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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사편
“…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까득, 까득. 벌써 3일 째, 먹이 창고에 처박혀 있던 영아는 피가 날 정도로 손톱을 물어뜯으며 죽여 버리겠다는 말을 연신 중얼거렸다. 영아의 주변엔 시체가 즐비했다. 목이 뜯겨 나간 사람부터 난도질을 당한 채로 죽은 사람까지, 20명이 넘는 사람이 고깃덩이가 되어 바닥을 나뒹굴었다.
시체들 사이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에 절어서 미친 사람처럼 손톱을 뜯는 영아의 모습은 호러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섬뜩하기 짝이 없었다. 인아를 죽이는 것에 실패한 영아는 이 창고 안에서 3일 동안 그 분풀이를 했다. 영아는 상처투성이인 인아조차 이기지 못한 스스로에게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지난번도 그렇고, 이번도 그렇고 인아는 충분히 영아를 죽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영아는 인아의 배려 때문에 살았다는 사실이 치욕적이었다. 차라리 죽였더라면, 죽이려는 시늉이라도 했더라면 이렇게까지 굴욕적이진 않았을 텐데ㅡ.
“… 정 인아…, 죽여 버릴 거야….”
치욕감과 분노, 그리고 패배감을 도저히 이겨낼 수 없었던 영아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먹이 창고로 달려가 가둬둔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먹었다. 당장 피를 마시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아서 20명이 넘는 인간을 잡아먹었다. 물도 이렇게 많이는 못 마실 텐데도, 아직까지 갈증을 느끼며 비명을 지르는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
창고에 틀어박혀 지낸 지도 3일이나 지났지만, 영아는 지금까지도 끓어오르는 분노를 진정시킬 수 없었다. 이미 다 닳아버려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손가락을 연신 물어뜯던 영아는 어떤 방식으로 인아를 짓밟아야 이 갈증과 분노가 풀릴지 고민했다.
“….”
혹시라도 이런 일이 있을까봐 서혁이 기절했을 때 심어놓은 위치추적기 덕분에 인아의 새로운 아지트 위치는 이미 다 파악한 상태였다. 만약 이마저도 없었다면 인아의 다음 살인을 기다려야 했을 테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하지만 영아는 아지트를 알았음에도 바로 그곳으로 달려가지 않았다. 또 혼자 설쳤다간 똑같은 꼴을 당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 쪽에서도 지난번처럼 멍청하게 당하고만 있지는 않겠지? 지난번 아지트에서도 엄청난 양의 트랩들이 있었는데, 이번 아지트라고 다르진 않을 것이다. 물론 지난번에는 흡혈귀인 영아를 고려하지 않은 트랩이었기에 유유히 통과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영아를 위한 트랩이 마련되어 있지 않으란 법도 없었다.
인아의 약점은 곧 영아의 약점이기도 했다. 그동안 은에 대한 내성을 길러왔지만 그렇다고 영아가 은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도 분명히 영아를 상대할 대비책을 마련할 텐데, 저번처럼 일이 쉽게 풀리진 않을 것이다.
“… 결국, 이 능력까지 써야 하는 건가….”
일단은 영아도 흡혈귀이기 때문에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영아의 능력은 상대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능력이었다. 잘만 사용하면 상대를 꼼짝 못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었지만, 반쪽짜리도 안 되는 영아의 몸은 그 능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 불완전한 몸뚱이로 능력을 사용했을 때의 부작용은 상상을 초월했다. 제대로 능력을 사용한다 해도 능력을 한번 씩 사용할 때마다 거의 두 달을 넘게 고통 속에서 몸부림 쳐야 했다.
“젠장… 진짜 이 힘만큼은 쓰고 싶지 않았는데ㅡ.”
능력을 사용하는 것은 안 그래도 갈증으로 고통 받고 있는 영아에겐 지옥 불에 뛰어드는 것과 같았다. 그런 탓에 이 능력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힘을 끌어올렸을 때 자신에게 돌아올 부작용이 무서워 제대로 힘을 끌어올리지도 못하고 불발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더 큰 문제는, 상대의 정신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부작용의 강도도 강해진다는 것이었다. 평범한 인간에게 사용했을 때도 거의 2달 동안 갈증 때문에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는데, 그 능력을 흡혈귀인 인아에게 사용한다면 상상을 초월하는 부작용을 겪게 될 것이다.
실종이 되어도 뒤탈이 없을 사람들만 잡아먹다보니 제공되는 인간의 수는 한정되어 있는데, 몇 백 명의 피를 마셔도 가시지 않는 갈증이 일어난다면 그땐 정말 죽음 밖에 답이 없었다.
“그래도… 이번엔 정 인아가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어차피 인아의 피가 목적이니 능력을 사용해도 괜찮겠지. 영아는 이번만큼은 거리낌 없이 능력을 사용하자고 마음먹었다.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여자의 피를 마셔야 된다. 만약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그땐 정말 다음 따윈 없을 것이다. 내 모든 것을 걸겠다는 각오로 임해야 해. 이번에 실패하면 그건 곧 죽음이야. 영아는 손톱을 뜯으며 마음 속에서 피어나는 잡다한 감정들을 잠재웠다.
“… 아니지, 죽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그 여자가 나한테 했던 것처럼, 나도 그 여자가 가장 아끼는 걸 빼앗아야겠어. 영아는 서혁으로 인해 폭주하던 인아를 떠올리며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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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반대야.”
“….”
“너 그 난리 피운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어. 이번엔 진짜 죽을 수도 있다고!”
“… 호들갑 떨지 마. 내가 죽은 것도 아닌데….”
“정 인아!!”
“어차피 헌혈 팩만으로는 상처 회복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아. 조금 무리더라도 살아있는 사람의 피를 마셔야 돼.”
“그렇게 위험한 상황이었으면 지난번에 데려 온 사람부터 잡아먹지 그랬냐!?”
“…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해라.”
인아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도통 말이 안 통하는 연후를 설득하느라 거의 30분이 넘어가도록 설전을 벌인 탓에 없던 기운까지 다 증발해버릴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연후 몰래 갔다 올걸. 인아는 이렇게 될 줄 예상했음에도 경솔하게 행동한 것이 후회되었다.
사실 몸 상태가 이러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급하게 다음 살인을 준비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몸이 회복되기를 기다릴 순 없었고, 헌혈 팩만으로는 이 이상의 치료가 불가능했다. 이런 상태로 다음 살인을 실행하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열흘 뒤에 나서나 이틀 뒤에 나서나 자살 행위인 것은 똑같았기에 이왕이면 빨리 해결할 수 있는 쪽을 선택하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아지트까지 들킨 상황에서 계속 계획을 미뤘다간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인아를 더욱 더 조급하게 만들었다.
“우리 정체 뿐 만 아니라 아지트까지 들킨 상황이야. 여기라고 얼마나 버티겠어?”
“그럼 다른 아지트로 가면 되잖아!”
“… 멍청아, 우리가 준비한 아지트는 세 곳 뿐이잖아. 거기까지 들키면 진짜 갈 곳 없는 신세가 된다고.”
“하지만… !”
“나도 이번엔 반대야.”
1시간 내내 아무 말 없이 tv를 보고 있던 은성마저 연후를 따라 반대를 하고 나서자 인아는 할 말이 없어졌다. 너까지 이러기야? 목 끝까지 차오른 말들을 삼키며 인아는 한숨을 내쉬었고, 은성은 그런 인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tv에 시선을 둔 채로 말을 이었다.
“… 계획은 철저하고 치밀해야 돼. 지금 네 몸 상태론 무리야.”
“….”
“혹시라도 네가 지금보다 더 다친다면 그땐 진짜 답이 없어. 정 그렇게 피를 마시고 싶으면 연고 없는 노숙자라도 데려 올 테니 잡아먹어.”
“… 너까지 나보고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을 죽이라는 거야?”
“지난번에 데려 온 사람은 죄가 없어서 살려줬어? 넌 그냥 이번 일과 관련 없는 사람을 건드리고 싶지 않은 거잖아.”
“….”
“네가 분명 헌혈 팩으로도 괜찮다고 해서 기껏 잡아온 사람도 그냥 보내줬어. 이제 와서 말을 바꾸면 내가 순순히 들어줄 거라 생각했어?”
“….”
“네 몸 상태가 정상이 되기 전까진 다음 살인은 없어. 네가 직접 잡아먹던지 우리가 데려온 사람을 잡아먹던지 선택해.”
“… 알겠어.”
그래, 누구든 잡아먹어 몸 상태를 최상으로 돌려놓고 살인에 임해야 한다는 것을 인아가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인아는 더 이상 쓸데없는 살인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인아가 죽인 사람만 해도 수십 명이 넘을 텐데, 여기서 더 사람을 죽이라니.
인아는 죽어 마땅한 사람을 죽였다며 스스로 합리화하려고 노력하는 짓을 또 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기에 고집을 부렸던 것인데, 연후에 이어 은성까지 반대를 하니 이 이상 고집을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인아는 결국 졌다는 듯 알겠다는 말 한 마디만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가게?”
“… 얘기 끝났잖아. 들어갈래.”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인아 때문에 놀란 연후가 인아를 붙들었다. 하지만 인아는 얘기가 끝났다며 연후의 손을 조심스럽게 뿌리치며 방으로 들어갔다. 인아의 뒷모습을 어이를 상실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연후는 짜증을 내며 인아가 앉아 있던 의자를 걷어찼다.
“와, 쟤는 내가 하는 말은 말도 아니라는 건가? 왜 네가 반대하는 건 듣는 거야?”
“… 그런 말은 인아 앞에서 해. 가만 보면 넌 꼭 내 앞에서만 떠들더라.”
“야!”
“쓸데없는 얘기 그만하고 인아가 잡아먹을 사람이나 찾아봐. 최대한 인아가 죄책감 느끼지 않을 사람으로 골라.”
“… 쯧, 이제 이런 짓 그만하나 싶었는데ㅡ.”
“불만이면 그만 두던가.”
“무슨 말을 못해. 야,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 잡아먹을 사람도 찾아야하고, 다음 계획 일정도 다시 짜야 하잖아.”
“알겠어, 가자.”
소파에서 일어난 은성은 연후를 따라 옆집으로 넘어갔고, 그 순간 방문이 열리고 인아가 거실로 나왔다. 짜증스럽게 머리를 헝클어뜨린 인아는 한 귀퉁이가 떨어질 정도로 소파를 세게 쥐었다. 은성과 연후의 말을 거스르고 싶진 않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이미 많은 사람을 죽였고 앞으로도 죽일 사람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이 일과 관계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인아는 결국 은성과 연후 모르게 독단으로 계획을 실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살인은 혼자 해왔고, 은성과 연후가 모아둔 정보도 다 훑어봤으니까 괜찮겠지? 인아는 연후와 은성이 잠들기를 기다리자고 생각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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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우….”
여당 대표 성관우의 집. 인아는 별조차 뜨지 않은 새벽하늘을 바라보며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집에 있을 땐 몰랐는데, 이렇게 밖에 나오고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몸 상태가 둔해진 게 느껴졌다. 헌혈 팩을 3팩이나 마시고 왔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 더욱 더 걱정이 되었다. 인아는 최대한 빨리 일을 끝내고 이 자리를 떠야겠다고 생각했다.
주변을 둘러 본 인아는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에 인상을 찌푸렸다. 목표가 몇 명 안 남아서일까. 미리 예고한 것도 아니건만 곳곳에서 경찰들이 감시하고 있으니,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는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거기다 본격적으로 인아에 대한 대비를 시작했는지, 모든 경찰들이 은으로 된 총을 하나 씩 손에 쥐고 있었다.
이 일대에 가득 찬 은의 기운 때문에 머리가 다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기운만으로도 구역질이 나올 것 같다니, 확실히 나한텐 독보다 더 위험한 것 같네. 인아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해진 상황 때문에 피곤함이 몰려왔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 그래도 마신 피가 있으니까 괜찮겠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헌혈 팩이 상처 치료엔 별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아주 잠깐 능력을 사용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게 만들어 준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거나 시간을 끈다면 그대로 황천길 행이겠지만, 잠깐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다면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할 만 했다.
인아는 긴장된 표정으로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하긴, 언제는 내가 죽는 걸 두려워했었나. 미련을 가질 만큼 값진 목숨도 아니니까 긴장하지 말자. 이제 와서 죽을까봐 두려워 일을 그르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
“… 자, 들어가자.”
인아는 능력을 사용해 시간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느려지는 시간의 흐름을 뚫고 단숨에 성 의원의 방으로 들어섰다. 창문을 깨고 방안으로 들어온 인아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기에 곧바로 관우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의 목덜미를 지나는 동맥을 뚫고 터져 나오는 피를 취하자 엉망진창이었던 인아의 몸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얼마 마시지도 않았건만 벌써부터 상처가 낫기 시작하는 것을 보니 역시 살아있는 사람의 피는 헌혈 팩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 으, 으으….”
그 순간, 몸 안에 있는 피를 모조리 마실 각오를 한 인아의 귓속으로 관우의 신음소리가 파고들었다. 깜짝 놀란 인아는 관우에게서 떨어졌고, 동시에 주위를 둘러봤다. 역시 헌혈 팩 만으로는 무리였나. 아무리 그래도 1분은 버틸 줄 알았건만 인아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능력이 풀려버린 모양이었다.
젠장, 이 정도 피로는 몸을 치료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당장 의원을 죽이고 자리를 떠야겠다고 생각하며 들고 왔던 검을 뽑아든 인아는, 갑자기 날아온 총알을 미쳐 피하지 못하고 어깨를 다쳤다.
탕ㅡ !
“… ㅇ, 윽ㅡ !”
“뒤로 물러서.”
“… 하… 되게 한가하신가보네….”
인아가 방심한 사이 방문을 열고 들이닥친 시문은 인아에게 총구를 겨누며 뒤로 물러서라고 말했다. 하, 내가 언제 올 줄 알고 이렇게 날 기다리고 계셨던 걸까? 지금껏 당신에게 이렇게 지대한 관심을 받아 본 적은 없는 것 같네. 그래서 그런가? 난 당신의 관심이 너무 어색하고 불편해.
인아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지만, 어깨에 파고든 총알이 인아의 살을 태우고 있던 와중이라 조금만 정신을 놓으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질 것 같았다. 보통 때였다면 평범한 인간이 쏜 총알 따위에 어깨를 내어줄 일은 없었겠지만, 아직 완전히 낫지 않은 몸 상태 때문에 시문의 총알을 미처 피하지 못했다. 아무리 살아있는 사람의 피를 마셨더라도 상처를 치유하려면 시간이 필요했고, 그 마저도 치사량도 안 되는 양이었기에 완전히 힘이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직 영아에게 당한 상처가 다 낫지 않은 모양이지? 몸놀림이 둔하기 짝이 없구나. 인간이라고 해도 믿겠어.”
“…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리 몸이 너덜너덜해졌어도 다 늙어가는 노인네 한 명 못 죽이겠어요?”
“날 죽이기 전에 창 밖에서 널 조준하고 있는 경찰들이 네 머리통에 구멍을 내줄 거다.”
“미안하지만, 내 목표는 당신이 아니라ㅡ.”
탕! 탕! 인아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의원에게 달려가 그의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아 넣었다. 그녀가 움직임과 동시에 안팎에서 총소리가 들렸고, 총알이 인아의 등과 다리를 관통했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었지만, 인아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의원의 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치사량에 가까운 피를 빼앗긴 상태였던 의원의 피를 순식간에 거의 다 마셔버린 인아는 마신 피를 힘으로 바꿔 단숨에 시간을 멈췄다.
“… !!!!”
“… 신기하죠? 사람이나 흡혈귀나 위기에 몰리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법이거든요.”
“빌어먹을… !”
“자ㅡ, 이제 어쩔까요? 여기서 아버지를 죽이고 갈까요. 아니면 그 알량한 목숨을 조금 더 연장해드릴까요?”
“… 정 인아….”
“그러니까 내 걱정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당신도 알다시피 난 인간이 아니잖아요?”
인아는 있는 힘껏 미소를 지으며 시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탕! 탕! 탕! 자신에게 다가오는 인아 때문에 겁을 먹은 시문은 인아를 향해 연달아 총을 쐈지만, 공포에 질려 아무렇게나 쏴대는 총알에 당할 리 없는 인아였다. 결국 시문의 눈앞까지 다가온 인아는 자신을 향해 겨누고 있던 총구를 옆으로 꺾어버렸다. 겉까지 은으로 된 총이었는지 손바닥이 타들어갔지만, 인아는 고통을 감추며 두 손으로 시문의 목을 감쌌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목 조르는 시늉까지만ㅡ.”
“이제 와서… 아버지라고 망설이는 건가? 어차피 죽일 거라면 지금 당장 죽여! 당장!!!”
“여기서 당신을 죽이는 건 너무 재미없는 결말이잖아요.”
“… 뭐?”
“당신은 날 구원해준 사람을 망친 장본인이니까, 그런 당신에게 어울리는 결말이 뭔지 최선을 다해서 고민 중이에요.”
“하… 구원? 어이가 없군. 그 약삭빠른 애송이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걸 정말 모르는 건가?”
“….”
“예전이나 지금이나 멍청한 건 똑같군. 정말 너 같은 괴물을 진심으로 받아줄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믿는 거야?”
“….”
“넌ㅡ !! 어차피 이 일이 끝나면 처참하게 버림받을 거야!! 내가 널 버렸던 것처… !”
“….”
“… ㅋ, 컥… !”
시문의 독설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미소를 유지하던 인아는 시문이 말이 끝나갈 때 쯤 목을 감쌌던 손에 아주 조금 힘을 줬다. 물론 흡혈귀의 힘을 기준으로 조금이었기에, 시문은 당장이라도 기절할 듯 새빨갛게 충혈 된 눈을 하고선 인아의 어깨를 붙잡았다.
자신의 손에서 버둥거리는 시문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인아는 시문의 눈이 뒤집혀지려는 순간 그를 바닥에 내팽겨 쳤다. 죽을 뻔 했던 시문은 겨우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인아는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눈빛으로 시문을 바라보다가 시문의 머리 위에 지긋이 발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 생각을 해 보니까, 그것도 좋겠네요.”
“… 크헉… 헉… 흐아… !”
“내가 당했던 모든 실험을 당신에게도 똑같이 실험해 보는 거예요. 어때요?”
“… ㅁ… 무… 후욱… 후으….”
“팔다리를 잘라서 불태우고, 이상한 약물도 주입하고…. 아, 연구원들한테 성폭행도 당했는데 그건 꼭 추가해야겠죠?”
“… 으… ㅇ… 이거 치워… !”
“… 한 번만 더 아버지 입에서 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그 잘난 혀부터 잘라서 개한테 먹이로 줘 버릴 거예요. 아버지도 그건 싫잖아요? 앞으로 영원히 안 볼 사이도 아닌데 우리 서로 상처 주는 말은 삼가도록 해요.”
싸늘한 표정으로 무시무시한 말을 내뱉던 인아는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미소를 지으며 시문의 머리를 밟고 있던 발에 힘을 줬고, 동시에 시문의 시간까지 멈춰버렸다. 그렇게 모든 할 일을 마친 인아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는지 모든 힘을 끌어 모아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아지트가 있는 곳 근처까지 온 인아는 능력을 해지시켰고, 그와 동시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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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혈 팩으론 안 되겠어. 벌써 2시간째인데 눈을 뜰 생각조차 안 하잖아.”
“… 젠장!!! 넌 cctv도 확인 안하고 뭐 한 거야!?”
“지금은 잘잘못 따질 때가 아니잖아.”
은성은 최대한 이성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떨리는 손을 감출 수가 없었다. 결국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연후가 인아의 몸에 다시 한 번 메스를 가져다댔다. 하지만 정신을 놓은 인아는 메스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았고, 힘없이 구부러진 메스를 바라보며 연후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렇게 정신을 놓은 인아의 몸은 쇳덩이도 침입하지 못할 정도로 단단해졌다. 자의로 몸을 지킬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렇게 되는 모양이었지만, 이런 상태에선 탄환을 빼내는 것도 불가능했다. 인아의 입에 직접 피를 흘려 넣는 것으로 어떻게든 인아를 깨워보려고 했지만, 탄환이 몸 안에 박혀있어 지속적으로 상처를 입고 있는 이런 상황에선 헌혈 팩은 아무 소용도 없었다.
“헌혈 팩도 이걸로 끝이야.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공수해오는 건데ㅡ.”
“이제 어떡하지? 이러다가 진짜 인아가 죽으면….”
“… 리스트 가져와. 누구든 납치해서 데려오면 어떻게든 될 거야.”
“얘 지금 다 죽어가는 거 안 보여? 숨도 제대로 못 쉬잖아! 우리가 갔다 온 사이에 죽어버리면 어쩔 건데!?”
“… 분명 버텨줄 거야. 지난번에도 우리가 나간 사이에 깨어났잖아.”
“저번엔 적어도 숨은 제대로 쉬었잖아! 거기다 총알이 몸에 박혀서 속에서부터 썩고 있을 텐데, 버틸 수 있겠어!?”
“그럼 나보고 어떡하라고!! 방법이 그것뿐이잖아!!”
결국엔 화를 내고야 마는 은성과 답답함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연후의 모습을 거실에서 지켜보던 서혁은 무언가 마음을 먹은 듯 결연한 표정으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방 안에 들어오자마자 은성의 손에서 메스를 빼앗아 손목을 그었다. 갑작스러운 서혁의 행동에 연후와 은성은 토끼눈이 되어 서혁을 바라보았고, 서혁은 아무 말 없이 피가 흐르는 자신의 손목을 인아의 입에 가져다댔다.
“… 야, 너 미쳤어!?”
“살아있는 사람의 피가 필요하다며. 그게 헌혈 팩이랑 무슨 차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러면 해결되는 거 아니야?”
“미친놈아!! 그러다가 인아가 이성 잃고 널 잡아먹기라도 하면 어쩔 건데!!”
“그럼 다 죽어가는 사람 눈앞에 두고 쌩 까?”
“… 서… 혁씨… ?”
“… !”
“인아야!!”
서혁의 피는 인아의 입술을 타고 입안으로 들어갔다. 연후와 은성이 서혁의 어깨를 붙잡고 서혁을 말리려 했지만, 서혁을 말리기도 전에 인아가 눈을 떴다. 2시간 동안 헌혈 팩을 6팩이나 먹여가며 고생했어도 눈썹 한 번 움직이지 않던 인아가 서혁의 피 몇 방울에 눈을 뜨다니. 연후와 은성은 놀람을 금치 못해 벙 쪘고, 서혁은 태연한 얼굴로 웃으며 인아에게 말을 걸었다.
“너… 진짜 죽고 싶어서 환장했지? 그 몸으로 또 사람을 죽이러 간다는 게 말이 돼?”
“… 지금… 무슨… !!!”
“자, 네가 마시고 싶은 만큼 마셔. 이거 마시면 금방 낫는다잖아.”
“… ㅁ, 미쳤어요?! 당장 이거 치… 읍ㅡ !”
“네가 안마시면 억지로라도 마시게 할 거야. 그러니까 얼른 마셔.”
서혁은 거부하는 인아의 입에 피가 흐르는 손목을 들이댔다. 인아는 서혁의 손목과 입술 사이에 억지로 손을 집어넣어 입을 틀어막았다. 대체 얼마나 깊게 상처를 낸 건지, 입을 막았음에도 손가락 사이로 서혁의 피가 흘러들어왔다. 자꾸만 입안으로 들어오는 서혁의 피를 도저히 뱉을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이 화가 나고 비참했던 인아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베개를 잔뜩 적셨다.
인아가 이런 얼굴을 할 거란 걸 알았지만, 서혁으로선 이 것 외에는 인아를 도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인아가 한 순간이라도 이성을 잃는다면 서혁의 목숨도 끝일 것이다. 하지만 서혁은 두렵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어차피 인아 때문에 살아난 목숨이니, 인아를 위해 죽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혁은 마음을 굳힌 듯, 눈물에 젖은 얼굴로 연신 고개를 젓는 인아의 뺨을 가볍게 감쌌다.
“… 인아야.”
“… 우으… 으으….”
“나는 너를 믿어. 너는 나를… 죽이지 않을 거야. … 그렇지?”
인아를 믿는다는 서혁의 말에 인아의 눈이 커졌다. 어째서 이 사람은 이토록 쉽게 나를 믿는다고 말할 수 있지? 인아를 구원해준 사람도, 심지어는 인아 스스로도 믿지 못하는 정 인아라는 괴물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 거야? 인아는 이런 괴물이 되고 4년 동안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말과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보여주는 이 남자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인아는 이렇게 괴물이 된 뒤로 단 한 순간도 스스로를 믿은 적이 없었다. 항상 의심했고, 끝도 없이 스스로를 괴롭혔고, 한 순간도 긴장을 풀지 못했다. 그런데 이 남자는 그런 인아를 믿어줬다. 날 죽이지 않을 것을 믿는다며 인아에게 자신의 목숨을 맡겼다.
인아는 이 남자의 믿음이 무서웠다. 이 믿음을 배신할까봐, 괴물인 자신을 믿어준 이 남자를 죽게 만들까봐 미치도록 두려웠다. 결국 마음을 정한 인아는 입을 가렸던 손을 조심스럽게 치웠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당신만큼은, 절대 죽게 하지 않을 거야. 내 안의 괴물에게 지지 않을 거야. 당신의 믿음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야.
“….”
“… 으….”
인아는 서혁의 손목에 송곳니를 박아 넣고 그의 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서혁의 피는 인아가 자신의 감정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점점 더 달콤하게 변해갔다. 지난번보다 훨씬 더 달콤해진 서혁의 피에 인아는 정신이 아찔해졌지만, 인아는 몸속에서 날뛰는 괴물을 짓밟고 뭉개며 죽을힘을 다해 이성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인아 안에서 잠들어 있던 괴물이 조금만 더 피를 달라며 애원하고 날뛰는 것을 막아내기 힘들었다. 정신이 점점 흐려지고 당장이라도 이성을 잃을 것 같던 그 순간, 인아는 자신의 어깨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 날카롭게 변한 손톱이 옷과 살갗을 동시에 뚫었고, 고통은 느낄 수 없었지만 겨우 끊어질 뻔 했던 이성의 끈을 붙잡았다.
겨우 정신을 차린 인아는 서혁의 말을 머릿속으로 계속 상기했다. 나는 절대 이 남자를 죽이지 않을 거야. 내 안에도 절반이나마 인간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내 손으로 죽이는 일 따윈 절대 없을 거야. 결국 인아는 서혁이 쓰러지기 직전까지만 피를 마시고 서혁을 밀쳐냈다.
“… 흐하… ! 후욱… 후으… !”
인아는 서혁에게서 떨어졌음에도 아직까지 서혁의 피를 갈망하는 마음 속 괴물을 잠재우기 위해 침대 주변에 굴러다니던 메스를 집어 팔을 몇 번이나 찔렀다. 진정해, 이제 됐어. 더 이상 피가 필요하지 않아. 이젠 다 괜찮아…. 그렇게 한참 동안 스스로를 달래던 인아는, 다량의 피를 빼앗긴 서혁이 쓰러지자 다급히 그를 향해 기어갔다.
“ㅅ, 서혁 씨… !”
“하아… 거봐…. 난 너 믿는다니까….”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 미안해….”
인아는 서혁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런 인아를 위로할 힘도 남아있지 않았던 서혁은 힘겹게 인아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려놓더니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
,
,
“어떻게… 믿을 수 있어?”
“….”
“인아 손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어. 인아도 자기 자신을 못 믿는데 어떻게 저 새끼는 인아를 믿을 수 있지?”
인아가 쓰러진 서혁을 안아들고 침대로 옮기자, 연후와 은성은 조용히 거실로 나왔다. 연후는 거실에 나오자마자 절망으로 가득 찬 얼굴을 쓸어내리며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현실을 곱씹었다. 인아를 믿는다고? 어떻게? 어떻게 인아를 믿을 수 있어? 우리도 못 믿고, 인아도 못 믿는데 어떻게 저 새끼는 인아를 믿을 수 있지?
인아가 한순간만 이성을 잃었어도 서혁의 목숨은 장담하지 못했을 상황이었다. 인아를 구원한 연후와 은성도 차마 하지 못한 일을 만난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녀석이 해내다니. 연후는 이 상황을, 서혁의 마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믿음이 아니라… 희생이야.”
“… 뭐?”
“아직도 모르겠어? 저 새끼, 인아가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다 받아들인 얼굴이었어.”
“… 설마….”
“그래. 저 미친 새끼… 인아 손에 죽을 각오를 했던 거야.”
“… 무슨… 소리야? 죽을 각오를 했다니? 인아를 믿어서 피를 준 게 아니라고?”
“그러니 더 무서운 거지. 인아를 위해 죽겠다는 생각을 서슴없이 할 정도로 인아에게 미쳐있다는 거니까.”
인아를 위해 죽음도 감수했다고? 그게 정말 가능해? 믿음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진지하고 무거운 서혁의 마음에 연후는 할 말을 잃었다. 말로만 인아를 믿는다, 너를 위해 죽을 수도 있다, 지껄여왔던 연후와는 달리 서혁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인아에게 자신의 목숨을 맡겼다. 하지만 연후였다면 분명 망설였을 테고, 실제로도 자신의 피를 내어준다는 생각 같은 건 조금도 하지 못했다.
완전히 서혁에게 졌다는 생각이 들자, 연후는 허망한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은성은 한숨을 내쉬며 땀에 젖은 얼굴을 닦아냈다. 그래도 아예 쓸모없는 놈은 아니었나보군. 패배감에 고통 받고 있는 연후가 마음에 걸렸지만, 은성은 목숨까지 내놓고 인아를 살려준 서혁에게 조금은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귀찮은 놈이긴 해도 인아의 목숨을 살렸으니, 깨어나면 뭐 맛있는 거라도 해먹여야겠군.
“자, 가자. 나 진짜 피곤해.”
“….”
“빨리 와. 야식이라도 먹고 잘 거니까ㅡ.”
은성은 힘없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자는 은성의 말에도 꿈쩍도 하지 않는 연후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배도 고프고, 졸음도 쏟아지니 얼른 집으로 가서 좀 쉬어야겠다. 은성은 연후를 질질 끌고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