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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모국어로 쓰인 古代의 운문집을 갖고 있다는 건 그 나라의 정말로(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만큼) 큰 행운이며, 그 나라가 고대로부터 문학과 예술, 철학을 즐기던 문화민족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문학 장르 중에서도 시(운문)는 문학의 왕이다. 현재 형태의 소설이 등장한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 것을 감안하면 비록 현재엔 홀대 받고 있지만 시의 가치는 그만큼 크다. 특히 한 나라의 고대어로 쓰인 고대의 시는 말이다. 동양 삼국은 모두 각자의 고대 모국어로 쓴 운문집을 갖고 있었다. 중국은 시경이라는 적어도 2500년 전 이전의 고대의 엄청난 시가 문학집을 갖고 있다. 이 시경에 실린 시만해도 300편을 넘는다. 일본은 만엽집이라는 서기 750년 경 만든 시가집을 갖고 있다. 만엽집에는 거의 4500여 수에 달하는 고대 시가가 고스란히 보존돼 있어서, 일본의 고대 문화의 정수를 지금도 잘 알고 만끽할 수 있다.
고대부터 문화 민족 국가였던 한국에도 이러한 고대 시가집이 당연히 있었다. 바로 통일 신라 말기 진성여왕 시대 만들어진 '삼대목'이었다. 삼대목은 경문왕의 동생이자 진성여왕의 삼촌이었던 김위홍과 경문왕이 칭찬해 마지 않았던 향가의 대가 대구화상이 함께 만든 전 신라의 명작 향가를 망라해 실은 한국 최초의 운문모음집이다. 삼대목이라는 제목으로 유추하기를, 삼대목은 향가가 쓰여진 시기를 상대, 중대, 하대(이를 '삼대')로 나누고 편집의 기준으로 목(目)을 정하여 만든 향가 운문집으로 보고 있다. 이 어마어마한 아마 한국에서 쓰여진 책 중 중요도로 열 손가락 안에 들만한 이 문화유산은 오늘날 남아 있지 않다. 한국인으로서는 너무너무 가슴 아프고 비통한 일이다.
삼대목이 만들어진 해는 888년이었다. 삼대목을 만든 그해 삼대목 편집 책임자였던 김위홍은 숨을 거두고 만다. 1년 후 889년 원종과 애노의 난이 일어났고, 한반도는 후삼국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삼대목은 문학의 문화를 꽃피우기엔 별로 좋지 않은 시기에 태어난 것이다. 이후 한반도에서는 936년까지 거의 5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한반도의 패권을 놓고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문학이란 사치스런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삼대목이 언제 소실됐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어이없게도 후삼국 시대에 벌써 삼대목은 소실됐을 가능성도 있다. 지금처럼 인쇄술이 발달한 시대도 아니었기 때문에 삼대목 책이 몇 권 없었다고 본다면 전란 중 금방 소실됐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936년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나서도 향가는 계속 창작됐다. 거의 200년 가까운 통일 신라 통치 기간을 거치면서 삼국인들의 문학어는 상당히 많이 신라어로 바꼈었지만 고려 건국 이후 개성 및 한산주, 패강진 지역에서 쓰이던 고구려어들이 한국어의 큰 중심축으로 들어오게 됐고, 현대의 한국어 형태의 큰 틀이 완성됐다. 이런 통합된 중세 고려어를 사용하여 고려인들은 신라의 문학 양식인 향가를 계승하여 계속 지었다. 이런 흔적은 적어도 12세기까지 지속되는데, 마지막 향가라고 일컬어지기도 하는 고려 가요 '정과정'은 분명 향가의 형태가 계속 전승돼 왔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시대까지 과연 한국 고대 시가의 정수였을 <<삼대목>>은 남아 있었을까?
13세기로 넘어가면서 고려에 몽골이 쳐들어오면서 향가의 운명도 큰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몽골의 침입을 즈음하여 고려에서 창작된 향가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후 고려 가요, 시조 등 한국 전통 시가 형태는 도남 조윤제 선생의 발견에서 보이듯 향가의 '전절대 후절소', '반절성'이라는 두 가지 큰 특징을 계승하고 있지만, 4구체, 8구체, 10구체 형식의 향찰을 사용한 향가는 더 이상 쓰이지 않았다. 향가의 마지막을 기록한 사람은 바로 일연이었다. 그는 14편의 향가를 그 향가가 생긴 이야기와 함께 <<삼국 유사>>에 실었다. 이 향가를 일연이 과연 해독할 수 있었는지는 미지수다. 개인적인 판단으로 일연은 아마 해독할 수 있었던 듯 싶다. 일연은 시를 보는 탁월한 눈을 지녔던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이야기 내용과 직접적으로 관계없는(굳이 싣지 않아도 됐을) 명작 향가 <찬기파랑가>와 <제망매가>를 굳이 삼국유사에 실었기 때문이다. 일연이 향가 해독을 할 수 없었다면 이야기 내용과 동떨어진 훌륭한 향가 2편을 싣지 않았을 것이다.
일연의 창작품이 아니기에 삼국유사에 실은 신라 향가를 일연 역시 어디선가 보고 베껴적었을 것이다. 일연이 베꼈던 책이 혹시 삼대목은 아니었을까? 일연이 실어놓은 14편이 모두 명작 향가인 것으로 보면, 분명 이 14작품도 삼대목에 실려있었을 것이다. (그밖에도 삼대목에 실려있던 명시, 명향가들은 어떤 작품이었을지, 생각만 해도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일연 시대까지 삼대목이 남아있었다면, 삼대목은 이후 몽골의 침략이나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 중 소실됐을 가능성이 큰 것 같다. 이보다 이후 조선시대까지 삼대목이 남아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조선 시대 삼대목을 언급한 글이 있다는 얘기는 아직까지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설령 있었다 치더라도 당시, 송시 등 한시풍의 시를 즐겨짓던 조선 시대 다수의 양반들은 해독 자체가 불가능한 삼대목 향가의 보존 가치를 굳이 느끼지 못했을 가능성이 큰 것 같다.
이후 향가는 거의 우리 시가에서 잊혀졌다가 20세기 초 1929년에 한국인이 아닌 일본의 유능한 언어학자 오쿠라 신페이가 일연 이후 아마 처음으로 삼국유사와 균여전의 향가 25수를 상당히 해석해냈다. 하지만 이 작업은 불완전했고, 이후 무애 양주동 박사가 오쿠라의 경지를 넘어 향가 해독을 거의 완전하게 해냈다. 향가 해독 사건은 당대 학계에 거의 충격적인 사건이었고, 향가를 해독해낸 오쿠라 신페이는 이 업적으로 천황상까지 수상했다. 그러나 너무나 안타깝게도 향가가 해석됐던 20세기 초 한국 최고의 시운문집 삼대목은 삼국사기 진성여왕조 기록의 한줄로만 남아있었다. 1989년 진위 논쟁이 지금까지 진행중인 화랑세기 필사본이 발견됐고 여기에 실린 향가 1수를 진짜 신라의 향가라 쳐도 오늘날 남아있는 향가의 숫자는 26수이다.
물론 남아있는 고대 시의 숫자가 많다고 그것이 꼭 그 민족의 고대 문화의 우수성을 입증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25개 남짓한 향가들은 모두 문학적 기교와 의미가 빼어난 명작들이며 이 작품들만으로도 과거 한국 민족이 얼마나 문학적으로 문화적으로 우수한 업적을 남긴 민족인지 알 수 있다. 비록 삼대목은 상실했지만, 한국인들은 1446년 아마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고 문학적인(시 쓰기에도 참 좋은) 문자일 한글을 창조해냈다. 이러한 말과 글에 대한 빼어난 센스가 한국인들에게는 분명히 특출났던 것 같다. 언어가 우수한 민족일수록 사고도 우수하다고 한다. 한국인들의 뛰어난 말과 글의 센스에는 분명 오래 전 상실된 고대 한국인의 선조들의 우수한 시적 능력이 녹아있을 것이다.
요새 향가와 고전 시가 공부를 다시 하면서 사라진 삼대목 생각이 자꾸 난다. 얼마전 일본을 방문하여 서점을 찾았을 때 책장에 8권까지 정리돼 출판된 만엽집을 보면서 너무 부럽고 분했다. 삼대목에 실린 향가들이 저들 만엽집 작품 못지 않게 정말 좋았을 텐데 지금은 없으니 말이다. 화랑세기 필사본처럼 진위논쟁이 있어도 좋으니 삼대목이 도서관 한 귀퉁이에 꽂혀있기만이라도 했으면 하는 바람이 너무 간절하다. 오늘날 훌륭한 한국 시인들이 많다. 황지우, 이성복, 신경림, 등 중견 시인들은 물론 황병승, 김경주, 김언 등 참 좋은 신인 시인도 참 많다. 2000년 뒤 우리 후손들이 지금처럼 후회하지 않게 오늘날 한국시를 좀 더 사랑해야겠다. 삼대목 명작 못지 않은 오늘날 한국어로 쓰인 명작 시들이 너무나도 많다. (답답하고 이런 마음 나누고 싶어 몇 자 써본다.) |
첫댓글 발견만 된다면 역사적인 날이겠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