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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나무위키 https://namu.wiki/w/%EB%A7%A8%20%ED%94%84%EB%9F%BC%20%EC%96%B4%EC%8A%A4
주인공 존 올드만은 약 1만 4천 년간을 살아온 늙지 않는 존재. 불사인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다.[3] 심한 질병에 걸린 적은 있지만 죽은 적은 없고, 흉터가 안 남지만 작중 생물학 교수가 말하는 가설 중 "세포가 완전히, 낭비 없이, 노폐물 없이 재생한다면" 흉터가 새 살에 밀려 떨어져 나가버렸던 것일 수도 있다. 본래 크로마뇽인으로 유럽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는 육체 나이가 약 35살 정도가 되었을 때 시간이 지나도 자신이 늙지 않음을 알게 되고, 동족들은 그가 타인의 생명력을 흡수한다는 이유로 쫓아냈다고 한다. 그는 결국 10년마다 무리를 벗어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 때론 자신이 자신의 아들 행세를 하며 무리에 계속 남아있기도 했다, 그러다가 걸려서 공문서 위조로 투옥되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기온이 매우 낮았고, 그는 태양이 뜨는 쪽이 더 따뜻할 것이라는 생각에 동쪽으로 향한다. 그러다가 인도에 이르러 부처를 만나 그의 가르침을 받은 뒤, 로마 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중동 지방으로 돌아와 서방에 맞게 재해석된 불교 이론을 퍼뜨리려 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이 불교 이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고, 그는 결국 로마에 의해 십자가형에 처해진다. 존은 인도에서 배웠던 고통을 죽이는 방법과 신진대사를 줄이는 방법을 이용해 죽은 척하고 살아날 수 있었다.동굴에 버려진 뒤 3일이 지나 몰래 빠져나가려 했지만 자기 제자들에게 모습을 들키고 만다. 존은 자신이 부활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으나, 이미 무아지경에 빠져 제멋대로 기뻐하는 추종자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결국 그 자리를 도망치듯 빠져나와 다시 유럽 지방으로 돌아간다.
한편, 그의 가르침을 따랐던 자들은 존을 신격화했고, 그의 이름은 시대가 되면서 조금씩 변화되어 예수란 이름이 되며[4] 실제 존과는 상관없는 전설들을 만들어 붙였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기독교의 예수라는 것. 존은 자신의 가르침이 세월이 지나면서 너무 변질되었다고 한탄하였고[5],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신학자인 이디스는 자신의 신앙을 뒤흔드는 그의 말에 신성모독이라며 울먹거리기까지 하였다.
존은 유럽을 떠돌아다녔으며 1600년 경 자신과 비슷한 존재로 보이는 사람을 만났다. 존이 말하길, 자신이 겪은 경험들을 서로 비교해 봤을 때, 불사일 확률이 높지만, 확신하는 게 불가능했다고 한다. 그 사람과 헤어진 지 200년 후 벨기에의 기차역에서 다시 한 번 언뜻 본 거 같다고 했지만,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의 종적을 놓치고 말아서 그가 진실로 늙지 않는 존재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후 존은 돼지치기 자크 본으로서 빈센트 반 고흐와 친분을 맺게 되었고, 그로부터 직접 그림 한 점을 선물받기도 하였다. 그 그림은 꽤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현대까지도 간직하고 있었고, 극중 이디스가 고흐 풍의 그림이라며 놀라워하며 출처를 묻기도 한다. 고흐의 사후 1890년 미국으로 건너와 지금까지 미국에서 살고 있었다. 존이라는 이름만 썼다고 했는데 "존 자크 본"이었나? 장 자크 본일 수도 있다 서양에서는 John이라는 이름은 Jack라는 별명으로도 불리우며, 이 경우 프랑스 이름 Jacques는 John의 프랑스식 이름이라고 해석될수도 있다.[6] 그럴듯한 설명으로 예수 불자설 떡밥이 활활 퍼지게 만드는 데에 일조하기도 했다.
존이 만 년 넘게 살아 왔다는 말에 흥미를 보이던 교수들은 어느 새 도저히 믿어지지 않지만 따져 보면 틀린 말은 아닌 존의 주장을 두고 서로 격렬한 논쟁을 하고 있었고, 이 사태를 수습할 수 없게 된 존은 지금까지 자신이 했던 얘기가 전부 농담이였다면서 사태를 무마한다. 이후 파티는 끝나고, 존의 집에 초대된 동료 교수들은 한 명씩 자리를 뜬다.
교수들이 모두 떠나자 존에게 연심을 품고 있는 존의 조교수, 샌디는 존에게 오랜 세월 동안 성을 바꿔 가면서 살아 왔으니 그 동안 써왔던 이름이 더 있는 거 아니냐고 묻자 존은 그동안 자신이 사용했던 이름들을 나열한다. 그러면서 존이 60년 전에 보스턴에서 거주하며 하버드 대학의 화학 교수를 맡았던 시절에는 '보스턴 티 파티'를 패러디한 존 토머스 파티(John Thomas Partee → John T. Partee)라는 이름을 썼다고 말하는데, 이 때 마지막으로 나가려다가 그 이름을 들은, 파티에 초대된 교수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심리학 교수인 윌 그루버의 안색이 갑자기 굳어진다. 윌은 존이 어릴 적에 행방을 감춘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자기가 만 년 넘게 살아 왔다는 존의 말이 전부 사실은 아니더라도 윌보다는 오래 살아 왔다는 사실이 간접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윌은 존이 자신의 아버지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절규하지만, 존이 자신의 어머니의 이름과 어릴 적에 키우던 애완견의 이름까지 알고 있자 울음을 떠트리며 '어머니는 아버지가 우리를 버렸다고 말씀하셨는데'라고 말하면서 쓰러진다. 존은 윌을 토닥이며 그를 달래려고 윌을 어릴 적의 애칭인 윌리라고 부른다. 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큰 충격을 받은 데다 파티 전날 아내가 췌장암으로 사망하면서 이미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상태였던 윌은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되어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만다.[8] 결국 존은 자신의 아들의 죽음을 눈 앞에서 목도하면서 큰 충격을 받게 되고, 혼자서 떠나려던 계획을 변경하여 자신을 사랑하는 샌디와 함께 떠나게 된다.
영화 중반 해리가 '이 중에 자네의 직계 자손이 있을 지도 모르겠군'이라는 대사를 하는데 이것이 바로 복선이었다. 또한 윌이 초반에 영원히 산다는 존의 말에 화를 내며 '내 장례식에는 올 거냐'라고 말하는데 이것도 복선이다. 윌의 사망으로 출동한 경찰이 조사를 해야하니 어디 멀리 가지 말라고 하자 '윌의 장례식에는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더불어, 윌이 계속해서 존에게 사용하는 상담 방법이나 내용을 살펴보면 알겠지만, 존이 가지고 있는 아버지와의 문제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들려 한다. 윌은 존이 자신을 신격화하는 것과 과대망상적인 행동이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있었던 문제 때문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윌이 가지고 있던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아버지에게 버림받은 것)가 다시금 살아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미 나이도 지긋하고, 수련을 거쳐 권위 있는 심리학자가 된 윌에게 이런 트라우마가 다시 살아난 것은 존이 그 트라우마의 주인공인 아버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존이 윌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 관객들은 감독이 계속해서 장난을 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서야 깨닫게 된다.
이 영화를 즐기는 포인트 중 하나는 극중 나름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나름대로 자신의 전문분야를 이용해서 주인공의 이야기를 반박하려 하나 결국 아무도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하겠지만 보면 알게 된다. 참고로 마지막에 독실한 기독교인인 이디스가 헤어지면서 존에게 키스를 어떻게 하는가[13]와 떨어지면서 짓는 표정도 관점 포인트.
영화의 의미
주인공이 '예수' 혹은 '신' 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 존재의 실체는 그저 '오래 살기만 할 뿐인 인간' 이었다는 결론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권능의 상징으로 쓰이는 '신', 그리고 그 '신 본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 이해하고 실행할 수 있는 것들을 전파하려 했는데 세월이 지나보니 신이 되어 있었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실제로 존은 "로마의 횡포에 반하여 사람들에게 불교적 가르침을 퍼트리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본인이 잠적한 후 이야기가 과장되고 살이 붙기 시작하더니 결국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는 식으로 이야기 한다.
위에서 말한 영화의 제목인 'Man from Earth'는 주인공인 그도 결국 (지구든 땅이든) 무엇으로부터 시작된 인간임을 말한다. 즉 신이나 예수가 외계, 천상의 존재가 아니라 지구에서 시작된, 지구 출신자라는 얘기.
위에서 나온 것처럼 영화의 내용 전체를 짚어 보자면 '믿음'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지만, 그것 역시 사람의 일부분일 뿐이고, 결국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첫댓글 우와~놀랍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