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 선생님의 부음을 듣고 오랜 인연을 떠올리다.
속리산 자락, 법주사와 삼년산성을 답사하고 돌아오던 길에 송현섭 도반으로부터 김지하 선생님의 별세 소식을 들었습니다.
며칠 전 이빨이 부러지는 꿈을 꾸고서, 내 일신상이나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 있을까 조마조마했는데, 선생님이 부음을 듣다니, 몇 달 전에 선생님을 뵈러 가려고 했더니 요양원에 계시다며 지금은 뵐 수가 없다고 해서 이제나 저제나 했는데, 다시는 뵐 수가 없다니,
시대와의 불화 속에 온갖 고통을 다 겪으셨던 한 시대의 천재 시인이자 대 사상가가 석가 탄신일에 그렇게 가시다니,
긴 한숨 끝에 흐르는 눈물, 슬픔 속에 김지하 선생님과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습니다.
“1993년 5월 22일 나는 서울에 갔다. 5월 30일에 덕진공원에 세우기로 한 김개남 장군 추모비문을 김남주 시인과의 인연으로 신영복 선생이 썼는데, 완성됐다는 연락이 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전날 밤, 무던히도 잠을 설쳤다. 처녀가 시집가기 전날 밤이 그렇게 길었을까? 나는 몇 번이고 깨고 또 깼다. 새벽 첫차로 서울로 갔고, 친구 최대길과 함께 목동에 있는 신영복 선생 댁에 갔다.
목동에 있는 한 아파트에서 신영복 선생이 손수 끓여준 커피 한잔을 마시던 중에 신영복 선생님이 내게 물었다. “요즘 김지하 선생님의 근황은 어떤지요?” “나는 잘 모르겠노라고, 말했다. 신영복 선생님의 집에서 이이화 선생께 전화를 했다. 역사문제연구소도, 집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난처했다. 만나고 가야 하는데, 그러자 친구가 근처에 파리공원이 있으니 그곳에 가서 잠시 쉬었다 나와 전화를 하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간 곳이 파리공원이었다.
이름 그대로 현대식 공원 파리공원을 돌아다니던 중에 먼 곳에 초라한 차림의 남자가 문득 눈에 띄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줄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자세히 보니 김지하 선생님의 얼굴을 닮았다. 나는 세 번을 바라보고서야 이방인처럼 앉아있는 그가 바로 김지하 시인임을 알아보았다.
“저 혹시 김지하 선생님이시지요,”
“예 그렇소.”
“저는 선생님의 시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사람이고 황토현문화연구소라는 단체의 대표인 신정일입니다. 다음주 5월 30일 김개남 장군 추모비를 전주 덕진공원에 세우는 데 신영복 선생님의 글씨를 받으러 왔던 길입니다.”
그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손과 내 어깨를 꼬옥 잡았다.
“참으로 좋은 일이요. 잘한 일이요. 여기 앉아요”
그 곳에서 나는 친구와 함께 퍼버리고 앉아 김개남 포에 얽힌 이야기와 동학의 전반에 걸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김지하 시인이 그때의 상황을 회고한 글을 보자
“생각해보니 그와의 만남 자체가 그랬다. 10여 년 전이던가, 그 이후이던가, 바람 부는 날, 서울의 양천구 목동에 있는 파리공원이었다. 벤치에 앉아 있는데, 웬 젊은이가 앞에 와 인사한다. 누구냐니까 황토현문화연구소의 신 아무개라고 한다. 동학과 전라도를 앞세우는데 서먹서먹할 까닭이 없었다.
그날 우리는 김개남. 손화중. 전봉준에 관하여 혁명과 봉기의 관계나 이념이나, 수양이나, 조직이 혁명에서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하여, 그리고 지금과 같은 전라도의 동백사업이 왜 문제투성이인지에 대해서 격의 없이 깊은 곳까지 들어가 주고받았다. 중요한 것은 그의 발언이나 주장이 그때 이후 지금까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그 토막토막이 모두 다 항구적인 진정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애당초부터 그가 발로 탐구하기 때문에 유지될 수 있는 불변성이다.(...) 철저히 리졸, 뿌리 모양으로 이루어진 그의 글은 그가 수많은 민족민중사상가들이 유령이 되어버린 지금, 가장 현장적이고 집요한 민족민중사상가로서 현존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렇다. 나는 그를 ‘삼남일대를 걸어다니며 발로 쓰는 민족 민중사상가’라고 부른다.“
그날 나는 김지하 시인으로부터 전봉준, 손화중, 손병희로 이어지는 동학은 농민혁명이 끝나면서 막을 내리고 온전히 동학정신이 살아남은 것은 김개남 포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파죽지세로 점령하고 무서운 혁명적 열기로 사방을 제패했으며 지리산을 넘어 하동, 진주까지 진출했던 김개남의 잔존세력들이 농민혁명이 끝난 후 지리산으로 숨어들었다는 이야기.
그들이 결국 1차, 2차, 3차 지리산 의병전쟁의 주역이 되고 진주 형평사운동과 고려공산당을 세운 김단야로 그리고 민족민중운동의 중심세력으로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왔다는 이야기를 두 시간이 넘도록 들었다.
김지하 시인은 나와 이야기를 하던 중에 줄잡아 담배를 두어 갑은 피웠을 것이다. 그 뒤 일산에 있던 자택에 있던 선생님의 집에 찾아갔을 때 집안 이곳저곳에 널려져 있던 담배개피를 보고서야 김지하 선생님이 얼마나 담배 애호가였는가를 알 수 있었다.
앙드레 지드의 작품 <지상의 양식>에서 “모든 행복이나 불행은 ‘우연히 마주치는 것’이어서, 네가 길에서 만나는 거지처럼 ‘순간마다 그대 앞에 나타난다.’는 것을 어찌하여 깨닫지 못했단 말인가.”라는 구절을 절절하게 실감했던 날이 바로 그날이었다.
그래, 어떻게 우리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단 말인가? 산책 나와 있던 김지하 시인을, 그것도 김개남 장군 추모비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남녘 땅 뱃노래를 읽으며 김개남 장군 추모비를 세울 생각을 했다.) 그렇게 만날 줄이야.
얘기를 마무리할 즈음에 김지하 선생님은 전화번호를 적어주셨다.
“장모님(소설가 박경리)이 김개남 장군의 영원한 팬이요, 토지의 전편에 나오는 김개주가 그분이요, 장모님이 알면 무척 기뻐할 것이요, 오늘 밤에라도 원주로 전화해 주시요”
김지하 선생님의 말에 전주에 도착하자마자 원주에 있는 박경리 선생님 댁으로 전화를 했다. 이러이러한 일로 서울에 가서 우연히 김지하 선생을 만났고 박경리 선생님에게 전화해 드리게 되었다고 했다.
“잘한 일이여. 내가 통영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김개남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듣고 자랐다고. 그래서 토지에 그 양반을 김개주라는 이름으로 썼었지. 김개남 장군은 세계적인 혁명가야. 내가 그래서 후배들을 만날 때마다 그 양반에 관한 글을 쓰라고 해도 안 쓰잖아. 토지 끝내고 나면 전주에 한번 갈게”
들뜬 그 목소리. 나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 목소리에 실려 있는 기쁨에 찬 목소리가. 아련하게 멀어져 갔다. 그날 나는 내가 존경하는 분들과 몇 분 차이 몇시간 차이로 세 분과 조우했다. 더구나 신영복 선생님을 통하여 들었던 김지하 선생님과 선생님의 장모이자 한국문학사상 길이 남을 <토지>의 작가인 박경리 선생과 기이한 인연으로 한 시간여 남짓 통화를 하는 영광을 누렸다.
전화를 끝내자마자 그날 하루가 활동사진처럼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날의 인연을 다시 불러낸 것은 신영복 선생이었다. 당신이 쓴 글씨를 찾아 답사를 다니고 경향신문에 연재를 하던 중이었다. 김개남 장군 추모비를 답사 하던 중 김남규 전주시의원을 통해 나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다. 2012년 오월에 펴낸 <변방을 찾아서>라는 책 112페이지에 그 당시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김개남 장군 추모비가 있는 덕진 공원은 전북대학교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다. 자연석 추모비는 이끼가 돋고 비바람에 바래어 글씨가 얼른 눈에 띄지도 않았다.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라는 비문에서 역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다. 이 글 귀는 역시 “새야 새야 파랑새야” 라고 함께 불리었던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수천 군사 어디 두고 짚둥우리가 웬 말이냐” 라는 노래의 1절이다.
비문 글씨도 식별이 어려울 정도였지만 사실은 그 글씨를 부탁한 사람을 내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남규 시의원이 찾아온 그 당시의 기록을 보고 나서야 그 전후 사정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나에게 글씨를 부탁한 사람은 <신 택리지>의 저자인 향토문화연구회(황토현문화연구소>의 신정일 선생이었다. 물론 김남주 시인이 작고해서 연결 고리가 끊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1993년에 목동의 우리 집에서 커피까지 함께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얼마 전에 그의 저서를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 자리를 빌려 양해를 구한다. 그 날 이이화 선생께 전화를 걸었으나 연결이 되지 않았던 것 까지는 기억이 되살아났다. 인연이란 참으로 우연처럼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강물의 표면에 투영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심히 흘려보내고 있는 수많은 사연들에 생각이 미치면 우리들 자신이 마치 강물에 떠내려가는 한 잎 낙엽이 된다. 생각하면 우리의 삶이란 인연이면서 우연이고, 우연이면서 또한 필연인지도 모른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엮는 사람들과의 인연이 그렇거든, 하물며 역사의 인연이야 오죽하랴, 거대한 산맥이 서로 밀고 당기듯 그 우람한 역사의 인연은 운명이라고 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그렇다. 인연이란 신기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이 세상에서 인연을 맺었던 박경리 선생님도, 신영복 선생님도, 그리고 지지난해 김지하 시인의 사모님인 김영주 선생이 가시더니, 기어이 김지하 선생님까지 가셨다.
오고 가는 것, 우주의 이치이자 순리라고 여기면서도 슬프다. 내 젊은 날의 우상이었고, 나에게 동학과 증산 강일순의 사상을 가르쳐준 김지하 선생님, 가끔씩 전화를 하셔서, ”신형, 나 어디가는데, 같이 갈까?“ ”신형, 이책을 보고 공부하면 어때?“ 하시며, 긴 편지를 써서 보내주셨던 내 스승이자, 길에서 만난 도반이었던 선생님, 부디 선생님이 가신 세상에서는 그냥 무심히 사셔서 마음 고생 없으시길 기원합니다.
선생님, 선생님, 나의 선생님, 김지하 선생님,
2022년 5월 8일 석가 탄신일에, 선생님을 보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