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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초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는 것을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알게 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복음을 선포하신다(복음).
제1독서
<그 영이 하느님께 속한 것인지 시험해 보십시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3,22―4,6
사랑하는 여러분, 22 우리가 청하는 것은 다 그분에게서 받게 됩니다.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하기 때문입니다.
23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24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알고 있습니다.
4,1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 영이나 다 믿지 말고
그 영이 하느님께 속한 것인지 시험해 보십시오.
거짓 예언자들이 세상으로 많이 나갔기 때문입니다.
2 여러분은 하느님의 영을 이렇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고백하는 영은
모두 하느님께 속한 영입니다.
3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 않는 영은
모두 하느님께 속하지 않는 영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적’의 영입니다.
그 영이 오리라고 여러분이 전에 들었는데, 이제 이미 세상에 와 있습니다.
4 자녀 여러분, 여러분은 하느님께 속한 사람으로서
거짓 예언자들을 이미 이겼습니다.
여러분 안에 계시는 그분께서 세상에 있는 그자보다 더 위대하시기 때문입니다.
5 그들은 이 세상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세상에 속한 것을 말하고 세상은 그들의 말을 듣습니다.
6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우리의 말을 듣고,
하느님께 속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진리의 영을 알고 또 사람을 속이는 영을 압니다.
복음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4,12-17.23-25
그때에 12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
13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14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5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16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17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23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24 그분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
간질 병자들과 중풍 병자들을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25 그러자 갈릴래아, 데카폴리스, 예루살렘, 유다,
그리고 요르단 건너편에서 온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예수님 만나는 법: 별은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가장 밝게 빛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갈릴래아 지역에서 첫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당시 성전이 있었던 예루살렘에서 멀어질수록 이방 민족에 가깝고 어둠과 오류 속에서 산다고 여겼습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가졌건, 가지지 않았건 자신이 더 오류 속에 산다고 여기는 사람이 빛을 보는 것입니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예루살렘이 있는 유다 지방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른 지역 사람보다 더 선택받은 사람들이라 여겨 교만하여져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빛이시기에 자신이 빛이라고 여기는 이들에게 다가가시지 않습니다.
어느 날, 원효대사가 외출했다가 분황사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갑자기 어떤 노스님이 길을 가로막더니 반갑게 아는 척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반갑구려, 원효대사. 대사께서 쓴 글을 읽어보았는데 깊이가 정말 대단하더군요!”
“보잘것없는 글인데 송구스럽습니다.”
“대사!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저랑 같이 식사라도 하시지요.”
나이가 많아 보이는 그 스님은 원효대사를 데리고 천민이 사는 동네로 향했습니다. 솔직히 원효대사는 그때까지 천민이 사는 동네에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젊은 시절, 화랑이었을 때는 당연히 갈 이유가 없었고, 출가해 스님이 된 뒤로는 공부하느라 갈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노스님은 어느 주막집에 이르러 자리를 딱 잡고 앉더니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어이, 주모! 여기 귀한 손님 오셨으니 술상 하나 봐주게.”
그 순간 원효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수행하는 사람이 술상이라니!’
원효대사는 자리에 앉지도 않고 곧바로 뒤돌아 나와버렸습니다.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해버렸습니다. 이때 갑자기 그 스님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원효대사, 마땅히 구제해야 할 중생이 지금 여기 있거늘 어디 가서 별도의 중생을 구제한단 말이오!”
그 말을 듣는 순간 원효대사는 그 자리에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은 빛이라고 생각하면서 빛은 더 밝은 빛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빛이 있을 곳은 어둠입니다. 그래야 참 빛이 됩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원효는 자신의 공부가 부족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노스님은 이론에만 머물던 자신의 자가당착을 밝혀주는 작은 빛이었던 것입니다.
원효는 승려들을 가르치던 스승 역할을 그만두었습니다. 남을 가르치고 글을 쓰는 대신, 머리를 기르고 신분을 숨긴 채 어느 절에 들어가 부목(負木)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부목 생활이란 사찰에서 땔나무를 마련하는 일 등 온갖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입니다. 즉 젊은 승려들에게 무시당하며 땔나무를 구하고 아궁이에 불을 지폈던 것입니다.
그 절에 꼽추 스님이 있었는데 다들 그 스님을 ‘방울 스님’이라 불렀습니다. 걸식할 때 아무 말 없이 방울만 흔들었기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붙은 것입니다. 방울 스님은 공양 때가 되면 다른 스님들처럼 제때 와서 밥을 먹지 않고 꼭 설거지가 다 끝난 뒤에 부엌을 찾아와 남은 누룽지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부목들은 그 스님을 귀찮아하고 무시하곤 했습니다.
하루는 원효 스님이 마루를 닦다가 학승(學僧)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보아하니 ‘대승기신론’을 공부하면서 논쟁을 펼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원효가 그 논쟁을 들어보니 학승들이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원효는 자신도 모르게 “그건 이런 뜻입니다”라고 말하며 일깨우려 했습니다. 그러자 난리가 났습니다.
“아니, 일개 부목 주제에 어디 스님들 공부하는 데 와서 이러니저러니 아는 체를 하는 게냐?”
그제야 원효는 고개 숙여 사과하고 다시 일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공부 판이 깨진 스님들은 스승을 찾아가 ‘대승기신론’이 너무 어려워 이해하기 힘들다며 하소연했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원효가 쓴 ‘대승기신론소’를 건네주며 공부해보라고 말했습니다. 학승들이 그 책을 읽어보니 깊이가 있음에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책에 나와 있는 똑같은 이야기를 한 원효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원효는 신분이 들통날 수 있다는 생각에 밤에 조용히 그 절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모든 스님이 잠든 시각 원효는 문을 살짝 열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습니다. 이때 문간방에 있던 방울 스님이 방문을 탁 열고는 이렇게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원효, 잘 가시게.”
방울 스님의 이 한 마디에 원효는 그 자리에서 확연히 깨달았습니다. 그는 천민들 가운데서 깨달음을 얻었고, 그들 가운데로 내려가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가장 핍박받는 스님만이 자신을 알아보는 것을 보았습니다. 빛은 어둠을 향해야 하고, 더 나아가 어둠만이 빛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을.
[출처: ‘인생을 바꾸는 유일한 방법’, 유튜브, ‘북올림’]
이태석 신부님이 가난한 톤즈라는 마을 한센인들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마더 데레사는 목마르다고 외치는 한 노숙인에게서, 그리고 김하종 신부는 한 냄새나는 지하 방에 사는 사람을 끌어안을 때 “나다. 두려워 마라”라고 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저는 신학교에 들어오기 전 떠들며 술을 마시다 잠시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그 고요함 가운데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문득 느껴 수도원에 있는 친구에게 “화장실에서 만난 하느님”이란 글을 편지로 보낸 적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빛이시다면 그분은 어둠 속에 계십니다. 별이 낮에 뜨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는 어둠이라고 여겨지던 갈릴래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어둠만이 빛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옳고, 내가 알고, 내가 잘살고 있다고 여기는 이들은 절대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습니다. 그 자체가 너무 밝기 때문입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세기 초, 미국 질레트사의 창업자 질레트는 세계 최초로 안전면도기를 개발했습니다. 당시의 면도기는 비싸기도 했지만, 사용 전에 칼날을 갈아야 했기에 매우 위험했습니다. 따라서 질레트는 자신의 발명품이 전 세계인의 선택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심각한 판매 부진이었습니다. 1년 동안 질레트사가 판 것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면도기 51개, 면도날 168개”
세계 제1차 대전이 시작되었고, 그는 곧바로 군수 물품 조달 부서에 연락해 면도기를 원가에 보급하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원가에 판매하면 남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까지의 적자 역시 당연히 메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커다란 손해를 보는 이 결정이 질레트사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켰습니다. 돈 한 푼 쓰지 않고 엄청난 광고 효과를 본 것입니다. 그래서 1917년, 한 해에만 1억 3천만 개의 면도기를 판매할 수 있었습니다.
손해 보는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손해 너머를 바라본다면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세상의 관점이 무조건 진리의 길은 아닙니다. 그보다 주님의 관점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관점을 따르게 되면, 어리석고 현명하지 못한 것처럼 비춰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근시안적인 생각입니다. 조금만 더 멀리 바라보면 사랑의 삶을 사는 주님의 관점이 하늘 나라를 차지하게 되는 가장 올바른 결정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감옥에 갇히고 나서야 회개를 선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는 요한에 의해 옛 계약이 끝나고, 새 계약의 시작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의 가르침을 짓밟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확인하듯이 요한의 가르침을 이어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우리의 회개로 주님께서 얻으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세상의 관점으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말도 듣지 않고, 악으로 쉽게 기울어지는 우리를 보면 “꼴도 보기 싫다.”라고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의 관점을 따르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관점은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죄를 고백하여 죄의 얼룩을 모두 씻지 않는 한 아무도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은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드러났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죄의 얼룩을 모두 씻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모두가 어려운 일을 겪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매일 경이롭고 아름다운 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더글러스 케네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예수님.
기분 좋지 않은 말을 듣고 나서….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이 기억납니다. 새벽 묵상 글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그로 인해 방송 출연과 외부 강의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습니다. 선배 신부님을 만나 함께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조신부가 성실하게 글을 쓰는 것은 좋은데, 조신부 묵상 글은 깊이가 없어.”
나름 그 깊이를 만들기 위해 책도 많이 읽고, 묵상 시간도 늘려가고 있는데 이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영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기분 나쁘다고 화를 내면, 막돼먹은 사람으로 비춰질 것 같고 또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말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속 좁은 사람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좋은 조언 감사합니다.”라고 말을 했지만, 솔직히 기분이 영 좋지 않았습니다.
‘나’를 보고 관찰하고 판단하는 사람들과 우리는 함께 살아갑니다. 따라서 자신이 원치 않는 판단이 이루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철학가 샤르트르의 말처럼 ‘타인은 지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함께 산다는 것은 좋은 말만 들으며 산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쁜 말도 들으며 나를 변화시키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첫댓글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마태 4,16)
갈릴래아 사람들처럼 빛을 맞이하는 새해의 시작이 되길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