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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일을 어떻게 시작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각자 일과를 시작하는 시간은 달라도, 처음 5분을 어떻게 보내는가 살펴보면, [일]을 대하는 그 사람의 태도를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따끈한 차 한 잔을 마시면서 일을 시작하는 사람도 있고 신문을 읽는 사람, 아니면 지난 밤에 본 TV 프로그램을 이야기하면서 하루 일을 시작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단순히 어떤 행동으로 하루를 시작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느냐"라는 {우선 순위}의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해야 합니까? 하루 일을 시작하는 태도에서 우리는, 그 사람이 삶에서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골로새서 3장 23절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 그리스도인은 자기 앞에 놓여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된 우리들이, 맡은 일을 앞에 두고 하품만 하거나 쓸모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해,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하듯 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 하듯 마음을 다해 일하기로 결심하십니까? 오늘도 올바른 동기에서 최선을 다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오늘 하루의 일들을 주께 하듯 마음을 다해 일하기로 결심하셨습니까? 골 3: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1. 이제 11월로 접어들었습니다. 이 해도 이제 두 달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한 해 한해가 어찌 이렇게 빨리 가는지요. 힘써 부지런히 주의 일을 하며 달려온 이 해를 모두 아름답게 마무리 할 수 있도록 기도속에서 점검하며 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2. 카페지기의 거리에서 찬양하면서 영혼을 치유하고 구원하는 사역을 하나님의 은혜속에서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코로나 이후 제가 찬양하는 마산과 진해 해변공원에 각종 타이틀을 만들어 축제, 기념, 추도 등의 이유로 행사공연이 너무 많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못쓴 예산들을 쓰기위해 안달이 난듯 합니다. 지자체가 이런 행사로 쓰는예산이 심각한 수준인 듯합니다. 이런 행사로 야외에 나가 찬양하는 사역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사역을 위해 장비를 싣고 다니는 제 차량이 노후되어 (뉴카렌스 2006년식, 28만키로) 계속 어려움이 있습니다. 여러곳을 수리해야 하는데 수리비가 너무 많이 나와 손을 못대고 있습니다. 중고차로 사서 근 10여년을 많은 장비를 싣고 다니며 사역에 쓰임 받은 참으로 고마운 녀석입니다. 중고차라도 말썽 없이 장비를 싣고 다닐 수 있는 자량을 후원해 주실 수 있는 분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제목 : 주의 일과 일상생활 성경 : 골 3: 22-25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종과 주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특별히 종들이 주인을 어떻게 섬겨야 할 것을 가르치고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본문의 요점을 알기 쉽게 풀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복하라. 그리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라.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상전을 섬기라. 노예로서 무슨 일을 하던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님으로부터 받을 줄 우리가 아니니 너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들이기 때문이니라” 이 본문과 비슷한 내용의 말씀이 엡6:5에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라”라고 말씀 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말씀을 증거하기 전에 먼저 본문에서 등장하는 ‘종’이라는 단어가 지니고 있는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종’은 헬라어로 ‘둘로스’라고 합니다. ‘둘로스’는 푼꾼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삯을 받고 일하는 일꾼이 아니라 어떤 집으로 팔려가면 일생동안 기약없이 종살이를 해야 하는 사람을 가지고 ‘둘로스’라고 합니다. 즉 한마디로 말해서 ‘둘로스’는 노예를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얼핏 생각해 보면 바울은 노예제도를 정당화 시켜서 말하고 있는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 볼 때 노예제도는 폐지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바울은 노예들을 향하여 “상전들에게 순종하라”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바울은 노예제도를 정당화하고 옹호하여 그렇게 권면했을까요 ? 그 당시의 노예들은 보통 부유한 집에서 키우는 가축들보다 더 비참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노예제도를 비난하거나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노예들에게 주인을 올바르게 섬겨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놀랄만한 사건은 당시 노예제도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붕괴되었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노예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해 놓은 구절이 없는데 노예제도는 그리도인들에 의하여 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도 노예해방을 위해 힘쓰라고 직접 분부하신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당시 노예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어서 그랬을까요 ? 아닙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누구보다도 낮고 비천한 자들을 사랑하셨고 항상 그들의 친구가 되셨다는 것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눅4:18에 보면 주님은 가난한 자에게,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노예해방을 위하여 힘쓰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지만 그러나 주님은 노예해방을 위하여 인간에게 가장 완전한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노예제도를 근본적으로 깨뜨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주신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해서 주님은 죄악으로 응어리진 인간의 심령을 치유함으로 말미암아 인간 스스로가 노예제도를 폐지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바울이 종들을 향해 “상전들에게 순종하라”라고 가르치고 있는 말씀은 노예제도를 정당화 시키는 말씀으로 받아 드려서는 않됩니다. 그럼 기독교가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근본 사상은 무엇일까요 ? 첫째 인간은 생명의 시작에서부터 모두가 평등하다는 사상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흙으로 창조하셨읍니다. 부유하고 권세 있는 종들의 주인이라고 해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물질로 특별한 형상으로 창조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 사역 속에서 살펴본다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즉 사람 밑에 사람 없고 사람 위에 사람 없습니다. 따라서 피부색이 좀 다르고 생활 환경에 따라 신체 조건이 좀 달라도 인간은 본질적으로 흙으로 빚어진 존재이므로 평등합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사회적 불평등이라는 구조악을 만들어 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을 빈부귀천으로 나뉘어 사람을 차별하고 적대하는 세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과 노예들은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함을 받은 모든 인간은 평등합니다. 주인이나 노예나, 자유인이나 속박자나 남자나 여자나 그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평등한 존재인 것입니다. 성경은 증거하기를 (갈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성경은 최고의 사랑과 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진정으로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의 실천이 당시 계급주의을 무너뜨렸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한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빌레몬서를 읽어보면 오네시모라는 노예 이름이 등장합니다. 노예 오네시모는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서 물건을 훔쳐 달아났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주인을 떠나 멀리 도망친 다음, 로마 감옥에 갇혔있던 사도 바울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오네시모는 바울과 함께 거하는 동안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마음의 변화를 받아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모는 그 주인에게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왠지 아십니까 ? 회개하고 용서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바울이 오네시모를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쓴 편지가 바로 빌레몬서인 것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위하여 놀라운 중재의 편지를 썼습니다. 당시의 법률에 따르면 오네시모는 사형을 면할 수 없는 중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빌레몬에게 무엇을 요청하고 있는지 몬1:16-17절 말씀을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하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종으로 다루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맞이해 줄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사람 빌레몬은 바울의 요청대로 새사람으로 돌아온 오네시모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맞이했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인간의 영혼만 구원하는 진리가 아니라 몸도 함께 구원하는 완전한 진리인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백인들이 흑인들을 법에 의하여 노골적으로 차별하고 있는 남아프리카 연방에서 생겨진 이야기입니다. 흑인 교회인 성 시온 교회에서 수난일 성찬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는 이 예배 때 특별한 행사를 계회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준 정신을 본받아 누구든지 자기가 정말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의 발을 씻는 예식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예배에 백인 판사님이 나타난 것입니다. 존경을 받는 판사로서 대법원장에 내정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올리버 판사입니다. 시온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세족 예식의 광고를 듣고 그는 그 교회에 다니는 자기 집의 흑인 여종 앞에 무릎을 꿇고 발을 씻었을 뿐만 아니라 그 검은 발에 입을 맟추었습니다. 예배당 안은 숙연해졌습니다. 올리버 판사는 이렇게 간증하였습니다. "마르다는 내 집 종으로서, 오랜 세월 내 아들 딸들을 돌보았으며, 내 자식들의 발을 씻어 준 정말 고마운 사람입니다." 이 소식이 퍼지자 내정되었던 대법원장 자리가 취소된 것은 물론 판사직도 박탈되었습니다. 시온 교회 목사가 올리버씨를 위로하기 위하여 방문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판사직도, 사회의 다른 지위도 무덤에 갈 때는 먼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먼지보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과 감사가 더 중요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는 모든 인간은 그 생명의 시작에서 부터가 평등하다는 사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노예해방을 위하여 힘쓰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지만 그러나 주님은 노예해방을 위하여 인간에게 가장 완전한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노예제도를 근본적으로 깨뜨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주셔는데 그것은 바로 내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바울이 종들에게 “상전들에게 순종하라”라고 가르치고 있는 말씀은 노예제도를 정당화 시키는 말씀으로 받아 드려서는 않됩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노예제도를 폐지한 두번째 근본 사상은 종들이 주인을 성실히 섬기며 주인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노예와 주인을 향해서 권면하는 말씀이 가끔 나옵니다. 본문 (골3: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내에서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바울에 이와 같은 권면의 말씀을 매우 못맞당하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바울이 노예들에게 권면하는 말이라고 하면 ‘너희들은 과감히 노예의 굴레를 떨쳐버리고 일어나라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에게 자유를 주셨다. 그리고 과감히 투쟁하라’라고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 무엇이라고 했나요 ? 오히려 ‘상전들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바울이 노예제도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했을까요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 역시 이 말씀을 읽을 때 다음과 같은 의문점을 가지기가 쉽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가축보다도 못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상전을 성실히 섬겨야 하는 것일까 ? 그리고 종의 신분으로 주인에게 충성하는 것도 주님의 일이 되는 것일까 ?라는 의문점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일 중에서 가장 잔흑한 것을 들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노예생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하고 보람 없고 인생의 목적도 없는 종살이가 과연 주님의 일이 될 수 있을까요 ? 그렇습니다. 바울은 천하고 비참한 노예 생활이 주님의 일이 된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바울은 종들을 향해서 말하기를 자기 상전에게 순종하되 그것도 주님을 두려워하듯이 떨면서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주신 상전이기 때문에 주님에게 순종하듯이 그 상전에게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전이 무슨일을 시키든 상관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모든 일들을 마치 주님께 하듯 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노예는 상급을 주님으로부터 받는다고 본문 24절에서 말씀했습니다. 그럼 왜 주님이 상전에게 순종하는 노예들을 상을 주실까요 ? 그 까닭은 자기의 일을 주님의 일을 하듯이 했기 때문에 상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눈가림으로 하면 주님에게 책망을 받을 것이고 무슨 일이든지 주님의 일을 하듯하면 칭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힘든 일을 한다 할지라도 노예생활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직업도 노예생활 보다는 낫습니다. 그러므로 노예의 일도 주님의 일이 될 수 있는데 우리가 평소에 하는 일이 주님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일을 할지라도 믿음으로 하는 한, 그 일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받지 못한 노예는 상전의 종이지만 그러나 구원받은 종은 그의 신분이 주님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사람의 종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믿음으로 일을 하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상전의 일을 하지만 이제는 주님의 종의 신분으로 하기 대문에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은 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노예들이 주님을 만난 후부터 그들의 인격에 변화가 일어나 생활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주인들이 자기를 하나님 대하듯이 섬기는 종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과거에는 포악하던 노예가 유순한 양과 같이 되었고, 또한 도덕적으로 부패했던 여종들이 변화를 받아서 천사같이 된 것을 보았을 때 그 주인들이 받았던 감동이 얼마나 컷을까 하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노에의 신분으로서 변화를 받은 자신의 아름다운 인격을 가지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착한 행실로 감동을 주었다면 그 일이 아무리 천하다 할지라도 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당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며 주변을 변화시켜나간 노예들,그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예수의 증인의 삶을 살았던 위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노예들 중에는 과거에 지체 높은 사람들이 간흑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쟁의 와중에서 포로로 잡혀와 노예생활을 하는 패전국의 귀족계급이었습니다. 그들은 지적 수준이 다른 노예들보다 높았습니다. 그래서 주인들은 그들에게 자기 자녀들의 교육을 맡기는 예가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좋은 이들 노예들은 주인의 자녀를 교육하면서 은밀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결국 이것이 훗날 로마제국을 무너뜨리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직장이나 직업, 그리고 현제 위치에서 어떠한 자세로 일을 하십니까 ? 이 시간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직업 우리의 직장이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직업에는 귀천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해서 얼마 만큼 주님의 증인들이 되고 빛이 되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직업과 직장이 좋아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런데 요즈음 교회 안에 가끔 이상한 기류가 흐르고 있는데 그것은 이원론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일과 세상 일을 분리해서 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교회에 와서 심방하고 전도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일은 주님의 일이요, 집에서 설거지 하고 아이를 키우는 일은 주님의 일이 아니라는 식으로 이 두 가지를 서로 갈라놓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옳은 생각,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성경적인 사고방식이 아닙니다. 여러분 !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에만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실까요 ?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5장에서 너희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세상일 전체를 통해서 영광을 받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원론적인 사고에 깊이 빠져 있는 사람들은 세상일은 주님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위험한 사상입니다. 대부분 이러한 사람들은 세상일에 대하여 부정하고 가증하다는 생각으로 일종의 협오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잘못하면 염세주의자나 아니면 신비주의로 빠져서 현실을 도피하여 사회의 낙오자가 되는 사레가 허다합니다. 하나님은 깊은 산속에 있는 기도원이나 아니면 수도원에서만 기도를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또한 예수의 이름으로 특정한 집단을 이루어 세상과 줄을 끊고 공동생활을 하는 자들에게만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러한 이원론적 사고는 주님의 통치권을 교회 안에서만 인정하고 저 넓은 세상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사상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교회 안에서 하는 전도 사업이나 아니면 선교사업에만 하나님의 축복이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모든 세상일에도 하나님의 축복이 따른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성도의 전 생활권은 전부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여져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지금 현재의 생활 속에서 만족함이 없습니까 ? 그러나 아무리 짜증스럽고 피곤한 생활이라 할 지라도 노예생활 보다는 낫습니다. 당시 노예들도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는 가운데서 주인에게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주인을 회개시키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는데 지금의 여러분들의 형편이 아무리 나빠도 그들 보다는 열배는 낫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시대에 살던 사람들 보다 문명과 문화의 발달로 행복한 생활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사회는 어떻습니까 ? 자식이 어미를 버리고 늙은 아비를 때리며 돈 때문에 부모를 살해하는 패륜의 범죄들이 우호죽순처럼 솟아나는 이 현실을 여러분들은 어떻게 받아드리고 있습니까 ? 어떤 심리학자는 학교 교육의 문제가 있고,가정 교육에 문제가 있다고 말을 합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옛날 사람들은 많은 공부를 했고 가정 교육을 잘받았기 때문에 웃어른을 공경하고 부모에게 효도를 했습니까 ? 그리고 아버지를 살해한 대학 교수는 가정교육에 문제가 있어고 교육을 잘못 받아서 패륜의 범죄를 저질렀습니까 ? 사회의 병패를 근본적으로 치료하는 방법은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회 전체가 거듭나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고서는 시한폭탄 처럼 언제 어디서 또다시 패륜의 범죄가 터질지 모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이 복음과 성령에 의하여 근본적으로 새롭게 거듭나고 고침을 받기 전에는 이 사회가 안고 있는 죄악의 뿌리는 절대로 뽑힐 수가 없고, 치료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 노예 제도는 노예들이 복음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받쳐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이 되었습니다. 헬마스라는 사람은 자기의 종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예수믿게 된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 믿은 다음에 처자를 데리고 와서 세레를 받게 했는데 그 자리에 자기 집에서 일하고 있는 250명이나 되는 노예들을 전부 불러서 함께 세례를 받게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자기의 재산을 노예들에게 고루 나누어주며 자유인 몸으로 살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무엇이 헬마스로하여금 노예들을 사랑할 줄 아는 마음으로 변화 시켰습니까 ? 교육입니까 ? 아니면 좋은 가정 환경입니까 ? 아니면 명예와 지위와 권세입니까 ? 그의 인격과 심령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거듭날 수 있도록 한것은 그의 노예가 복음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받쳐 주인에게 순종하는 착한 행실로 감동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패륜으로 병패된 사회를 하나님께 축복을 받고 범죄없는 복지 사회로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당시 노예들처럼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노예들이 진실한 신앙생활을 한 것처럼 여러분들 모두가 가정에서 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착한 행실로 성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미국에 노예제도가 있던 시절에 어떤 사람이 노예시장의 경매대 위에 있는 한 노예에게 [만일 내가 너를 사서 내 집으로 데려가면 정직하고 진실하겠느냐?] 고 물었습니다. 그 젊은 흑인 노예는 예수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귀하가 저 를 사시던 말던 관계없이 저는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그리스도를 섬김으로 늘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겠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임을 고백했으면 여러분들은 말과 행동에 있어서 진실해야 합니다. 예수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너무나도 이웃에게 좋게 보이기 위하여 자주 그 럴듯한 말과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챤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에서 위선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세요. “하나님. 이제 내 자신은 주님을 위해 살기를 원합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이 주님의 일이기 때문에 저의 모든 것이 거룩한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주의 영광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가르쳐 주세요. 도와 주세요. 그러면 날마다 주님 영광 위해 살겠습니다” 라고 기도하세요. 그리고 주부는 가정에서, 학생은 학교 공부에, 직장인은 근무지에서,농부는 농업에,사업가는 회사에서 그 일에 진실과 성실로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땀흘려 일한 대가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자기의 맡은 일을 주님의 일로 생각하고 충성한 자에게는 그 손이 수고하는 대로 주께서 상급을 주시고 또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첫댓글 오늘도 주안에서 성령의 도움으로 주님의 영광과 복음과 선교와 설교와 목회와 치유와 상담과 지혜와 능력과 성령의 도구로 쓰임받고 열매 맺게 하소서 샬롬
~감사합니다 ~샬롬~!!~ㅎㅎㅇㅇ
오늘도 감사하게 섬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함께해 주신 예수 사랑 목사님, 평안 장로님, 만경강 목사님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