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동물이다'라고 말을 하면 너무도 인간을 폄하한다고 하겠지만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따라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연에 대한 욕구가 강하다. 여행을 하다가 푸른 산하를 보면 마음이 포근하여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본능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연을 희구하게 되는 것이다. 어쩔 수없이 도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는 전원 생활이 인생의 마지막 꿈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 몇몇은 과감히 도시의 생활을 버리고 전원으로 찾아 들어 꿈을 현실로 만들고 있다. 그러한 용기조차 없는 우리는 과감히 전원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 문득 치솟아 오르는 부러움에 한숨짓고는 한다. 이럴 때마다 언젠가는 도시를 떠나겠다는 욕구가 더욱 강해지곤 한다.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언젠가는 도시를 떠나 푸름이 가득한 전원생활을 하고자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자연을 기반으로 하는 생업에는 종사하지 못하더라도 생활의 뿌리만이라도 자연과 가깝게 하자는 생각이 구체화되어 나타나는 것이 바로 전원에 집을 장만하는 것이다.
한옥 그리고 전원주택
조선조는 농업이 국가 경제의 기본이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정책을 전면에 표방할 만큼 조선시대는 농업 활성화에 전력을 다하였다. 임금이 친히 경작의 시범을 보일 만큼 농업은 국가의 기본산업이었다. 이러한 사회구조는 근세까지 이어져와 인구 통계에 의하면 1955년도에는 농가인구가 75%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0년도에는 도시인구가 전체인구의 75%를 차지하고 있어 30년 사이에 농촌인구가 급격히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통계를 볼 때 40세 이상의 나이를 가진 사람들 대부분은 과거 농촌에 기반을 두고 살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농촌 주택은 삶 자체를 자연에 의탁한 자연스러운 전원주택이다. 또한 과거의 농업은 전적으로 자연의 현상에 순응하며 꾸려져왔기 때문에 일상생활에도 영향을 미쳐 우리의 한옥은 철저하게 자연에 순응하는 집의 구조로 발전되어 왔다. 따라서 우리의 선조들은 자연과 호흡하며 즐기고 자연에서 생활을 살찌워 왔다.
전원주택이라는 단어는 생활 방식의 변화로 생겨난 신조어이다. 전원주택이라고 함은 생활의 기반은 도시에 두고 삶의 터전은 전원에 둔 집을 말한다. 그러므로 과거의 우리의 주택과는 다른 구조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연을 이웃하고 산다는 원칙에는 과거나 현재나 다름이 없다. 따라서 자연 친화적인 우리의 한옥과 전원주택은 서로 닮은꼴이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전원주택은 우리의 자연과 많이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집의 개발 방식이 서구에서 들어온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우리의 체질에는 맞지 않는다. 우리 나라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려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연에 적합하게 발달해온 한옥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한옥에서 배운다.
집의 발달사를 보면, 집은 자연 환경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하였다. 초기의 집은 동굴과 같은 자연적인 엄폐물에서 시작되어 지금과 같은 형태로 발전되어 왔다. 과거 공업과 기술이 발달되지 못하였던 시절의 집은 자연에 순응하면서 인간이 견디기 힘든 자연조건에 대응하는 모습으로 발전되어 왔다. 따라서 집은 기본적으로 지역의 기후조건과 문화환경에 적응하며 발전되어 왔다. 각 지역의 전통가옥을 보면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비가 많이 오는 지방에서는 지붕의 물매가 가파르고 누각형태의 고상주거(高床住居)로 되어 있다. 눈이 많이 오는 지방의 지붕은 눈이 쌓이는 것을 막기 위하여 비가 많이 오는 지방보다도 물매가 더욱 가파르다. 유목민의 집은 이동하는 생활방식에 맞도록 해체조립이 쉽도록 만들어졌다. 예를 들어 몽골의 게르(빠오)를 보면 조립과 해체가 간편하여 해체하는데 30분, 조립하는데 1시간 남짓의 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비슷한 예로 카라반을 많이 하는 아라비아 유목민의 집은 텐트 형식이다. 같은 더운 지방이라고 하여도 건조한 지방의 집은 두꺼운 흙벽돌로 되어있으며 외부를 백색으로 칠하여 외부의 열기를 차단하도록 하였고, 중정(中庭)을 만들어 집안의 환기가 되도록 하여 더운 외기에 직접 면하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그러나 덥지만 비가 많이 내려 습기가 많은 지역은 집안 전체가 환기가 잘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처럼 집은 자연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발달되어 왔다. 우리가 우리의 한옥에 주목을 하여야 하는 이유는 한옥이 우리 나라의 자연환경에 가장 잘 적응된 집이라는 점 때문이다. 한옥을 차근차근 뜯어보면 지금도 무릎을 치게 하는 부분이 한두 곳이 아니다. 예를 들어 처마가 많이 튀어나온 것은 햇빛과 비를 적절하게 제어하기 위함이고, 대청의 공기 순환체계를 보면 과학적 원리가 숨어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온돌은 간접난방 방식이어서 쾌적한 느낌을 줄 뿐 아니라 우리의 건강까지도 북돋우어주는 매우 합리적인 난방방식이다. 이렇듯 한옥에는 선인들의 생활의 지혜가 녹아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한옥을 잘 관찰하면 우리는 환경 친화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집을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집의 과거와 현재
나는 한옥의 형태적인 것을 무조건 답습하라고 권하고 싶지는 않다. 집은 자연환경뿐만 아니라 시대적 환경에 의해서도 많은 변화를 한다.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하여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사회적 환경에 따라 집은 달라진다. 조선시대의 왕은 궁궐에 살고, 부자들은 99간 기와집에서 살고, 일반인들이 세 칸 남짓한 초가집에서 살았던 것은 그들이 처한 사회환경에 때문이다. 그리고 집의 구조를 보면 현재의 집과 조선시대의 집이 다르고 조선시대의 집과 고려시대의 집이 다르고 또한 삼국시대의 집이 다르다. 이렇게 시대에 따라 집의 구조가 변화하는 것은 집을 짓는 기술, 난방방식 그리고 시대를 흐르는 생각의 차이 등 때문이다.
집은 생활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에 시대의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한옥은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에 맞도록 만들어진 집이다. 현재 남아있는 한옥은 모두가 조선시대의 집이다. 조선시대는 성리학을 국시로 하였기 때문에 남녀유별을 유난히 강조하였다. 따라서 사대부의 집은 철저히 내외를 구분하는 구조로 되어있다. 그러나 현재의 집은 현재의 생활을 담아야 하므로 조선시대의 집과 같을 수 없다. 현대는 공업을 기반으로 나아가서는 정보화시대를 지향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남녀의 구별이 없으며 이제는 여성도 적극적으로 사회생활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므로 집의 구조도 당연히 현재의 생활에 맞추어 변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옥에서 배우라는 것이 곧 한옥의 구조를 모방하라는 뜻이 아니다. 모방할 수도 모방하여서도 되지 않는다. 우리가 한옥으로 눈을 돌리는 것은 그간의 우리의 생활에 대한 반성의 결과이다. 우리가 서구문화에 대하여 개방을 결정한 후 우리들의 집은 우리의 정서와 환경을 무시한 집들로 변화하였다. 서구의 집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결과 우리 환경과는 전혀 다른 집에서 살게되었다. 이제는 이러한 우리의 자세를 비판적으로 돌아보고 우리의 것의 장점을 찾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이러한 자세로 돌아가 한옥에서 배워야 할 몇몇을 기술하여 보기로 하자.
첫 번째 : 호흡하는 집을 짓자.
호흡하는 집은 우선 창과 문을 열어놓을 수 있는 집을 의미한다. 창과 문을 열어놓는 집은 건강하다. 도심에서 이렇게 할 수가 없다. 공기오염과 소음으로 그리고 도난의 문제로 문과 창을 열어놓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전원으로 나아갔다면 반드시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러한 집의 구조는 차양 또는 처마가 있어야 한다. 현대의 집은 이러한 점에서 많은 자성이 있어야 한다. 특히 전원의 삶을 살기 위하여 전원에 짓는 집들이 미적인 문제 때문에 차양과 처마를 거부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전원의 삶을 포기하는 것이다. 차양과 처마가 필요한 것은 햇빛을 조절하고 비오는 날에도 마음 편하게 문을 열어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차양이 없는 집에서 살아본 분들은 비가 들이쳐 화들짝 놀라 창문을 닫으려고 우왕좌왕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더운 날 잠을 자려해도 소나기가 걱정되니 문을 닫고 잘 수밖에 없고 따라서 더위를 피하기 위하여 에어컨을 가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잘 따져 자연 조건을 지혜롭게 이용한다면 보다 적극적으로 자연과 호흡하는 집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 기계적 환경에서 벗어나자
춥다는 것과 덥다는 것, 찬 것과 뜨거운 것은 모두 상대적 개념이다. 더운 여름 우물에 담가두었던 수박을 꺼내먹는 맛은 냉장고에 넣어 둔 수박을 꺼내먹는 것보다는 시원함이 부족하다고 느껴질 수 도 있다. 그러나 매미소리를 들으며 시원한 바람을 쐬면서 우물에서 꺼낸 수박을 먹는 맛은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먹는 수박과는 분명 맛이 다르다. 사람은 주변환경을 오감을 통하여 인식한다. 차다는 것 하나보다는 시원한 바람과 매미소리가 어우러진 정취는 우리의 심성을 더욱 따뜻하게 한다. 영창으로 떨어지는 교교한 달빛과 함께 나무를 스치는 바람소리 등은 분명 도심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전원의 정취이다. 또한 장독대에 소복이 쌓여있는 눈을 치우며 꺼낸 김치, 마당에서 불을 때어 잘 달여 담가놓은 장을 햇빛과 바람을 살펴가며 잘 숙성시켜 가는 것 하나 하나가 새로운 도전이며 새로운 즐거움이다. 요사이 부식조차 사다먹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자연이 베풀어주는 다양한 맛을 잃어가고 있다. 이처럼 날씨와 계절의 변화 속에 나타나는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전원주택을 찾는 이유가 아닐까. 자연을 즐기려고 간 전원주택에서 자연을 거부하는 기계장치에 의존한다는 것은 전원주택 본래의 취지에 벗어나는 일인 것이다.
세 번째 : 자연을 관조하자
우리 선조들은 자연을 관조하는 정신을 바탕으로 집을 지었다. 정원을 보아도 동양삼국의 정원구조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일본이나 중국의 정원은 그야말로 경관을 만든다는 의미의 조경(造景)이 발전하여왔다. 그러나 우리의 조경원칙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즐기는 조경'의 개념이 우세하다. 우리 나라의 조경을 보면 인위적으로 만들어 경치를 즐기는 예가 그리 많지 않다. 조경을 한다는 의미로서 만들어진 인공조경물은 연못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조경은 '주변의 경관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차경(借景)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지세를 인위적으로 조정한다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필요에 따라 조금씩 변형을 주는 경우에도 의식하고 보지 않으면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하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자연을 관조하기보다는 자연을 자신의 구미에 맞추어 변형시키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정원까지도 자연스러움을 추구하였던 선조들의 정신은 사라지고 일본이나 중국처럼 인간의 손으로 꾸미는 것을 조경으로 인식하고 있다. 한국의 정원에는 상록수가 그리 많지 않다. 낙엽수를 심어 자연의 변화를 느끼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정원의 특징이다. 이것은 우리의 선조들이 자연의 현상에 거스르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선조들은 집 주위에 유실수를 키워 자급자족의 정신을 살려왔다. 유실수 자체가 가지는 자급자족의 성격도 중요하지만 때에 따라 소담스럽게 열리는 과실은 자연이 주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이러한 것을 즐길 줄 아는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네 번째 : 색을 아끼자
현대는 색깔 공해의 시대이다. 너무 많은 색깔 속에 묻혀 살고 있다. 과거 자연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색들로 인해 눈이 어지러울 정도이다. 건물의 간판은 물론 집까지도 색깔로 혼란스럽게 꾸며진다. 이러한 색깔의 공해는 남과 다르게 자신만을 드러내려는 욕구에서 비롯된다. 자신을 숨기고 은연자적(隱然自適)하는 것을 중요한 삶의 철학으로 삼았던 선조의 모습과는 달리 지금은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여 안달이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은 집에까지 나타나고 있다. 자신의 집이 드러나 보이기 위하여 우리는 너무 많은 헛된 노력을 들인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예전 농촌에서 느낄 수 있었던 포근함은 자연스러운 형태와 색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지금의 농촌은 붉은 색, 파란색 녹색 등 원색의 지붕과 직선으로 예전의 자연스러움을 잃어버렸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자연스러움을 다시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 전원주택에서도 천연의 색을 살려 자연스러움이 살아 있는 집으로 짓는다면 우리에게서 사라져 버리고 있는 아름다운 심성을 다시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다섯 번째 : 터의 기를 살리자.
요사이 전원주택을 짓는 것을 보면 너무 자연을 훼손하고 있다. 자연을 즐기려고 자연으로 찾아가면서 집을 짓는 것을 보면 아직 도시적인 사고에 젖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땅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다. 땅을 깎아 내리는 것은 땅의 기를 죽이는 일이다. 요사이에도 많은 사람들이 명당을 찾아 집을 지으려한다. 명당이라 함은 자연의 지세가 사람을 이롭게 하는 곳을 말한다. 그러므로 명당으로서 가치를 가지려면 우선 자연적인 지세를 살리는 것이 원칙이다. 과거에는 명당의 일부가 약할 때는 약한 부분에 기를 더하는 것은 있어도 더한 것을 깎아내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요사이는 이러한 개념은 찾아볼 수 없다. 우선 집을 지을 때 땅을 돋구기보다는 땅을 깎아 내리고 집을 짓는다. 땅을 훼손하였을 경우는 이미 땅의 기운이 사라진 것이다. 그러므로 명당을 원한다면 집을 지을 때 땅을 돋우어 집을 짓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땅의 기운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마침말
우리가 한옥에서 배울 것은 한마디로 자연에의 동화(同化)이다. 한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연에 동화되어 살려고 하였던 선조들의 생각이 곳곳에 배어 있다. 자연을 찾아 전원에서 살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러한 정신을 배울 필요가 있다. 자연을 즐기려 도심을 탈출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자연을 훼손하고 도심에서 살던 생활을 그대로 옮겨간다면 굳이 전원으로 나갈 필요는 없다. 자연을 찾아 나선 이상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즐기려는 마음자세를 집터를 찾을 때부터 가진다면 다른 누구보다도 자연을 즐길 수 있는 집을 지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