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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움직인 다윗의 진실한 애도
삼하 3:31-39
31 다윗이 요압과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아브넬 앞에서 애도하라 하니라 다윗 왕이 상여를 따라가
32 아브넬을 헤브론에 장사하고 아브넬의 무덤에서 왕이 소리를 높여 울고 백성도 다 우니라
33 왕이 아브넬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이르되 아브넬의 죽음이 어찌하여 미련한 자의 죽음 같은고
34 네 손이 결박되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차꼬에 채이지 아니하였거늘 불의한 자식의 앞에 엎드러짐 같이 네가 엎드러졌도다 하매 온 백성이 다시 그를 슬퍼하여 우니라
35 석양에 뭇 백성이 나아와 다윗에게 음식을 권하니 다윗이 맹세하여 이르되 만일 내가 해 지기 전에 떡이나 다른 모든 것을 맛보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하매
36 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며 왕이 무슨 일을 하든지 무리가 다 기뻐하므로
37 이 날에야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이 넬의 아들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이 한 것이 아닌 줄을 아니라
38 왕이 그의 신복에게 이르되 오늘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큰 인물이 죽은 것을 알지 못하느냐
39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 하니라
삼하 3:31-39 / [아브넬의 장례식] 다윗은 이제 요압을 비롯하여 자기의 모든 신하들에게 이와같이 명령하였다. `그대들은 모두 옷을 찢고, 허리에 베옷을 걸친 다음 아브넬의 상여 앞에서 슬피 울면서 가시오!' 그러고 나서 그는 몸소 상여를 뒤따라갔다. 32) 마침내 아브넬을 헤브론에 장사지내고 다윗이 그 무덤 앞에서 목놓아 울자, 온 백성도 그를 따라서 울었다. 33) 이때에 다윗은 아브넬의 죽음을 슬퍼하며 이런 비가를 지어 읊었다. `그대가 무슨 몹쓸 죄를 저질렀다고 그토록 모진 죽음을 당하게 되는가! 34) 그대는 전쟁 포로가 되어 두 손과 두 발이 쇠사슬에 매인 사람도 아니건만! 어째서 그대가 불한당들에게 잡혀 죽듯이 그토록 모진 죽음을 당하게 되었소!' 다윗의 비가를 들으며 백성들은 더 슬프게 울었다. 35) 장례식이 끝날 무렵에 백성이 다윗에게 묘지에서 요기라도 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아직 해가 지지 않았기 때문에 다윗이 그날 하루는 단식을 하겠다고 맹세하였다. `오늘 해지기 전에 내가 어떤 음식이든 조금이라도 입에 댄다면 하나님께서 내게 무슨 벌을 내리셔도 좋습니다.' 당시에는 해가 져서 새날이 와야 하루의 단식 의무가 풀리게 되어 있었다. 36) 이렇게 단식하면서 슬퍼하는 왕을 보자, 모든 사람이 다윗왕을 좋게 여겼다. 온 백성은 다윗이 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좋게 여겼던 것처럼, 이번 일도 기쁘게 여겼다. 37) 이리하여 그날 장례식에 왔던 사람들은 모두 아브넬이 죽은 것은 왕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38) 다윗은 자기의 신복들에게 이와같이 말하였다. `오늘 이스라엘에서 아주 훌륭하고 유능한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그대들은 알고 있소? 39) 내가 비록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운 왕이지만 이러한 일을 막을만큼 강한 왕은 못 되오. 스루야의 아들들이 나보다 더 강해졌고, 나는 더 이상 그들의 힘을 누를 수가 없기 때문이오! 그러므로 그들이 저지른 악행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벌을 내려 주시기 바랄 뿐이오'
아브넬의 죽음은 다윗에게는 위기로 다가왔습니다. 언약을 맺고 돌아가는 아브넬을 다시 불러들여 죽인 것으로 백성들에게 비춰지기 때문입니다. 이 위기 가운데 다윗은 진실한 애도를 통해 상황을 반전시킵니다.
아브넬의 장례식(31-34) 요압에 의한 아브넬의 죽음은 다윗에게는 백성들의 신망을 무너뜨리게 되는 위기였습니다. 백성이 신뢰하지 못하는 왕이 된다는 것은 정치적 생명이 끝났음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이런 상황 가운데 왕으로서 충분히 정치적으로 계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모든 계산을 내려 놓고 진심으로 아브넬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다윗은 즉시 국장을 선포하고, 온 백성에게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아브넬을 애도할 것을 명령합니다. 다윗은 아브넬의 상여를 따라가며 애곡했고, 그를 위하여 애가를 지어 부르기까지 했습니다. “네 손이 결박되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차꼬에 채이지 아니하였거늘”(34)이라는 표현은 재판을 통해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아무리 자신을 추격해 오던 적장이었더라도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아브넬을 다윗은 진심으로 애도하고 있습니다.
기쁨으로 바뀐 의심(35-39) 다윗은 아브넬의 죽음이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큰 인물의 죽음이라고 선포합니다(38). 신하들이 음식을 권하지만 다윗은 해가 지기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애도를 표합니다. 다윗의 이러한 행동은 오해 가운데 있었던 백성들의 마음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아브넬의 죽음이 다윗의 야비함에 의한 것이라 여겼던 백성들은 아브넬을 위해 진심으로 애도하는 다윗의 모습을 보며 그 진실함을 믿게 됩니다. 다윗의 진실함은 그를 따라야 할 백성들에게 기쁨을 가져다주었고, 왕에 대한 전적인 신뢰로 돌아오게 됩니다(36).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정치적 계산과 이익을 앞세우기보다 진실한 애도를 통해 오해를 극복해 낸 다윗의 결단을 볼 수 있습니다. 나에게는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진실한 용기가 있습니까?
적 용 : 계책을 내려하지 아니하고 진실함으로 해결하려는 다윗의 용기를 보며 내가 직면한 문제 가운데 정직으로 감당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참 화나는 일이 많은 세상일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삶은 호락호락하지 않을 수 있고, 분노할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 그런 상황이 오면 말씀 한 구절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에베소서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화를 조금만 덜 내고, 그런 사람들이 조금씩 많아지면 세상은 훨씬 평화로워 질 겁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지혜, 오늘 하루의 아침을 열면서 하나님께 구해 봅니다. ‘다윗과 함께 하시는 주님, 오늘 하루도 나와 함께 하소서.’
호크마 주석
=====3:31
다윗이 요압...백성에게 이르되 - 이처럼 다윗이 아브넬을 죽인 요압조차 아브넬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애통캐 한 것은,아마 그로하여금 자신의 행위를 반성케 하기 위함에서였을 것이다(Matthew Henry,Pulpit Commentary).그런데도 이후 요압이 이번 경우와 유사하게 아마사마저 살해한 것으로 보아(20:9,10),요압이 자신의 죄악을 전혀 회개치 아니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 히브리인들이 극한 슬픔을 표출하던 전형적 방법이다.1:2 주석 참조.
다윗 왕이 상여를 따라가서 - 여기서 다윗이 특별히 '왕'으로 언급되고 있음에 유의하여야 한다.즉 다윗이 왕의 신분으로서 마치 자신이 상주(喪主)인 양 아브넬의 장례식을 주도하며 상여 뒤를 따라간 것은 곧 아브넬의 장례식의 국장(國葬)으로 치뤄진 것을 의미한다.그러면 다윗이 이처럼 아브넬의 장례식에 특별히 신경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그것은 곧 백성들의 의혹을 불식(拂拭)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즉 아브넬의 죽음은 다윗이 요압과 짜고서 행한 짓으로 오해받기 충분하였다.때문에 다윗을 불신한 이스라엘 지파들은 다시금 이스보셋과 결탁할 가능성이 있었다.그러므로 다윗은 아브넬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함으로써,그의 죽음이 자신과는 무관함을 백성들에게 보이고자 했던 것이다(37절).
=====3:32
무덤에서 소리를 높여 울고 - 히브리인들에 있어서 애곡(哀哭)은 장례식의 첫째 요건이었다.왜냐하면 이는 자연스러운 슬픔의 발로이자 죽은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 였기 때문이다.따라서 상주나 친족 뿐 아니라 모든 문상객들 역시 빈드시 애곡을 하여야 했다.본문에서 아브넬의 장례식에 참석한 다윗과 모든 백성이 애곡한 것도 이와 같은 풍습의 하나였다.그런데 이러한 풍습은 훗날 소위 직업적인 호상인(護喪人),즉 '애곡하는 여인들'을 생기게 하였다(대하 35:25;전 12;5;렘 9:17;암 5:16;마 9:23).
=====3:33
애가를 지어 가로되 - 여기서 '애가'는 '죽은 자를 애도하는 노래',즉 '키나'(* )를 가리킨다.1:17 주석 참조.
미련한 자의 죽음 같은고 - 이스라엘의 총사령관이자 실권자인 아브넬이 요압에게 살해된 것은 그의 명성에 걸맞지 않는 크나큰 과오라는 뜻이다. 즉, 블레셋과의 수많은 전투에서 생존한 그가 요압의 얕은 꾀 하나 짐작하지 못하고 죽은 사실에 대해 다윗은 놀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놀라움 때문에 다윗은 아브넬을 '미련한 자'에다 비유한 것이다. 한편 공동 번역은 본절을 보다 의역(意譯)하여 '어이없이 개죽음을 당하다니'로 번역하고 있다.
=====3:34
네 손이...채이지 아니하였거늘 - 본절의 의미에 대하여서는 학자들 간에 견해를 달리한다. 그중 하나는 이 말이, 요압이 아브넬을 살해할 당시 아브넬은 요압의 공격을 충분히 방어할 수 있을 만큼 자유스러운 상태에 있었음을 의미한다는 견해이다(Lange). 두번째 견해는 아브넬이 아사헬을 죽인 행위 (2:23)로 인하여서는 결코 포박당하거나 투옥되지 아니하였음을 뜻한다는 견해이다(Keil & Delitzsch,Pulpit Commentary). 이 중 그 어느 견해를 취하여도 전체 문맥에는 별 지장이 없다.다만 이는 아브넬이 의외의 죽음을 당하였음을 강조하는 데 그 의지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불의한 자식의 앞에 엎드러짐 같이 - 원문에서 '불의한 자식'은 복수형인 '불의한 자식들'로 되어 있다.한편 여기에서 '불의한 자식들'은 강포,폭행을 일삼는 자들을 의미한다.따라서 본절은 아브넬이 그와 같은 무리들로부터 폭행을 당하여 죽은 것처럼 비참하게 살해 당했다는 뜻이다.
=====3:35
다윗에게 음식을 권하니 - 이 말은 백성들 각자가 다윗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음식을 가져왔다는 말이 아니다.대신 이는 그 당시의 풍습을 보여 주는 말로서,장례식 이후에 참석자들을 위해 마련한 음식(렘 16:7;겔 24:17,22;호 9:4)을 백성들이 다윗에게 권했다는 뜻이다(Lange,Pulpit Commentary).
내가...떡이나 다른 것을 맛보면...마땅하니라 - 다윗이 이처럼 금식(禁食)을 단행한 것은 애도를 표하기 위함이었다.즉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을 애도하여 저녁 때까지 금식했던 것과 마찬가지로(1:12),아브넬을 위해서도 금식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3:36
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며 - 아브넬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는 다윗의 행동을 본 백성들이,그제서야 다윗이 요압과 결탁하여 아브넬을 죽였을 것이라는 의혹을 푼 것을 뜻한다(37절).그리하여 다시금 백성들이 다윗을 신뢰하며 호의(好意)를 갖게 된 것을 의미한다.이처럼 다윗의 진실된 행동은 오히려 위기를 극복하고 온 백성들의 마음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여기서 우리는 진실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깨달을 수 있다.그리고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는 진리(롬 8:26)또한 확인할 수 있다.
=====3:37
이 날에야...아니라 - '이 날에야'라는 말은 이전에는 백성들이 아브넬을 살해한 범인으로 다윗을 의심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 - 이 말은 지금까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유다 지파까지도 다윗을 의심했음을 나타낸다.그런데 이러한 이스라엘 온 백성들이 이제 다윗 왕을 믿게 된 것은,다윗의 논리적인 말이나 권모 술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그의 진실된 행동으로 말미암은 것이다(36절 주석 참조).
=====3:38
이스라엘의 방백이요 또는 대인 - 여기서 '방백'에 해당하는 '사르'(* )는 간혹 '왕'을 뜻하기도 하지만(시 45:16;사 9:6;단 8:25),대게는 군대 장관(단 10:13)이나 한 성읍의 최고 지배자(10:3;삿 8:6;에 3:12)를 가리키는 말이다.그리고 '대인'에 해당하는 '가돌'(* )은 '위대한 자'란 뜻이다.그런데 공동 번역은 이 두 단어를 합하여 '위대한 장군'으로 번역하고 있다.아무튼 다윗이 아브넬을 가리켜 이처럼 칭한 까닭은 그가 막강한 군사력을 거느리고 있던 이스보셋의 군장(軍長)이었을 뿐 아니라,통일 이스라엘 왕국 건설에 조력하였던 자였기 때문일 것이다(Lange).
=====3:39
내가...약하여서 - 이는 아마 다윗이 아직 유다 한 지파의 왕으로써 통일 왕국을 이루지 못한 상태일 뿐 아니라(2:1-4), 적대 세력인 이스보셋 정권도 존속하고 있음(2:8-10)을 염두해 둔 말일 것이다.
여호와는...그 악한대로 갚으실지로다 - 이처럼 다윗이 아브넬 살해 사건을 보고 받자마자(28절) 즉시 요압을 처벌하지 않고 대신 하나님께 심판을 맡긴 까닭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즉 (1) 군장으로서 요압이 지니고 있던 강력한 세력때문, (2) 그를 처벌할 경우 발생할지도 모를 유다 지파의 내분 때문, (3) 전 이스라엘의 통일에 있어서 요압과 같은 용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상의 이유들 때문에 다윗이 처벌을 일시 유보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해서 요압을 사면(赦免)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다윗은 죽기 전 솔로몬에게 유언하기를, 끝내 회개치 않고 왕국에 대한 반역 행위를 계속 저질렀던 요압을 처형토록 지시하였기 때문이다(왕상 2:5,6).
< 설 교 >
억울한 일을 당하셨습니까?
삼하 3:31-39
우리 속담 중에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이 있습니다. 법대로 처리하는 것보다 폭력으로 해결하는 게 더 빠르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이것이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법대로 처리해야 합니다. 법대로 처리하면 시간이 더 많이 걸리고 심지어 법이 억울한 것을 다 해결해주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폭력으로 처리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나도 법을 어기는 악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가르치십니까? 예수님은 법을 지키는 것보다 더 엄격한 교훈을 주십니다. 마태복음 5:40입니다.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다른 사람이 거짓송사로 내 속옷을 뺏으려고 해도 법대로 소송해서 싸우지 말고 오히려 양보해주라는 뜻입니다. 누가 내 오른편 뺨을 치면 어떻게 하라고 하십니까? 폭력으로 갚거나 법에 호소하지 말고 왼편 뺨도 돌려대라고 하십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가르치셨을까요? 예수님은 우리가 법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려고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 다 맡기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대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내가 손해를 당해도 이웃의 유익을 위해 양보해주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웃에게 자꾸 맞는 것이 이웃을 더 악하게 만들어 이웃에게 해가 된다면 때리지 말라고 권해야 합니다. 또 이웃이 약한 자를 때리면 맞는 사람이나 때리는 사람을 위해 때리지 않도록 권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문자적으로 무조건 양보만 하라는 뜻이 아니라 이웃의 입장을 생각하며 이웃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양보해주는 참 사랑의 삶을 살라는 뜻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가 주먹을 의지하지 않고, 심지어 법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오늘 다윗도 이런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아직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지 못하고 유다지파만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는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다윗의 군대장관은 요압이고 이스보셋의 군대장관은 아브넬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보셋의 진영에서 이스보셋왕과 군대장관 아브넬이 다투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 후 아브넬이 다윗을 찾아와 항복하기로 하고 돌아갔습니다. 다윗은 아브넬을 평안히 보냈지만 요압이 아브넬을 죽였습니다. 전에 아브넬이 요압의 동생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평안히 보낸 아브넬을 요압이 죽였기 때문에 무척 분노했습니다. 더욱이 다윗은 아주 난처해졌습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은 다윗이 아브넬을 죽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요압을 처벌하면 나라의 법도 바로 세우고 백성의 오해도 풀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압의 세력이 너무 커서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어떻게 합니까? 아브넬에 대해서는 후하게 장사지내줌으로써 자기 마음도 달래고 백성의 오해도 풀었습니다. 그리고 요압에 대해서는 직접 벌하지 않고 하나님이 벌해주시기를 바라는 기도만 드렸습니다. 본문 3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사실 다윗은 백성의 존경을 받는 왕이었습니다. 요압을 처벌하려면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압의 세력이 워낙 막강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나라에 큰 손실이 생겼을 것입니다. 내전이 일어나서 백성이 큰 해를 당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 힘을 의지하지 않고 법에 정해진 왕의 권위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로 악이 제거되고 나라가 바로 서게 되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결국 요압이 어떻게 됩니까? 다윗이 죽고 솔로몬이 왕이 된 후 요압은 다른 죄를 지어 처벌을 받습니다. 다윗은 나라의 평화를 위해 하나님의 역사를 의지하고 이렇게 오래 참은 것입니다. 얼마나 훌륭한 믿음입니까?
우리도 이런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도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시지요. 세상에서도 그렇고, 교회에서도 그렇고, 심지어 가정에서도 그럴 때가 있지 않습니까? 이럴 때 얼마나 속이 상하십니까? 힘이 없으면 힘이 없어서 속이 상하고, 힘이 있으면 힘이 있는데도 대응하지 못해서 속이 상하시지요. 여러분 아무리 억울하고 속이 상해도 폭력으로 대항하지는 마십시오. 물론 법에 고발하는 게 필요한 경우도 있겠지만 될 수 있는 대로 법에도 고발하지 말고 참으십시오.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다윗은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악한 자들을 하나님이 그 악한 대로 갚아주시기를 바란다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평생 요압의 방자한 행동을 보면서도 참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다윗은 나라를 평화로 지켰고 위대한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압은 솔로몬 때에 처벌을 당했습니다. 정말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결국 하나님이 최선의 처리를 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 권세를 굳게 믿고 어떤 어려움이나 억울한 일을 당해도 꿋꿋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 방법대로 살아서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드리고 우리 자신도 큰 축복과 상급을 받게 되기 바랍니다.
리더에게 필요한 덕목
삼하 3:31-39 / 이한규목사
< 온유한 리더가 진짜 강자다 >
주후 642년에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영류왕과 100여명의 귀족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그때 왕의 시체를 토막 내어 시궁창에 버렸고 귀족들을 짓밟아 죽이는 잔인한 행동까지 했다. 백성들은 겁에 질려 바짝 엎드렸다. 그러면서 “와, 멋지다. 보스 기질이 있다.”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속으로는 잔인무도한 사람이라고 비웃었다. 주변 나라들은 더 비웃었다.
연개소문의 칼로 정쟁은 사라졌지만 그 후 생겨난 공포의 침묵은 정치의 효율성과 국가의 활력을 떨어뜨렸다. 연개소문은 군사와 전쟁 전술은 탁월했지만 인재 활용과 국가 경영 능력은 부족해서 경제가 어려워졌다. 그에게는 이성계처럼 이방원 같은 아들이나 정도전 같은 신하가 없어서 정치력 부재로 인해 민심 수습을 잘 하지 못했다. 그런 자기 한계를 알고 칼 정치를 그만두고 싶어도 칼로 정권을 잡았기에 칼을 놓으면 자신이 칼을 맞으니까 계속 칼 정치를 하면서 국력은 점차 약해졌다.
더 큰 문제는 외교적인 고립이었다. 연개소문의 쿠데타 소문은 당나라에도 널리 퍼졌고 고구려의 실권자가 잔인하고 폭력적인 마왕처럼 소문나서 대외 문화 교류가 크게 위축되었고 무역상들조차 고구려와의 거래를 꺼려했다. 점차 대외무역 악화로 경제가 더 나빠지자 연개소문의 쿠데타를 속 시원하게 여긴 사람들조차 점차 돌아섰고 당나라를 물리칠 정도로 강했던 고구려의 국력은 더 약해졌다. 그런 민심 이반과 연개소문 아들들의 권력 투쟁으로 인한 내분으로 결국 고구려는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힘과 폭력이 아니다. 권력자가 힘과 폭력을 앞세워 대중을 겁박하며 정치하면 사회가 일사불란하게 더 발전하고 번성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또한 권력자가 힘을 과시하면 사람들이 자신을 멋지게 여길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앞에서는 고개를 숙여도 속으로는 그 폭력성을 비웃는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저렇게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는 소통하거나 상대하거나 교류하고 싶지 않다.”
고려 때 무신정변 후에도 비슷한 결과가 생겼다. 당시 왕은 허수아비였고 무신들이 서로를 죽이며 100년간 무신정권이 지속되었다. 당시 실권자들은 상대를 제압하는 싸움 전술은 가졌어도 사려와 지혜와 교양은 부족했고 국가 운영 능력은 더 부족했다. 게다가 힘으로 정권을 잡을 때 곧 따라오는 민심 이반을 틈타 몽골의 반복된 침략이 시달렸다. 그때도 지식수준과 문화수준은 크게 후퇴했고 고려의 국력도 급격히 쇠퇴했다. 힘에 의한 정치는 처음에는 시원하고 잘 굴러가는 것 같지만 금방 한계에 도달한다.
결혼 중매 얘기가 오갈 때는 대개 상대의 가정도 살핀다. 그때 부모가 무속 종교에 빠져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그 자녀의 혼사가 막힌다. 자녀도 그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결국 부모가 잘못된 길로 가면 수치와 불행은 자녀 몫이 된다. 혼사를 논할 때 가장 꺼려하는 가정은 상대 가장이 폭력적이라고 소문난 경우다. 가장의 폭력적인 이미지는 혼사의 논의조차 막는다. 그런 가정과 사돈이 되면 같이 격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반면에 가장의 인격적인 이미지는 혼사 논의를 활발하게 만든다. 그런 가정과 사돈이 되면 같이 격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이 힘을 앞세우는 폭력적인 사람으로 소문나면 그 국민과는 문화 교류나 무역거래도 하고 싶지 않고 국제결혼 대상으로도 삼고 싶지 않다. 같이 어울리면 같이 못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교가 고립되고 무역수지가 악화되고 상황이 심각해지면 민심 이반을 틈타 외세의 침공을 받는다. 결국 대통령이 잘못된 길로 가면 수치와 불행은 국민 몫이 된다. 리더가 인격적이냐 폭력적이냐 하는 문제는 공동체의 운명을 좌우한다. 리더가 남들에게 폭력적인 이미지로 각인되면 공동체는 큰 불행에 처한다.
다윗이 왜 훌륭한 인물이 되었는가? 그는 탁월한 싸움 실력을 가진 강한 용사였지만 따뜻하고 인격적인 사람이었고 특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강한 용사였지만 눈물도 흘릴 줄 알았다. 그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 아니라 의를 위해 피와 눈물을 흘릴 줄 알았고 약자를 품어 주는 따뜻하고 인격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온유와 배려를 앞세운 리더십과 매력이 사울의 나라를 다윗의 나라로 만든 요소였다.
< 리더에게 필요한 덕목 >
사울이 죽은 후 이스라엘은 다윗 편과 사울의 아들인 이스보셋 편으로 갈렸다가 점차 다윗 편은 강성해지고 이스보셋 편은 약해졌다. 다윗의 선한 리더십 때문이었다. 다윗의 삶이 주는 교훈으로서 리더의 복을 얻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1. 진실
당시 다윗 세력이 점점 강성해지자 이스보셋의 군대장관 아브넬은 대세를 읽고 다윗에게 나라를 넘기려고 다윗을 방문했다. 그때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이 동생의 죽음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으로 아브넬을 죽었다. 한참 민심을 얻던 다윗에게 아브넬의 죽음은 민심을 이반시킬 될 수 있었다. 그러자 다윗은 요압과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에게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그 앞에서 애도하라고 했고 자신은 그의 상여를 따라갔다(31절). 그것은 다윗이 상주처럼 행동했다는 말로서 장례를 국장으로 치렀다는 뜻이다.
그때 다윗이 아브넬을 헤브론에 장사하고 그 무덤 앞에서 소리를 높여 울자 백성들도 다 울었다(32절). 또한 아브넬을 위해 애가까지 만들어 낭독하자 백성들은 다시 슬퍼하며 울었다(33-34절). 그리고 석양에 백성들이 나아와 다윗에게 음식을 권했지만 다윗이 해 지기 전까지 금식하겠다고 했다(35절). 그러자 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면서 그때야 비로소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이 한 일이 아닌 줄을 알았다(36-37절). 큰 참사가 생겨 애도할 일이 있으면 힘써 애도해야 민심을 얻는다.
당시 아브넬이 갑자기 죽자 일부 백성들은 다윗 왕을 의심했지만 왕의 진실한 애도가 그 의심을 불식시키고 오히려 백성들의 민심을 얻게 했다. 결국 다윗이 백성들의 마음을 다시 얻은 것은 논리적인 말이나 권모술수나 위선이 아닌 진실의 힘이었다. 진실하게 살면 언젠가 진실은 드러나고 위기는 기회가 된다. 기독교에서 예언자란 미래를 아는 사람의 의미보다 진실을 아는 사람의 의미에 가깝다. 거짓과 진실을 분별하고 진실을 따라 진실하게 행하는 사람이 복된 리더가 된다.
2. 지혜
다윗은 아브넬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고 울고 애가까지 짓고 금식까지 했다. 그때 다윗이 실제로 아브넬의 죽음을 아쉬워했지만 백성들의 민심을 잃지 않으려고 지혜롭게 행동한 측면도 조금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민심을 잃지 않고 오히려 백성들이 다윗 왕을 더 존경하게 만들었다. 그처럼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지혜를 구하라. 윽박지르며 강하게 밀어 붙이면 일시적으로 원하는 것은 얻어도 결국 그 반작용으로 나중에 화를 입고 삶의 지혜도 얻지 못한다.
어느 날 가뭄으로 도토리 수확이 줄자 원숭이 농장주가 말했다. “원숭이들아, 이제부터 도토리를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 주겠다.” 원숭이들이 너무 적게 준다고 데모하자 농장주가 다시 말했다. “그러면 도토리를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 주겠다.” 그 말을 듣고 원숭이들이 만족했다. 그 얘기에서 조삼모사(朝三暮四)란 고사성어가 나왔다. 언뜻 보면 주인이 어리석고 순진한 원숭이들을 묘하게 가스라이팅한 것 같다. 그래도 원숭이들에게 윽박지르지 않고 지혜롭게 해결책을 찾으려던 주인의 모습만은 배울 필요가 있다.
가뭄 때에는 재화가 한정되어 누군가가 희생해야 문제를 해결될 수 있다. 그렇다면 기쁘게 희생할 길을 찾고 똑같은 환경에서도 다른 마음으로 그 상황과 환경을 받아들일 방법을 찾아 팔로워를 지혜롭게 이끄는 것이 리더의 할 일이다. 그때 무조건 자신이 원하는 방법대로 윽박지르며 강요하고 억지로 이해시키면서 끌고 가면 지혜가 깊어지지 않고 문제 해결도 멀어진다. 지혜를 구하고 찾고 지혜의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점차 지혜롭게 될 것이다.
3. 여백
다윗은 스루야의 아들들인 군대장관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를 바로 제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의 손길에 맡겼다(38-39절). 개혁과 정의의 칼날을 휘둘러 잘못된 사람을 무조건 제거하면 인간의 정의가 늘 흠이 있기에 나중에는 사회적 분열이란 더 큰 손실이 생긴다. 그러므로 때로는 역사의 순리와 역사의 승리를 믿고 부조리와 부정의에 대해 정의의 칼날을 휘두르려고만 하지 말고 기도의 손길을 모을 줄 알아야 한다.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살다 보면 가족처럼 가까울수록 결점도 잘 눈에 띈다. 그것을 즉시 없애려고 하면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더 많다. 그렇다고 그것을 그냥 계속 놔두고 볼 수는 없기에 기도가 필요하다. 원수 같은 사람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도 그 문제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적절하게 처리해 주실 것이다. 혼자 문제를 처리하려고 하면 하나님이 뒷짐 지고 계시지만 기도하면서 여백을 남겨두고 기다리면 하나님이 그 여백 중에 임하셔서 가장 멋진 역사를 만들어내실 것이다.
내가 남을 바로 처단하려고 하지 말고 여백의 마음으로 그를 대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나를 바로 처단하시지 않고 여백의 마음을 가지시고 오늘도 하루의 삶을 살게 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남에게 별로 인정받지 못해도 하나님은 “끝까지 너를 인정하고 기대하고 사랑하고 신뢰한다.”라고 말씀하신다. 그 하나님의 여백으로 인해 내가 오늘도 살아가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거침돌이 되는 사람에게 여백의 마음을 가지고 대하면 그에게도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지만 나부터 더욱 복된 존재로 변화될 것이다.
죽음이 어찌하여 미련한 자의 죽음 같은고
삼하 3:31-39 / 우인택 목사
오늘 본문은 아브넬의 죽음에 대한 다윗의 애도에 대한 기록입니다.
1. 먼저, 다윗은 아브넬의 죽음을 요압과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에게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애도하라”고 명령했습니다(31절). 그리고 그 자신이 상여를 따라가서 아브넬을 장사하고 백성들 앞에서 소리를 높여 울었습니다(32절).
다윗이 이렇게 행한 것은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오해할 소지가 너무나도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아브넬 살해 사건은 요압이 다윗의 사주에 의해 저지른 것처럼 오해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모처럼 일어난 화해의 분위기가 깨어질 수 있는 위기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이 분노하여 남쪽 유다를 대적하게 되면 또다시 전쟁의 위기 앞에 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적극적으로 자신이 아브넬을 살해한 것이 아님을 보였습니다. 당당하게 자기의 진심을 드러냈고, 진실에 근거해서 백성들 모두에게 애통의 시간을 가지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이렇게 행한 것은 단순히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이끌어 정치적인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요압의 아브넬 살해 사건이 불의한 일이었고, 그러한 일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세워져야 할 나라인 통일 이스라엘에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이 같은 이유로 백성들 모두가 가슴 아파해야 한다고 명령했습니다. 불의에 가슴 아파하지 않고서는 정의를 세울 수 없음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다윗과 같이 더 넓은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앞에 놓인 위기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한 하나님의 공의를 볼 줄 아는 영적인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할 때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오늘, 주어진 환경속에서 영적인 안목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 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33-34절에서, 다윗은 아브넬의 죽음을 애도하는 애가를 부릅니다. “아브넬의 죽음이 어찌하여 미련한 자의 죽음 같은고 네 손이 결박되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차꼬에 채이지 아니하였거늘 불의한 자식의 앞에 엎드러짐 같이 네가 엎드러졌도다”
여기에서 우리는 ‘미련한 자의 죽음 같다’라는 말에 교훈을 받게 됩니다. 아브넬은 군인이었습니다. 그것도 북쪽 이스라엘 군대의 총사령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살해를 당할 때 손과 발이 결박되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용맹하지 않아서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윗의 삼십 용사 중의 한 사람인 아사헬을 단번에 죽인 자였습니다.
그러한 그가 요압에게 살해를 당한 것은 깨어 경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불의한 요압의 칼에 허무하게 죽임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 허무한 죽음에 대해서 애가를 지었고, 이 노래로 아브넬을 애도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를 경성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이 애가는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마음에 새기고 불러야 할 노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탄과의 전쟁을 치르는 영적인 군사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항상 깨어 경계해야 합니다. 아브넬처럼 미련한 자처럼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항상 깨어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변에서 사탄의 교활한 공격에 허무하게 무너지는 아브넬과 같은 성도들을 보게 됩니다. 후와 탄식에 빠져 사는 성도들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무너진 것은 그들에게 사탄을 대적할 강력한 무기가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도라면 누구나 죄와 어두움을 이길 수 있는 강력한 무기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무너진 것은 깨어 경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방심하여 머리카락이 잘린 삼손과 같이 사탄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 경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어 우리를 미혹하는 죄에 대하여 경계의 태세를 높이고 우리를 향해 달려드는 어두움의 세력을 정확하게 분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의 나팔을 불 수 있음을 기억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35절에 “석양에 뭇 백성이 나아와 다윗에게 음식을 권하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들은 다윗은 “만일 내가 해 지기 전에 떡이나 다른 모든 것을 맛보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라며 자신의 슬픔을 보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아브넬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정치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다윗의 모습을 보며 36-37절에 “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며 왕이 무슨 일을 하든지 무리가 다 기뻐하므로 이 날에야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이 넬의 아들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이 한 것이 아닌 줄을 아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온 백성이 이를 보고 기뻐한 것은 다윗의 행위를 의심하다가 이제는 그 의심이 사라지고 백성들 모두에게 다윗을 향한 확고한 믿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은 39절에 다윗의 탄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 하니라”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 아뢰는 다윗의 이 탄식에서 우리의 탄식을 보게 됩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고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지만, 세상의 불의와 죄악을 바꿀 수 없는 한계를 우리 성도들도 날마다 체험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우리는 다윗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때로는 불의와 죄악으로 얼룩진 세상의 물결을 감당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뒤바꾸려 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한계를 날마다 경험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죄악의 물결을 거꾸로 뒤집을 수는 없다 해도 다윗처럼 그 물결을 거슬러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문제 앞에서 어찌할 수 없을 때, 다윗과 같이 정의를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아뢴다면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바르게 세우실 날이 반드시 오게 될 것입니다. 그날을 소망하며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진실한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앞에 놓인 위기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다윗처럼 그로 인한 하나님의 공의를 볼 줄 아는 영적인 안목을 가진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아브넬의 미련한 죽음을 바라보면서 항상 깨어 경계하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 죄악으로 얼룩진 세상속에서 믿음을 지키고 의로운 삶을 사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새벽예배 10분 설교
삼하 3:31-39 / by 김동희 목사
1. 사울왕이 죽은 뒤, 사무엘을 통해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예기치 않은 문제가 하나가 발생했습니다. 사울의 사촌이자 장군이었던 아브넬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새로운 왕으로 세운 것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나라는 둘로 갈리게 되었고, 유다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지파들은 자연스럽게 이스보셋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2. 이 분열은 곧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동족간에 벌어진 전쟁은 잔인하게 치러졌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죽고 말았습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이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였습니다.
3. 그런데 한가지 변수가 일어났습니다. 이스보셋과 아브넬이 갈등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울의 후궁을 범했던 아브넬을 이스보셋이 비난하면서 둘 사이는 크게 틀어져 버렸습니다. 두 왕의 전쟁 또한 점점 더 다윗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기에, 아브넬은 이스보셋을 배신하기로 결심했습니다.
4. 다윗은 아브넬의 전갈을 받고, 자기의 옛 아내이자 사울의 딸이었던 미갈을 다시 아내로 돌려받는 조건으로 그의 제안을 수락하였습니다. 사실 다윗에게도 나라의 통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기에, 아브넬의 제안을 매우 소중한 기회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훗날 나라가 통일 되었을 때 정통성 문제를 생각해서 미갈과 다시 결혼하게 해줄 것만을 요구한 것입니다.
5. 아브넬은 자기쪽에 있는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베냐민 지파 사람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동의를 얻어 다윗을 찾아갔습니다. 다윗은 그를 성대히 환영해 주었습니다. 이제 그 둘의 약속은 거의 이루어질 것처럼 보였습니다.
6. 그런데 이 일은 다윗의 장군이었던 요압이 망쳐버렸습니다. 요압에게 있어 아브넬은 동생 아사헬을 죽인 철천지 원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다윗 또한 심정적으로는 아브넬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나라를 분열시킨 장본인이요, 배신과 탐욕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통일을 위해 이러한 마음을 꾹 누르고 끝까지 아브넬을 귀하게 대접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압은 이러한 대의에는 관심이 없었고, 분노와 미움에만 집중하였습니다. 요압은 아브넬을 다시 불러들여 칼로 찔러 죽여버렸습니다.
. 이 일은 매우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지금껏 만들어 놓은 협상이 무너질 뿐 아니라, 나라의 분단이 완전히 고착화 되어버릴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양측의 전쟁은 더욱 감정적으로 치달을 것이 뻔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다윗의 리더십은 큰 손상을 입을뿐더러 궁극적으로는 주변 국가들이 계속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노리는 상황 속에서 민족 전체가 망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8. 다윗은 이 상황을 온 마음을 다해 수습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은 요압을 비롯하여 자기와 함께 있는 온 백성에게 명령하였습니다. "백성은 옷을 찢고, 허리에 굵은 베 옷을 두른 뒤에, 아브넬의 상여 앞에서 걸어가면서 애도하여라." 그리고 다윗 왕도 몸소 상여를 뒤따라갔습니다. 모든 백성이 아브넬을 헤브론에 장사지내니, 다윗 왕이 아브넬의 무덤 앞에서 목을 놓아 울었고, 온 백성도 울었습다. 다윗은 아브넬을 위해 조가를 지어 그 슬픔을 표현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해가 지기 전까지 모든 음식을 그치고 자신의 슬픔을 표현하였습니다.
9. 이 모든 일은 베냐민 지파와 아브넬을 따르던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심지어 자기의 왕권이 약해 요압을 통제하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고백까지 하였습니다. 다윗은 이 일이 자기와는 조금도 상관이 없는 일이며, 오히려 나는 아브넬을 이처럼 아끼고 귀하게 여겼다는 것은 온 천하에 드러낸 것입니다. 다윗은 이 모든 것을 통해 나라가 더 이상 분열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10. 다윗이 아브넬과 더불어 밀약을 맺고,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자기 모략와 정치적 술수로 모든 일을 처리하려고 했던 것은 큰 실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진정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다윗의 동기를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을 헤아리시사, 그의 실수가 더 이상 그를 흔들지 않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우리는 항상 주님의 뜻을 구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동시에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진실로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둘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웃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아갈 때, 주님은 그것을 귀히 여기시고, 그 마음을 통해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모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다윗의 지도력
사무엘하 3:31-39
지난 시간에는 동생의 복수를 위해 아브넬을 헤브론성에서 죽인 요압이 다윗으로부터 저주를 받는 내용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다윗이 아브넬을 죽인 요압의 행위에 대해 저주를 한 것은 단순히 살인죄에 대한 저주라기보다는 헤브론 성, 즉 도피성에서의 악한 행동에 대한 저주였습니다. 도피성은 살인자가 피하여 목숨을 부지할 수 있도록 규례를 세워 놓으신 성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살인자까지도 살리시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 인해서 살아가고 있음을 도피성 규례를 통하여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도피성에서의 복수 행위는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부인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저주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부인한다는 것은 말로써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외치는 것만이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입술로는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나 그 행위가 입술의 고백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 깊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니까 나는 예수를 믿는 신자다’고 여기고 안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입술의 고백은 있지만 그 행위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항상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에 대한 고백과 함께 모든 것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정신에 부합된 길을 가야합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내 스스로 나의 고백을 뒤집는 삶을 반복할 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끊임없이 나 자신이 요압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경계해야 할 것이고 살피며 점검하는 삶을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증인으로 부름 받은 신자로서 증인다운 삶을 위해서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신자가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에 부합된 길을 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신자 자신이 말씀에 의해서 다스림 받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이 나를 다스리고 지배하는 삶이 되지 못한다면 결국 우리는 우리의 뜻과 고집을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39절에 보면 다윗은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날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대로 갚으실찌로다 하니라”는 말을 합니다. 왕 다윗도 다스릴 수 없을 정도로 요압의 형제가 강한 세력을 가진 자로 군림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말입니다.
요압은 다윗의 신하입니다. 그런데 아브넬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환송해준 다윗을 찾아와서 다윗의 어리석음을 말하면서 불평을 하는 것을 보면 요압은 자신의 힘과 세력을 믿고 다윗에 대해서도 아무런 두려움이 없이 대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넬이 이스라엘의 왕인 이스보셋을 대하는 태도와는 같지 않았을지라도 왕에 대해 경시하는 마음은 있었다고 보여지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감히 왕에게 그러한 태도를 보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윗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나도 힘이 있다’는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오랜 세월 다윗과 함께 하면서 그를 도와줬다는 자신의 공로가 앞섰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요압은 다윗에게 순순히 복종하는 인물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따라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다윗이 강력한 힘을 가진 왕이었다면 요압도 함부로 행동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다윗이 환송하여 보내준 아브넬을 다시 붙잡아서 죽인다는 것은 왕권에 대한 도전과도 같은 것인데 다윗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면 어찌 그런 악행을 스스럼없이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것을 두고 다윗의 지도력에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할까요? 왕이 왕다운 강력한 지도력을 보이지를 못하고 약한 모습을 보여주니까 신하인 요압이 다윗에 대해 불평을 하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였다고 판단해도 되는 것일까요?
이스라엘을 이방 국가와 같은 존재로 본다면 다윗의 지도력을 문제 삼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대통령의 지도력에 대해 많은 문제를 삼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방나라와 다르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은 힘으로 존재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존재 방식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하고 은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방 나라는 힘의 나라입니다. 힘으로 존재하고 힘있는 자가 군림하도록 되어 있는 힘이 질서인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이방 나라는 힘있는 자를 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힘은 오직 힘에 대해서만 굴복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방나라의 왕은 강력한 힘이 있어야 합니다. 힘으로 힘을 통제하고 다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역시 힘이 질서인 힘의 나라입니다. 힘이 국가를 통치하기 때문에 강력한 지도력이 없는 대통령에 대해서는 요압과 같은 태도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대로 이스라엘은 힘의 나라가 아니라 은혜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하고 있음을 증거함으로써 하나님을 드러내어야 할 나라로 세워진 것입니다. 다윗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모든 관심을 하나님께 두고 있었던 것이지 이스라엘을 자신의 소유화하여 지배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었던 것입니다.
요압이 아브넬을 죽였을 때 다윗은 “넬의 아들 아브넬의 피에 대하여 나와 내 나라는 여호와 앞에 영원히 무죄하니”(28절)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혹 요압의 죄가 자신에게 돌아올 것을 염려하여 발뺌을 하는 의도의 말이 아니라 항상 여호와 앞에서 무죄한 자로 존재하기를 원하는 다윗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즉 다윗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말인 것입니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결정적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을 살려준 것 역시 항상 여호와 앞에서 무죄한 자로 살기를 힘쓰는 다윗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 즉 지도자는 강력한 통치력을 가진 힘있는 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다윗처럼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왕이 필요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국가이며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서의 왕의 역할은 백성들의 마음이 항상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도록 지도하고 돕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현 사회에서 말하고 요구하는 지도자와는 그 의미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카리스마’라는 말을 들어왔을 것입니다. ‘저 사람은 카리스마가 있다’는 말을 많이 하고 있는데, 어떤 단체든 그 단체를 이끌기 위해서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를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카리스마’라는 말에 대해 많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카리스마’란 용어는 본래 기독교적 용어로서 ‘은혜’ ‘무상의 선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거두어 가지 않는 하나님의 선물을 뜻하기도 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저 베푸신 은총의 선물을 뜻하기도 하는 말입니다. 즉 성령의 특별한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은혜로 생활하는 모든 신자들에게는 ‘카리스마’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용어를 독일의 사회과학자인 M.베버라는 사람이 사회과학의 개념으로 확립시켜 버린 것입니다. 즉 보통의 인간과는 다른 뛰어난 재능이나 힘을 이렇게 부름으로써 카리스마를 뛰어나고 힘있는 자에 대한 복종의 의미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서 은연중 타인을 압도하는 듯한 느낌이 주어질 때 그를 ‘카리스마’있는 사람으로 말하면서 스스로 그에게 복종하는 자세를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지도자에게 카리스마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 역시 다를 바 없습니다. 현대 교회는 교회의 목회자에 대해서도 ‘카리스마’를 요구하기도 합니다. 강한 지도력으로 교회를 이끌어 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회가 질서가 있고 성장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에서 목회자란 교인들의 중심적 위치에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위치에 있는 목회자가 연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목회자에 대한 복종보다는 무시가 나오게 될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요압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외적으로 보면 교회가 질서가 없어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현대 사회가 이해하는 그러한 카리스마적인 힘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백성들을 권력으로 복종케 하고 강포로 다스리지 않은 것입니다. 다윗은 오직 ‘나와 내 나라’즉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무죄하기를 힘썼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지배 법칙인 은혜와 긍휼과 자비하심을 나타내기에 힘썼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스라엘에 요압 같은 자가 존재했던 것입니다.
요압은 도피성에서 복수를 행할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두지 않은 사람입니다. 모든 일을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힘으로 사는 사람은 약자에 대해서는 자신의 힘을 내세우려고 하고, 강자에 대해서는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께 악행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힘없는 약한 자인 다윗이 문제입니까? 아니면 힘없는 약한 왕이라고 해서 무시하면서 마음껏 불평하고 복수의 감정을 드러내며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하는 요압이 문제입니까?
왕이기 때문에 강력한 통치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에서는 필요치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강력한 통치력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강한 통치력이 없다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제어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어떤 경우에 이스라엘 백성이 다윗에게 제어를 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다윗처럼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해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살려준 것은 그 중심이 하나님을 향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그 중심이 하나님을 향해 있다면 사울을 살려준 다윗의 행위를 정당한 것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중심이 있지 않다면 자신을 해하려고 하는 사울을 죽이지 않는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단지 사람 좋은 다윗으로만 보여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아브넬을 환대하고 보내준 것은 둘로 나누어진 나라가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세워지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겼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즉 아브넬에 대한 개인적 감정이 우선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 우선되어졌기에 아브넬을 환대하고 돌려보낸 것일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요압은 하나님을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먼저 앞세운 것입니다. 아브넬과의 감정적 관계에서 다윗의 행위를 보니 불평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다윗에게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따라 행동하는 요압은 참으로 제어하기 어려운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압과 같은 존재가 오늘날 교회 내에도 있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의 욕망과 감정과 생각에 따라 행동하는 그들이 참으로 제어하기 어려운 요압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말씀이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관심사가 아니기에 교회에서 선포되어지는 말씀에 대해서도 복종할 의도를 전혀 갖지 않고 있습니다.
목사의 말이 복음을 기초로 한 것이라면 그 말에 순종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주님을 주인으로 섬기고 주인 되신 예수께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의 말이 복음에 일치되는 것인가에는 상관없이 다만 자신의 생각에 맞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불평을 하고 반대를 한다면 그것이 곧 요압 같은 모습이고 이러한 사람은 참으로 제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만나는 관계가 유지될 때 교회다움이 증거 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행동하고 있음을 백성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다윗에 대한 신뢰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넬이 죽은 사건으로 인해 백성들이 혹 자신을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요압과 백성들에게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아브넬 앞에서 애통하라고 지시한 후에 아브넬을 장사하고 그를 위해 애가를 지어 부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음식을 권했을 때 “내가 해 지기 전에 떡이나 다른 것을 맛보면 하나님이 내게 벌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35절)고 하자 다윗의 진심을 알게 된 “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며 왕이 무슨 일을 하든지 무리가 다 기뻐하므로 이 날에야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이 넬의 아들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의 한 바가 아닌 줄을 아니라”(36-37절)고 하게 된 것입니다. 온 백성이 다윗의 마음을 알게 되고 그를 신뢰하고 그의 말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며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목사는 ‘나와 내 나라는 여호와 앞에 무죄하다’는 다윗의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순전한 교회로 세워지기를 위해 모든 힘을 기울이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오직 이것이 중심이 되어 서로 신뢰하는 관계로 굳게 설 때 말씀 안에서 만나는 관계가 되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때로 어려운 것은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운 요압과 같은 존재가 있을 때입니다. 말씀에 복종하기보다는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그들은 참으로 어렵다 할 수 있습니다. 목사의 지도력은 힘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사랑과 긍휼이 그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앞서 말한 목사의 카리스마이고 여러분의 카리스마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약해보인다고 해서 무시한 것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지 않습니까? 세상적으로는 약한 모습의 예수님이셨지만 우리는 그분 앞에서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잘난 것이 전혀 없는 악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이라면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다스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이 강력한 통치력으로 여러분을 제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 앞에 이런 신자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런 존재로 살아가는가는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선포될 때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제어하는 강력한 힘은 오직 복음뿐입니다. 복음에 의해 제어 받고 살아가는 그가 곧 그리스도의 사람이고 신자인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갚으시리라
삼하 3:31-39 / 푸른교회
<다윗이 요압과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아브넬 앞에서 애도하라 하니라 다윗 왕이 상여를 따라가 ... 무덤에서 왕이 소리를 높여 울고 백성도 다 우니라 왕이 아브넬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이르되 ...>(31-33절).
다윗이 왕의 신분으로 마치 자신이 상주인 양 아브넬의 장례식을 주도하며 상여 뒤를 따라가 무덤 앞에서도 크게 울고 심지어는 애가까지 지어 부른 것은 당시 아브넬의 장례가 국장으로 치러진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지금까지 반역자 노릇을 해온 아브넬의 장례식에 그토록 지대한 관심과 정성을 쏟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백성들의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즉 다윗이 요압과 짜고 고의적으로 행한 살해였다는 오해를 살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다윗을 불신하는 지파들이 다시 이스보셋을 중심으로 뭉칠 수 있었으므로 아브넬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함으로써 그의 죽음과 자신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백성 앞에 증명해 보이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날에야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이 넬의 아들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이 한 것이 아닌 줄을 아니라>(37절). 이것은 그 사건으로 백성들이 다윗을 더욱 신뢰하며 더 큰 호의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다윗의 진실한 행위가 오히려 그 위기를 극복하고 온 백성들의 마음을 더 널리 사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진실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거듭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진리(롬 8:26)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반면 요압은 어리석어서 역사의 겉모습만 보고 그 내면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읽어내는 능력이 형편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과오를 거듭했고, 또 다시 치명적인 덫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왕이 그의 신복에게 이르되 오늘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큰 인물이 죽은 것을 알지 못하느냐 ...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대로 갚으실지로다 하니라>(38-39절).
다윗이 즉각 요압을 처벌하지 않고 하나님께 그 심판을 맡긴 것은 군대장관으로서의 그의 세력 때문이고, 그를 처벌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유다 지파의 분열을 우려해서였지만 그렇다고 그를 사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죽기 전 솔로몬에게 유언하며 요압의 처형을 당부했기 때문입니다(왕상 2:5-6).
<적용>
-아브넬의 장례를 통해 본 다윗의 정치적 처신에 관해 간략히 적어 보십시오.
-다윗이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렵다>(29절)고 했던 스루야의 아들들은 누구를 가리킨 것입니까?
-다윗이 솔로몬에게 요압에 대한 처형을 당부한 열왕기상 2:6 말씀을 찾아 적어 보십시오.
<기도>
주님, 아브넬의 죽음에 대한 다윗의 반응과 그의 장례식에 임하는 다윗의 태도는 지나칠 정도로 극진했고, 반면 요압에 대한 분노는 지나칠 정도로 집요하여 유언으로까지 그의 응징을 당부했을 정도였습니다. 어쨌든 아브넬은 돌이켰고, 요압은 끝까지 자신의 행위를 회개할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오늘 다윗의 이런 모습에서 주님의 성품과 뜻을 읽을 줄 아는 저희들 되게 해주시옵소서.
진실하게...
삼하 3:31 – 39 / leeapostle
오늘 본문은 어제 묵상한것처럼 다윗의 중심이 드러난다.
아브넬의 죽음앞에서 다윗은 애도했고 또 진실되게 그의 중심을 보여주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39절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악을 갚으실 것이라는 믿음때문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와닿은 모습은 진실됨이었다.
그는 진실되게 아브넬을 위했다.
그의 고백 속에서 사실 첨엔 정말 아브넬이란 사람이 저런 인물인가...?하는 의문점도 가졌지만 적어도 그의 고백이 참되다는 것은 느껴졌다.
아마도 이 고백이 하나님앞에서의 고백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된다.
나도 하나님앞에서 진실한 삶을 살아가길 소망한다.
사실 진실하게 나아가건 아니건 간에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만 그 주님을 속이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자.
모든 것을 보고 계시기에 정말 솔직함으로 정직함으로 나아가는 오늘 하루가 되어지자.
바로 이 진실됨에는 오늘 다윗이 보여준 것처럼 먼저는 하나님께 진실됨을 보이는 것이고 나아가 사람앞에서도 진실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 모습과 힘으로는 절대로 진실될 수 없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이 나를 붙들어야 한다. 그래서 그 모습이 모두에게 보여질 수 있도록 나아가자.
'36 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며 왕이 무슨 일을 하든지 무리가 다 기뻐하므로...'
진실됨의 결과는 나에게 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린다...^^
아브넬의 죽음을 애도하다
삼하 3:31-39 / 김정우 교수
전쟁의 상흔들
나는 내 인생에 긴 쉼표를 만들기로 했다. 나는 헤브론에서 남 유다의 왕이 되었지만 내가 주도적으로 남북통일을 할 생각이 없었다. 나는 우리 나라의 역사를 능동적으로 열어가기보다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통일을 향한 역사가 스스로 펼쳐지도록 기다리기로 하였다. 다만 헤브론에서 나의 집안을 두루 보살피며 여섯 아내에게서 여섯 아들을 낳고 기르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삼하 3:2-5). 그러던 어느 날 사울 왕의 군대장관이었고 현재 북이스라엘의 사실상 실권자인 “넬의 아들 아브넬”이 사신들을 보내어 그와 언약을 맺고 이제 남북통일을 함께 이루어 보자는 뜻밖의 제안을 하였다(삼하 3:12). 나는 지난 7여년동안 “피흘림이 없는 평화통일”을 위하여 기도하며 기다려 왔으므로 드디어 때가 왔다고 믿고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만 나의 첫 아내 미갈을 내게 먼저 보내어 주어야 한다는 조건만 달았다(13절). 내가 “사울의 딸 미갈”을 요구한 것은 그에 대한 사랑보다는 사실은 나의 차가운 정치적 계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현재 미갈의 남편이 된 “발디엘”은 “바후림까지 울면서 미갈과 함께 왔다”고 한다(16절). 그의 미갈에 대한 순정은 나의 냉정과 늘 대비되어 이야기 되었다. 아브넬은 사실상의 왕권을 갖고 있었으므로 북이스라엘의 장로들 뿐만 아니라 “사울의 베냐민 지파” 지도자들에게 내가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야 할 역사적 명분과 현실적 필요성을 말하며 설득하는데 성공하였다(17-19절). 아브넬이 20명의 부하들과 함께 헤브론으로 왔을 때 나는 그들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고, 아브넬과 “평화의 언약”을 맺었다(참. 21절, ‘샬롬’).
아브넬이 “평안히”(beshalom) 헤브론을 떠났을 때(21, 22절), 전쟁터에 나갔던 요압이 돌아와서 나와 아브넬 사이에 맺은 언약을 알게 되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그는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나에게 화를 내며 아브넬을 “야비한 스파이”로 몰아붙였다(24-25절). 내가 볼 때 아브넬은 속내를 숨기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교활한 인물은 아니었다. 물론 아브넬이 “사울의 첩 리스바”를 취한 것만 보아도 그는 사실상 왕처럼 행세하고 싶은 권력 욕망이 강한 인물이었다(6-11절). 그렇지만 그는 통일 이스라엘을 만들 수 있는 정치적, 군사적 역량을 갖춘 “큰 인물”이었다(38절) 그 때 요압은 아브넬을 시기했고 만약 아브넬의 계획대로 통일이 된다면 자신이 이인자로 밀려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깊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아브넬을 죽이고 우리의 평화 통일 노력을 무산시킬 것까지는 상상조차하지 못하였다.
아브넬의 무덤
후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요압은 나를 만난 직후 전령들을 보내어 아브넬을 다시 헤브론으로 불렀다. 아브넬은 헤브론 근처의 “시라 우물 가에” 있었다(26절). 아브넬과 요압은 묘하게도 “우물 가에서” 운명적인 조우(遭遇)를 한다(삼하 2:13). 아브넬이 헤브론 성문으로 들어오자 요압은 마치 오랜 전우를 만나듯이 아브넬의 손을 붙잡고 “단둘이서만 할 이야기라도 있는 듯이 속여”(공동개역) 큰 성문 안의 후미진 곳으로 들어갔다(27절). 그는 분명히 아브넬을 “속였다”(히브리어, 베쉘리, LXX, 에클리노, DRA, treacherously). 아브넬이 나를 “속였다”는 그의 말은 그의 투사(投射)였음이 분명해졌다(25절). 그는 마치 아팠던 과거를 잊고 새로운 미래를 함께 세워가자는듯이 넓은 아량으로 아브넬을 품을 듯이 포옹하면서 순식간에 칼을 뽑아 아브넬의 “배를 찔러 죽였다”. 여기의 “배”(호메쉬)는 “다섯번째 갈비뼈”(하메쉬)로 이해되기도 한다(Bodner). 마치 아브넬과 요압의 친위대원들 24명이 서로의 “옆구리”()를 찔러 죽인 것처럼(26절), 분명히 급소를 찔러 죽였을 것이다. “배”이든 “옆구리”이든 요압은 냉혹한 복수를 계획한 것이 분명하다. 요압은 이후에 그의 라이벌인 아마사에게 동일한 장소를 찔러 죽인다(20:10). 요압은 아브넬이 그의 동생 아비새를 “창 뒤 끝으로 찔러 죽인 것”(2:23)에 대한 정당한 복수라고 주장했지만, 그의 복수는 결코 정당화 될 수 없으며 비열하였다. 어떻게 아브넬이 아사헬을 전쟁터에서 죽인 것과 평화로운 장소에서 몰래 음모로 죽인 것이 같을 수 있겠는가? 그 때 요압의 동생 “아비새”도 함께 그 음모에 가담하였다(30절). 요압은 탁월하고 유능한 군인이었지만, 군인의 명예를 버리고 악하고 비뚤어진 마음으로 가증스럽게 복수하였다.
헤브론 시가지
나는 아브넬의 죽음 소식을 듣고 참담했다. 그리고 무서운 현실 정치에 치를 떨었다. 그래도 나는 요압과 그의 집안에 병과 죽음과 가난이 끊어지지 않도록 공적으로 저주 기원을 하였다(29절). 나는 모든 백성들과 함께 아브넬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그는 사울의 숙부였던 “넬”의 아들이었으므로(삼상 14:50) 왕족의 한 명이었고, 천하 제일의 용장이었고, 우리 나라를 오랫동안 외적들로부터 지켜 왔고, 이제는 통일 이스라엘을 이룰 준비를 마쳤다. 나는 아브넬을 높여 나의 왕도인 “헤브론에 장사하였다”(32절). 그리고 아브넬의 죽음을 애도하며 조가(弔歌)를 짓고 백성들과 함께 불렀다(33-34절). “어떻게 천하 최고의 고귀한 장군이 바보처럼(나발) 모략꾼들의 속임수에 걸려 한 순간에 죽음을 당하고 어이 없이 엎드러졌는가(napal)?” 나는 애통하며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며 내 슬픔과 고뇌를 충분히 표현하였다(35절). 백성들은 내가 아브넬을 죽이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고 안심하였다. 형제가 형제를 죽이고 복수가 복수를 낳는 악순환이 끊어지고,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곳에 생명과 축복이 임하는 선순환”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시 133: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