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 전쯤 중앙승가대학교에 다닐 때였다.
방학을 맞아 강원 동창들이 범어사에 모여 강사스님 방에 인사를 하러 갔었다.
강사스님은 약밥 공양이 들어왔다며 내어 놓았는데,
마침 배가 고프던 참이라 한입 맛있게 베어 꽉 씹었다. 그 순간 앞니가 툭 부러졌다.
대추씨를 빼 내지 않은 상태로 약밥을 만들었던 것이었다.
그 다음날 서둘러 서울로 올라와 독실한 불자가 운영하는 치과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
원장님은 본래의 이빨이 그래도 가장 나은 것이니 기둥을 심어 그대로 쓰자고 했으며,
돈 없는 학승(學僧)이라는 것을 알고는 한 푼도 받지 않았었다.
원장님은 이제 연세가 많아 병원을 다른 이에게 넘겼기에 만날 수는 없지만,
그때 부러진 앞니는 그대로 입안에 있다.
우리는 무언가를 씹으면서 살아있음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음식을 먹는 재미만 해도 얼마나 쏠쏠한가.
공양을 약으로 생각하는 출가 수행자에게도 음식 씹는 즐거움은 크다.
그런데 큰방에서 전체대중이 함께 공양을 하다 보니, 느긋하게 씹는 맛을 즐길 새가 없다.
노스님들은 워낙 소식(小食)이라 젊은 스님들이 공양 시작하고
몇 번 씹을 때쯤엔 이미 숭늉을 기다리고 계신다.
어른 스님들을 하염없이 기다리게 할 순 없는 일,
젊은 스님들은 아직 발우에 기득한 밥과 국과 반찬을 한곳에 모아서
국밥인지 비빔밥인지도 모를 음식을 재빨리 넘긴다.
이렇게 몇 년 대중생활을 하고나면 그 왕성하던 식욕도 어느 덧 사그라지게 된다.
덕분에 스님들은 비만이 거의 없고, 젊은 시절 그 힘든 잠과의 싸움도 잘 이겨낸다.
대신 거개 젊은 시절엔 위장병과 친구로 지내기도 하는 것이다.
고등학교시절 늘 껌을 씹고 계신 선생님이 계셨다.
50대의 선생님은 수업 중에도 예외 없이 껌을 씹으셨는데,
담배를 끊느라고 시작한 껌 씹기가 습관이 되셨다고 했다.
좀 점잖지 못하다는 것 외는 다른 사람에게 전혀 피해를 주지 않으니
나쁜 습관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다만 재미로 씹는데 타인에게는 죽음을 부르는 치명적인 경우가 있다.
요즘 ‘악플’이라고 일컬어지는 ‘악성 댓글’의 문제가 심각한 듯 보인다.
아마도 글을 올리는 사람은 단순한 자신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그럴지 모르지만,
막상 당하는 입장에서는 심각한 상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상대가 자신을 조절할 수 있는 높은 정신력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자살까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재미가 악업(惡業)이 되는 경우라 하겠다.
이왕 씹을 바에는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이익이 되는 것을 씹으면 어떨까?
처음 경전이나 조사어록을 씹으면 이빨이 들어가지도 않는다.
그래서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고 투덜댄다.
감각적인 개그를 이해하는 수준으로는 당연히 무슨 맛인지를
모를 수밖에 없는 것들이니 어쩌랴.
그런데 씹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점차 묘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달라진다. 이 맛을 제대로 본 사람이라면
흔히 세상에서 재미있다고 흥분하는 것들이 심드렁해지고 만다.
하지만 어설프게 씹다보면 병도 많이 생긴다.
그 중에도 심각한 병은 ‘저만 잘난 놈’이 되고 마는 병이다.
이 병은 평범하던 이를 괴이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
만약 그것을 완전히 씹어 삼키고 소화까지 완벽하게 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될까?
그는 죽는다. 그리고는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 태어난다.
그에게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 세계는 자유롭고 평화롭다.
누구를 만나도 걸림이 없고, 어딜 가도 괴로움이 없다.
힘들고 괴로운 나날을 보내는 사람이 과연 남을 편안하게 하고
남에게 베풀 수 있을까? 그건 이론상으로만 가능한 허구일 뿐이다.
싯다르타는 보리수 아래에서 ‘진리’라는 딱딱한 음식을 씹어 먹고는 죽었다.
그리고는 ‘부처’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바로 그분이 가는 곳에서는 항상 연꽃이 피어나 향기로 가득했었다.
송강스님 / 서울 개화사 주지
출처 : [불교신문 2652호/ 9월1일자]
사진은 연보리님 게시물에서..()..
첫댓글 쌀밥도 꼭꼭 씹을수록
단맛이 난다데예..^^
마하반야바라밀()
녜꼭잘 씹어 먹겠나이다
잘 먹기 보다 꼭
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