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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지 않은 제대군인!
우리에겐 선배 제대군인들이 있다.
안 ㅇㅇ 예비역 육군 대위
육군대위로 전역한지 5년 ,
지금 나는 대한민국 육군의 헬기를 정비하는 항공 정비군무원으로 거듭났다. 전역후 여러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우연히 만난 선배 제대군인을 통해 흔들리던 의지를 다잡을 수 있었고 결국 목표로 한 제2의 인생설계를 실현할 수 있었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함께 하고자 한다.
나는 2001년 학사장교로 임관하여 근무하고 2008년 만 7년의 군 생활을 뒤로하고 대위로 전역했다. 아쉬움과 표현키 힘든 먹먹함이 컸지만 이제 무언가를 찾아 일을 하고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다. 그동안 군복의 푸르름에 익숙해 왔던 탓인지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과 화려한 세상의 모습들이 또렷치 않고 뿌연 안개 속 같다는 느낌이 자주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건 준비하지 않은 사람이 맞닥뜨리기 쉬운 낯선 길에 대한 두려움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부모님이 거주하고 계시는 충남 조치원으로 이사를 했다. 구체적 목표 보다는 얼마간 막연하게 영어공부와 이러저러한 자격증이라도 따야겠다는 생각에 취업을 위한 구직활동은 뒤로하고 책을 보며 공부했다. 굳이 당장의 섣부른 취업보다 몸과 마음의 여유, 솔직히 말해 좀 쉬어 보자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렇지만 삼십대 초반의 가장이 직업도 없고 확실한 목표도 없이 책이나 뒤적이고 있다는 것은 참 난감한 일이었다. 말이 좋아 내일을 위한 준비의 시간이지 무직자, 실업자였다. 소위 말하는 ‘백수’. 그게 바로 딱 나였다. 간간히 자기도 모르게 내 쉬는 아내의 긴 한숨 소리를 듣기라도 하면 그나마 뒤적이던 책속의 글자도 온통 뿌옇게 보이기만 했다. 더구나 장교의 길을 통해 사나이로서 더 장대한 목표를 세우고 있으니 저를 믿고 아내를 맡겨달라는 나의 포부를 높이 사 결혼을 허락해 주신 장인의 얼굴은 차마 볼 면목이 없었다.
목표 없이 막연히 공부를 한다고 하니 능률도 오르지 않고 가계는 생활비마저 알음알음 부모님의 도움을 바라는 상황이 되었다. 전역후 등록한 제대군인지원센터를 통해 소방공무원 입시 학원비를 지원받아 공부하였다. 수험공부에 나름 충실히 하였지만 생각처럼 여의치 않아 일단 취업을 하기로 하였다. 제대군인지원센터 취업정보를 통해 행정인턴 1년 계약직으로 국립대전현충원에 지원하여 채용되었다. 호국영령의 안식처인 국립현충원에서 근무한다는 보람이 컸으나 급여는 네 식구가 생활하기에는 크게 부족했다. 사명과 보람도 의미가 있었지만 솔직히 현실의 기본적 요구를 충족치 못하는 것은 궁핍으로 이어 질 수 밖에 없었다. 대전현충원에서 3개월가량 근무 하던 중 전역후의 내 근황을 들으신 작은아버지께서 당신께서 하시는 일을 도와 같이 해보자는 제안에 대전 현충원 근무를 마치고 그분의 일을 돕게 되었다.
얼마간 새로운 환경에서 일을 하게 되니 의욕도 생기고 좀 더 낳은 급여도 가계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열 명 남짓의 직원과 가족들이 중심이 되어 하는 조그만 공장 일이다보니 사실 가족이 아닌 조카인 내 입장에서는 동기부여도 쉽게 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내 의지 그리고 목표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 조카가 안쓰러워 일 손 하나를 내어준 것을 받아들인 것 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매사 그렇듯 원하지 않으면 의지도 생기지 않는 것이 아닐까. 답은 간단했다. 힘들어도 내가 노력하고 준비해서 할 일을 찾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한 바람이나 꿈이 아닌 목표의 실현에 가치를 둘 만한 그런 일을 찾는 것이 급선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처럼 뜬구름 잡 듯 ‘뭐 이것저것 열심히 하고 두드리다 보면 열리겠지’ 식의 마음가짐으로는 결코 될 일이 아니었다. 보다 구체적이고 꼼꼼한 계획과 준비가 필요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삶을 위해 내가 절실히 바라는 것, 내가 꼭 하고 싶은 일. 그것을 찾아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서의 저녁시간. 그때 나는 무심코 우리나라 공군에서 운용하고 있는 F-15K의 프라모델 조립완성품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적지 않은 헬기며, 항공기 프라모델이 이곳저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었다. 이것들이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어디에서 다 만들어진 완성품을 돈 주고 사온 것이 아니라 그동안 내가 하나하나 공들여 깎고 붙여서 만든 것들이 아닌가. 나는 왜 이것을 만들었던가.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일들이 아닌가. 답은 거기에 있었고 바로 그것이었다. 내가 적지 아니 꿈꾸고 바랐던 것. 문뜩 예전 여단장님께서 강조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다 "Go to the basic!" 기본으로 돌아가라! 내가 하고 싶은 것. 바로 항공기를 만지고 다루는 일이었다.
항공기 정비사. 그것을 이제는 막연한 꿈이 아닌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목표로 세웠다. 꿈은 자유고 꾸기만 해도 되는 것이지만 목표는 이루지 못하면 실패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 가만히 앉아서는 될 일이 아니었다. 내가 사는 조치원이나 근처 큰 도시인 대전이나 청주에서 항공정비관련 공부를 하기에는 사실상 요원했다. 마침 실직자 우선 선정 직업교육 과정을 알게 되어 간단한 면접 시험을 통과한 후 서울로 기차를 타고 통근하며 항공 관련 공부를 했다. 그렇게 9개월 가량을 매일 6시간의 통학거리를 견뎌내며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항공 정비 산업기사, 항공기체 정비 기능사, 항공 기관 정비 기능사를 취득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나름 열심히 공부해서 항공정비관련 자격증을 취득했다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자격증일 뿐 이었다. 항공기정비사로 인정받기 위해 미연방항공청(FAA)이나 우리나라 국토교통부 항공관계부처에서 공인해 주는 면장과는 별개였다. 여기저기 알아봐도 면장 없이는 정비사로서 항공사에 취업할 수 있는 방법은 요원했다. 또 면장취득을 위해서는 항공정비업체등에서 적어도 6개월 이상 근무한 실무경력이 있어야 했다. 이렇다보니 경력을 쌓기 위한 정비업체에도 지원조차 할 수 없는 현실이 그저 막막하고 한 숨만 나왔다. 아내 역시 열심히 공부해서 자격증만 따면 정비사가 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가 이러한 현실을 마주하고 는 적지 않게 실망하는 눈치였다.
일단 가능한 방법을 알아보기로 했다. 그러던 2010년 늦가을 어느 날 내가 살고 있는 조치원에서 멀지 않은 곳인 청주국제공항에 위치한 항공관련 회사에서 직원을 모집한다는 구인공고를 발견했다. 정비사를 모집하는 것도 아니고 공항의 여타 업무관련 직종이었으나 나의 최종목표의 실현은 결국 비행기가 있는 그곳, 바로 공항이라고 생각했기에 망설임 없이 지원을 했다. 그 회사는 항공기정비사들도 함께 근무하는 곳이었기에 한편으로는 가까이서 항공기 정비관련 업무분야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지식을 얻거나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 확신했다.
면접간 지점장이란 사람은 다른 피면접자보다 나에게 유독 질문을 많이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육군 대위출신이라는 나의 이력 때문인지 몇 가지 직선적인 질문을 던져 나를 당혹케 했다. 한 가지 기억나는 것은 ‘육군대위 출신이면 상당히 고급자원이고 전역을 염두에 두었다면 많은 준비를 했을 것인데 어째서 크고 좋은 회사에 지원하지 않고 우리 회사에 지원을 했는가? 혹시 스스로 아무런 준비를 한 게 없고 또 무능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라는 요지의 질문은 당황스러움을 넘어 울컥 기분을 상하게 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나는 취업을 위한 면접에 응한 사람이었기에 감정보다는 그동안의 노력과 군 경험을 바탕으로 더욱 발전적인 사회구성원으로 거듭나기 위한 각오를 당당히 피력했다. 일단 목표가 있었기에 급여나 근무여건 등에 관한 질문에의 답변은 간단하고 명료하나 소신 있게 답변을 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공항은 여러 가지 규정과 법규의 적용이 많아 처음 얼마간은 환경과 분위기를 익히며 한 일주일여를 보내게 되었다. 그제야 알게 되었지만 지점장은 나와 같은 군 간부 출신이었다. 뜻한바 있어 부사관으로 군 생활 20년을 마치고 상사로 전역 후 여러 사회경험을 거쳐 현재 회사의 지점을 맡고 있는 사람이었다. 부사관 출신의 지점장이라. 겉으로는 아닌 척 했지만 얼마간은 미묘한 감정을 숨기기 쉽지 않았다. 육군대위 출신인 내가 전역 후 사원으로 입사해서 상사 출신인 지점장과 근무를 하게 된 이 상황. 더구나 지점장은 군 생활동안 나와 같은 주특기로 전차 부대와 기계화 부대에서 근무를 하고 전역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전역 후 새로 맞닥뜨린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고 또 꼼꼼히 준비해왔는지 알게 되었다. 내가 느낀 일말의 그런 감정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사회에서의 새로운 도전에 스스로 장애물을 쌓는 것과 다름 없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직장의 상사이자 내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선배 제대 군인 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공항에는 항공사 직원이나 또는 조종사, 스튜어디스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공항에서의 업무종류는 항공기정비, 급유, 지상장비지원, 화물과 수하물취급, 항공보안 그리고 세관, 검역 등등 헤아리기조차 쉽지 않다. 회사에서 내가 맡은 업무는 항공사 위탁수하물 취급과 지상조업장비의 지원과 운용이었다. 그리고 간간히 같은 회사 소속부서인 항공기정비사들의 업무를 도우며 정비 실무에 관한 이해를 돕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정비사가 아니었다. 그것이 한계였다. 하지만 틈틈이 항공기를 직접 보고 만지며 조금이라도 실무를 책이 아닌 현장에서 익힌다는 것은 실로 하늘과 땅처럼 큰 차이가 있었다.
지점장은 나와의 자리를 자주 만들어 사회의 선배이자 직장의 상사로서 여러 조언과 조금이라도 흔들리거나 나태함이 보이면 따끔한 질책도 서슴치 않았다. 대형운전면허증과 항공정비관련 자격증 몇 개 취득하고 이정도면 취업준비는 된 게 아닐까 자만하던 나의 의식을 바뀌도록 한 사람도 바로 그였다. 그는 내가 경험했던 부사관들 에게서는 듣도 보도 못했던 토익 800점을 넘는 점수를 전역당시 가지고 있었다. 또 대형운전면허, 굴삭기면허, 지게차면허, 전기기능사는 물론 이러저러한 분야의 자격증이나 수료증도 상당했다. 더구나 취득이 만만치 않다는 국가공인 물류관리사 자격증도 있었고 민간자격이지만 관련업계에서 인지도가 높은 국제 무역사, 무역영어 1급 자격증도 가지고 있었다. 다 합해서 열 다섯 가지 정도의 자격증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항상 무언가를 위해 틈나는 대로 공부를 하고 현장에 적용하여 회사의 발전에도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입사한 그 이듬해 그는 공항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국토해양부장관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내가 나의 진로와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힘겨워 할 때마다 그는 내게 이런 말을 들려줬다. ‘안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말고, 반드시 된다고만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되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 그리고 그 방법이 하나라도 떠오르면 또 생각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옮겨봐. 되고 안 되고 그 차이는 바로 거기에 있다.’
공항근무는 항공사의 이익창출을 위한 항공기 운항스케줄이란 축에 의해 돌고 돌았다. 그렇기에 밤과 낮이 없었다. 나는 말 그대로 주경야독, 주독야경 가릴 것 없이 조금이라도 여건이 허락되면 근처의 도서관, 독서실에서 공부를 했다. 직업과 병행할 수 있기에 목표를 수정하여 공군 항공정비분야 군무원으로 정했다. 자투리 시간이나 휴무를 허투루 보내는 직원들이 적지 않아 시간이 부족한 나는 그것이 안타까웠지만 무엇이든 하고 말고는 결국 그들 스스로의 선택이자 몫이었다. 지점장을 통해 경험에서 우러난 충고나 조언을 받아들이고 여건을 잘 활용하며 열심히 공부해서 대기업이나 계열사로 이직하거나 목표로 한 자격증을 취득한 직원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불평불만을 하는 일부 직원들은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직원들을 오히려 시기어린 시선으로만 보기 일쑤였고 경제가 어렵네, 취업난이라 좋은 직장을 구하기가 힘드니 이런 소리만 입에 달고 살았다. 어느날 지점장이 말했다. ‘결코 취업난 같은 것은 없다. 세상에 할 일은 얼마든지 있는데 다만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할 것인지 목표를 세우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소리만 하는 것이다.’
회사근무를 병행하며 시간을 쪼개 열심히 준비했지만 2011년도 공군군무원시험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분석을 해보니 역시 공부량 이었다. 시간이 부족했다지만 한 달에 8일이상의 휴무는 보장되었고 근무일에도 항공기 운항간격 편성관계로 잘 만하면 다섯 시간 이상을 더 활용할 수 있었는데 그런 시간을 꼼꼼히 활용하지 못한 것 같았다. 거기다 틈틈이 머리 식힌다고 놀러도 다녔고 또 직원들과의 소소한 자리도 굳이 사양하지 못하는 등 시간을 컨트롤 하지 못한 문제도 없지 않았다. 어쨌든 시험에 불합격하고 나니 실망이 적지 않았다. 이제 둘 중 한 가지는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마음은 이미 포기하자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러한 나를 안쓰럽게 지켜보던 지점장이 위로차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또 하나의 제안이자 조언을 주었다. ‘우물을 팔 때 한 우물만 우직하게 파는 것도 좋지만, 가능하다면 틈틈이 다른 우물도 근처에 같이 파거나 하다못해 우물을 팔 자리라도 미리 봐두는 것도 물을 얻기 위한 좋은 방법중의 하나다.’ 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일단 회사근무를 지속하면서 지금의 수험공부를 계속하고 면장취득 시험응시에 필요한 6개월 이상의 항공정비회사 경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면 본사의 항공기정비부에서 인턴으로 근무할 수 있도록 임원들에게 추천을 해 보겠다는 조언과 격려도 덧붙였다. 그의 진심어린 격려에 용기가 돋았다. 지금 내가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겠다고 나서면 직장도, 항공기정비사도 그리고 군무원이 되겠다는 목표도 사라지는 것이지만 내가 마음 다잡고 다시 의지를 되세우면 지금의 직장, 군무원을 위한 목표 그리고 항공정비사 면장취득을 위한 경력을 준비하는 기회도 지속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마침 한 달간 제주공항 지점에 파견근무를 나가 업무량이 훨씬 많은 타 공항현장에서 시야를 넓힐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이번에는 공군과 더불어 육군항공정비 분야에도 같이 응시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효율적인 공부를 위해 회사 근무스케줄을 살펴 가용한 시간을 최대한 이끌어 냈다. 회사는 항공기 스케줄 때문에 오전에 중간에 근무를 마치고 나가 저녁 무렵 다시 출근하는 근무편성이 많았다. 이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일단 점심을 먹거나 잠시 휴식을 위해 집에 들렀다가 공부하는 패턴을 없앴다. 말이 좋아 점심 먹고 잠시 휴식이지 일단 집에 들르면 가족들과 식사하고 아이들과 부대끼다 보면 금방 시간이 지나기 마련이고 또 잠시 눈이라도 붙이면 몇 시간은 금방이었다. 오전 근무 후 바로 독서실로 가서 공부를 시작하고 점심은 간단히 준비한 도시락을 먹고 바로 또 공부했다. 야간이나 심야스케줄의 경우 다른 직원들은 하릴없이 주로 잠을 잤지만 나는 잠 안자고 서너시간을 공부에 활용했다. 적지 않게 힘들고 고단 했다. 어느날은 공항 시멘트 바닥에 코피를 뚝뚝 흘리기도 했다.
하지만 목표를 위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고 절실했기에 창피하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가산점을 얻기 위해 틈틈이 워드 1급 시험도 준비해서 자격증도 취득했다. 그리고 그해의 시험응시. 두 번의 도전 끝에 2012년 육군 항공 기체정비 군무원시험에 합격하는 기쁨을 얻었다. 합격자 발표일 떨리는 마음으로 합격을 확인하고 보니 너무도 기쁜 마음에 오히려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곁에서 아내가 눈물을 글썽이며 내 어깨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정말 기뻤다. 그리고 그 동안 같이 고생해준 아내에게 참으로 감사했다.
면접을 거쳐 최종 합격을 하니 이제 다가올 임용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 회사를 사직하기로 했다. 그동안 가족들과 제대로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이 미안하기도 했고 또 조금은 쉬고 싶다는 욕심도 들었다. 지점장에게 이런 정황을 보고하고 2주 후 사직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지점장도 정말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축하해주었지만 사직은 좀 더 두고 보는 게 좋겠다는 여운을 남겼다. 이제 임용발령만 나면 되는데 무슨 소린가 싶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나의 군무원임용 발령은 빨라야 두세달 후에나 가능할 것 같았다. 아무리 임용 예정자라지만 지금 일을 그만두면 소득이 없어지는 상황이 되는 것이었다. 이미 사직서까지 낸 마당에 다시 일하겠다고 하기도 그래서 할 수 없이 집 주변의 회사를 알아 보았지만 그만그만한 생산직에 또 삼개월 수습기간을 두다보니 쉽지 않았다. 또 지원한다고 입사가 된다는 보장도 없는 일이었다. 합격의 기쁨도 잠시. 그렇게 일주일쯤 지나니 조금씩 걱정이 앞섰다. 어찌되었던 일을 해서 가족들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현실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그렇게 퇴사 일자를 이틀가량 남겨 두었을 때 지점장이 전화로 여차저차 정황을 묻더니 그럴 줄 알았다며 내일 당장 휴가를 끝내고 출근하라고 했다. 어짜피 퇴사일자가 남았으니 회사에는 사직취소하면 되는 것이라며. 좀 멋쩍긴 했지만 내심 기뻤다. 다행히 동료들도 다시 출근한 나를 반겨주었고 2012년 그 해를 넘겨 지난 4월 임용일전까지 4개월 가량 더 근무할 수 있었다.
오늘도 나는 ‘투타타타’ 가 아닌 ‘봬에에에엥’ 소리로 들리는 500MD 헬기를 동료 선후배들과 더불어 신명나게 정비하고 있다. 장교로 전역후 뜻 한 대로 잘 되지 않아 자신과 주변을 원망도 하고 또 결코 녹록하지 않은 사회의 치열하고 높은 벽 앞에서 힘겨워도 했었다.
그러나 한편 준비와 도전의 과정이 헛되지 않는다면 결코 이루지 못할 것도 없다는 용기와 자신감도 얻고 배웠다. 그리고 우물을 팔 때 가능하다면 혹여 물이 안 나올 경우를 대비하여 다른 자리도 틈틈이 알아보고 잠깐씩 쉴 때 다른 우물자리에도 삽질을 해 보라는 직장 상사의 진심어린 격려. 비록 근무하던 부대는 틀렸지만 한 때 전우였으며 역시 제대군인인 선배의 조언과 아낌없는 지원도 큰 힘이자 행운이었다. 첫 급여를 받고 찾아가 소주 한 잔 대접하는 자리에서 그는 내게 말했다. ‘나도 뜻 한바 있어 나름 준비를 철저히 한다고 하고 전역을 했지만 막상 마주한 세상의 벽은 너무 높고 힘겨워 남 몰래 적지 아니 눈물도 흘렸다. 좌절의 언저리에 들어설 때 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용기와 힘을 준 것은 이러한 길을 먼저 걸었던 선배 제대군인들의 조언이었다. 직접적인 만남에서의 조언도 있었고, 특히 지금도 매달 받아보거나 열람하는 제대군인소식지며, 직원채용을 위해 자주 찾곤 하는 제대군인지원센터의 여러지원과 끈을 놓지 않은 정보교류도 큰 힘이 되었다. 열심히 준비하고 도전한 자네의 노력과 의지가 있었기에 좋은 결과가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군무원으로 열심히 근무하면서 현역에 근무하고 있는 미래의 제대군인들에게 사회에서의 또 다른 도전과 성취를 위해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준비하여야하고 목표를 세워야 하는지 열심히 들려주고 도와주길 바란다.’
제대군인! 우리 제대군인은 결코 외로운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처음 군문에 들어섰을 때 생소한 환경, 경험해보지 못했던 낯선 세계에 대한 우려와 두려움이 없지 않았지만 결국 배우며 익히고 숱한 훈련을 통해 당당한 전사로 거듭나지 않았던가. 다를게 없다. 제대군인, 이제 우리는 고귀한 소명을 다하고 또 다른 세상을 살기 위해 도전의 길을 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지금도 그랬고 내일도 그럴 것이다. 주변에는 우리의 노력을 이해하고 우리의 성공을 기원하고 바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 중심에 제대군인들이 있다.
우리의 마음과 입장을 가장 잘 알고, 우리가 가야할 길을 먼저 걸어온 선배 제대군인들을 멘토로 삼자. 나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하게 제대군인이 사회에서 자립하고 뜻 한 바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 확신한다.
그들은 새내기 제대군인인 당신을 사회의 교관으로서 더욱 강하고 올바르게 키워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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