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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판단기준은 무엇인가?
삼하 4:1-12
1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은 아브넬이 헤브론에서 죽었다 함을 듣고 손의 맥이 풀렸고 온 이스라엘이 놀라니라
2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 군지휘관 두 사람이 있으니 한 사람의 이름은 바아나요 한 사람의 이름은 레갑이라 베냐민 족속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들이더라 브에롯도 베냐민 지파에 속하였으니
3 일찍이 브에롯 사람들이 깃다임으로 도망하여 오늘까지 거기에 우거함이더라
4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다리 저는 아들 하나가 있었으니 이름은 므비보셋이라 전에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소식이 이스르엘에서 올 때에 그의 나이가 다섯 살이었는데 그 유모가 안고 도망할 때 급히 도망하다가 아이가 떨어져 절게 되었더라
5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바아나가 길을 떠나 볕이 쬘 때 즈음에 이스보셋의 집에 이르니 마침 그가 침상에서 낮잠을 자는지라
6 레갑과 그의 형제 바아나가 밀을 가지러 온 체하고 집 가운데로 들어가서 그의 배를 찌르고 도망하였더라
7 그들이 집에 들어가니 이스보셋이 침실에서 침상 위에 누워 있는지라 그를 쳐죽이고 목을 베어 그의 머리를 가지고 밤새도록 아라바 길로 가
8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 왕에게 이스보셋의 머리를 드리며 아뢰되 왕의 생명을 해하려 하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 되신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의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 하니
9 다윗이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그의 형제 바아나에게 대답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내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10 전에 사람이 내게 알리기를 보라 사울이 죽었다 하며 그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줄로 생각하였어도 내가 그를 잡아 시글락에서 죽여서 그것을 그 소식을 전한 갚음으로 삼았거든
11 하물며 악인이 의인을 그의 집 침상 위에서 죽인 것이겠느냐 그런즉 내가 악인의 피흘린 죄를 너희에게 갚아서 너희를 이 땅에서 없이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12 청년들에게 명령하매 곧 그들을 죽이고 수족을 베어 헤브론 못 가에 매달고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져다가 헤브론에서 아브넬의 무덤에 매장하였더라
삼하 4:1-12 / [이스보셋이 살해되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은 아브넬이 헤브론에서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넋을 잃은 채 어쩔 줄을 몰라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도 모두 갈팡질팡하였다. 2) 그때에 이스보셋을 섬기던 장군들 중에는 바아나와 레갑 형제가 특공대 대장으로 있었는데, 그들 아버지의 이름은 림몬이었다. 그들은 베냐민 지파에 딸린 브에롯 마을에서 태어난 사람들로, 3) 아브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자기들의 시대가 온 것으로 착각하고 무모한 거사를 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집안과 마을에까지 수치가 되었다. 이리하여 브에롯 주민들은 모두 깃다임으로 도망가서 오늘날까지 그곳에 살고 있다. 4) 사울의 집안에는 아직도 살아 남은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낳은 므비보셋이었다. 그러나 그는 두 다리를 저는 불구자였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이스르엘의 싸움터에서 함께 죽었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5세였다. 그때에 전사 통보를 받은 유모가 그를 업고 도망치다가 떨어뜨려서 두 다리를 다 절게 된 것이다. 바아나와 레갑은 이제 이스보셋만 죽이면 더 이상 사울의 집안에서 정당한 왕위 계승자가 나올 수 없다는 간교한 계산을 하고 거사를 준비하였다. 5) 레갑과 바아나가 이스보셋의 왕궁에 이르렀을 때는 마침 가장 뜨거운 한낮으로, 이스보셋은 낮잠을 자고 있었다. 6) ㄱ) 그들은 밀을 가지고 가려는 사람들처럼 꾸미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집안에는 어레미로 밀을 깨끗이 치던 여인이 고개를 떨군 채 졸고 있었다. 그들은 그녀의 배를 찔러 죽이고 무사히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ㄱ. 70인역에 따라 내용을 보충하였다) 7) 그들은 곧장 이스보셋의 침실로 가서 누워 자던 왕을 찔러 죽였다. 그리고 머리를 잘라 가지고, 곧 거기 마하나임에서 출발하여 밤새도록 아라바 길을 걸어서 8) 헤브론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그들은 이스보셋의 머리를 다윗에게로 들고 가 의기양양하게 말하였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에야 여호와께서 사울과 그 후손들의 원수를 우리 임금님께 갚아 주셨습니다. 임금님을 죽이려고 벼르던 사울의 아들이 여기 이렇게 죽었습니다.' 9) [암살자들을 처형하는 다윗] 그러자 다윗은 이스보셋을 죽인 암살자들에게 이와같이 대답하였다. `온갖 위기에서 나를 살려내 주신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내가 맹세한다. 너희가 나를 아주 잘못 생각하였다. 10) 전에 내가 시글락에 있을 때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나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러 온 전령인 듯 생각한 자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를 붙잡아 처형해 버렸다. 이것이 그가 전해 준 소식의 대가이다. 11) 자기 집 침상에서 평화롭게 잠자는 무고한 사람을 해친 것은 세상 어디서고 용납되지 못할 행동이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희가 바로 그렇게 사람을 죽였으니, 내가 어찌 그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있겠느냐? 너희가 스스로 죽을 짓을 하였으니 이제 너희를 이 땅에서 없애 버리겠다' 12) 다윗은 자기 부하들에게 암살자들을 처형하라고 명령하였다. 다윗의 부하들이 레갑과 바아나를 죽이고 그들의 손과 발을 모두 자른 다음에 그 시체를 헤브론 연못가에 매달았다. 그리고 이스보셋의 머리는 헤브론에 있는 아브넬의 동굴 무덤에 장사해 주었다.
아브넬의 사망 소식은 그나마 남아있던 사울 집안에 공포로 다가왔습니다. 이에 바아나와 레갑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죽여 다윗에게 투항하며 목숨을 구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일을 의인을 죽인 악인의 행동으로 판단하고 그들을 사형에 처합니다. 나의 판단기준은 이익입니까? 정의입니까?
이스보셋을 살해하다(1-7) 사울의 군대장관이었던 아브넬이 다윗의 진영이었던 헤브론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은 이스보셋을 위시한 사울의 진영에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이스보셋은 손의 맥이 풀리고, 온 이스라엘은 이 소식에 놀랍니다. 아브넬의 죽음은 더 이상 이스보셋의 왕위가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가망이 없음을 파악한 이스보셋의 군지휘관 바아나와 레갑은 집 침상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는 이스보셋을 죽인 후 그의 목을 베어 머리를 가지고 헤브론에 있는 다윗의 진영으로 향합니다. 본문은 바아나와 레갑이 베냐민족속 브에롯 출신이라고 밝힘으로 이스보셋을 암살한 두 사람은 사울왕가가 속한 베냐민 지파 출신임을 드러냅니다. 같은 지파 출신으로서 왕을 지켜야 할 바아나와 레갑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왕을 살해하는 악을 저지른 것입니다.
다윗의 심판(8-12) 밤새 아라바 광야를 달려 헤브론에 도착한 바아나와 레갑은 여호와께서 다윗의 원수를 갚으셨다고 아뢰며 이스보셋의 머리를 드립니다. 적장의 머리를 가져온 것이기에 다윗으로부터 안전을 보호받고 상급도 받을 것이라 생각한 것과는 달리 다윗의 심판은 엄중했습니다. 전에 사울의 죽음을 알린 자에 대한 심판을 예로 들며 이들의 행동은 악인이 의인을 침상 위에서 죽인 것이기에 악한 일이라 규정합니다. 다윗은 청년들에게 명하여 이들을 처형하도록 합니다. 정치적으로 따지면 이스보셋의 죽음은 다윗에게는 이익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판단 기준은 자신의 정치적 이익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판단 기준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옳음이 옳은 것이요, 하나님 앞에서 그름이 그른 것입니다. 순간의 이익과 만족을 위해 우리의 판단 기준을 흐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적 용 : 나의 판단 기준은 무엇입니까? 나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은 끊기 힘든 유혹입니다. 옳고 그름을 따져 판단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인간관계에서 벌어진 틈을 메우길 원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소중한 사람들과 연결시켜 달라고 호소하길 원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먼저 연결될 때, 인생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훨씬 더 잘 의사소통할 수 있습니다. 결혼해서 부부가 하나님을 향해 성장하면, 서로를 향해 더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소통하려는 사람들에게 더 선명한 신호를 보내 주십니다. 서로의 관계가 붕괴되는 순간, 어찌해야 할 바를 요청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기꺼이 우리를 돕길 원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은 이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아낌없이 주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세상의 명예만을 중요시 했던 사울 왕가의 몰락을 보며 교훈을 얻어야겠습니다.”
호크마 주석
====4:1
헤브론 - 다윗이 유다 족속의 왕으로 즉위한 왕도(王都)이다.2:1 주석 참조.
손 맥이 풀렸고-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르푸 야다우'(* ) 는 '손이 약하여 졌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약하여졌다'는 동사는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힘이 빠진 상태, 곧 쇠진(衰盡)한 상태를 묘사하는 말이다(렘 6:24;50:43;겔 21:7).이와 같은 사실은 이스보셋이 아브넬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아마 그는 아브넬의 반역 행각과 비참한 죽음의 소식에 접하고선 이중적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Pulpit Commentary).
온 이스라엘이 놀라니라 - 사실 아브넬의 피살 소식은 온 이스라엘을 당혹감과 두려움에 빠지게 하기에 충분했다.왜냐하면 영웅적인 한 인물에게 국가의 운명을 의존하고 있던 고대 사회에서는 그러한 인물의 급작스런 죽음은 전국을 혼란 속으로 몰아넣기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4:2
군장 - 이에 해당하는 '사리 게두딤'(* )은 2:8에 나오는 군장,즉 '사르 차바'(* )와는 다른 말이다. 왜냐하면 '사르 차바'는 '군대 사령관'(chief of army)이란 뜻이지만 '사리 게두딤'은 단순히 '무리들의 우두머리'(captains of bands)란 뜻이기 때문이다.이로 보아 여기서의 '군장'은 군 전체의 지휘권을 행사하는 총사령관이 아닌 그 휘하에서 한 단위를 책임지던 자를 의미하는 듯하다.공동 번역은 이를 '특공대 대장'으로 번역하고 있다.
바아나...레갑 - '바아나'(Baanah)의 뜻은 '낙타를 타는 사람'이다. 이들은 친형제로서 악을 행하는 데 서로 손을 적시었다(5-7절). 베냐민 족속...
림몬의 아들들 - 바아나와 레갑의 혈통이 소개된다.그들은 이스보셋과 같은 베냐민 지파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사울 왕가를 무너뜨리는 반역의 선봉이 되었음은 비열한 공명심과 사악한 출세욕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8절 주석 참조.
브에롯 - 이스라엘이 기브온과의 조약(條約)을 맺을 때 얻은 네 성 중 하나이다(수 9:17).후에 이 성읍은 베냐민 지파의 14성읍 중 하나로 편입되었다(수 18:25).한편 많은 학자들이 이 '브에롯'(Beeroth)을 예루살렘 북방 15k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황폐한 도시'엘비레'(el Bireh)와 동일시여긴다(Josephus,Robinson,Wycliffe).
=====4:3
일찍 브에롯 사람들이 깃다임으로 도망하여 - '깃다임'(Gittaim)이 어디인가는 알려진 바 없다. 다만 느 11:33에 의하면 바벧론 포로 귀환 후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거주했던 곳 중의 하나로 '깃다임'이 언급되어 있는데 동일 지명 인지도 확실치 않다.그런데 브에롯 사람들이 깃다임으로 이주해 우거한 까닭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에 다음과 같이 두 견해로 나뉘고 있다. (1) 길보아 전투 (삼상 31장) 이후에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을 습격하자 브에롯을 버리고 깃다임으로 피신했다고 하는 견해이다(Keil,Patrick). (2)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했을 때(21:1,2)그곳을 떠났다고 하는 견해이다(Pulpit Commentary). 그런데 벧하우젠(Wellhausen)은 깃다임의 블레셋 '가드'(Gath),또는 '림몬(Rimmon)이라고 주장하였다(Lange). 만일 이 주장이 옳다면 (1)번의 견해는 모순된다. 왜냐하면 블레셋의 지경인 깃다임에 다시 들어간 다는 것은 논리상 맞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록 증명할 길은 없지만,(1)번의 견해보다 (2)번의 견해가 더 타당한 것 같다.
=====4:4
절뚝발이 아들...므비보셋 - '므비보셋'(Mephibosheth)의 뜻은 '부끄러움을 없애 버리는 자'이다. 그런데 다른 성경에 보면, 그의 본명은 '므립바알'(Meribbaal)인 것으로 나와 있다(대상 8:34;9:40). '므립바알'은 곧 '바알로 만족하는 자'란 뜻이다. 따라서 이같은 이름이 므비보셋으로 바뀌게 된 동기는 아마 에스바알이 이스보셋으로 바뀐 그것과 똑같을 것이다. 즉 바알 우상 숭배와 관련'바알'이란 이름을 혐오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이름 속에 철저히 '바알'이란 말을 배격한 것이다(Keil & Delitzsch,Lange).2:8 주석 참조. 한편,여기에서 저자가 므비보셋의 신상을 자세히 소개한 이유에 대하여선 다음과 같은 두 견해가 있다.(1)단순히 뒤에 벌어질 사건(9장)의 배경을 보여 주기 위해 기록되었다는 견해이다(Rust).이 견해는 므비보셋의 불구 상태(절뚝발이 상태)가 사울가의 몰락(이스보셋의 죽음)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입장이다.(2)사울가의 완전한 몰락을 보여 주기 위해 기록하였다는 견해이다(Keil & Delitzsch,Matthew Henry,Hertzberg,Pulpit Commentary).즉 이스보셋이 죽은 후(5-7절)에 사울가의 유일한 후계자로 므비보셋이 남으나,그는 절름발이어서 도저히 왕위를 계승할 수 없는 부적격자라는 사실이다.따라서 사울가는 실질적으로 완전히 몰락했음을 본 구절이 보여준다는 주장이다.우리는 1-4장까지의 문맥이 다윗가의 흥왕과 사울가의 몰락을 다루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에 근거해 볼 때 위 두 견해 중 두번째 견해가 보다 타당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전에 사울과 요나단의 죽은 소식이...올 때에 - 길보아 전투에서의 블레셋과의 싸움 중 요나단이 전사하고 사울은 자결한 소식(삼상 31장)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된 때를 가리킨다.
그 유모가 안고 도망하더니 - 아마도 블레셋군의 승전(勝戰)소식을 접한 므비보셋의 유모는 블레셋인들이 사울 왕가를 멸절시킬 목적으로 므비보셋마저 제거할 군사를 보내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그리하여 심각한 위기 의식에 젖어 므비보셋을 안고 은신처를 찾아 도피하였을 것이다(Matthew Henry's Commentary, Vol. II, p.464).
=====4:5
볕이 쬘 때 즈음에...낮잠을 자는지라 - 여기서 '볕이 쬘 때 즈음'이란 '정오','대낮'을 의미한다.팔레스틴 지역의 풍습으로 볼 때,이때는 이 지역 사람들이 오침(午寢)을 즐기는 시간이었다(2:29,32;3:26).이러한 습관은 사막 지대의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따라서 이스보셋이 이때에 낮잠을 잔 것은 헨리(M.Henry)가 해석한 대로 이스보셋의 극단적인 나태를 보여 주는 행위는 아니었다. 한편,이스보셋의 두 군장 레갑과 바아나가 이때에 이스보셋의 집에 온 것은 그가 잠들고 있는 동안 그를 암살하려고 했던 의도적인 행동이었을 것이다.
=====4:6
밀을 가지러 온 체하고 - 두 군장이 어떻게 해서 이스보셋의 침실에까지 들어올 수 있었는가를 설명해 주는 구절이다.여기에서 밀은 병사들에게 줄 군량(軍糧)을 의미한다(Keil,Lange). 이렇게 볼 때 그들은 군량,곧 밀을 가지러 왔다는 핑계를 대고 이스보셋의 침실에까지 무사히 들어간 것이 분명하다.아마도 그들은 이러한 군량 수송의 일을 자주 맡아 했기 때문에 문지기들의 의심을 조금도 받지 않았던 것 같다.한편,70인역(LXX)과 벌게이트역(Vulgate)은 이 구절을 엉뚱하게도'그 집의 문지기가 밀을 까부수다가 조는 동안에 몰래 숨어 들어갔다'라고 해석해 놓았다.영어 성경 중 이같은 해석을 따르는 것으로는 RSV와 Jerusalem Bible등이 있다.그러나 이 해석은 가장 오래된 성경이자 전통적 권위를 지닌 맛소라 사본(Masoretic Text)과 상충된다.그리고 그같은 개역(改譯)의 근거도 어디서 취하였는지 알 수 없다.따라서 그 같은 해석을 받아들이기는 곤란하다. KJV,NIV,Living Bible 등도 한글 개역 성경과 같은 번역을 취하고 있는 점을 볼 때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4:7
집에 들어가니 - 5,6,7절에서 두 군장이 이스보셋의 집에 들어갔다는 말이 계속 반복되어 있다.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이들이 그 집에 계속적으로 반복하여 출입했음을 뜻하지 않는다.왜냐하면 이와 같은 중복적(重複的)표현법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점진적으로 세밀하게 보여 주기 때문이다(Erdmann,Keil & Delitzsch,Lange,Philippson). 즉,5절은 두 군장이 이스보셋의 집에 들어간 단순한 사실만을 보여주며,6절은 5절보다 더 상세하게 그들이 어떻게 그곳에 들어갔는가를 보여 준다.그리고 7절은 결과적으로 그들이 그곳에 들어가 저지른 잔인한 범죄 현장을 묘사하고 있다.이와 같이 중복된 말들은 한 가지 사실을 점진적으로 확대 설명해 주기 위한 표현들이다.이렇게 볼 때,6절에서 두 군장에게 배를 찔리운 자는 어떤이의 견해처럼 그 집의 문지기가 아니라 본절에서 두 군장이 쳐죽이고 목을 벤 바로 그 이스보셋인 것이다.한편 같은 맥락에서 6절의 '도망하였더라'는 말은 본절에서 '밤새도록 아라바 길로 행하여'라는 말로써 확대 설명되어 있다.
아라바 길 - 아라바 길(the way of the Arabah)은 당시 이스보셋의 왕도(王都)마하나임(2:8)에서 헤브론으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이곳은 아브넬과 그 군대가 기브온 전투에서 요압과 휴전한 후 마하나임으로 퇴각할 때 거쳐갔던 길이기도 하다. 2:29 주석 참조. 그런데 마하나임에서 헤브론까지의 거리는 약 95km였다. 따라서 레갑과 바아나는 밤새도록 쉬지않고 약 20여 시간 동안 시속 5km 이상의 속력으로 걸어 헤브론에 도착했을 곳이다. 여기서 우리는 악을 향한 악인의 열심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다(롬 3:13-17).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의 이러한 열심은 자신들의 죽음을 재촉하였을 뿐임을 유의해야 한다(8-12절).
=====4:8
왕의 생명을 해하려 하던 원수 - 이 말은 두 군장,곧 바아나와 레갑이 이스보셋의 머리를 다윗에게 바치면서 이스보셋을 비난하는 말이다.그러나 그들의 이와 같은 비난의 말은 근거없는 것이었다.왜냐하면 이스보셋 진영과 다윗 진영이 서로 대치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스보셋이 개인적으로 앙심을 품고 다윗을 살해하고자 했던 흔적을 우리는 조금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따라서 그들의 이러한 말은 다윗의 후한 보상을 바라고 저지른 자신들의 잔인한 범죄(5-7절)를 마치 당연한 처사인 양 미화시켜 보이려 했던 비열한 언사(言辭)였음을 알 수 있다(Lange).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 - 이처럼 레갑과 바아나가 이스보셋이 '사울의 아들' 임을 강조한 것은 다윗으로 하여금 그 옛날 사울로부터 당한 생명의 위협을 회상토록 함으로써 사울 왕가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심을 갖게 하기 위함이었다(삼상 18:10,11;19:8-17;23:14).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기대는 완전히 빗나갔는데(9-12절)하나님 중심주의의 삶을 사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간의 의식(意識)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음을 보여 준다.
여호와께서...같으셨나이다 - 바아나와 레갑이 이렇게 말한 동기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다윗의 왕국을 반드시 세우실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Pulpit Commentary).그러나 그들이 상당한 보상을 바라고 다윗에게 이스보셋의 목을 가져왔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그들은 자신들의 범죄 행위를 호도(糊塗)하기 위해 이와 같이 여호와의 이름을 들먹인 것이 분명하다(Keil,Lange,Matthew Henry).이러한 사실은 그들이 이스보셋을 거명할 때,단순히 이스보셋이라고 하지 않고 다윗을 죽이려 한 사울 왕의 아들이라고 말한 사실에도 잘 나타나 있다.즉,그들은 자신들의 잔인한 범죄를 다윗 앞에서 감추기 위해 이와 같은 얕은 꾀로 공정한 마음을 혼란케 하려 하였던 것이다.
=====4:9
내 생명을...건지신 여호와 - 다윗이 이와 같은 말을 한 것은 레갑과 바아나의 범죄 행위가 다윗의 생명 유지에 아무런 필요도 없었던 것임을 밝히기 위함이다.즉,다윗 자신이 지금까지 여러 환난 가운데서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누구의 도움 때문이 아니라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고 있는 것이다(Matthew Henry).따라서 이는 바아나와 레갑이 말한 대로 실제로 이스보셋이 다윗을 죽이려 했다 할지라도 다윗이 자신의 생명을 위해 그들의 도움을 받을 필요는 전혀 없었다는 의미이다.즉 여기에서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을 들먹거리며 자신들의 범죄 행위를 무마(撫摩)해 보려 한 그들의 말이 신앙적인 측면에서 얼마나 모순된 것인가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4:10여기에서
다윗은 레갑과 바아나아게 일전에 사울 왕의 죽음의 소식을 보고한 아말렉 소년을 자신이 시글락에서 처벌한 사실(1:1-16)을 상기시키고 있다.그런데 이 같은 목적은 곧 바로 이 두 죄인들을 처벌하기 위한 정당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즉, (1)과거 죽임을 당한 사울 왕은 실제로 무고한 다윗을 죽이려 했던 죄인이었고(2) 사울을 죽였다고 주장한 아말렉 소년은 어쩔 수 없는 상황 중에 그렇게 했다고 사려(思慮)됨에도 불구하고(1:9,10)다윗은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함부로 죽였다는 이유로 아말렉 소년을 처벌하였다(1:14-16).따라서 이제 (1) 다윗을 살해하려 했다는 아무런 증거도 찾을 수 없는 무죄한 이스보셋을 (2)그것도 무자비하게 고의로 목을 벤 레갑과 바아나의 행위(5-8절)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인 것이다.
시글락 - 다윗이 사울에게 쫓길 때 가드 왕 아기스로부터 하사 받았던 은신(隱身)성읍이다.1:1 주석 참조.
그 기별의 갚음을 삼았거든 - 여기서'갚음'에 해당하는 '베소라'(* )는 본래 좋은 소식에 대한 보상을 의미한다.그러나 여기서는 역설적으로 악한 소식에 대한 죽음의 보상을 의미한다.
=====4:11
악인이 의인을...죽인 것이겠느냐 - 여기에서 다윗은 신앙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법적인 차원(the legal sphere)에서 악인(wicked man)과 의인(righteous person)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즉,이스보셋은 하나님 앞에서 신앙적으로 볼 때는 죄인일지 모르나,법적인 차원에서 볼 때는 사울의 왕권을 찬탈하거나 혹은 어느 누구를 죽이려 한 죄인은 아니었다.반면 바아나와 레갑은 법적으로 무고한 이스보셋을 잔인하게 살인한 악인이었다.따라서 그들의 살인 행위는 법적으로 도무지 용서받을 수 없는 분명한 범죄 행위였다(Keil & Delitzsch Commentary,Vol. II, p.311).
피흘린 죄 - 1:16 주석 참조.
=====4:12
수족을 베어...머리를 가져다가...장사 하였더라 - 다윗의 공정한 심판을 보여주는 구절이다.즉,다윗이 바아나와 레갑의 수족(手足)을 벤 것은 그들이 손과 발로 무고한 자의 목을 베어 헤브론까지 가져왔던 까닭이다(Keil & Delitzsch,Pulpit Commentary). 또한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져다가 헤브론에서 장사지낸 것은 그가 법에 저촉될 만한 어떠한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이와 같이 다윗은 아말렉 소년을 죽인 그 사건(1:1-16)과 마찬가지로 (1)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2)의와 불의를 공정하게 가리어 처단하였다.우리는 여기에서 다윗의 의로운 통치의 결정적인 요소,곧 공정성을 발견할 수 있다.한편,다윗이 바아나와 레갑의 수족을 베어 헤브론 못가에 매어 달은 까닭은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1)백성들에게 악인의 처참한 말로(末路)를 보여 줌으로써 범죄치 못하도록 경고하기 위함이다.(2)다윗 왕국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인 공의(公義)를 널리 증거하기 위함이다.(3)아브넬의 죽음의 경우(3:31-37)와 마찬가지로 이번 이스보셋의 죽음의 경우에도 전혀 무관함을 강조하기 위함이다(Lange,Keil & Delitzsch).
아브넬의 무덤에 - 이처럼 다윗이 이스보셋의 시신을 아브넬의 무덤에 합장(合葬)한 것은 생전에 저들의 관계를 고려해서였을 것이다.즉 그들은 생전에 사울 왕가의 왕과 군장 간이었으니(2:8,9)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였던 것이다(Lange).
< 설 교 >
이스보셋이 살해되다.
오늘은 사무엘하 4장 말씀을 공부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사무엘하 2장과 3장에서 살펴본 대로 아브넬이 하나님의 뜻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다윗에게로 돌리지 않고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욕망을 위하여 그렇게 행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첩 리스바의 일로 인하여 아브넬과 이스보셋 사이가 틀어졌습니다. 그제서야 아브넬은 이스라엘을 다윗에게로 돌리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아브넬을 다윗은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요압이 사적인 복수심으로 인하여 아브넬을 살해하였습니다. 아브넬이 다윗 편에 서려고 한 것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모두다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 행하였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스보셋이 레갑과 바아나에게 살해를 당하는 사건입니다. 레갑과 바아나가 이스보셋을 살해 한 것도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곧 다윗에게 좋게 보여 자기 유익을 구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들을 다윗은 어떻게 합니까? 아브넬과는 달리 죽여 버렸습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이 사건을 통해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1-3절을 보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아브넬의 헤브론에서 죽었다 함을 듣고 손맥이 풀렸고 온 이스라엘이 놀라니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 군장 두 사람이 있으니 하나의 이름은 바아나요, 하나의 이름은 레갑이라. 베냐민 족속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들이더라. 브에롯도 베냐민 지파에 속하였으니. 일찍 브에롯 사람들이 깃다임으로 도망하여 오늘까지 거기 우거함이더라”고 했습니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아브넬이 헤브론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스보셋은 손의 맥이 풀렸습니다. 그리고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히 놀랐습니다. 사울의 군대 장관이요, 자신을 세워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한 아브넬이 죽었다는 것은 이스보셋에게나 이스라엘의 미래에 암담을 가져다주는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 군장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의 이름은 바아나요, 하나의 이름은 레갑이었습니다. 이들은 베냐민 족속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들이었습니다. 브에롯은 여호수아서 9장에 보면 기브온 족속이 여호수아에게 항복할 때에 속한 네 성읍 중의 한 성읍입니다. 여호수아서 9:17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진행하여 제 삼일에 그들의 여러 성읍에 이르렀으니. 그 성읍은 기브온과 그비라와 브에롯과 기럇여아림이라”고 했습니다. 이 브에롯은 베냐민 지파에 속해 있었습니다. 3절을 다시 보면 “일찍 브에롯 사람들이 깃다임으로 도망하여 오늘까지 거기 우거함이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삽입구입니다. 사무엘서 저자 당시에 브에롯이 베냐민 지파에 속해 있었는데 이스보셋 왕을 죽인 두 군장들의 반역사건으로 인해 그 후손들이 자신들의 원래 고향에서 쫓겨나 깃다임이라는 지역으로 도망을 가서 거기서 외지인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4절을 보면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절뚝발이 아들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므비보셋이라. 전에 사울과 요나단의 죽은 소식이 이스르엘에서 올 때에 그 나이 다섯살이었는데 그 유모가 안고 도망하더니. 급히 도망하므로 아이가 떨어져 절게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보면 이스보셋의 두 군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의 이야기가 등장을 합니다.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사울과 요나단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을 때 그의 나이가 다섯 살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모가 그를 안고 급히 도망을 가다가 아이를 떨어뜨려서 다리를 다쳐 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왜 갑자기 므비보셋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제 사울의 혈통에서는 왕이 될 만 한 자가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울의 마지막 혈통이 므비보셋이었는데 그가 절름발이었습니다. 절름발이라는 말은 왕의 자격이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렇게 됨으로써 온 이스라엘이 다윗에게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 사무엘하 5장에서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오늘 본문에서 레갑과 바아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늘 본문 5-8절을 보면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바아나가 행하여 볕이 쬘 때 즈음에 이스보셋의 집에 이르니 마침 저가 낮잠을 자는지라. 레갑과 그 형제 바아나가 밀을 가지러 온 체하고 집 가운데로 들어가서 그 배를 찌르고 도망하였더라. 저희가 집에 들어가니 이스보셋이 침실에서 상 위에 누웠는지라. 저를 쳐 죽이고 목을 베어 그 머리를 가지고 밤새도록 아라바 길로 행하여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 왕에게 이스보셋의 머리를 드리며 고하되 왕의 생명을 해하려 하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 되신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바아나가 이스보셋의 집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마침 이스보셋은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레갑과 바아나는 밀을 가지러 온 체하고 그 집으로 들어가서 이스보셋의 배를 칼로 찌르고 도망을 갔습니다. 그런 후에 다시 집에 들어가 침실에 누워 있는 이스보셋의 목을 베어 마하나임에서 헤브론까지 밤새도록 달려서 다윗에게로 와서 그 머리를 받쳤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왕의 생명을 해하려고 하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하면서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 되신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의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8).
그러면 이들이 왜 이런 일을 하였을까요? 이들의 이와 같은 행위를 한 것은 다윗에게 투항하면서 어떤 보상을 바랐던 것 같습니다. 이들의 생각에는 사울이 다윗의 정적이었기 때문에 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지고 오면 다윗이 자신들에게 큰 상을 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또한 이들이 이렇게 한 이면에는 사울에 대한 원망도 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레갑과 바아나는 기브온 족속 사람입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열정으로 이미 언약으로 편입된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일이 있습니다. 이것은 맹세를 어긴 행위였습니다. 여호수아서 9장에 보면 기브온 거민이 여호수아를 속이고 화친을 맺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여호수아의 여리고성과 아이성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사신의 모양으로 꾸미고 마치 멀리서 온 것처럼 위장하여 화친을 청하였습니다. 이에 여호수아는 그들을 살리리라고 언약을 맺었습니다. 여호수아 9:15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언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이 맹세를 어기고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다윗 시대에 삼년 기근이 왔습니다.
사무엘하 21:1-2절을 보면 “다윗의 시대에 연부년 삼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함이니. 저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저희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저희 죽이기를 꾀하였더라. 이에 왕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 물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기초해서 볼 때 레갑과 바아나는 자기들의 동족을 죽인 사울체제 하에서 어쩔 수 없이 살아가다가 이제 아브넬까지 죽고 나자 개인적인 복수는 물론이거니와 다윗으로부터 보상을 바라면서 이스보셋을 죽이고 그의 머리를 들고 다윗에게로 온 것입니다. 이들은 자기의 유익을 따라 행한 것입니다.
그동안 다윗 주변에 몰려온 자들이 어떤 자들이었습니까? 사울이 살아있는 동안은 환난 당하고 빚지고 원통한 자들이 어쩔 수 없이 다윗에게로 피하여 왔습니다(삼상 22:2). 이러한 자들 가운데서도 자기들의 의를 자랑하는 자들이 나왔습니다. 사무엘상 30장에서 본 것처럼 시글락에서 아말렉 사람들을 추격할 때에 낙오병들에게 아무 것도 주지 말고 가족만 돌려주고 쫓아버리자고 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30:22절을 보면 “다윗과 함께 갔던 자 중에 악한 자와 비류들이 다 가로되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은즉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 사람의 처자만 주어서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 하는지라”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다윗에게 피하여 올 때의 형편을 잊어버리고 자기들이 다윗을 따라 힘들지만 전투에 끝까지 함께 했다는 공로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사울이 죽고 아브넬과 이스보셋 마저 죽고 나자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다윗에게로 옵니다. 그 이유는 대세가 어디로 흐르는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말로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들먹이지만 결국 그들은 자기 살기 위해서 다윗 편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빈손으로 오지 않고 무언가 다윗에게 도움이 될 만 한 선물을 가지고 오려고 자기들이 섬기든 왕의 목을 베어서 들고 왔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죄악된 본성입니다.
그러면 이스보셋의 목을 가져온 자들에 대한 다윗의 반응은 어떠하였습니까? 9-12절을 보면 “다윗이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그 형제 바아나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전에 사람이 내게 고하기를 사울이 죽었다 하며 좋은 소식을 전하는 줄로 생각하였어도 내가 저를 잡아 시글락에서 죽여서 그것으로 그 기별의 갚음을 삼았거든 하물며 악인이 의인을 그 집 침상 위에서 죽인 것이겠느냐. 그런 즉 내가 저의 피흘린 죄를 너희에게 갚아서 너희를 이 땅에서 없이 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소년들을 명하매 곧 저희를 죽이고 수족을 베어 헤브론 못가에 매어달고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져다가 헤브론에서 아브넬의 무덤에 장사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레갑과 바아나에게 말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한다고 합니다. 이 말은 다윗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은 자신의 권모술수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전에 사울의 죽음을 전한 자가 다윗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는 줄 알고 왔지만 그를 죽여 버렸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1장에서 살펴본 내용으로 아멜렉 사람이 전리품을 취하기 위해 길보아 산에 갔다가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것을 보고 다윗에게 큰 상을 기대하고 사울의 투구와 팔 고리를 벗겨 와서 다윗에게 받쳤습니다. 사무엘하 1:9-10절에 보면 그 아멜렉 사람은 다윗에게 “사울이 부상을 입고 죽여 달라고 요청하여 죽이고 투구와 팔 고리를 가지고 왔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다윗과 다윗과 함께 한 자들은 그 소식을 듣고 옷을 찢으며 슬퍼하며 금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아멜렉 사람을 쳐 죽이게 하였습니다. 다윗은 바로 이 이야기를 예로 들어서 “하물며 악인이 의인을 그의 집 침상 위에서 죽인 것이겠느냐. 그런즉 내가 저희 피흘린 죄를 너희에게서 갚아서 너희를 이 땅에서 없이 하지 아니하겠느냐”고 합니다(11). 그래서 그 두 사람 곧 레갑과 바아나를 죽이고 수족을 베어 헤브론 못가에 달아 버립니다. 그리고 이스보셋의 머리는 헤브론에서 아브넬의 무덤에 장사하였습니다.
사무엘서 저자는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주는 나라는 이런 자들 곧 레갑과 바아나와 같은 자가 설 자리가 없음을 보여줍니다. 다윗이 사울의 왕관을 가져온 아말렉 소년을 죽인 것은 요나단에 대한 인간적인 의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지고 온 레갑과 바아나를 죽인 것도 정치적인 계산이나 이익에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이 임하였기 때문에 다윗이 그렇게 행한 것입니다. 다윗은 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언약의 나라가 어떠함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 편에 오면서 자기들의 이해득실을 따라 오는 자들과 자기들의 공로를 들고 오는 자들을 다윗이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죽여 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나라와 세상의 회사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레갑과 바아나가 아무리 주의 이름을 들먹이며, 다윗을 자신의 주로 고백하여도 다윗은 이들을 죽여 버립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의 나라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다윗의 편에 서려고 하는 것입니까? 자기 유익을 위해서 입니다. 다윗의 편에 서려고 하는 자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나아오지만 사울 치하에서는 다윗의 편에 서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습니다만 다윗이 언제 죽을지 모를 정도로 사울의 추격을 피하여 이곳저곳으로 정처 없이 유리하며 도망 다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사울이 죽고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의 왕으로 등극할 것이 가시화되자 앞 다투어서 다윗의 편에 서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다윗 편에 서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다 자기 유익을 따라서 다윗 편에 서고자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 땅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편에 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날 교회가 사람들로부터 많은 욕을 얻어먹고 있지만 그래도 기독교인의 수가 많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예수님의 편에 서려고 나왔겠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이 어떤 것이지 알고 따라 나선 것입니까? 여러분들은 왜 기독교라는 종교를 택하였습니까? 왜 교회에 나옵니까? 과연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입니까? 물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주님 편에 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예수님을 믿고 이 세상에서 복을 받기 위해서 곧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자들과 같이 자기 유익을 위해서 따르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잘 점검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유익을 위해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교회에 나오고 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진정 주님을 사랑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예배를 드리고 헌신을 한다고 할지라도 멸망당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14:25-35절을 보면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 없어 내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 치러야 할 많은 비용이 있습니다. 자기부인,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순교의 길을 가야 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계산을 잘 해 보고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과연 누가 스스로 이 길을 가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는 줄기차게 이런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면 다윗 편에 서기 위해서 무언가 들고 오려고 한 자들과 같은 자들은 다 떨어져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편에 서는 자가 있다면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이라도 잘 계산해 보고 내가 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주님을 믿고 따르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지금이라도 안 되겠다고 싶으면 돌아서는 것이 낫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나의 소유라는 것이 다 버려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버릴 능력이 없기에 우리 주님께서 나의 소유라는 모든 것을 친히 차압해 가십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주님 편에 서시겠습니까?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왜 주님을 따르는지 돌아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자신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주님이 우리의 목적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레갑과 바아나와 같은 자가 되지 않게 하시고, 오직 우리 주님을 사랑하여 우리 주님 편에 서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멸망의 자식이 되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언약에 참예 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이스보셋의 죽음과 다윗의 대응
사무엘하 4장 1~12절 / 이준원목사
지금까지 일어난 일 정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믿음으로만 살기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며 당장 인생이 잘 풀릴 것으로 기대하기 쉽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며 순종하면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잘 풀어주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믿음으로 나아가더라도 이 세상에 살면서 여러 반대에 부딪히며 실패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의심하게 됩니다. ‘믿음으로 나가라고 하시고서는 왜 이런 강한 반대에 직면하여 실패하게 하시는가? 왜 이렇게 힘든 상태에서 오래 기다리게 하시는가?’라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의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의 사람으로 이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의 길로 나아갔기 때문에 실패한다면, 믿음으로 순종했기 때문에 실패를 경험하는 그 시간이 오히려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굉장히 유익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대로 아주 잘 풀리고 인생이 탄탄대로라면 그것은 두려워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 때문에 손해 보고 실패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경험이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실패 가운데 모든 일을 주권적으로 행하시는 하나님을 진짜로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실패를 경험하며 기다리는 가운데 자신 안에 있는 모든 불신앙을 치료받을 수 있고, 특히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거기서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성공하기만 하고 잘되기만 하면 얻을 수 없는 지혜를, 우리는 믿음으로 인한 실패를 통해 얻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왕들을 보면 다윗보다 더 많은 고생을 하고 왕이 된 사람이 없습니다. 사울도 그랬고 솔로몬은 부귀영화만 누렸으며 뒤에 오는 모든 왕도 다윗처럼 고생하고 왕이 된 사람은 없습니다.
다윗은 오랫동안 사울 왕에게 쫓기는 처지였고 또 사울이 죽은 후에도 무려 7년 동안이나 이스보셋과 아브넬의 반대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 못한 채 유다 지파만의 왕으로 있었습니다. 사울만 죽으면 다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이것만 풀리면 내가 잘될 것이다.’라고 했는데 또 문제가 오고, ‘이것만 해결되면 될 것이다.’ 했는데 또 문제가 있습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 믿음의 사람은 그런 데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거기에서 원망하고 불평하고 낙심하며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상황을 허락하신 것에 대해 왜 그러시는지 헤아려보면서 기다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바로 그렇게 기다리는 가운데 위대한 다윗 왕이 만들어졌습니다. 다른 왕들은 그런 기간이 없었습니다. 특히 사울은 그런 기간이 없었기 때문에 바로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이 기간 동안 다윗이 배운 것은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조급하게 서두르지 않고 죄를 짓지 않으며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해 나아가면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 모든 반대 세력이 제거되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더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실패한 상태에서 오래 기다리는 것은 아주 중요한 체험임을 알아야겠습니다.
지금까지를 정리해보면, 다윗이 왕이 되지 못하는 데에 가장 큰 걸림돌이 아브넬과 이스보셋이었습니다. 사울만 죽으면 자기가 왕이 될 줄 알았는데, 사울이 죽고 나서도 7년 동안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다윗을 대적해서 나라를 세운 아브넬과 이스보셋만 없어지면 다윗이 쉽게 왕이 되지 않겠느냐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데, 실제로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다윗이 왕이 되는 것을 많은 사람이 두려워하며 싫어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다윗이 왕이 되는 것을 시기하고 싫어하는 자들이 많았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놀랍게도 사람들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만 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사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면서도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너무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고 너무 성경적으로만 하면 불편해하고, 오히려 적당히 인간적인 방법을 섞어서 하기를 선호합니다.
참 슬픈 현실인데, 교회도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모든 것을 이끌어 나가면 좋을 것 같지만, 그렇게 해야 함에도 실제로 성경대로만 하면 답답해하고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따라가면 모두 다 좋아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모든 것을 처리하면 독선적이며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를 옥죄고 자기가 거기에 얽매인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완전히 반대인데 그것을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살면 거기에 자유가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생명의 삶> 공부 때도 이야기하는 내용인데, 탁구 칠 때 탁구를 잘 치는 사람, 정말 자유롭게 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있는 힘을 다해 휘두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힘 있는 대로 휘두르면 어떻게 됩니까? 네트에 걸리거나 밖으로 나가 버립니다. 정말 자유를 가진 사람은 자기가 공을 보내고 싶은 곳에 길게면 길게, 짧으면 짧게, 또 왼쪽 오른쪽 자유자재로 보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잘 치는 사람이고 자유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유는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훈련으로 이루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는데, 자기 마음대로 살면 인생이 망가집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아서 중독되어 병원에 실려 가거나 죽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 마음대로 살면 인간이 망가집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인간이 살아납니다. 하나님 말씀은 오히려 우리에게 자유를 줍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을 오해하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불편해지고 답답해지니까 적당히 타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믿는 사람도 그렇게 말합니다. 다윗 때 바로 그런 사람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다윗은 아브넬과 이스보셋만 없어지면 자기가 곧바로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으로 생각했을 텐데, 실제로는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미 사울의 인간적인 통치에 길들여 있었습니다. 오히려 다윗의 지나친 하나님 중심주의로 나아가며 하나님을 항상 찬양하고 경배하며 노래하는 것에 대해 오히려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넬과 이스보셋이 반대하는 동안 다윗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 기다리는 동안에 양쪽을 비교할 수 있는 기회가 있지 않았겠습니까? 이스보셋과 아브넬은 이스라엘 열한 지파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너무나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유다 지파 한 지파였지만, 그의 통치는 힘이 있었고 신선했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마음이 다윗 쪽으로 기울게 되는 겁니다.
때가 되자 하나님은 다윗의 걸림돌을 하나씩 제거하셨습니다. 다윗이 7년을 기다리지 않고 ‘내 힘이 강하니까 나가 싸워서 정복하겠다.’라고 했으면 일을 그르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알아서 걸림돌을 치워주십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사람이 아브넬인데, 하나님의 때가 되니까 자기들끼리 분열이 일어나면서 이스보셋을 배신하여 나라를 넘기겠다고 스스로 찾아왔습니다.
사실 아브넬이 다윗 쪽으로 오더라도 그게 좋은 게 아닙니다. 좋을 것 같지만, 사실 아주 골치 아픈 문제 거리가 되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사람이 와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 나라를 내가 주었는데!’ 하며 얼마나 유세를 떨겠습니까? 다윗이 조금만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내가 준 나라를 이렇게 할 수 있느냐?’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 아브넬이 모두 다윗에게 가자고 다른 사람들을 실컷 설득해놓고는 허무하게 요압의 칼에 찔려 죽고 말았습니다. 이것도 참 놀라운 역사입니다. 이때 다윗은 아주 지혜롭게 행동했습니다. ‘아브넬이 잘 죽었다.’라고 하지 않고, 요압을 저주하며 아브넬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자기로부터 멀어질 수도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열한 지파 사람들의 마음을 아브넬 애도를 통해 안심시킨 겁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 하면 다윗이 고난을 통해 지혜를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냥 강하게 밀어붙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지혜를 배웠습니다. 바로 그런 데서 나온 지혜입니다. 다윗은 한편으로는 요압을 저주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브넬을 애도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붙들었습니다. 아브넬이 죽자 이스보셋 쪽의 사람들의 마음은 급격하게 허물어집니다.
1. 이스보셋의 절망 (1~3절)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은 아브넬이 헤브론에서 죽었다 함을 듣고 손의 맥이 풀렸고 온 이스라엘이 놀라니라” (1절)
아브넬이 죽었다는 소식은 이스보셋에게는 한마디로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그가 절망한 이유가 뭡니까? 그와 그의 정권이 하나님을 신뢰하여 세워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여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보셋에게는 아브넬이 산성이요 방패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나의 산성이시며 나의 방패이십니다.’라고 시편에서 노래하지만, 이스보셋은 아브넬을 향해서 ‘당신이 나의 산성이시며 방패입니다.’라고 하는 관계였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해도 자기가 힘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아브넬을 굉장히 부담스러워하고 힘들어하면서도 아브넬이 죽었다고 하니까 그대로 무너집니다.
사실 사람의 눈으로는 아브넬을 볼 때 굉장히 믿을 만한 사람입니다. 굉장한 장군이고, 힘도 있고, 노련하고, 정치적으로도 교묘한 술수를 많이 쓰는, 아주 믿을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눈으로는 그렇게 보였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눈으로는 결코 신실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냥 악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보셋은 그런 사람을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의지하던 이스보셋은 아브넬이 죽었다는 소식에 마음이 녹아 내립니다. ‘손에 맥이 풀렸다’고 개역개정에서 표현하고 있는데, 용기를 아예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스보셋 정권이 의지했던 것들은 혈연, 군사력, 백성들의 인기, 세상 영화 같은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잘 나가고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거기 계시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고 인간의 지혜와 수단을 의지하며 살아가면, 그런 것들이 없어질 때 엄청난 절망감을 느끼며 두려움을 갖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의지하던 게 없어지면 여기 표현처럼 손에 맥이 풀리며 그냥 주저앉는 상황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갑자기 두렵거나, 맥이 풀리거나, 힘이 없어지거나, 머리가 띵하면서 쓰러지거나, 굉장히 걱정이 되고 불안해지는 때가 언제입니까? 그렇게 두려워하고 불안해질 때 내가 왜 이런지 생각해 보십시오. 대부분 내가 의지하던 게 흔들리니까 나도 흔들리는 겁니다.
그런 삶의 기초는 너무 허약합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마치 모래 위에 지은 집과도 같습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지으니까 홍수가 나면 그냥 쓸려가고 없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반석 위에 기초를 세워야 합니다. 그래야 어려움이 와도 견딜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의 힘을 의지하면 처음에는 일이 잘 풀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뭔가 일이 터지면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나 하고 찾아가지 않습니까? 지혜와 힘을 빌리고 연줄을 찾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사람을 의지했을 때는 일이 꼬이고 힘들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힘이 들더라도 아예 처음부터 결단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혹시 사람들이 배반하거나 사라진다 해도 모든 것이 다 끝나 버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기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스보셋뿐 아니라 온 이스라엘도 놀랐다고 합니다. 이제 드디어 모든 백성도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지고 있구나 하고 느낀 겁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다윗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사울의 집에 붙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다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세우신 것을 다 알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일부러 복종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편에 붙어 있었던 것입니다.
5장에서 사람들이 다윗을 이스라엘 전체의 왕으로 세우겠다고 올 때 보면, 이스라엘 장로들의 말을 통해 그들은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하시고 다윗은 이미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이고 다윗이 자기들을 위해 얼마나 많이 싸웠는지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다윗을 대적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다윗을 반대하여 이스보셋을 내세워 나라를 세웠던 아브넬이 죽임을 당한 것을 본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다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브넬을 심판하신 하나님이 자기들까지 심판하실 것이라는 두려움을 품게 된 것입니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 군지휘관 두 사람이 있으니 한 사람의 이름은 바아나요 한 사람의 이름은 레갑이라 베냐민 족속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들이더라 브에롯도 베냐민 지파에 속하였으니, 일찍이 브에롯 사람들이 깃다임으로 도망하여 오늘까지 거기에 우거함이더라” (2-3절)
꼭 필요한 것 같지 않은 내용이 여기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있습니다. 아브넬의 죽음 소식을 들은 이스보셋에게 남은 희망이 있다면, 자신의 곁에 아직 남아있는 베냐민 지파 친척들이었고, 그중에서도 특히 군대 장관들이었습니다. 그중 두 군지휘관 바아나와 레갑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베냐민 족속 브에롯 사람이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림몬의 아들들, 즉 형제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브에롯 족속 출신이었는데, 브에롯은 기브온 사람들의 중심 도시였습니다(삼하 21:2).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인도 아래 정복 전쟁을 펼칠 때, 기브온은 가나안 민족이면서도 이스라엘에게 항복합니다. 자기들이 멀리서 온 사람들인 것처럼 꾸미고 와서 이스라엘과 화친을 맺어 살아남은 사람들입니다. 비록 자기들을 속이고 언약을 맺었지만 언약은 언약이라고 인정하여 대신 이스라엘의 종으로 섬기도록 하고 받아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기브온 사람들이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닌데, 베냐민 지파에게 그쪽 땅을 주었기 때문에 베냐민 지파 안에 들어와서 베냐민 지파가 되어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나중에 21장에서 이것이 무슨 뜻인지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사울 왕이 자신의 지파인 베냐민에서 원래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지만 화친을 맺어 베냐민으로 들어온 기브온 사람들, 특히 그중에도 브에롯 사람들의 피를 없애버리려는 속셈으로 기브온을 공격하여 많은 사람을 살육하는 일을 벌였습니다. 성경에는 그 사건이 나오지 않는데, 나중에 보면 사울이 그런 일을 벌였다고 기브온 사람들이 다윗에게 와 호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따라서 이 두 사람(레갑, 바아나)은 사울 곁에서 그동안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해오다가 이제는 이스보셋 정권 아래서는 군지휘관의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그러다 이제 아브넬도 죽고 나라가 기울게 되니까, 자기 원래 동족의 원수를 갚는 것과 동시에 다윗의 환심을 사서 한 자리 차지하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레갑과 바아나의 출신 성분은 원래 이스라엘이 아니었던 기브온 출신으로 베냐민으로 들어왔는데, 베냐민 출신 사울 왕 밑에 있었고 이제 또 그 아들 이스보셋이 왕이 되어 다윗을 대적할 때도 그 밑에 있었고, 군지휘관이라는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다가 아브넬이 죽고 나니까 이제는 이스보셋을 암살하는 자들이 되었다는 겁니다.
2. 레갑과 바아나의 반역 (4~8절)
그런데 오늘 본문은 레갑과 바아나의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전혀 다르게 보이는 한 사건을 집어넣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의 절친이었던 요나단의 살아남은 아들 므비보셋에 대한 기록입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다리 저는 아들 하나가 있었으니 이름은 므비보셋이라 전에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소식이 이스르엘에서 올 때에 그의 나이가 다섯 살이었는데 그 유모가 안고 도망할 때 급히 도망하다가 아이가 떨어져 절게 되었더라” (4절)
다윗과 언약을 맺고 목숨까지 내어줄 정도로 서로 사랑했던 요나단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므비보셋입니다. ‘보셋’이 같아서 헷갈릴 수 있는데, 사울의 아들로서 다윗을 대적하여 왕국을 세우고 왕이 된 사람은 이스보셋이고, 다윗과 생명을 나누는 친구였던 요나단(사울의 아들)의 아들이 므비보셋입니다. ‘보셋’은 사실 ‘수치’라는 뜻입니다.
므비보셋이 사울과 요나단이 죽을 때 다섯 살이었다고 여기 되어 있습니다. 이제 7년 정도 지났으니까 그 나이가 열두 살 정도가 된 겁니다. 다섯 살 때 유모가 그를 안고 뛰다가 떨어뜨려서 다리가 잘못되어 장애가 생겨 제대로 걷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왜 이 이야기가 아무 관련이 없는 것 같은데 여기에 끼어들어 있는 겁니까? 처음 사무엘하를 읽는 사람들과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무엇을 느끼겠습니까? 여기서 이스보셋이 암살당하는 장면이 곧 나오는데, 그렇다면 금방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스보셋이 죽으면 그다음 왕은 누가 될 것인가?’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이제는 유일한 사울 계통 왕위 계승자 후보가 다름 아닌 다리를 저는 므비보셋이라고 밝힘으로써,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될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는 의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정말 왕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다윗밖에 없다는 것을 여기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왕이 전쟁의 지도자이자 야전 사령관 역할을 겸하여 나가서 싸웠기 때문에, 다리를 쓰지 못하는 므비보셋은 이스라엘을 이끄는 적합한 왕이 아니라는 것을 여기서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전에 다윗이 요나단과 함께 언약을 맺을 때 누가 살아남든지 친구의 후손들을 돌봐주자고 약속했기 때문에,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을 다윗이 책임지고 은혜를 베풀어주는 의미도 여기에 깔려 있습니다.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바아나가 길을 떠나 볕이 쬘 때 즈음에 이스보셋의 집에 이르니 마침 그가 침상에서 낮잠을 자는지라. 레갑과 그의 형제 바아나가 밀을 가지러 온 체하고 집 가운데로 들어가서 그의 배를 찌르고 도망하였더라” (5-6절)
이스라엘은 낮에 무덥기 때문에 중동 지방 사람들은 낮에 잠을 잡니다. 여기 보면 “볕이 쬘 때 즈음에”라고 되어 있는데, 굉장히 뜨거울 때입니다. 즉 낮잠을 자는 시간이었습니다. 레갑과 바아나가 한낮에 이스보셋의 집에 들어간 것은 이스보셋이 낮잠 자는 시간을 일부러 노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레갑과 바아나는 군대에서 필요한 밀을 가지러 온 것처럼 꾸미면서 이스보셋의 집 가운데까지 들어갈 수 있었고, 그때 잠을 자던 이스보셋의 배를 찌른 다음 도망갑니다.
“그들이 집에 들어가니 이스보셋이 침실에서 침상 위에 누워 있는지라 그를 쳐 죽이고 목을 베어 그의 머리를 가지고 밤새도록 아라바 길로 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 왕에게 이스보셋의 머리를 드리며 아뢰되 왕의 생명을 해하려 하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 되신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의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 하니” (7-8절)
브에롯 사람 레갑과 바아나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자기 동족의 원수를 갚으면서 동시에 다윗의 환심을 사기 위한 의도로 이스보셋을 살해하고 그 머리를 베어서 다윗에게 갑니다. 다윗에게로 온 바아나와 레갑은 이스보셋의 머리를 그에게 바치면서, 다윗을 향한 자신들의 충성을 부각하기 위해 그 머리가 다윗의 원수 사울의 아들 것이며 자신들의 행위가 다윗에게 나라를 주기로 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른 것처럼 떠벌이고 있습니다. ‘여호와’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자신들의 죽음을 재촉하는 원인이 되고 맙니다.
레갑과 바아나는 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다윗에게 항복하기만 하면 되었는데, 다윗으로부터 상을 얻기 위해 잠을 자던 자기들의 왕 이스보셋을 찔러 죽이고 그 머리를 베어가지고 다윗에게로 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가 자기 무덤을 판 꼴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굳이 이스보셋을 죽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냥 놓아두고 다윗에게 투항해도 나중에 다윗이 이스보셋 정권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레갑과 바아나가 이스보셋의 배를 찌르고 도망쳤다가 다시 왔다고 볼 수 있는데, 그들이 치밀한 암살 계획을 세운 것은 아니라 그냥 들어가서 자고 있는 것을 보고 찔렀다가 이스보셋이 칼에 찔려 소리를 지르니까 겁을 먹고 일단 피신했다가 다시 돌아와 목을 베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스보셋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고 정말 불행한 사람입니다. 자기도 권력을 잡아보겠다고 나름대로 애쓰면서 아브넬의 꼭두각시 역할을 하더라도 자기가 왕으로 있겠다고 버티다가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애초부터 다윗을 대적해서 나라를 세우는 데에 가담하지 않고 물러났으면 괜찮았을 텐데, 그도 권력욕이 있었던 겁니다. ‘내 말만 잘 들어. 그럼 왕 시켜줄게.’라고 왕을 시켜준다니까, 아브넬의 꼭두각시가 되더라도 왕이 되고 싶었던 겁니다. 그래서 자기 아버지 사울처럼 왕이 되 보려고 하다가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런데 더 슬픈 것은, 그가 죽을 때 그의 곁에 아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끝까지 충성한 부하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레갑과 바아나 같은 사람이 아브넬 죽음 이후에 자기를 보호해주어야 할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이 자기를 죽였습니다.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최대 비극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다 세상을 떠납니다. 인간의 사망률이 얼마입니까? 100%입니다. 우리는 다 죽습니다. 이중 영원히 이 땅에서 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다 떠납니다. 그러니까 떠나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차피 다 떠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떠날 때 내 곁에 누가 있는가입니다. 아무도 없다면 얼마나 실패한 인생이겠습니까? 아무리 떵떵거리고 돈이 많고 부귀영화를 누려도, 내가 죽을 때 내 곁에 아무도 없다면 이 얼마나 비극입니까?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내가 세상을 떠날 때 나와 함께 해줄 사람이 있습니까?
장례식을 할 때 보면 정말 아름다운 장례예배가 있습니다. 누군가 돌아가시면 정말 많은 사람이 모여서 그분에 대해 회고하고 이렇게 훌륭한 분이셨다며 여러 가지 미담을 나눕니다. 제가 잘 아는 목사님이 캘리포니아에 사시는데, 얼마 전 그 목사님의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90대 장로님이셨는데, 남긴 것은 거의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 심지어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까지 구름 떼 같이 장례예배에 와서 아버님을 기리고 회고하고 감사하며 너무나 아름다운 장례예배를 드렸다고 들었습니다.
반면, 너무나 쓸쓸한 장례식도 있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와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심지어 죽은 것도 모릅니다. 정말 안타까운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이 세상을 떠날 때 어떨까?’ 결국 이 세상을 떠나는 그때가 문제가 아니라 그 전에 어떻게 살았느냐가 문제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정말 잘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잘 살고, 사람들 보기에도 아름다운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은 잘될 수밖에 없습니다.
3. 반역자들의 최후 (9~12절)
이제 다윗은 이스보셋을 죽이고 그 머리를 베어 가지고 온 레갑과 바아나를 결코 기뻐하지 않습니다. 뭐라고 합니까?
“다윗이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그의 형제 바아나에게 대답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내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전에 사람이 내게 알리기를 보라 사울이 죽었다 하며 그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줄로 생각하였어도 내가 그를 잡아 시글락에서 죽여서 그것을 그 소식을 전한 갚음으로 삼았거든, 하물며 악인이 의인을 그의 집 침상 위에서 죽인 것이겠느냐 그런즉 내가 악인의 피흘린 죄를 너희에게 갚아서 너희를 이 땅에서 없이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9-11절)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그 두 사람에게 의롭게 대우해 준 왕을 불의한 방식으로 죽인 그 행위가 명백히 하나님 앞에서 죄라고 밝힙니다. 다윗은 이전에도 사울의 죽음 소식을 전하며 칭찬과 명예를 얻으려다가 죽임을 당한 아말렉 소년의 예를 들면서, 레갑과 바아나 두 사람 역시 자신들의 피 값으로 죽임을 당해야 마땅하다고 선포합니다.
다윗을 기쁘게 하는 것은 이런 원수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그가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주님의 마음 아닙니까? 우리 하나님은 죄인, 악인이 그냥 망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회개하고 믿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죄인이 죽어 가는 것을 그냥 놓아두거나 그들이 죽는 것을 기뻐한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미워하시며 진노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악인이 벌을 받아 죽었다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악인이 주님께 돌아오기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누가 봐도 악한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이 죽으면 잘 죽었다고 좋아할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빨리 마음을 돌이켜 주님께 돌아오도록 기도해야 하고, 만약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면 안타까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원수가 인생에서 괴로움을 당한다고 기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진노하실 일입니다.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청년들에게 명령하매 곧 그들을 죽이고 수족을 베어 헤브론 못 가에 매달고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져다가 헤브론에서 아브넬의 무덤에 매장하였더라” (12절)
다윗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못 되고는 이스보셋이나 어떤 인간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린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레갑과 바아나를 처형하여 팔다리를 베고 헤브론 못 가에 달아 두었습니다.
사악한 죄를 지은 사람이 당할 저주를 온 백성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이렇게 한 것인데, 특히 수족을 벤 것은 그들의 손과 발이 이스보셋을 살인하는 도구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다윗은 이스보셋의 머리를 아브넬의 무덤과 함께 장사지내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이렇게 다윗처럼 원수를 사랑하고 끝까지 돌봐주며 선으로 대해주는 사람입니다.
[나가는 말]
레갑과 바아나는 아주 악한 자들이었습니다. 자기들의 왕인 이스보셋을 배신하고 그를 죽였을 뿐 아니라 그것을 통해 큰 상급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자기쪽이 괜찮을 때는 가만히 있다가 기울어가니까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이런 악한 자들의 악행으로 다윗은 이스보셋과 힘겨운 싸움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었고 온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는 데 악인들이 사용된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많은 악인들이 존재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자기가 악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많은 악인들이 존재합니다. 이들은 기회만 있으면 사람들을 해치려 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교회에서도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약한 사람들에게 상처와 아픔을 줍니다.
또 이들은 악한 일을 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라며 하나님을 언급하기까지 합니다.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언급한 것과 같습니다. 사울도 그랬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도 하나님의 백성과 관련한 일에서는 결국 하나님의 큰 계획 안에 존재할 뿐입니다.
그러한 믿음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악인들이 권세를 부리는 상황에서도 침착하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당장은 아무리 악인이 잘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그런 악인들도 사용하셔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주변에서 악인이 잘되는 것을 보게 되면 괴로워하고 안타까워하며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 원망하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반전이 곧 시작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기다려보십시오. 분명히 역사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다윗의 삶은 사울이라는 악인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 외 아브넬이나 이스보셋이나 레갑과 바아나 같은 사람들이 방해를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사울 같은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위대한 왕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런 악인들을 통해 다윗을 단련하셨습니다.
결국 다윗이 평생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게 된 것은 ‘내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져 주셨다.’라고 고백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을 그가 항상 생생히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수많은 악인들의 위협 속에서 경험했습니다. 다윗이 시편에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라고 노래한 것이 태평성대나 모든 것이 다 형통할 때 그런 게 아닙니다. 아주 극한 어려움 속에서, 악인들의 위협 속에서 그런 노래들을 불렀습니다.
다윗은 악인들에 의해서 오히려 왕위에 적합한 인물로 빚어졌고, 사울이나 아브넬이나 레갑이나 바아나 같은 자들의 악한 계획과 행동을 통해서도 오히려 좀 더 쉽게 왕위에 오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악인들도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자기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 채 자기 욕심만 따라 사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아주 절묘한 손길로 그들의 악을 선으로 바꾸셔서 믿음의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바로 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신뢰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생생히 체험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위해 아름답게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가지 삶의 방식
양인국목사 / 삼하 4:1-12.
1. 아브넬의 죽음은 사울가의 무너짐을 가속화시켰다. 아브넬이 죽은 후 이스보셋의 군장 바아나와 레갑이 그를 반역하였다. 그들은 이스보셋의 집에 들어가서 낮잠을 자고 있던 그를 죽이고 그의 목을 가지고 헤브론에 있는 다윗을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다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 왕에게 이스보셋의 머리를 드리며 아뢰되 왕의 생명을 해하려 하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 되신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의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4:8)”
2. 우리는 사울의 집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역들을 보며 인간관계가 힘을 중심으로 이루어 졌을 때 그 힘의 중심축이 이동하면 인간관계도 깨어진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힘을 가지고 있던 사울의 지배 아래에서 이익을 보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는 사울이 죽은 후 그의 집을 배반하고 다윗에게로 가려고 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아브넬이 이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고, 또한 바아나와 레갑도 이런 사람들이었다. 사울의 집에서 일어난 이와 같은 일들은 힘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인간관계가 얼마나 신뢰할 수 없는지 말해 주고 있다. 힘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충성은 힘에 대한 충성일 뿐이고, 인격적인 관계에서 나오는 충성이 아니다. 그러므로 힘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그 힘을 잃어버렸을 때 그의 힘을 보고 충성하던 사람들도 그를 떠나거나 또는 그의 대적이 되는 것이다.
사울은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힘을 의존하였기 때문에 더 큰 힘을 가진 다윗이 나타났을 때 더 이상 자신의 왕권을 지킬 수 없었다. 이로 인하여 힘(왕권)을 중심으로 맺어졌던 인간관계도 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의 삶의 방식이 힘을 중심으로 한 것이라면 사울과 같은 실패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면 믿음의 사람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계시의 말씀인 성경이 이 물음에 대하여 주는 대답은 오직 하나다. 그것은 “믿음의 삶”을 말한다. 여기 믿음의 삶이란 하나님의 능력과 인격을 믿고 삶의 여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는 삶을 말한다. 그래서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이렇게 살았고, 그를 본받아 믿음으로 살았던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이 이렇게 살았다. 특별히 성경에 기록된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에 따라 살았던 사람들도 이렇게 살았고, 그리스도교 역사 가운데 위대한 삶을 살았던 믿음의 사람들 모두가 이렇게 살았다.
여기 모든 시대 믿음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살펴보면 그들 가운데 나타나는 공통점들이 있다. 그리고 그 공통점들은 그들의 삶을 복되고 아름답게 세워주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 준다. 우리가 이것을 알 때 비로소 힘을 중심으로 사는 세속적인 삶의 방식 외에 또 다른 삶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는 공통점들 가운데 하나는 자신들의 연약함을 아는 자들이었다는 것이다. 삼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메뚜기 떼처럼 많은 수의 군사를 가진 미디안과 아말렉 그리고 동방의 여러 나라들의 연합군과 싸워 승리한 기드온은 강한 자가 아니었고 연약한 자였다(삿7:12). 그는 자신에 대하여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다.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삿6:15)” 인류 역사 가운데 큰 영향을 끼친 몇 사람 중의 하나에 속하는 바울 역시 자신의 연약함을 아는 자였다. 그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자인지에 대하여 말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2:3)”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가장 위대했던 다윗 왕은 자신이 얼마나 강하고 위대한지에 대하여 관심을 갖기 보다는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자인지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시39:4)”
믿음의 사람들에게 연약함은 스스로를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아니었고 능력의 하나님께 나가는 은혜의 수단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자신의 연약함을 알지 못하는 자는 결코 믿음의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실제로 믿음의 사람들은 삶의 여정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볼 때마다 하나님께 나갔다. 그래서 그들은 오히려 약할 때 강함 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며 살았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의 사람들에게 약함은 강함 되시는 하나님을 보다 더 온전하게 알아갈 수 있도록 베풀어 주시는 은혜들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약함을 은혜의 수단으로 아는 사람들에게 연약함이 문제가 되겠는가?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연약하지만 그 연약함을 은혜로 알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점들 가운데 다른 하나는 삶의 여정에서 어떤 위험이나 위기를 만나도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도 삶의 여정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곳을 다닐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고,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 빠져 있을 때도 있다. 우리는 시편을 통하여 믿음의 사람들이 삶의 여정에서 직면하게 되는 어려움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다. 실제로 시편의 대부분은 믿음의 사람들이 삶의 여정에서 직면한 위기 가운데서 구원을 요청하는 탄원들이다.
놀라운 사실은 이처럼 믿음의 사람들이 삶의 여정에서 많은 어려움들을 직면하였지만, 그들 가운데 한 사람도 낙망하거나 좌절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시련에 직면해 있을지라도 하나님으로 인하여 구원을 소망하며 살았다. 모세는 홍해 앞에서 직면한 위기 가운데서도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고,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환경에 직면해 있을 때에도 목자 되신 하나님으로 인하여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함을 받을 것을 믿었다. 물론 요나는 물고기에게 삼킨바 되어 바다의 심연까지 내려갔지만 그곳에서도 구원에 대한 소망을 잊지 않고 있었다. 이처럼 믿음의 사람들이 절망할 수밖에 없는 환경 가운데서도 구원의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능하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재 직면하고 있는 위기에서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었다. “내가 신뢰하는 하나님께서 이 위기 가운데서 나를 구원해 주실 수 있는가?” 그들은 이 물음에 대하여 “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 물음에 대하여 예라고 대답하는 순간 현실이 어떠하든지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믿음의 사람들은 삶의 여정에서 어떤 위기를 만나도 그것을 능히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알고 있었다.
믿음의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는 공통점들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환경들을 삶을 세우는 자원으로 삼고 살았다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의 생애를 돌아볼 때마다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된다. 그것은 그들에게 삶의 여정에서 위기가 없었다면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질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쳐야하는 위기를 만나지 않았다면 “여호와 이레”라는 신앙의 고백을 가질 수 있었을까? 모세가 바로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는 일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됨으로부터 해방시킨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까? 바울이 살 소망조차 가질 수 없는 환경에 직면하지 않았더라면 그토록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았을까? 루터의 종교 개혁은 카톨릭 교회의 조직적인 박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만일 박해가 없었다면 루터가 비덴베르크교회 정문에 붙인 95개 조항의 논제는 당시 카톨릭교회가 저지르고 있는 비리를 고발한 일회적인 사건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면 믿음의 사람들은 삶의 여정에서 만나는 모든 환경을 어떻게 삶을 복되고 아름답게 세울 수 있는 자원으로 만들 수 있었을까? 그들이 의도적으로 환경을 삶의 자원으로 만든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지도 않았고 할 수도 없었다. 그들이 한 것은 오직 직면한 환경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을 바라본 것뿐이다.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 직면한 환경이 어떠하든지 그것은 그들의 삶을 복되고 아름답게 세울 수 있는 자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시62:5)”
하나님은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삶의 여정에서 선택할 수 있는 두 가지 삶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다. 하나는 힘에 의존하여 사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삶이다. 우리는 사울의 집에서 일어난 일들을 통하여 힘을 의존하고 사는 삶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알았고, 하나님의 능하심과 인격을 믿는 사람들의 삶을 통하여 믿음으로 사는 삶의 결과가 무엇인지 알았다. 이와 같은 지식들은 믿음의 사람으로서 우리가 어떤 삶의 방식을 택하여 살아야 할 것인지 알게 하는 지혜가 될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 알 때 비로소 우리는 범사에 감사할 수 있고 또한 믿음으로 살도록 불러 주신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손안에 있습니다
삼하 4장 4절 / 류영모목사
화면에 비치는 하늘을 최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특히 붉게 물든 석양의 노을을 보신 적 있으신지요? 저는 심장 판막 치환수술후 두 번째 위기를 맞아 병원 침상에 앉아 창가로 펼쳐져오는 붉고 발갛게 그리고 무지개 빛으로 물들여 놓은 듯한 석양의 하늘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렸던 적이 있습니다. 과연 사역의 현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들 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라는 질문과 함께 20년동안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오랫동안 맺혀져 있었던 어느 단어가 해석되어지지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번개처럼 뭔가 뇌리를 스치며 환하게 내 조명시켜준 성경인물이 있었습니다. 마치 누군가가 제 옆에서 이 사람의 일생을 보여주면서 제가 가지고 있었던 문제와 이 사람의 문제를 대조 비교하면서 설명해주는 듯 했습니다.
그 사람은 오늘 읽은 본문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오늘 저는 이 사람이 살아온 인생의 발자취를 조심스럽게 따라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에게 있었던 해석 되어지지 않은 그 고뇌 속에 우리의 고뇌를 겹쳐 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고뇌가 우리와 조금은 어딘가 닮은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바로 므비보셋입니다. 이 므비보셋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오늘 본문 4장 4절을 현대어 성경에서는 삼하 4:4 사울의 집안에는 아직도 살아남은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낳은 므비보셋이었다. 그러나 그는 두 다리를 저는 불구자였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이스르엘의 싸움터에서 함께 죽었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5세였다. 그때에 전사 통보를 받은 유모가 그를 업고 도망치다가 떨어뜨려서 두 다리를 다 절게 된 것이다. 바아나와 레갑은 이제 이스보셋만 죽이면 더 이상 사울의 집안에서 정당한 왕위 계승자가 나올 수 없다는 간교한 계산을 하고 거사를 준비하였다.
므비보셋의 아버지가 요나단이고 할아버지는 사울임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므비보셋은 좋은 혈통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좋은 혈통이 도리어 므비보셋의 걸림돌이 되었음을 우리는 4:4절을 읽으면서 금방 알게 됩니다. 길보아 전쟁에서 할아버지 사울과 아버지 요나단, 그리고 삼촌들인 아비나답과 말기수아가 전사 하게 됩니다. 이 전사통보를 받은 유모가 급하게 므비보셋을 업고 도망치다가 그만 떨어뜨리고 맙니다.
왜 떨어뜨렸을까? 현대어 성경에는 유모가 ‘업고’라고 되어 있고 개역성경에나 개역개정판 혹은 쉬운 성경에는 ‘안고’ 라고 해석되어 있습니다. 아이를 안고 업고.... 좋습니다. 안았다고 합시다, 업었다고 합시다. 어쩌다 떨어뜨렸을까요? 그 상황을 눈을 감고 머릿속에 곰곰이 그려보았습니다. 시급하고 촌각을 다투는 다급한 상황이었음을 짐작케 합니다. 먼저는 유모가 놀랐습니다. 당황하는 유모의 모습을 보면서 이제 겨우 5살 박이 어린아이 므비보셋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유모와 궁녀들과 신하들이 어깨를 들썩이며 웁니다. 궁전 안에 난리가 났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절망의 탄식소리가 울음이 되어 들려옵니다. 어린아이 므비보셋도 울었습니다. 아이들은 원래 군중심리에 의해 잘 따라 웁니다. 슬프게 우는 신하들의 모습을 보면서 영문도 모르게 함께 울다가 므비보셋은 칭얼대고 또 떼를 썼을 겁니다.
다급한 상황에서 어린왕자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설명할 수 없었던 유모는 칭얼대며 우는 왕자를 업었다 안았다 급하게 들쳐 업고 뛰었습니다. 궁전안 높은 계단에서 뛰어 내리다 그만 발을 잘못디뎌 삐끗 중심을 잃고 떨어뜨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만약 그때가 캄캄한 밤이었다고 한다면 어린 므비보셋에게 있어서 그날 밤은 평생 잊을 수 없는 무서운 밤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아이는 떨어지면서 두 다리를 크게 다쳤습니다. 다리에서 피가 철철 흘러나옵니다. 아이의 상처를 돌보며 싸맬 시간이 없습니다. 일단은 이 궁궐을 벗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궁궐에 남아있었다간 블레셋인들이 보낸 군사들로 말미암아 유일한 혈통인 므비보셋이 죽임을 당할지 모릅니다. 얼마나 아팠을까요? 므비보셋으론 정말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상황입니다. 조금만 아파도 쩔쩔 매었던 유모가 오늘은 아파서 자지러지게 소리치며 우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도 사랑하는 아버지도 달려오지 않습니다. 의원조차도 달려오지 않습니다. 너무 아파 견딜 수 없습니다.
그렇게 캄캄한 밤은 지나고 어느 낯선 초라한 집에서 은둔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루아침에 거지가 된 것입니다. 거지가 된 것만도 서럽고 이해가 안 되는데 한동안 다친 다리부상으로 끙끙 앓으며 몸살을 앓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아픈 다리가 나았을 때 쯤 므비보셋은 그전처럼 달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어느 정도 무엇인가를 인지할 나이 7살 8살이 되었을 때 므비보셋은 자신이 장애인이 되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것도 장애 중 심한 장애였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짐작 할 수 있습니다.
9:13 “그는 두 발을 다 절더라”
한 다리만 다친 것이 아니고 두 다리를 모두 다친 심한 장애를 당한 것입니다. 이런 심한 장애를 가지고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십대를 므비보셋은 어떻게 보냈을까? 라는 생각에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것들뿐 입니다.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상황이지만 ‘원망’ 이라는 단어가 므비보셋의 가슴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현실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어느 날은 부모님이 보고 싶어 울었습니다, 뜨거운 눈물로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워야 했는지 모릅니다. 죽고 싶은 생각이 날마다 므비보셋의 마음을 두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이해가 되어지고 해석이 되어지는지요? 친한 친구여서 보증을 서 주었더니 그 친한 친구가 사기를 치고 도망갔습니다. 20년. 30년 청춘을 바쳐 일했던 직장에서 상을 주기는커녕, 어느 날 그만두라는 명퇴 선언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적지 않은 음모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승진시험에서는 매번 떨어집니다. 실력차이 때문에 떨어진 것이라면 어느 정도 수용이 가겠지만 뒷거래가 있었다는 주위사람들의 말 때문에 더욱더 힘이 듭니다. 하는 일마다 잘 되지 않습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억울함이라는 단어가 힘들게 합니다. 억울하다고 하소연 하고 싶은데 하소연할 곳 조차 하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마저 그 모든 것을 허용한 것 같아 하나님이 야속합니다. 어느 날은 죄를 많이 지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고 회개도 많이 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내게 사랑의 하나님으로 다가오질 않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니 힘없고 빽 없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늘 당하고 사는 것 같아 세상이 싫어집니다. 뭔가 달라지고 싶어 교회 나왔지만 항상 내 기도 응답만 늦어진 것 같고, 하나님은 나 같은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교회 마저도 뛰어난 사람만이 인정받는 것 같은 오해가 생깁니다. 정말 슬픈 것은 사람들에게 인정 못 받는 것 보다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듯한 이 느낌이 정말 싫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느낌! 경험해 보셨는지요?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저도 이런 생각, 이런 느낌 때문에, 참 힘들었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제 아버지를 너무나 존경하며 사랑했습니다. 아버지의 그 당당함과 그 박식함과 그 인자함이 저에겐 늘 든든한 빽 이었습니다. 읍내에서 아버지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읍내에서 큰 어른이셨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참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하나님께서는 대학 4학년 때 담 관 암으로 돌아가시게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하나님은 제가 의지하고 사랑하는 모든 분을 빼앗아 가는 분으로 여겨질 만큼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2년 전 제가 군에 있을 때 너무나 헌신적인 사랑으로 저를 사랑했던 어머니를 데려가셨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운명하는 그 순간까지 제 이름을 계속 부르고 또 부르며 “명환아” “명환아” 하며 제 이름만 부르다가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제가 군에서 어머님이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머니는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거의 2년 사이에 저는 가장 사랑하는 두 분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부터 제게 찾아오는 시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남겨두신 유산은 불공평하게 처리 되었고 저는 집에서 나와야 했습니다.
저는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할지... 머물 곳이 없어서 친구 집으로, 또 교회의 장의자에서 잠을 잔적도 있었고, 독서실에서 머물기도 했었습니다. 그때부터 제 앞길을 캄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제가 하는 모든 일마다 하나님께서 따라다니시며 방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향하여 소리 질렀습니다.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제가 뭘 그리 잘못했습니까? 왜 저를 이렇게까지 철저히 밟아 버리십니까? 그러나 저는 이 마음을 가지고서도 또 다시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런데 엎드리고 엎드려도 답은 없었습니다. 도대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둘 쌓여가는 상처와 분노만 제 가슴속에 가득했습니다. 철저하게 무시도 당했습니다. 혼자 방에 앉아서 서럽게 울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저를 버린 줄 알았습니다.
왜 하나님은 제 부모님을 그렇게 짧은 세월 사이에 다 데리고 가셨을까?
2년 전에 제가 예배사회를 인도하고 있을 때 저희 교회에서 설교를 하셨던 에디레오 목사님께서 육신의 아버지를 용서하고 자신에게 잘못을 행한 사람들을 용서하라는 선포의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저는 그때 하늘을 향하여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하나님! 저의 육신의 아버지는 너무나 좋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 아버지를 용서합니다. 이해가 안 되어도 하나님 아버지를 용서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웃음이 입가에 번집니다.
오늘 본문 속에 등장하고 있는 므비보셋이 저와 같은 심정이 아니었겠나 싶습니다. 여기저기에서 들려주는 아버지 요나단은 너무나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기며 하나님을 사랑했던 분이셨습니다. 인자한 인격을 지녔던 분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요나단을 나쁘게 평가하는 말을 한번도 들어 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 왕으로 세워진 다윗 왕을 목숨처럼 아꼈다. 라는 말에 므비보셋은 더욱 더 화가 났습니다. 그렇다고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것은 무엇입니까? 숨어사는 신세밖에 더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했던 아버지 요나단을 기억한다면, 어찌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할 수가 있는가? 결코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이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이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는 므비보셋이라는 한 인물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 삶 속에서 침묵하시는 것 같으나 결코 침묵하는 것이 아님을 전하고 싶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가슴깊이 묵상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므비보셋을 통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많은 교회가 있는데 한소망교회라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주심은,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과 분명한 섭리가 있음을 확실하게 발견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버림받은 듯 살아왔던 므비보셋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 떠나보겠습니다.
9:6절에서 므비보셋은 다윗에게 자신을 가리켜 “죽은 개”와 같은 자를 어찌하여 돌아보시나이까?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죽은 개.... 개와 같은 자라고 해도 정말 하찮은 존재임을 충분히 설명해줄 수 있을진대 산개도 아닌 “죽은 개” 라고 자신을 비하시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아담하와의 죄로 말미암아 죽은 개와 같은 존재들아니었습니까?.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존재!, 늘 공허감에 헐떡거리며 영원한 지옥불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죽은 개의 종말은 비참합니다. 구더기가 끼고 까마귀와 독수리들이 달려들고, 그러다 비참한 몰골만 남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구더기가 있는 곳, 유황불이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지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예수님을 통해, 죽은 개와 같은 존재를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셨습니다.
우리는 구원 받았다. 라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위대한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개로 살아가는 므비보셋을 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은개!! 바로 지옥과 같은 세월을 보낸 므비보셋을 결코 버려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죄는 벌할 수밖에 없는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므비보셋의 할아버지인 사울 왕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살펴봅시다. 사울왕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왕입니다. 사울 왕이 버림받았던 이유는, 사울 왕이 먼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삼상 15:23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삼상13:13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하나님은 말씀을 버리고 회개할 기회마저 버리고 끝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못한
사울 왕을 벌하셔야만 했습니다. 사울왕의 후손이 결코 왕이 될 수 없다고 선포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진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 그리고 아비나답과 말기수아가 길보아에서 전사합니다. 그리고 전사하지 않고 살아있었던 사울의 넷째아들 이스보셋도 살해당합니다. 이제 유일하게 남아 있는 혈통은 바로 므비보셋입니다.
그런데 만약 므비보셋이 두 다리를 다치지 않은 정상인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스보셋을 살해한 바아나와 레갑이 므비보셋도 분명히 죽였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정말 의로운 요나단의 후손이 완전히 끊어지는 불행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이라고 말해야 할까요? 므비보셋은 두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었습니다. 그 당시 장애인은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관습이 므비모셋이 죽지 않아도 되는 길을 열어 주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우연히 되어진 일이겠습니까? 어쩌다 보니 그렇게 저렇게 되어진 일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레미야 33:3 절 말씀을 현대어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나는 온 세계를 창조한 주인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도 내가 모조리 일으켜 놓고 있다. 무엇이든지 내가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그것이 바로 현실이 되어 나타난다. 그러므로 너는 지금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보고 이리저리 흔들리지 말고 오직 나만을 의지하여라”.
잠언 3: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잠언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할렐루야!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네 가지 교훈을 생각하고 가슴에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손 안에 여러분과 이 세상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인생은 우연이 된 것이 아닙니다. 이해되어지지 않고 해석되어지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관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어두운 터널이 계속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그 터널은 지나게 됩니다.
만약 지금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계신다면 겸손히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을 가지고 꿋꿋이 걸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 속에 침묵하시는 것 같습니까? 네 침묵하는 것 같아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때문에 주무시는 것도 조는 것도 포기하시고 여러분 한분 한분의 모든 걸음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을 크게, 놀랍게 사랑하시고 계십니다.
이사야 55 :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여러분이 한소망교회에 가족이 된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 속에 인도된 것입니다. 한소망교회에 있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십시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통해 일하실 하나님을 기대하십시오.
만약 므비보셋의 인생이 죽은 개와 같은 인생으로 막을 내렸다면 오늘 저는 여러분 앞에서 므비보셋을 들어 설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므비보셋은 죽은 개와 같은 인생으로 막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그 공의를 이루면서 또한 사랑을 베푸십니다.
사울을 벌하신 하나님께서는 또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섬겼던 요나단을 기억하고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에게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 문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다윗입니다.
9장 1절 : 다윗은,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7절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누구를 인해서 은총을 베풀겠다고요, 네 요나단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요나단을 잊지 않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요나단의 그 아름다운 선행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적당한 하나님의 시간표에 맞추어 다윗으로 하여금 요나단을 기억나게 하셨고. 그리고 요나단의 후손 바로 므비보셋을 찾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2000년 전에 아무 죄도 없이 고통을 당하며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뿌리며 돌아가신 독생자 예수님의 그 공로를 기억하고 계십니다. 조상대대로 자신도 모르게 물려받았던 끔찍한 저주의 사슬과, 우상숭배 했던 모든 죄악들을 통해 우리를 보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눈으로, 예수님의 사랑의 그 공로를 통해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두 번째 교훈은 우리의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께 성령님께 여러분의 모든 문제들을 토해 내십시오. 여러분이 풀지 못하는 문제들로 말미암아 아파 하지마시고 , 원망하고 불평하며 부정적인 언어로 자신을 학대하지마시고 이해가 안 된다고 해석이 안 된다고 움츠려 들지 마시고 그 모든 문제들을 예수님께 가져오십시오.
이사야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께는 풀지 못할 어려운 문제는 없습니다. 예수님께는 넘지 못할 높은 산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힘 있고 완벽한 중보자이십니다. 여러분과 저 대신 아파하셨고, 대신 고통당하시고 대신 죽으셨습니다.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예수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분은 지금도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시며 중보하시는 분이십니다.
히브리서 4:15,16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성령님께서도 여러분의 모든 문제를 놓고 중보하며 기도하시고 계십니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세 번째 교훈은 이제 여러분과 제가 예수님 밖에 있는 사람들의 중보자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캄캄한 흑암 속을 헤 메이듯 살아가고 있습니다.. 풀리지 않는 실타래를 계속해서 들여다보며 고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므비보셋이 어떤 행동을 했거나 많은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저 다윗왕의 부름에 어찌하여 죽은 개 같은 자를 돌아보시니까? 라는 말 외엔 아무런 행동을 취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므비보셋과는 달리 수고를 많이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먼저 남은 자를 찾아 나선 신하들입니다. 그리고 사울집안에 유일하게 생존하는 종 - 시바입니다. 또한 무시하지 않고 므비보셋을 숨겨주고 데리고 살아준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이라는 사람입니다. 므비보셋 이라는 한 사람을 위해서 여러 사람들의 수고가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한 사람이 교회에 나오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기도와 수고가 있었음을 우리는 두말할 것 없이 공감하고 또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 되어 절망과 고통과, 죽음이라는 시련의 터널 앞에서 답이 없는 물음표를 던지며 자신의 삶의 여정을 헤 메는 사람들에게 길을 안내하는 중보자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단 12:3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할렐루야
마지막으로 우리가 오늘 본문말씀에서 가슴에 새겨야 할 네 번째 교훈은, 예수님 안에 이미 들어온 우리 성도님들의 중보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우리는 므비보셋의 완전한 회복의 장면을 행복한 마음으로 함께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9:7절 : 사울 왕에게 속해 있었던 논밭과 재산을 돌려받게 됩니다.
9절 : 사울의 시종이었던 시바의 속한 모든 사람들이 므비보셋을 주인으로
섬기게 합니다.
11절 : 다윗 왕과 함께 밥상을 받으며 왕자 중 하나처럼 왕궁에서 살게 됩니다. n 할렐루야
12절 : 보면 므비보셋의 아들 미가의 길이 형통함으로 축복의 길로 활짝 열립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축복의 근원을 제공했던 사람은 바로 므비보셋의 아버지 요나단의 중보 때문이었습니다.
요나단은 원래가 사울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왕자였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자신의 자리와 신분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적으로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린다면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의 사람인 다윗을 너무나 멋지게 중보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중보와 그 사랑이 얼마나 진했던지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한 것을 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삼상 18: 1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먼저 하나님의 사람인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인도 속에 만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소망이라는 멋진 교회를 우리가 섬겨야 할 사역 터로 허락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마음을 하나로 뭉쳐 한 비전 안에서 서로를 중보하며 서로를 격려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앞에 세우신 영적아버지인 사랑하는 담임목사님을 비롯해 교역자들과 또한 리더들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중보의 첫 번째 시작은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것입니다. 또한 생명같이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러한 중보의 아름다움이 꽃피우길 원합니다.
셀 목장 안에서 이러한 중보의 아름다움이 번져가길 원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중보 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요나단의 아름다운 중보로 말미암아 요나단의 유일한 핏줄 후손이 복을 받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확인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해석이 되어지시는지요? 아직도 고민하는 부분이 있는지요? 먼저 여러분의 자신을 점검해 보십시오. 첫째-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손안에 여러분이 있음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빚으시고 있습니다. 지금은 캄캄한 터널 안에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그 사랑의 손길이 여러분을 인도하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둘째-우리의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께 그리고 성령님께 여러분의 모든 문제들을 토해 내십시오. 예수님께서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모든 문제들을 풀어 주실 것입니다.
셋째 여러분과 제가 예수님 밖에 있는 사람들의 중보자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므비보셋이라는 보잘 것 없는 한 사람을 다윗에게 데리고 오기 위해서 수고했습니다. 지옥과 같은 생활을 하며 아파하는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 안에 이미 들어온 우리의 믿음의 가족들, 그리고 셀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님들의 중보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숙한 공동체
삼하 4장 5~12절 / 이지원목사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바아나가 길을 떠나 볕이 쬘 때 즈음에 이스보셋의 집에 이르니 마침 그가 침상에서 낮잠을 자는지라. 레갑과 그의 형제 바아나가 밀을 가지러 온 체하고 집 가운데로 들어가서 그의 배를 찌르고 도망하였더라.
그들이 집에 들어가니 이스보셋이 침실에서 침상 위에 누워 있는지라 그를 쳐죽이고 목을 베어 그의 머리를 가지고 밤새도록 아라바 길로 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 왕에게 이스보셋의 머리를 드리며 아뢰되 왕의 생명을 해하려 하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 되신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의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 하니 다윗이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그의 형제 바아나에게 대답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내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전에 사람이 내게 알리기를 보라 사울이 죽었다 하며 그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줄로 생각하였어도 내가 그를 잡아 시글락에서 죽여서 그것을 그 소식을 전한 갚음으로 삼았거든 하물며 악인이 의인을 그의 집 침상 위에서 죽인 것이겠느냐 그런즉 내가 악인의 피흘린 죄를 너희에게 갚아서 너희를 이 땅에서 없이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청년들에게 명령하매 곧 그들을 죽이고 수족을 베어 헤브론 못 가에 매달고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져다가 헤브론에서 아브넬의 무덤에 매장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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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콩고민주공화국 대표단이 우리나라를 찾아와서 말했다고 합니다.
“1960년대 한국은, 지금의 콩고민주공화국과 똑 같았습니다.
50년이 흘렀는데, 우리는 제자리걸음이고, 한국은 엄청난 발전을 했습니다.
그 비결을 알고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도 잊어 버렸던, ‘새마을 운동’ 을 소개해 줄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탄자니아, 네팔, 몽골, 캄보디아, 모잠비크, 코트디부아르..... 등등 92개국...
심지어는 중국의 후진타오주석..미국 하버드대 연구원들까지 찾아와서..
후진국에서 탈출한 비결로, 한국을 모델로 삼고, 비결을 연구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잘되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점점 잘되어 갑니다.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제자리 걸음하는 공동체도 있습니다.
반대로 점점 않되고 뒷걸음질 하는, 망해가는 공동체도 있습니다.
공동체를 치면, 가정도 공동체요..
회사도 공동체요..
나라도 공동체라 할수 있겠습니다.
어떤 공동체가 되고 싶으십니까?
당연히 점점 잘 되는 공동체가 되고 싶습니다.
교회도 공동체입니다. 믿음의 공동체요, 신앙의 공동체 입니다.
그런데 교회도 점점 잘되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제자리 걸음하는 교회도 있고,
거꾸로 망해하는 교회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에는, 두 공동체가 나오고 있습니다.
망해가는 공동체과 흥해가는 공동체...
사울의 공동체와, 다윗의 공동체가, 바로 그 모델 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정과 우리나라와 우리교회가
잘되는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1. 망할 수밖에 없는 공동체.....사울의 공동체입니다.
7절 8절
그들이 집에 들어가니 이스보셋이 침실에서 침상 위에 누워 있는지라 그를 쳐죽이고 목을 베어 그의 머리를 가지고 밤새도록 아라바 길로 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 왕에게 이스보셋의 머리를 드리며 아뢰되 왕의 생명을 해하려 하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 되신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의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 하니
지난주간 뉴스를 보니까 참 재미있는 이색뉴스가 있었습니다.
영국의 한 업체가, 여성들을 상대로 이색조사를 실시했다고 합니다.
“비밀이 퍼지는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일까?”
“이건 비밀인데, 너만 알고 있어...” 그러고 비밀을 나누었는데,
그 비밀이 공동체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퍼지는 시간이 얼마인가? 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조사결과 여성들이 ‘이야기 하지 말아야 할’ 비밀을 퍼뜨리는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47시간 15분인 것으로 조사됐다고 합니다.
이틀도 채 되지 않는 사이에, 비밀은 나만 비밀이지.. 다 새나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건 비밀인데~” 그렇게 이야기를 하지 마시기...성경의 권위로 부탁드립니다.
일단 이야기 하면, 이틀만 되면,
나만 비밀이지...모두가 다 아는, 비밀이 되어 버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감출것이 없습니다.
감춘다고 또 감추어지겠습니까?
공동체가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너만 봐...그리고 해운대 영화 파일을 주었더니, 일주일도 않되어,
우리나라 전국에, 해운대 불법영화 파일이, 퍼지고 말았습니다.
국민MC 라고 하지요..유재석씨,
그 부인이 산부인과에 가서 진찰을 받고,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집에 갔더니,
남편도 잘 모르는데...이틀도 않되어, 포털사이트에 큼지막 하게,
“유재석 드디어 아이를 갖다”..대문짝 만하게 보도가 되고 말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비밀은 없습니다.
감출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사울왕의 공동체는 망해가는 공동체 였습니다.
망해간다는 것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사울왕이 전쟁터에서 죽었습니다. 장자인 요나단도, 차자인 아미나답과 말기수아도,
그 자리에서 같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 밑에 있던 아브넬장군은 급하게 돌아와서, 사울의 가족들 중에서, 남아 있던 아들 “이스보셋”을 급하게 왕으로 앉혔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괜찮타 괜찬타...사울의 왕국은 든든하다 든든하다..”
그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자 그러나 비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모두가 다 쑤근 거립니다.
“이스보셋이 무슨 왕이야... 평소에 왕위 서열도 아닌데, 어떨결이 왕이 되고....”
“나라가 곧 망하겠다. 망하겠어...”
자..준비가 않되었는데, 얼떨결에 왕이 되는 것이, 잘 풀리는 것입니까? 횡재만난 것입니까?
아닙니다.
어떻게 감출수 있겠습니까?
가만히 있다가 왕이 되었는데, 하나도 준비가 않되었는데...
왕인 척 한다고, 사람들이 속아 주겠습니까?
그래서, 준비는 단순간에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준비는 철저하게 그 댓가를 치루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성숙도 단순간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룻밤 쎄게 기도했다고, 신앙이 한꺼번에 확 성숙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10년을 하루같이, 20년을 하루같이...변함없이 무릎꿇고 기도하는 신앙생활...
분명히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차이가 나고 말았습니까?
이스보셋은, 스스로 왕의 그릇이 준비되지 못할 때,
이스보셋을 왕으로 앉혔던 아브넬 장군이, 죽은 사울왕의 첩과 놀아납니다.
이스보셋이 화가나서 않좋은 소리를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선왕의 첩과 어떻게 감히, 네가 놀아날 수 있느냐?”
그랬더니 아브넬이 적반하장으로 도리어 이스보셋을 보고 화를 내면서 말합니다.
“ 왕으로 앉혀 주었더니, 선왕의 첩을 건드렸다고 나에게 이렇게 화를 내다니...
이제 내가 뭣 때문에 더...너를 섬기겠는냐? 남유다에 있는 다윗왕을 섬기련다...”
그리고 그길로, 북이스라엘을 몽땅 갖다 바치겠다고, 다윗왕을 찾아가 버립니다.
군대 장관이 가버리니까. 밑에 있던 졸개들도 다 자기 앞가름을 위하여 딴생각을 품습니다.
7절 8절에 보면, 레갑과 바아나형제는, 한밑천 잡으려고,
몰래 왕궁에 숨어 들어가서.. 잠을 자던 이스보셋왕을 죽여 버리고,
그 머리를 잘라 들고, 다윗왕에게 투항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하여 사울왕의 나라는, 비참하게 끝을 맺고,
망하고 말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상누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철저하게 준비하지 않고,
서로 뿔뿔이 마음이 나누어지면,
아무리 잘되고 싶어도, 사울왕의 나라처럼 갈기갈기...흩어지고,
망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2. 흥할 수밖에 없는 공동체...다윗의 공동체가 되겠습니다.
9절 10절
다윗이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그의 형제 바아나에게 대답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내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전에 사람이 내게 알리기를 보라 사울이 죽었다 하며 그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줄로 생각하였어도 내가 그를 잡아 시글락에서 죽여서 그것을 그 소식을 전한 갚음으로 삼았거든
그렇다면 잘되는 공동체, 흥하는 공동체, 다윗의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 입니까?
다윗은 가만히 있는데도, 자꾸와서, 나라를 바치겠다고 합니다.
다윗은 가만히 있는데도, 나라는 점점더 강성하여 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비결은 무엇이냐?
다윗의 부하들을 보면, 잘 알수 있겠습니다.
다윗도 부하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울왕의 부하들과는 딴판입니다.
다윗의 부하들 중에는, 다윗을 죽이고, 다윗의 목을 배어서, 한밑천 잡아보자..
이렇게 생각하는 부하가 한명도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다윗왕의 부하는 다윗과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 하였던, 부하들이었습니다.
사울왕이 죽인다고 하여도, 같이 죽겠다고 다윗을 찾아갔던 부하들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죽음의 땅 블레셋으로 들어갈때, 같이따라 들어갔고,
거기서 다윗이 살아나올때도, 같이 살아나왔던 사람들이,
바로 다윗의 부하들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랜시간 동안, 즐거움을 함께하고, 고난을 함께 하며,
심지어는 죽음의 자리까지 함께 하였던, 다윗과 부하들이기에..
어떻게 다윗을 배반을 할수 있겠습니까?
똘똘 뭉쳐 있다보니, 적을 만나면, 다윗과 함께, 악착같이 싸워서 이깁니다.
똘똘 뭉쳐 있다보니, 다윗과 함께라면, 죽음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공동체는 잘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다윗왕과 부하들과 같은 관계인가...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예수님과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제자인가?
나는 오랜시간 즐거움도 예수님과 같이... 고난의 자리도 예수님과 같이..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라면, 항상 함께하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제자인가?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윗왕의 부하들과는 비교할수 없는,
더 성숙한 믿음의 공도체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랜시간..예수님과 동고동락하고 생사고락을 같이 할때...
어떻게 예수님을 배반할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라서, 제자들도 모두 십자가를 같이 지고 순교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한마음 한뜻이 되어, 똘똘 뭉쳐 나갈 때,
우리 김포상도교회는 잘 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부흥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김포상도교회는 수도권 서부지역에서, 제일 큰 교회가 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숙한 믿음의 공동체..
오래동안 신앙의 연단으로... 믿음이 깊어진...
성숙한 믿음의 공동체는 잘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3. 성숙한 믿음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11절 12절
하물며 악인이 의인을 그의 집 침상 위에서 죽인 것이겠느냐 그런즉 내가 악인의 피흘린 죄를 너희에게 갚아서 너희를 이 땅에서 없이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청년들에게 명령하매 곧 그들을 죽이고 수족을 베어 헤브론 못 가에 매달고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져다가 헤브론에서 아브넬의 무덤에 매장하였더라
성숙한 믿음은 단순간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를 아시고, 내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처럼..
성숙한 신뢰의 관계는, 단순간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 고난을 함께 하며,
눈물과 기도의 자리를 함께 하고.
심지어는 죽음의 십자가의 자리에까지 함께 할때..
예수님의 12제자들과 같은
성숙한 믿음의 공동체가 세워 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미성숙하고,
공동체를 깨뜨리고 망하게 하는,
예수님과의 관계가...이스보셋을 만난 레갑과 바아나 같은 사람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믿어....
그저 한번 왔다가.....내가 싫증나면, 예수님 팔아 버리고..다른데..또 찾아 가야지..
그러는 마음이 있을때, 가롯유다 처럼...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버리는 제자도 있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렇게 쉽게 버린다면, 예수님을 그를 쉽게 버리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렇게 하찮케 여긴다면, 예수님도 그를 매사에 하찮케 여기실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다윗인들 왜 마음속에, 사울왕의 마지막 아들이 죽었을때, 다행으로 여기는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아유 잘 되었다. 그렇게 나를 죽이려고 하던, 사울왕의 집안이, 이제 다 망하는구나..”
요른 마음이 들수 있었겠지만, 절대로 그런 유혹을 따르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받은 집안을 망하게 하고, 나에게 상을 받기를 바라느냐? 오히려 일벌백계하리라..”
그리고 말씀의 전통을 따라서, 레갑과 바아나를 죽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죄의 유혹은 생길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죄의 유혹데로 행동하느냐, 아니면 유혹을 멀리하고, 성경말씀대로 행동하느냐?
하는데서,
‘죄의 사람’이 되고, ‘말씀에 사람’이 되는,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감정대로 화내고 말하고, 죄의 유혹대로 행한다면, 죄의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감정이 올라와도, 죄의 유혹이 와도, 그것을 물리치고, 말씀대로 살아갈 때,
그 사람은 성령의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매일 내안에는 죄의 법과 성령의 법이 싸우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죄를 물리치고, 성령의 법을 따르는 사람이 되어, 생명의 성령의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랬다고 하는 것입니다.
듣기 좋은 말이지만, 그것이 죄의 말일 때는 따르지 않았습니다.
싫터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일 때에는, 회계할줄 알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럴때, 다윗의 공동체는, 말씀의 공동체가 되었고,
말씀의 공동체가 될 때,
나뉘어지지 않고, 무너지지 않고, 든든히 서게 되엇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밉다고 미워한다면, 그 가정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화난다고 막말하면, 그 회사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사람이 감정이 없겠습니까?
왜 죄의 유혹이 없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은, 모두 다....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지 못함을 알고,
하나님의 교회의 덕 세우기 위하여, 믿음의 행실을 쫓을 때...
그 교회는 더욱 부흥하고, 점점 잘 되지 않겠습니까?
말씀을 정리합니다.
점점 않되고, 망하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그 공동체 속에는, 공동체를 허무는 사람, 레갑과 바아나 같은 사람이요...
가롯유다와 같은 사람이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는 공동체는, 망할 수밖에 없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입니다.
점점 잘되는 공동체, 부흥하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그 공동체를 들여다 보았더니,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나가는 성숙한 믿음의 사람들이 있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숙한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덕을 세워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즐거움의 자리도, 고난의 자리도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입니다.
죄의 유혹이 와도, 쫓지 않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김포상도교회는, 성숙한 믿음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공동체와 같이...부흥하고, 잘되고, 점점 성장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수도권 서부지역에서 가장 예수님의 영광을, 높이 세우는...
성숙한 믿음의 교우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 드립니다.
잘못된 믿음
전승문 목사 / 삼하 4:9~12
햄릿이라는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작품 중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라! (Frailty, thy name is woman)” 그렇습니다. 여자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연약한 건 결코 여자만이 아닙니다. 사실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여자든 남자든 젊은이든 노인이든 다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늘 불안합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믿고 의지할 것이 꼭 필요합니다. 믿을 수 있는 것,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인간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겁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믿습니까? 내가 무엇을 믿는지는 나는 무엇이 있어야 안심이 되는지 그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엄마가 있어야 편안합니다. 아이는 엄마를 믿고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와 있어야 마음이 편한가요? 또한 무엇이 있어야 불안하지 않고 안심이 되십니까? 돈입니까? 그렇다면 돈을 믿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그런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돈을 믿고 돈을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돈이 과연 믿을만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돈은 언제든 우리를 배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불안은 사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시작되는 겁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모든 불안의 뿌리인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불안은 결국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생기는 겁니다. 문제는 그 불안 그 두려움을 돈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돈은 죽음을 막아줄 수도 해결해줄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믿음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결국은 무너져버리고 말 공허한 믿음인 겁니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권세를 믿든 지식을 믿든 혹은 사람을 믿든 그런 믿음들은 다 헛된 것들입니다. 그 중 어떤 것도 우리를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시켜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참 많은 것들을 믿고 많은 것들을 의지합니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라 무엇이든 믿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보셋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울의 넷째 아들인데 사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람입니다. 다윗이 유다의 왕으로 있는 동안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왕이 된 사람입니다. 아브넬이 5년 동안 동분서주해서 그 자리에 앉혀준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고작 2년 동안 그 자리에 있었을 뿐입니다. 성경은 그런 그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이스라엘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사십 세이며 두 해 동안 왕위에 있으니라 (삼하 2:10)” 그렇습니다. 이스보셋은 40세에 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2년 만에 물러났습니다. 사실은 물러난 것이 아니고 살해당한 것입니다.
이스보셋은 그의 본명이 아닙니다. 그의 본명은 에스바알(אֶשְׁבַּעַל)입니다(대상 8:33). 에스바알은 바알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 바알의 사람 곧 우상의 사람인 겁니다. 사울이 얼마나 비신앙적인 사람이었던지 아들의 이름을 바알의 사람이라고 지은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에스바알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의 면전에서는 그렇게 불렀겠지만 뒤에서는 이스보셋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스보셋(אִישׁ־בֹּשֶׁת)은 부끄러운 사람, 수치스러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보셋이라는 이름은 그의 본명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에게 붙인 별명인 겁니다. 그런데 성경이 그 이름으로 그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보셋은 부끄러운 사람이라는 뜻인데 그 수치스러운 이름으로 그를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그는 왜 그토록 부끄러운 이름으로 남은 것일까요? 사울의 뒤를 이어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람인데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일까요? 그는 실제로 수치스러운 삶을 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능력도 없고 용기도 없고 도저히 나라를 이끌만한 인물이 아니었던 겁니다.
사울에게는 여러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맏아들은 우리가 잘 아는 요나단입니다. 참 훌륭한 왕자입니다. 둘째는 말기수아고 셋째는 아비나답입니다. 이 세 아들은 모두 사울과 함께 전장에서 같은 날에 죽은 사람들입니다. 사울이 길보아 산에서 자결할 때 블레셋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용맹한 왕자들인 겁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이스보셋은 없었습니다. 그가 왕이 될 때 나이가 40세였다고 했으니까 아버지가 죽을 때도 최소한 30세는 넘었을 겁니다. 이스라엘은 20세 이상이면 전쟁에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민 1:3). 그런데 이스보셋은 30이 넘었으니까 당연히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아마도 전쟁이 두려워서 참여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다윗은 20세가 되기도 전에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그것도 모두가 두려워하는 골리앗에 맞서 전쟁을 시작한 겁니다. 그런데 이스보셋은 30이 넘어서도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겁니다. 그러니 그런 그가 이스보셋 곧 수치스러운 사람이라는 이름을 갖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었을까요? 더구나 전쟁에 패배하여 다 무너진 이스라엘을 어떻게 재건하고 왕이 된 것일까요? 아브넬이 한 겁니다. 아브넬이 다 한 겁니다. 이스보셋은 그저 왕이라는 이름만 갖고 실상은 아브넬이 다 한 겁니다. 아브넬은 사울의 조카였습니다. 또한 아브넬은 사울의 군대를 이끌던 군사령관이었습니다. 그런 아브넬이 애써 나라를 재건하고 이스보셋을 왕위에 앉혀준 겁니다. 그러니까 이스보셋은 아브넬을 믿고 왕이 된 사람인 겁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보셋은 아브넬을 믿고 아브넬만 의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넬이 있어야 마음이 편하고 아브넬이 없으면 불안해하는 아브넬의 사람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아브넬에게 사울의 후궁 리스바의 일로 책망을 했습니다. 감히 아브넬을 책망한 겁니다. 실제로 아브넬이 사울의 후궁인 리스바와 불륜을 맺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실이라면 아브넬을 반역으로 다스릴 수 있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어쩌면 이스보셋이 아브넬을 몰아내고 실권을 쥐려고 이것을 문제 삼았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스보셋은 그럴만한 용기도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보셋은 아브넬이 버럭 화를 내자 한마디 대꾸도 하지 못한 겁니다. 아브넬은 그냥 화만 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넬은 대놓고 이스보셋 앞에서 나라를 다윗에게 바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보셋은 그런 아브넬이 무서워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명색이 왕이라는 사람이 신하가 대놓고 반역을 하겠다는데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겁니다. 그러니 그는 이스보셋 수치스러운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더욱이 아브넬은 말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다윗을 찾아가서 나라를 다윗에게 넘기겠다고 협상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요압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아브넬이 남왕국에서 살해당한 겁니다. 그렇다면 이건 전쟁도 불사할 만큼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당연히 남왕국에 책임을 물어야하는 중차대한 일이었던 겁니다. 그러나 이스보셋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남왕국에도 다윗에게도 어떠한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스보셋은 아브넬이 헤브론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손의 맥이 풀려버리고 말았습니다. 전쟁은 고사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혀버린 겁니다 :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은 아브넬이 헤브론에서 죽었습니다 함을 듣고 손의 맥이 풀렸고 온 이스라엘이 놀라니라” 이런 사람이 이스보셋입니다. 그러니 후대의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이스보셋 수치스러운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 당연한 겁니다.
더욱 답답한 것은 이스보셋은 그런 상황에서도 낮잠을 자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랬습니다. 이스보셋은 그토록 위급한 상황에서도 한가하게 낮잠이나 자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부하들에게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 :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바아나가 길을 떠나 볕이 쬘 때 즈음에 이스보셋의 집에 이르니 마침 그가 침상에서 낮잠을 자는지라 레갑과 그의 형제 바아나가 밀을 가지러 온 체하고 집 가운데로 들어가서 그의 배를 찌르고 도망하였더라” 북왕국 이스라엘의 장군들 중에 레갑과 바아나라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형제가 모두 북왕국의 장군들이었습니다. 그 두 사람은 베냐민지파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과 같은 지파의 사람들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스보셋을 배신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다윗에게 투항하기로 작정한 겁니다. 그들은 아브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는 나라가 망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다윗이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될 거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렇다면 다윗에게 잘 보이는 것이 지혜로운 선택일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다윗에게 잘 보일 수 있을까요?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있습니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을 해본다는 건데 사실 이 말은 많은 문제가 있는 말입니다. 이게 사고방식이 같은 사람들끼리는 통하는 말입니다. 생각하는 방식이 같은 사람들은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면 서로를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고방식이 다른 사람은 안 됩니다. 생각하는 방식이 다른 사람은 아무리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역지사지, 레갑과 바아나가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했습니다. 다윗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본 겁니다. 그러자 그들의 생각에는 다윗이 사울을 철천지원수로 여길 것 같았습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너무너무 못되게 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입장이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도 원수로 여길 것이 분명했습니다. 이스보셋만 아니면 다윗이 이미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답이 나왔습니다. 어떻게 해야 다윗에게 잘 보일지 답이 나온 겁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원수로 여기는 이스보셋을 죽여주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틀림없이 다윗이 기뻐하고 자신들에게 큰 상을 줄 것 같았습니다. 역지사지 자신들이라면 틀림없이 그럴 것 같았던 겁니다.
그래서 이스보셋을 죽인 겁니다. 그들은 이스보셋을 죽인 것으로 그치지 않고 머리를 잘라 다윗에게 가져갔습니다 : “그들이 집에 들어가니 이스보셋이 침실에서 침상 위에 누워 있는지라 그를 쳐죽이고 목을 베어 그의 머리를 가지고 밤새도록 아라바 길로 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 왕에게 이스보셋의 머리를 드리며 아뢰되 왕의 생명을 해하려 하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 되신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의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 하니” 그들은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를 갚아주셨다고 말한 겁니다. 과연 그들의 생각대로 다윗이 기뻐했을까요? 그렇게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져오면 다윗이 기뻐하며 큰 상을 내렸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다윗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기뻐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하나님께 맹세를 하며 그들을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 “다윗이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그의 형제 바아나에게 대답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내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전에 사람이 내게 알리기를 보라 사울이 죽었다 하며 그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줄로 생각하였어도 내가 그를 잡아 시글락에서 죽여서 그것을 그 소식을 전한 갚음으로 삼았거든 하물며 악인이 의인을 그의 집 침상 위에서 죽인 것이겠느냐? 그런즉 내가 악인의 피 흘린 죄를 너희에게 갚아서 너희를 이 땅에서 없이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청년들에게 명령하매 곧 그들을 죽이고 수족을 베어 헤브론 못가에 매달고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져다가 헤브론에서 아브넬의 무덤에 매장하였더라” 그랬습니다. 다윗은 그 자리에서 그들을 죽였습니다. 단순히 죽인 것만이 아니라 그들의 손과 발을 헤브론 못가에 매달았습니다. 그들이 그 손과 발로 얼마나 악한 짓을 했는지 모든 백성에게 공개한 겁니다. 이어 다윗은 이스보셋의 머리를 아브넬의 무덤에 매장해주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아브넬과 함께 이스보셋을 매장해 준 겁니다.
다윗이 왜 이렇게 했을까요? 사실 이스보셋은 다윗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 아닌가요? 또한 그의 죽음은 사실상 다윗에게 득이 되면 되지 해가 될 일은 아니지 않을까요? 이것이 레갑과 바아나의 생각이었습니다. 득과 실을 따져서 득이 되면 좋아하고 실이 되면 싫어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겁니다. 그래서 이스보셋을 죽이고 다윗에게 찾아온 겁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득과 실을 따지는 사람이 아니었던 겁니다. 다윗에게 중요한 건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이 중요한 사람에게는 세상에서의 득과 실이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세상의 삶에서 어떤 것이 유익이 되고 어떤 것이 해가 되는지 그것이 제일 중요할 겁니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어떻게 보실까? 이것만이 다윗에게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 어떨지가 중요했던 겁니다. 그러니 역지사지가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 아무리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겁니다.
사무엘하 4장에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각각 믿는 것이 서로 다른 사람들입니다. 첫 번째는 사람을 믿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믿고 사람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스보셋입니다. 이스보셋이 믿고 의지한 사람은 아브넬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보셋은 아브넬이 있어야 마음이 편했습니다. 설령 아브넬이 자신에게 못되게 굴어도 아브넬이 있어야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던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아브넬이 죽자 손에서 맥이 풀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과연 아브넬은 믿을 만한 사람이었을까요? 물론 이스보셋은 아브넬 덕분에 왕이 된 사람이 맞습니다. 그래서 아브넬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사람이 이스보셋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아브넬은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배신하고 이용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를 의지하다가 이스보셋, 수치스러운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 한 부류는 레갑과 바아나 형제입니다. 이들은 권력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권세를 가질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물질을 믿고 권력을 믿고 세상을 믿는 사람들인 겁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었던 그 권력은 그들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 권력 때문에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세 번째는 다윗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믿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하나님만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에게는 언제나 하나님의 생각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이 아닌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었습니다. 세상의 그 누구도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믿음의 대상이 아니었던 겁니다.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 믿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의지한 겁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믿는 사람인가요? 무엇이 있어야 누가 있어야 안심이 되십니까?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람은 너무나도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만 믿어야 합니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미움의 대상이 되면 안 됩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사람을 미워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사람을 위해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게 다윗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을 미워하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브넬도 이스보셋도 미워하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들의 죽음을 슬퍼한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된 겁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믿으십니까?
다윗이 왕이 되기까지
삼하 4:1-12 / 장석환목사
오늘 본문은 북이스라엘의 이브보셋이 암살당한 이야기입니다.
1. 이익을 좇아
아브넬의 죽음은 북이스라엘에 큰 충격이 되었습니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은 아브넬이 헤브론에서 죽었다 함을 듣고 손의 맥이 풀렸고 온 이스라엘이 놀라니라” (삼하 4:1) '이스보셋은아브넬이 헤브론에서 죽었다 함을 듣고 손의 맥이 풀렸고 온 이스라엘이 놀라니라'고 말합니다. 이스보셋과 온 이스라엘이 놀랐습니다. 나라에 희망이 없어 보일 정도가 되었습니다.
“레갑과 그의 형제 바아나가 밀을 가지러 온 체하고 집 가운데로 들어가서 그의 배를 찌르고 도망하였더라” (삼하 4:6) '레갑...집 가운데로 들어가서 그의 배를 찌르고 도망하였더라'고 말합니다. 레갑과 바아나는 이스보셋의 중요한 군대 지휘관이었습니다. 이스보셋의 집에도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직위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왕을 죽이기로 결심하여 죽였습니다.
“그들이 집에 들어가니 이스보셋이 침실에서 침상 위에 누워 있는지라 그를 쳐죽이고 목을 베어 그의 머리를 가지고 밤새도록 아라바 길로 가” (삼하 4:7) '침상에 무워 있는지라 그를 쳐죽이고 목을 베어 그의 머리를 가지고'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들이 섬기던 왕을 누워 있을 때 죽였습니다. 비겁한 행동입니다.
'그의 머리를 가지고' 다윗에게 갔습니다. 그들이 왕을 죽였다는 증거를 삼기 위해 가지고 갔을 것입니다. 피 흘리는 머리를 들고 먼 거리를 간 것은 참으로 잔인합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자신들이 섬기던 왕의 머리를 들고 간 것은 참으로 인정머리 없고 잔인한 행동입니다.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 왕에게 이스보셋의 머리를 드리며 아뢰되 왕의 생명을 해하려 하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 되신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의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 하니” (삼하 4:8)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 되신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의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하나님께서 지지하시는 정당한 행동인 것처럼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진짜 정당하였을까요? 다윗에게 합리화의 이유를 제공하기 위한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결코 악한 방식을 지지하지 않으십니다. 게다가 그들은 진정 다윗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하였습니다. 그들이 이스보셋의 머리를 들고 간 것은 자신들이 죽였음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윗에게 상을 받을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좇아 행동하는 때가 많습니다. 레갑과 바아나는 이것이 자신들에게 이익이 아니라 생각했으면 결코 이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면 행동하고 이익이 되지 않으면 행동하지 않는 것은 철저히 선악과와 같습니다. 오직 자신의 생각과 이익이 행동의 기준이 되는 것은 본능적이지만 매우 악한 행동입니다.
2. 진리를 좇아
다윗이 왕이 되는 과정을 보십시오. 가장 먼저 북이스라엘의 사울이 죽었습니다.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자인 요나단도 죽었습니다. 다른 아들들도 죽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자신이 먼저 사울을 죽일 수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왕으로 기름을 부으셨으니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사울을 죽이는 것을 죄로 여겼습니다. 요나단의 죽음에는 누구보다 더 슬퍼하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아브넬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스보셋이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데 거의 모든 장애물이 제거된 것입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에게 다리 저는 아들 하나가 있었으니 이름은 므비보셋이라 전에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소식이 이스르엘에서 올 때에 그의 나이가 다섯 살이었는데 그 유모가 안고 도망할 때 급히 도망하다가 아이가 떨어져 절게 되었더라” (삼하 4:4) '요나단에게 다리 저는 아들 하나가 있었으니 이름은 므비보셋이라...나이가 다섯 살이었는데'라고 말합니다. 이제 남은 유력한 후손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인데 나이는 12살입니다. 그러니 거의 모든 장애물이 없어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것을 생각하기 보다는 레갑과 바아나의 죄를 생각하였습니다.
다윗이 대답하였습니다. “하물며 악인이 의인을 그의 집 침상 위에서 죽인 것이겠느냐 그런즉 내가 악인의 피흘린 죄를 너희에게 갚아서 너희를 이 땅에서 없이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삼하 4:11) '악인이 의인을 그의 집 침상에서 죽인 것이겠느냐'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스보셋이 죽은 것은 분명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데에는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진리를 생각하였습니다. 자신을 생각하면 레갑과 바아나가 잘한 것이지만 진리를 생각하면 악한 일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악한 일이라고 말 하였습니다.
“청년들에게 명령하매 곧 그들을 죽이고 수족을 베어 헤브론 못 가에 매달고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져다가 헤브론에서 아브넬의 무덤에 매장하였더라” (삼하 4:12) '그들을 죽이고 수족을 베어'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손으로 이스보셋을 죽였으니 손을 잘랐고 다리로 달려왔으니 다리를 잘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악한 자임을 드러내기 위해 '헤브론 못 가'에 메달았습니다.
다윗이 이익을 좇아 왕이 되고자 하였다면 벌써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진리를 좇아 왕이 되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손해인 것 같았으나 결국은 이익이 됩니다. 결국 이스보셋이 죽음으로 모든 장애물이 제거되고 이제 다윗은 왕이 됩니다. 그 과정에 다윗은 자신의 이익을 좇아 생각하지 않고 자신에게 이익이 되어도 악이면 악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모든 과정에 철저히 진리를 좇아 갔습니다. 그래서 왕이 되어도 당당히 왕이 될 수 있게 됩니다.
이스보셋이 수하 장군의 배신으로 암살당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좇아 행동한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에 벗어난 악한 행위였습니다. 결국은 자신들에게 재앙이 됩니다. 그것이 다윗에게는 이익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악한 일이기에 기뻐하지 않고 죄 값을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이익을 좇아 행동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익이 아닙니다. 진리를 좇아 행해야 합니다. 그것이 손해보는 것 같지만 결국 이익입니다. 오직 진리를 좇아 행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울 왕조의 이스보셋이 죽다
삼하 4:1-12 / 야곱
◆ 이스보셋이 살해되다(1-7)
(1)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은 아브넬이 헤브론에서 죽었다 함을 듣고 손의 맥이 풀렸고 온 이스라엘이 놀라니라
이스보셋은 이미 아브넬의 반역을 알았다. 그러고도 어찌할 힘이 없었다. 그런데 아브넬의 죽음은 또 다른 충격이었다. 귀순하겠다는 사람까지 죽였으니, 아직도 왕으로 있는 자신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제는 다윗이 쳐들어오면 제대로 막아줄 장군도 없다.
충격은 이스보셋만 받은 것이 아니다. 그에게 속한 군 지휘관도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완전히 항복을 선언한 군사령관도 죽음을 맞이한 마당에 자기들의 목숨을 보전할 것이라고는 기대할 수 없었다. 다윗은 받아준다고 했지만, 그 진심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확실하게 다윗의 편임을 알려줄 그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에 군 지휘관이었던 사람 둘이 이스보셋을 배신할 궁리를 했다. 이 둘은 베냐민 지파로서 사울과 같은 지파였고 그동안 사울에게 많은 은혜를 입었음이 분명함에도 배신할 생각을 하고 몰래 들어가서 이스보셋을 살해했다.
5, 6, 7절은 중복된 것처럼 보인다. 6절에는 배를 찌르고 도망했다고 하고, 7절에는 쳐 죽이고 목을 베었다고 했다. 두 번 들어간 것인가? 어떤 주석가는 6절에서 배를 찔려 죽은 사람은 문지기였고, 7절에서 이스보셋이 죽은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일리가 있는 말 같기도 하다. 그러나 5절은 이스보셋이 낮잠 자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고 6절은 이스보셋을 죽인 것을 전체적으로 말한 것이고, 7절은 구체적으로 과정을 풀어서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6절의 ‘도망하였더라’는 말과 7절의 밤새도록 아라바 길로 갔다는 말이 서로 연관되기 때문이다.
아라바 길은 사해 남단에 있는 계곡인데, 상당히 메마르고 거친 길이다. 이들이 이 길을 선택한 것은 최대한 빨리 가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스보셋이 있던 마하나임에서 헤브론까지는 100km가 넘는 거리다. 빠른 걸음으로 시간당 6km의 속력으로도 걸어도 16시간이 넘게 걸리는 길이다. 이들이 한낮에 이스보셋을 살해하고 출발하여 밤새 걸었다는 말이 이해된다.
그런데 4절에서 갑자기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언급된다. 앞뒤 문맥과 어울리지 않고 생뚱맞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이스보셋이 제거되는 상황을 설명하는 도중에 이렇게 므비보셋을 갑자기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이스보셋이 죽으면 사울 왕조에서 왕위를 이을 유일한 사람은 므비보셋뿐인데, 그 므비보셋은 절름발이기 때문에 당시 상황에서는 전쟁에서 앞장서야 하는 왕으로서는 부적격자였다. 즉 이스보셋이 죽음으로써 사울 왕조는 완전히 끝임을 암시하는 대목이기에 언급한 듯하다.
◆ 다윗의 현명한 판단(8-12)
(11) 하물며 악인이 의인을 그의 집 침상 위에서 죽인 것이겠느냐 그런즉 내가 악인의 피흘린 죄를 너희에게 갚아서 너희를 이 땅에서 없이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스보셋의 머리를 들고 온 바아나와 레갑은 큰 상을 받을 줄 알았다. 그러나 다윗의 생각은 달랐다. 이들이 자신들의 주를 배신한 것을 처벌하고 이들의 수족을 헤브론 못가에 전시했다. 그리고 이스보셋의 머리는 아브넬의 무덤에 잘 매장해주었다.
이것은 매우 지혜로운 판단이었다. 이것을 통해서 다윗은 사울 가족을 원수로 생각하지 않음을 온 천하에 공표하고, 사울에게 속한 사람들을 모두 품을 뜻을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었다. 이로써 사울에게 속한 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안심하고 귀순할 수 있게 하였고, 동족끼리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하나가 될 수 있는 기틀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주인을 배신하는 것은 절대로 칭찬받을 일이 아니며, 오히려 악행임을 신하들에게 일깨우고, 충성이 얼마나 큰 미덕인가를 교육하는 효과도 있었다.
언뜻 생각하면 사울 집안이 망한 것이 다윗으로서는 기뻐할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인의 짧은 생각이고, 왕의 위치에 있었던 다윗은 더 멀리보고 더 깊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다윗처럼 멀리 보고 깊이 생각하여 결정을 내릴 줄 아는 지혜가 얼마나 귀한가!
지혜는 우리 인생에서 제일 필요한 요소다. 그리고 최고의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생존하기 위한 지혜, 돈 버는 지혜, 다스리기 위한 지혜 등 모든 상황에서 지혜가 필요하지만, 지혜 위에 가장 뛰어난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자체가 인간의 가장 필요한 지혜이면서 동시에 모든 지혜의 근원이다.
하나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원합니다.
잠시라도 세속에 홀려서 경외하는 마음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게 해주십시오.
빠른 길이 아닌 바른 길입니다..
삼하 4:1~12 / js9191
"내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악인의 피흘린 죄를 너희에게 갚아서 너희를 이 땅에서 없이하지 아니하겠느냐(9,11)"
샬롬! 오늘도 진리의 말씀을 통해 믿음의 길로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조선 시대 거상(巨商) 임상옥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장사란 이익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 하수(下手) 장사꾼은 당장 눈앞의 이익을 위해 사람을 속이는 부정한 방법을 택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신뢰를 잃게 됩니다. 그러나 진짜 거상은 당장 손해를 볼지라도 정직하게 거래하며 신용을 쌓아 올립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눈앞에 보이는 빠른 길이 아니라, 바른 길을 걸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빠르게 세워진 이스보셋의 나라가 어떻게 무너지는지 보여줍니다. 그에 반해 다윗의 나라는 여전히 더디게만 보입니다. 기름 부음 받은 후 수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다윗은 여전히 온 이스라엘의 왕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보셋이 아니라 다윗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뤄 가십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 참된 성도는 어떤 자인지 함께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첫번째로, 하나님의 바른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은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됩니다. 본문 1절입니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은 아브넬이 헤브론에서 죽었다 함을 듣고 손의 맥이 풀렸고 온 이스라엘이 놀라니라"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아브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스보셋의 나라는 빠르게 세워진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나 백성들의 지지가 아니라, 군사령관 아브넬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급조한 나라였습니다. 인간적인 계산으로 쌓아 올린 나라는 이처럼 한 사람의 힘만 사라져도 순식간에 흔들립니다. 심지어 이스보셋의 끝은 참혹했습니다. 본문 6절입니다. "레갑과 그의 형제 바아나가 밀을 가지러 온 체하고 집 가운데로 들어가서 그의 배를 찌르고 도망하였더라" 자신의 부하인 레갑과 바아나에게 배신을 당해 죽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사람이 세운 나라는 무너집니다. 아무리 겉보기에 화려하고 튼튼해 보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무너집니다. 반면 다윗의 나라는 어떠합니까? 매우 더디고 답답해 보입니다. 다윗이 왕으로 기름 부음 받은 지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의 시간은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는 시간이었고, 사울이 죽은 지금도 유다 지파만이 그를 왕으로 인정할 뿐입니다. 세상의 시선으로 보면 실패한 인생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이 모든 시간이 결코 낭비되는 시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겉보기에 화려한 이스보셋의 나라가 무너지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다윗을 통해 이뤄질 하나님 나라는 날로 굳건해지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빠른 길이 아닌 바른 길로 나아가길 축복합니다. 때로는 내 생각과 다르고 더디게 느껴질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걷는 길이 가장 바른 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두번째로, 하나님의 공의를 선택하십시오. 이스보셋의 부하 레갑과 바아나는 나라가 흔들리는 틈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기회주의자였던 그들은 이스보셋을 살해하고, 그의 머리를 다윗에게로 가져갑니다. 본문 7-8절입니다. "그를 쳐죽이고 목을 베어 그의 머리를 가지고 밤새도록 아라바 길로 가 헤브론에 이르러 …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 되신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의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 하니" 그들은 밤새 쉬지 않고 달려 헤브론으로 갑니다. 이스보셋의 머리를 바치면 다윗이 큰 상을 줄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은근히 부러워합니다. 배신은 옳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남보다 먼저 기회를 잡아채는 것을 능력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들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본문 9절과 11절입니다. "내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악인의 피흘린 죄를 너희에게 갚아서 너희를 이 땅에서 없이하지 아니하겠느냐" 다윗은 자신의 왕권을 위해 불의를 묵인하지 않았습니다. 죄에 대하여 명확히 죄라고 선언합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해서 불의를 눈감지 않았습니다. 왜입니까? 그가 섬기는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불의의 벽돌을 끼워 넣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어떻게 이렇듯 단호히 결단할 수 있었을까요? 그가 광야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성품과 약속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그런 하나님을 신뢰했기에,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성취될 것을 믿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나를 유혹해오는 불의는 무엇입니까? 내 눈앞에 놓인 세상의 빠른 길은 무엇입니까? 내 생각을 내려놓고, 비록 더딜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공의의 길을 걷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공의의 하나님, 빠른 길이 아닌 주님의 바른길로 나아가기 원합니다. 내 눈앞에 있는 세상의 유혹에, 인간적인 계산에 휩쓸리지 않는 믿음을 주옵소서. 세상의 방식이 아닌 오직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내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도울 힘이 없는 인생
삼하 4:1-12 / 잡초
사람은 어떤 위치에 있던지, 자기의 위치에 어울리는 일을 하려고 고민하고 노력합니다. 대통령이 되면, 내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대통령 재직시에 무언가 업적을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마음의 부담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무리하게 경제적 정책도 할 수 있고, 외교정책도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노래 부르면 붙잡아다가 패고, 독도를 지키던 의용수비대장을 잡아다가 안기부에서 고문하고, 이제는 독도를 지키는 사람들이 의용군인이 되고,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노래가 이제는 온 땅에 가득차는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어떤 직책에 있을 때 뭔가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고 싶은 심정에 유혹을 받습니다. 그래도 누가 어느 자리에 있었을 때 무엇을 할까? 소위 Doing 무엇을 했느냐? 하는 일에 우리는 많은 관심을 갖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무엇을 했느냐 하는 일에 대해서 우리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그렇지 않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 우리는 어른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람이면 사람이냐, 사람이라야 사람이지. 그 말이 그 말 같은데, 결국 그 말은 조금 유식하게 이야기하면 됨됨이, Being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의 됨됨이가 무엇이냐 하는 이야기지요. Doing 무엇을 했느냐?에 의해서 그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Being, 어떤 사람이 되었느냐? 하는 내적인, 본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평가하고 또 칭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마리아와 마르다에 의해서 마르다는 열심히 무언가 일을 하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앞에서 말씀을 듣는 거기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마리아가 말씀을 듣는 것을 보면서 마르다가 짜증을 냈습니다. 너 말씀을 듣기보다 와서 이 일 좀 도와야 하지 않느냐? 라고 이야기 하지만 우리 주님은 놀랍게도 마리아가 훨씬 좋은 편을 선택했다. 우리 주님도 Doing보다는 Being에 더 높은 점수를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 열 두 지파 중에 외형적으로는 열 지파를 인도하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이 자기의 군대장관 아브넬이 자기와 충돌해서 갈등을 느끼고는 이스보셋을 허수아비 왕으로 세우고, 자기가 실권을 가졌지만 이스보셋왕이 호락호락 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이제는 다른 생각을 해야 되겠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자기의 북왕국 이스라엘 그 땅과 모든 권리를 남왕국 왕으로 있는 다윗에게 넘겨야 되겠다. 그냥 넘기는 것이 아니라 협상을 통해서 나의 지분, 나의 기득권을 차지해야 되겠다. 밀사를 보내고 자신이 직접 찾아가서 계획을 하고, 의논을 하고, 돌아오는 중에 통일이 되었을 때 자기의 경쟁자라고 할 수 있는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에게 죽임을 당하는 그런 내용을 우리는 지난 주에 보았습니다.
허수아비이기는 했지만, 군대장관 덕분에 왕노릇을 하고 있던 이스보셋이 아브넬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손에 맥이 풀렸다. 그렇게 1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이스라엘 정국이 아주 무정부 상태로 돌아갔어요. 그러는 중에 사울왕과 같은 베냐민 지파 지금 이스보셋이 사울의 넷째아들이니까 계속 베냐민 지파가 왕을 하고 있는데, 같은 지역, 같은 지파 사람입니다.
처음에 어떤 일을 위해서는 같은 지파의 사람들이 힘을 모아서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좋을 때에는 서로 도움이 되었어요. 무슨 예를 들면, 충남 향우회, 호남 향우회, 영남향우회, 좋은 때는 같은 지역, 같은 동네라고 하는 것만 가지고도 서로 무엇을 도와주고, 서로 힘이 되어 주지만 어떤 결정적인 이해관계가 들어서면, 서로 원수가 되는 경우들이 있지요.
같은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지만, 지금 무정부 상태가 되면서 두 장수 바아나와 레갑이라고 하는 형제장수가 생각하기를 머리를 빨리 굴렸습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빨리 정세를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지금 무정부상태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남왕국 유다의 왕인 다윗에게 점수를 따는 일인데, 그 일이 무얼까?
지금 허수아비 왕의 무정부상태인 이스라엘의 왕 이스보셋을 죽이고, 그 목을 베어서 다윗에게 바치면 우리는 일등공신이 되지 않을까? 가만히 있어도 무너져 가는 이스라엘은 저절로 다윗에게로 갈 터인데, 그냥 가기 전에 그래도 우리 때문에 북왕국인 당신의 나라가 되었다고 하는 그 공로를 한 번 챙겨보자. 이 형제 장수는 그 생각으로 바빴습니다.
그리고 왕의 궁궐을 찾아갔습니다. 경호원들이 많이 있었겠지요? 밀을 가지고 온다고 하고왕이 누워있는 침상에까지 다가갔습니다. 왕이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칼로 그 배를 찌르고, 도망을 쳤다가 다시 와서 왕의 목을 베고서 그 벤 목을 가지고 밤새도록 사해 주변 길로 다녀서 헤브론 다윗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이스보셋, 북왕국 이스라엘왕의 머리를 갔다가 바치면서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왕의 생명을 해하던 원수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왕의 원수를 자손에까지 갚으셨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왕의 원수를 갚게 했습니다. 우리가 공로자가 아닙니까? 일등공신 아닙니까? 이것이 이 두 장군이 왕의 목을 베어서 배반하고 다윗에게로 온 명분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명분을 대의명분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 명분은 우리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이 바아나와 레갑이라고 하는 형제 장수가 이스보셋의 목을 베어가지고 온 것은 다윗의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그런 의도가 아니라 무너져가는, 쓰러져가는 국가에서 무언가 자기의 기득권과 이해를 챙기려고 하는 욕심에서 비롯됐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삼척동자도 다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 동안에 대의명분을 내세워서 명분은 이렇게 이렇게 이야기 하지만 사실 속마음은 다른 어떤 욕심 때문에 그런 일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 일을 하셨지요? 목사님, 제가 이런 이런 이유 때문에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명분입니다. 속마음의 진정한 이유가 다른 것이 감추어져 있지 않습니까?
저는 사무엘상부터 사무엘하까지 오면서 중심적인 인물이 다윗인데, 저는 이 강해설교를 준비할수록 계속 이 다윗에게 깊이깊이 빠져들어요. 다윗이라고 하는 사람을 만약 그 채를 가지고 그의 삶을 채를 친다고 하면 왠만한 것들은 다 구멍으로 빠져나간다고 할지라도 마지막 남는 다윗이라고 하는 이미지는 무엇일까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이라면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것도 포기할 줄 아는 사람, 참 어려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유익이 되면 ‘하나님 조금 가만히 계세요. 좀 눈 한 번 찔끔 받고 계세요.’ 몇 천만원, 몇 억이 그냥 떨어지는데, 그러는 사람 많지 않습니까? 여러분 마음 속에 손을 한 번 대고 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여러분의 이익을 대해서 살아오고, 필요할 때만 여러분 보내지 않았습니까? 오늘 다윗은 정말 놀라운 기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에게 정말 유익된 일이 다가오더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지 않는 일이면 그는 행하지 않았고, 기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레갑과 바아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너희들 날 잘 모르나봐? 그 전에 사울왕이 길보아 전투에서 블레셋과 싸워 전쟁을 벌이다가 군사를 다 잃고 마지막 기병대가 막 다가오는 순간에 더 이상 안 되겠다. 하나님의 자녀가 할례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죽는 것 보다는 차라리 내가 죽지.
자결을 하는 그 상황에서 아말렉 사람이 그것을 보고서 사실은 자기가 죽인 것도 아니지만 전쟁터에서 약탈하려고 다니던 그런 비류들이었는데 스토리를 꾸며서 왕을 내가 죽이고, 다윗왕의 원수였던 사울왕을 죽이고, 그 왕관을 내가 가지고 왔습니다. 내가 공로자 아닙니까? 내가 좀 대우해 주세요. 라고 아말렉 사람이 다윗에게 왔을 때 다윗이 어찌 네가 하나님이 심판해야 할 일을 네가 했다고 하느냐? 어찌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을 네가 함부로 손을 대느냐? 아말렉 사람을 그 자리에서 죽였어요. 사울이 죽은 것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네가 어찌하여 11절 악인이 의인을 그 집 침상에서 죽인 것이겠느냐?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자를 네가 네 욕심을 가지고 기울어진 이스라엘을 배반하고, 보상을 받으려는 그런 욕심을 가지고 네게로 왔다고 내가 기뻐할 줄 알았느냐? 내가 나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사람이 섭섭할 때가 있지요? 몰라줄 때 무슨 오해가 있어요. 속상합니다. 이렇게 나를 모르나? 적어도 몇 년을 나하고 신앙생활을 했으면 알텐데... 눈만 봐도 알텐데... 왜 모릅니까? 욕심이 자기의 생각을 지배하면 몰라지지요. 흐려지지요.
이 바아나와 레갑이 다윗을 정말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욕심이 가득해 지면서 바로 다윗을 볼 수 없었어요. 이 목을 가지고 가면 다윗도 상을 줄 것이다. 그들의 욕심이 다윗의 의로움을 가리워 버렸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결코 기회주의자였던 레갑과 바아나 두 장수의 수고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는 때때로 승리를 위해서, 축복을 위해서 우리는 인위적으로 애를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위적으로 승리하려고 하고, 응답받으려고 우리는 애를 씁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는 것인 줄 믿습니다.
영국 브리스톨은 요한 웨슬리 목사님이 은혜받고 거듭난 이후에 처음으로 사역을 시작한 곳입니다. 또 브리스톨은 기도의 사람 조지 뮐러라고 하는 분이 고아들을 데려다가 고아원을 시작한 곳이기도 합니다. 당시 영국 사회는 수없이 많은 아이들을, 사생아들을 내어다 버렸습니다. 그 아이들을 조지 뮐러가 다 데려다가 키웠습니다.
그 브리스톨 고아원 했던 곳에 가 보았는데, 지금은 도심지에서 가까운 곳이지만, 과거에는 아주 시에서 먼 외곽지역이었어요. 거기에 허름한 곳에 고아원을 짓고, 버려진 어린 아이들을 모아다가 빵을 구해서 먹이고, 그들의 삶의 자리를 제공하고, 그러면서 신앙을 가르쳤습니다.
아이들이 점점 많아졌어요. 어느 날 조지 뮐러는 아이들을 식탁에 다 불러앉혀는데, 그 날은 아이들에게 줄 빵이 없어요. 먹을 것이 없지만, 전부 아이들을 나무식탁에 다 불러 앉혀놓고, 우리 기도하자. 감사기도하자. 아이들 생각에 감사기도 하려면 음식이 있어야 하는데, 빵이 있어야 하는데, 그 날은 빵을 배급하지 못하고, 빈 식탁에서 조지 뮐러는 아이들 앞에 감사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비록 빵은 없지만, 우리에게 건강을 주신 것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비록 빵은 없지만, 생명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기도를 하고 있는 동안에, 밖에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브리스톨의 유명한 빵집에서 빵을 만들어서 파는 사람이 이웃동네의 부자가 빵을 주문해서 수레에 가득 새로 만든 빵을 실고서 그 고아원 앞길로 지나가는데, 비가 자주 오는 영국에서 포장이 되지 않은 진흙길 때문에 수레가 한 쪽 바퀴가 빠졌어요.
예비된 바퀴도 없고, 지금 시간을 맞추어서 가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약속된 시간에 그 빵을 배달할 수가 없게 되었어요. 그래서 큰 낭패구나. 그리고서는 좌절하고 있는데, 그 사람 눈에 고아원이 들어왔어요. 사실은 그 사람도 동네 주변에서 어떤 사람이 고아들을 데려다가 그 아이들을 잘 양육한다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조금 좋은 일을 해야 하는데, 그런 마음만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날 수레 바퀴가 빠지면서 배달을 할 수 없게된 빵을 내가 그럼 고아원에 가져다 줘야 되겠다. 그러면서 고아원을 들어갔어요. 방문을 똑똑 두드리는데, 그 두드리는 시기가 언제냐 하면 지금 식탁에 아무 것도 놓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는 시간이었어요. 조지 뮐러가 감사기도를 마치고서 나가보니까 여기는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나가보니까 한 신사가 자기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 해요. 지금 방금 만든 고급빵을 저 이웃동네 부자에게 배달을 하다가 지금 당신네 고아원 앞에서 수레 바퀴가 빠져서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는데, 이 빵을 내가 고아원에게라도 주고 싶은데, 괜찮겠느냐고, 조지뮐러는 하나님께 여호와 이레로 감사한 줄 믿습니다.
생전 먹어보지도 못한 고급빵을 그날 아이들은 아낌없이 물론 그 아이들 중에는 빵이 없이 기도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불평한 아이들도 있었겠지요. 빵도 없는데 감사기도야? 감사할 것이 있어야 감사하지. 이런 아이들도 있었겠지만 중요한 것은 지도자지요. 리더라고 하는 것은 그럴 때 그런 사람들을 끌고 갈 수 있는 리더쉽, Spiritual Power가 필요한 것입니다.
불평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을 두는 것이 아니라 같이 안고 가는 것입니다. 유능한 가이드는 힘들어 하는 사람에게 조금만 올라오면 됩니다. 여러분, 산 올라갈 때 제일 고마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까마득하게 멀어요. 얼마나 남았어요? 내려오는 사람에게 물어봅니다. 다 왔어요. 조금만 올라가면 되요. 그러면 힘이 나잖아요. 아휴, 지금 올라가면 어려운데요. 그러면 맥이 쫙 빠지지요.
제가 한라산 올라갈 때도 4- 5시간 걸리는 것을 그냥 뻔히 알지만 물어보지요. 힘들다는 거지요. 얼마나 남은 것 같아요? 다 온 것 같아요. 조금만 올라가면 되요. 힘 내세요. 그러면 힘이 나요. 어휴, 절반도 못 왔는데, 언제 올라가려고 그래요. 이러면 맥이 풀리잖아요. 지도자는 힘을 불어넣어 주는 사람입니다.
지금 식탁에 아무 것도 없지만 우리가 감사할 수 있다고 하는 것, 여러분의 감사의 기도는 여러분의 식탁이 풍성할 때만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닌 줄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조지뮐러는 기도의 사람이라고 하지요? 기도의 아버지라고 하고, 고아의 아버지라고도 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기도하는 우리에게 이런 교훈을 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기도하고 돌아서서 3분이 지나도 그 마음의 확신이 있다면 그 기도는 응답받을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열심히 기도해 놓고, 돌아서서는 그 기도의 확신과는 관계없이 또 옛생활로 돌아가는 거예요.
교회에서 기도한 것 따로, 세상 나가서 근심 따로, 3분을 못 넘긴다는 것이죠. 그래서 기도는 우리가 기도하고 3분이 지나도 확신이 있다면 그 기도는 응답될 수 있는 기도라는 거예요. 그것은 자기의 체험에서 나온 것이죠.
인위적으로 응답을 하려고 하는 그런 우리의 생각보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응답을 사모하고 기다릴 수 있는 성도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레갑과 바아나는 기회주의적인 그런 자세를 가졌습니다. 지금 어떻게 주판을 튕겨야, 어떻게 계산기를 두드려야 내게 유익한가 하고 계산적인 행동을 했습니다.
내가 이런 행동을 해야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점수를 따지 않겠느냐? 그는 Doing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의 사람 됨됨이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차라리 그가 그 왕을 중심해서 이제 흐트러지고, 연약하고, 혼란스러운 나라를 지키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오히려 다윗이 그 장수들을 귀하게 보았을 것입니다. ‘야, 이 어려운 때에 그래도 저 사람들은 쓸 만 하구나.’
시편 46편 1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란 중에 만난 큰 도움이시라. 시편 기자는 또 고백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여러분들에게 도움이 필요한 순간, 건강이라는 도움이 필요하고, 물질이라고 하는 도움이 필요하고, 성공이라는 도움이 필요할 때 여러분들은 어디에, 여러분들의 도움을 구하시겠습니까?
사람을 많이 아는 것도 도움 중에 도움이지요. 우리 어느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자기 교회 구청에 건축과에 다니는 공무원이 있어가지고, 교회를 건축하는데 걱정 근심이 없대요. 자기가 설계부터, 시공부터, 구청에 허가 받는 것까지 알아서 다 하니까 걱정이 없대요. 야, 우리 구청 직원이 있으니까 참 좋네.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요. 도움이 됩니다.
여러분, 사회생활 할 때에 도움이 됩니까? 병원 한 번 입원해 보려고 하면 얼마나 병실 하나 얻기가 힘들어요. 그런데 여러분, 정사파이야 권사님한테 전화 한 번 하면 그 날로 들어가서 입원할 수 있잖아요. 여러분 고맙다고 음료수 사 드립니까? 고마워서 어떻게 하지. 하면서 입으로만 하지 않아요? 여러분 치료 다 받고 나올 때 그래도 음료수 박스 하나 해서 그 간호사들 있는 병동에 나눠들 드시라고 최소한의 인사는 하십니까? 그런건 뇌물이 아니예요. 기본적인 우리의 매너입니다.
사람을 알면 도움이 됩니다. 얼마나 도움이 되고, 말고요. 사람들은 또 이야기합니다. 돈만 있으면 안 되는 일이 뭐가 있어? 돈을 사람을 사서 까지, 제가 가끔 길을 지나다 보면 늘씬하게 생긴 아가씨들이 아마 키가 1m 70cm는 넘을 것 같고, 짧은 치마 입고, 그 부츠는 그 긴 것을 신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서는 막 춤을 추어댑니다. 아르바이트 중에는 그게 최고라면서요? 맥도날드에서는 1300원 받아도, 그거 하면 10000이 넘는다면서요. 춤도 잘 춰야 하고, 인물도 좋아야 하고, 키도 커야 하고, 아마 우리 청년들 중에도 그런 아르바이트 하는 청년이 있는 줄 모르겠어요.
내가 어떤 목사님이 지나가다가 그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내 생각에는 저 아이들 얼굴에는 기쁨이 없어, 이번에 온양에서 선교사 대회에서 하는데, 그 앞에서도 큰 점포가 오픈해서 그 아가씨들이 춤을 추면서 난리를 춰요. 가만히 제가 그 아가씨들 얼굴을 봤어요. 춤을 잘 추는가를 본 것이 아니라 그 아가씨들의 얼굴을 봤어요. 전혀 기쁨은 없어요. 왜 그래요? 자기는 돈 받은 만큼만 춤을 춰주면 되니까 기뻐서 추는 것이 아닙니다. 춤은 기뻐서 추어야 하는데, 돈을 받은 만큼만 추는 거지요.
그 사람이 만약에 오늘까지 돈을 받기로 했으면 내일 거기가서 춤을 출까요? 내일 가서 춤을 추면 그 여자는 정신 나간 여자지요. 돈으로 사람을 춤을 추게 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의 기쁨까지 살 수는 없지요?
이런 저런 것들이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고 말하지만 사실상 그런 것들은 우리에게 진정한 도움이 되지는 않아요. 우리의 육신에 편리함은 줄 수 있습니다. 이틀 기다릴 것, 하루 기다리고, 열 시간 기다릴 것 한 시간 기다리게 하고, 우리에게 편리를 줄 수는 있어요. 하지만 우리에게 기쁨을 주지는 않아요.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얼마나 많은 시간을 얼마나 많은 기회를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느라고 시간 쓰고, 물질 쓰면서 시간을 보냈습니까? 그러고도 빨리 회개하고 돌아오면 좋은데, 70, 80 되고나서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외로워 그제야 손들고 오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이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주님, 내 식탁에 빵이 없어도 저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내 삶에 넉넉함이 없어도 저는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사람으로 인해서, 물질로 인해서, 도움을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저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저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기뻐하라.
레갑과 바아나와 같이 약삭빠른 인생을 살아왔다고 생각하면서, 이것이 성공과 출세의 지름길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오늘 레갑과 바아나와 같은 인생은 여기서 끝내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것,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은 것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것은 절대로 자기에게 유익이 된다고 해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분명한 영적 자존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심령을 가지고, 오늘도 세상을 향해서 나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그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새벽은 모든 사람이 포기하는 시각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고, 더 이상은 참을 수 없고, 더 이상은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그 시간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다릅니다. 언제까지 새벽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저는 개척교회 하는 분들에게 권면합니다. 여러분, 그 고난의 현장을 다 겪었지만, 그 하나님이 잡아주시는 그 시간까지 낙심하지 마세요. 안 되네. 보따리 싸고 다른 데 가서 또 이름 바꾸고, 또 새로운 아파트 가서 시작하고, 그렇게 하지 마세요. 교회를 나오지 않는 주변의 사람들도 잠재적인 교인입니다. 그들이 불꽃 같은 눈으로 교회를 바라보고, 성도들을 바라보고 있어요. 그러면서 나도 언젠가 예수 믿으면 저 교회 가야지. 잠재적인 교인이 무서운 거예요.
저는 이 동네에서 5년, 10년, 20년 오래 살 던 분이 어느날 교회 등록했다고 그러면 저는 뛸 듯이 기쁩니다. 우리 교회가 여기서 22년을 있는 동안에 그들이 계속해서 우리교회가 조립식 때에도 보았고, 우리교회가 어려울 때부터 다 지켜보면서 그래, 내가 언젠가 교회 가면 저 교회를 간다. 그리고 그들이 마지막 결단을 하고, 이 자리에 왔습니다. 우리 평안의교회가 여기 있을 이유가 있었구나.
기다려야 합니다. 신앙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실 때까지,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도우시는 주님을 기억하면서 주님과 함께 하는 승리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우리 환난 가운데에서도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을 의지하기를 원합니다. 환란 중에 주님이 도우실 그 손길을 신뢰하기를 원합니다. 새벽에 도우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때 카이로스를 기다리게 하시고, 인위적으로 성공하며 출세하며 이해타산을 따지는 그러한 연약한 저희들 되지 아니하도록 주님 저희들의 신앙의 길을 붙잡아 주시옵소서.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않고, 우리를 도우시는 여호와 이레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