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과 문화에 관한 참신한 통찰
우리 시대 위대한 사상가 움베르토 에코의 강연(Sulle spalle dei giganti)
28,000 원 이세진 옮김
미와 추, 절대와 상대, 거짓, 비밀, 음모, 성스러움……. 인류는 늘 환상적인 주제들에 매혹되었다. 이에 대한 지식과 문화는 어떻게 변화해 왔으며, 우리의 현재와 어떻게 관계 맺고 있을까? 『에코의 위대한 강연』은 세계적인 문화 축제 〈밀라네시아나La Milanesiana〉를 위해 쓴 글을 모은 책으로, 오늘날 우리가 혁신적이라고 여기는 행위들이, 옛것과 각을 세우고 고전을 되살리는 과정 속에서 탄생한 것임을 보여 준다. 아들을 바치라는 신의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였던 아브라함, 히틀러가 그린 정물화의 추함, 거짓말에 관한 칸트의 어리석은 말, 비밀결사 장미십자회, 보잘것없는 음악에 대한 프루스트의 예찬, 성 마리아와 모니카 벨루치의 이미지 등 에코는 특유의 익살과 통찰력으로 읽어 낸다. 고대와 중세를 넘어 근대와 현대까지, 수많은 사상가와 예술가, 그들의 작품을 유쾌한 에코와 함께 만나 보자.
에코 인생 마지막 15년의 강연 모음집
『에코의 위대한 강연』은 움베르토 에코가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매년 열리는 세계적인 문화 축제 〈밀라네시아나〉에 참여해 〈대가의 강연〉 형식으로 쓴 글을 엮은 책으로, 2001년부터 2015년까지의 글 열두 편이 담겨 있으며 원제는 〈거인의 어깨 위에서Sulle spalle dei giganti〉이다. 2000년, 문학, 영화, 음악, 예술, 과학, 철학의 위대함을 알리고 각 분야에서 뛰어나다고 인정받은 인사들을 불러 모아 문화 교류의 장을 마련한다는 〈실험〉의 성격으로 시작한 〈밀라네시아나〉는, 현재 노벨 문학상, 노벨 과학상, 오스카 상, 각종 국제 음악상의 수상자들을 초청하는 것은 물론 이탈리아의 14개 도시에서 열릴 정도로 유명해진 축제다. 에코는 2016년 타계하기 전까지 이 축제에 거의 매 회 빠지지 않고 초청받았으며, 때로는 주제 선정에 영감을 주기도 했다.
이 축제에서 에코는 축제의 의미만큼이나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주제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에코의 담론에는 계속 되돌아오는 주제들이 있는데, 이는 에코가 그 주제들에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여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는 글에 해당하는 첫 번째 글 「거인의 어깨 위에서」는 다른 열한 편의 글을 아우른다. 난쟁이와 거인의 아포리즘은 에코의 첫 소설이자 베스트셀러인 『장미의 이름』에서 언급된 바 있기에, 2001년 축제의 초창기에 이 주제를 선정해 포문을 연 것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이 책은 난쟁이와 거인 아포리즘의 기원을 비롯해 미와 추의 본질, 절대와 상대, 비밀과 음모의 힘, 예술의 불완전성 등을 탐구하며 창의적인 지식과 문학, 예술 작품들이 선인들과의 소통에서 역동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곧 에코는 우리가 난쟁이에 불과하지만 거인들 덕분에 그들의 어깨 위에서 더 멀리 보게 된다는 점을 일깨운다.
이 책에는 에코가 강연과 글에 사용하고 이 책을 위해 추가 선정한 총 135개의 도판이 실려 있어 생생한 느낌으로 에코를 만나 볼 수 있다. 몇몇 글은 『가재걸음』, 『적을 만들다』에서 공개된 바 있어 다른 맥락에서 맛볼 수 있으며, 더불어 이 책을 통해 『미의 역사』, 『추의 역사』는 물론,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베스트셀러 소설 『장미의 이름』으로 에코에 대한 관심을 넓혀 볼 수 있다.
고전을 만나는 유쾌한 방법
단테, 톨스토이, 셰익스피어, 데카르트, 칸트 등 흔히 <대가>라고 알려진 작가나 철학자, 혹은 그들의 작품을 우리는 대개 공부하듯 대한다. 그것이 고전을 대하는 방법의 전부일까? 에코는 빛을 사랑한 중세인을 이야기하며 단테의 『신곡』 「천국편」을 불러오고, 허구와 실제 세계의 차이를 이야기하며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셰익스피어의 『겨울 이야기』를 불러온다. 데카르트가 독일 여행 중 비밀결사 장미십자회와 접촉하려 했던 사실을 알려 주기도 하고, 암살자 앞이라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칸트를 두고 〈위대한 인물도 때때로 어리석은 말은 하는구나 싶다>라고 조롱하기도 한다. 마치 강연 무대에 선인들을 소파에 앉혀 놓고 청중 앞에서 대화하듯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느낌이다. 이 책에서 친절하고 유쾌한 언어로,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때로는 날카롭게 이야기를 전개하는 에코를 따라가면서 에코의 해박한 지식을 속속들이 들여다 볼 수 있다.
에코에 따르면, 거인과 난쟁이의 이야기는 오래된 부친 살해 은유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 중 하나다. 곧 기존의 것을 지키려는 자들과 혁신을 추구하는 자들 사이의 논쟁을 말한다. 유의할 점은 공격이 대칭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아버지를 죽인 오이디푸스나 제 손으로 두 아들을 죽인 메데이아 같은 신화 속 이야기뿐 아니라, 새로운 라틴어의 등장과 기존 예술 양식에 대한 반발 등 그 역사는 유구하다. 에코는, 이미 고대와 중세에 논쟁과 수용의 과정을 거치며 지식과 문화가 꽃을 피웠으며 이러한 기반이 오늘날 창의성과 혁신의 바탕을 이루었음을 보여 준다. 고대인들은 비례의 아름다움을, 중세인들은 빛의 아름다움은 물론, 짜릿함을 주는 괴물 형상의 아름다움도 발견했다. 히틀러가 그린 정물화에서 우리는 예술적 가치와는 별개로 삶의 추를 떠올린다. 절대라는 개념에 대한 탐구는 인류를 진리 탐구로 이끌었고 그 과정에서 상대주의를 만나기도 했다. 그밖에 불의 다양한 이미지, 소설 속 인물과의 친밀감, 이마를 탁 치게 하는 명언의 수사법, 거짓말에 관한 고민, 불완전성의 가치, 비밀과 음모론의 의미, 성스러움의 인간적 모습 등 선대의 지식과 문화는 언제나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에코와 함께 고전을 종횡무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현재와 만나게 된다. 개념이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며, 거짓말이나 비밀, 음모과 같이 단순해 보이는 주제에 철학과 윤리, 정치와 권력의 문제가 결부되어 있다는 점, 팔이 없는 밀로의 비너스나 컬트 영화처럼 사람들이 완벽하지 않은 것에 매력을 느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전은 아이디어의 보물 창고이자, 도전해 볼 만한 산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보물 혹은 도전거리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