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一. 굽히지 않는 모르드개.
1절-6절: 그 후에 아하수에로 왕이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의 지위를 높이 올려 모든 함께 있는 대신 위에 두니 대궐 문에 있는 왕의 모든 신복이 다 왕의 명대로 하만에게 꿇어 절하되 모르드개는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하니 대궐 문에 있는 왕의 신복이 모르드개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왕의 명령을 거역하느냐 하고 날마다 권하되 모르드개가 듣지 아니하고 자기는 유다인임을 고하였더니 저희가 모르드개의 일이 어찌되나 보고자 하여 하만에게 고하였더라 하만이 모르드개가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함을 보고 심히 노하더니 저희가 모르드개의 민족을 하만에게 고한고로 하만이 모르드개만 죽이는 것이 경하다 하고 아하수에로의 온 나라에 있는 유다인 곧 모르드개의 민족을 다 멸하고자 하더라.
먼저 하만을 생각해 보면 하만은 아각사람이요, 아각은 누구냐 하면 아말렉족의 왕이다.
‘아말렉’ 하면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가 첩 딤나에게서 낳은 아들이다.(창36:12) 에서는 야곱과 대립이 되는 야곱의 형이다.
출17:1-16에 선민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가는 도중에 마실 물 때문에 모세와 다투었고, 르비딤광야(호렙산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종 모세가 바위를 쳐서 물을 먹였고, 이런 와중에 아말렉족이 나타나서 이스라엘과 싸운 것이다.
이 때 모세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손을 들고 있으면 이기기 때문에 아론과 홀이 모세의 손이 내려오지 못하도록 모세의 손을 떠 바치고 있는 동안에 여호수아가 아말렉족을 대파시켰다. 모세가 이것을 책에 기록으로 남겨 아말렉족과 대대로 싸워 천하에서 완전히 없이 하여 기억함이 없도록 하라고 했다.
그런데 삼상 15:1-23에 보면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 왕에게 씨도 없이 죽이라고 했는데 사울 왕은 자기 눈에 보기 좋은 것은 남겨놓고 말았다. 이래서 사울 왕은 하나님께 밉뵈었고 결국 싸움터에서 자기 아들과 함께 비참하게 죽고 말았다.
그러나 아하수에로 왕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에다가 사람을 볼 줄 모르니까 간사한 하만을 지위를 높여 자기 밑에 총리대신으로 앉혀놓은 것이다.
왕도 참 어리석다. 이런 자를 자기의 심복부하로 삼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왕과 백성과 나라꼴이 어떻게 될까?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만일에 하만이 있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보이기만 하면 죽이려고 달려들 것이다. 그러나 바사나라에서는 왕도 백성도 모두 사람을 못 알아보니까 하만이 간사하게 슬며시 들어왔고, 아말렉이 어떤 건지도 모르니까 그 자에게 권세와 권력을 주고 부귀영광을 주고 키워주고 있는 것이다.
후일에 하만이 죽는 모습을 미리 끌어다 놓고 본다면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이 하만을 잡아내지 않았더라면 아하수에로 왕은 꼼짝없이 하만에게 당하는 것이다.
2절: 대궐 문에 있는 왕의 모든 신복이 다 왕의 명대로 하만에게 꿇어 절하되 모르드개는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하니.
모르드개는 신앙정신이 살았다. 아무리 왕의 명령이고 법이라고 하지만 하만에게 입혀진 그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 부귀영광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만이 모르드개 앞으로 지나가도 절을 하지 않았다.
‘내가 비록 이국땅에서 포로의 신세로 대궐문의 문지기로 서 있지만 나는 너를 알아보고 있다. 너는 조상들의 원수요 나의 민족의 원소요 너는 나의 원수다’ 모르드개의 신앙정신이 투철하고 강하다. ‘너를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자들은 네 앞에 굽신굽신 절을 할는지 모르지만 나는 너를 짓밟고 있다, 이 하만아!’
하만이 왜 화를 내느냐? 자기에게 절을 안 한다고, 자기를 안 높여준다고, 자기를 안 알아준다고, 자기를 무시한다고.
하만 같은 성질은 무시하고 짓밟아 버려라! 이놈은 근본적으로 택한 선민에게 대적을 하고 나오는 놈이다. 살려두면 안 된다. 자기 속에 모르드개를 파수꾼으로 세워 이 하만을 알아보게 해야 하고 분노를 느낄 줄 알아야 한다.
二. 제비 뽑은 날짜.
7절: 아하수에로 왕 십이 년 정월 곧 니산월에 무리가 하만 앞에서 날과 달에 대하여 부르 곧 제비를 뽑아 십이월 곧 아달월을 얻은지라.
하만이 제비를 왜 뽑느냐? 하나님의 뜻을 찾느라고? 아니다. 택한 선민을 죽일 날짜를 정하기 위해서이다. 마음은 죽일 것을 이미 작정을 했고.
아달월 정월 십삼일은 남녀노소 모든 유다인이 몰살되는 날이다. 모든 재산은 다 탈취당하고. 그런데 알고 보면 정월 십사일은 유월절이다. 그러니까 유다인이 죽는 날은 유월절 하루 전날이다.
이 유월절은 애굽에서 택한 선민을 살린 날이다. 죽이는 날은 아니다. 그러니까 14일 하루 전날 13일은 하만 자기가 죽는 날이다. 이것도 모르고 하만은 자기 뜻대로만 되는 줄 알겠지!
하나님께서는 하만이 죽는 날을 정해 놓았는데 하만 자기는 선민 유다를 죽이는 날을 정해 놓고 왕에게 가서 하는 말이 ‘왕에게 무익하니이다’(8, 9절)
사실 하나님의 택한 선민을 용납하고 도움으로써 왕에게 유익이 많다. 많은 혜택을 입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요셉의 덕으로 애굽은 7년 흉년을 모면할 수 있었고, 에스더 2:19-에 모르드개로 말미암아 왕이 목숨을 구한 것이다.
그런데 하만이 모르드개가 한 일을 왕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모르드개의 선행이 드러나면 자기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해서인지도 모른다.
왕을 살린 자를 죽이려고 하는 것은 왕을 죽이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될 터인데 왕을 살린 그 모르드개를 죽이려는 흉계가 클수록 왕이 그 사실을 아는 날엔 왕을 속인 것으로 드러나니 하만 자기는 죽는다.
그리고 은 일만 달란트(340톤)는 자기가 힘써서 노력해서 정당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유다사람을 몰살시켜서 탈취해서 들여놓겠다는 약은 속셈이다.
그리고 9절에 왕의 일을 맡은 자의 손에 붙여 왕의 부고에 드리겠다고 한 말도 알고 보면 바로 자기 자신을 지칭하는 것이다. 왕 앞에서 충성자처럼! 이렇게 간사하다.
하지만 왕은 하만의 그 말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하만이 그런 말을 하면 어느 나라 백성이 자기의 법을 어기는지, 정말로 왕 자기에게 무익한지 유익한지를 조사해야 되는 것인데 그것이 없다. 완전히 허수아비다.
사실 하만이 왕의 그런 허점투성이를 이용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 하만은 왕의 충성스런 신하가 아니라 하만에게 왕이 이용을 당하는 꼴이다. 하만 자기 마음대로 뜻대로 계획을 짜고 진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왕은 날마다 잔치하고 누리고, 하만은 악만 계획을 하고 진행을 하고. 그대로 두면 왕을 죽일 수도 있다.
三. 네 소견대로 해라.
11절-15절: 이르되 그 은을 네게 주고 그 백성도 그리하노니 너는 소견에 좋을 대로 행하라 하더라 정월 십삼일에 왕의 서기관이 소집되어 하만의 명을 따라 왕의 대신과 각 도 방백과 각 민족의 관원에게 아하수에로 왕의 이름으로 조서를 쓰되 곧 각 도의 문자와 각 민족의 방언대로 쓰고 왕의 반지로 인치니라 이에 그 조서를 역졸에게 부쳐 왕의 각 도에 보내니 십이월 곧 아달월 십삼일 하루 동안에 모든 유다인을 노소나 어린 아이나 부녀를 무론하고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또 그 재산을 탈취하라 하였고 이 명령을 각 도에 전하기 위하여 조서의 초본을 모든 민족에게 선포하여 그 날을 위하여 준비하게 하라 하였더라 역졸이 왕의 명을 받들어 급히 나가매 그 조서가 도성 수산에도 반포되니 왕은 하만과 함께 앉아 마시되 수산성은 어지럽더라.
하만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자기 마음대로 그 권세를 휘두르게 생겼다. 완전히 자기 세상이다. 자기 밑의 신복들 역졸들은 자기 명령에 착착 움직여주고, 자기의 승리가 눈앞에 온 줄 알고 자기 권세 영광에 부풀어 있다.
왕과 하만은 짝이 되어 마시고 있다. 왕은 누림에 술을 마시고, 하만은 사람 죽이는 술을 마시고. 같은 술인데 술맛이 다르다. 마음이 다르니까!
그러나 인간의 계획만 알고 하나님의 계획을 모르는 선민들은 어수선하고 혼란일 수밖에 없다.
이방인의 나라 안에 왕과 하만과 백성이 있고, 하나님의 선민이 있다. 이방나라 안에 먹고 마시고 누림과 명예 영광 권세가 같이 있다. 모든 세상사람의 소원이다. 이것을 무시하면 못 살고 죽을 수도 있다.
이 때 하나님의 택한 선민으로서 그 앞에 굴복하고 절을 해야 되겠느냐? 우리의 속에 모르드개가 있어야 한다.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요약 정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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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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