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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남자의 계절
바람에 날리는 낙엽과 깃을 올려 세운 버버리 코트로 대표되는 가을 ― 옷깃을 여미고 또 여며도 고독이 스미는 것 같은 가을은 남자의 계절입니다. 바람은 싱그럽지만 그 바람을 맞는 남자들의 얼굴엔 왠지 모를 그늘이 드리워지고 분위기는 추억에 젖는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공원에서 만난 여친이 이런 말을 합니다.
“가을이 오면 왠지 남자들에게 벤치를 내 줘야 할 것만 같아요.”
봄에는 설레는 마음으로 이성을 찾고, 여름에는 뜨겁게 사랑하다가, 가을이면 지쳐 헤어지고… 추운 겨울 너나없이 옆구리 시림을 견디며 봄을 기다리는 남자들… 가을이면 왠지 모르는 허전함과 슬픔에 가슴이 무거워지는 것은 왜일까요. 과연 이것이 남자만의 느낌일까요? 이 상쾌한 계절에 하필 보이는 것이 높아진 (멀어진) 하늘. 누렇게 변해 떨어지는 낙엽뿐이라니…
흔히 봄은 여자의 계절,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합니다. 문학에서는 이를 성욕으로 풀이하여 「봄 보지 쇠저를 녹이고/ 가을 좆 천정을 뚫는다.」고 하였지만, 그러나 반취가 직접 「남자의 가을」을 60번 정도 경험하고 보니, 성적인 면보다 심리적 측면에서 더 위축되는 계절이더군요. 그래서 알아봤습니다. 우리 몸의 화합물, 사랑의 분자들을 알아보면 답이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가을이 되면 사람의 감정을 조절해주는 세로토닌이라는 호르몬의 분비량이 줄기 때문에 그렇다는 이론이 있습니다. 세로토닌은 특이하게 햇볕이 있을 때만 분비됩니다. 일조량이 줄어들면 당연하게 세로토닌의 분비가 줄어들고 쓸쓸함이랄까, 우울증으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절기와 동절기의 일조량이 열 시간씩 차이가 나는 북유럽에 우울증 환자가 많고 자살율이 높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의문점이 있습니다. 세로토닌의 분비는 여성호르몬이 자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실제 세로토닌 부족으로 우울증이나 정신질환을 앓는 것은 남성보다는 여성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세로토닌 때문에 남성들이 가을을 더 탄다는 얘기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렇다면 테스토스테론이라는 남성호르몬(Testosterone)의 문제일까요? 남성호르몬이 가장 활발하게 분비되는 계절이 가을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왕성하게 분비되는 남성호르몬 때문에 남자들이 가을을 탄다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입니다. 남성호르몬이 왕성해지면 신진대사가 활발해져서 식욕이 생기고, 연애욕구를 느끼며, 도전(정복) 의식도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가을과 남성을 연결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차제에 사랑에 관여하는 분자들을 알아보면 답이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랑에는 세 단계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끌림, 둘째는 빠져듦, 셋째는 애착입니다. 각 단계마다 감정적 변모가 다르고, 그에 따른 과학적 설명도 달라집니다. 단계마다 다른 사랑의 분자가 관여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1단계로 서로 강하게 끌릴 때는 두 사람 사이에 ‘화학’이 작용합니다. 사랑의 시작인 이 첫 단계에서는 테스토스테론 이라 부르는 남성 호르몬과 에스트로겐 이라는 여성호르몬이 바로 상대방에게 끌리게 만드는 화합물입니다. 테스토스테론은 남성이 성장하면서 남자답게 보이게 만들며 에스트로겐은 여성이 아름다운 육체와 미를 지니게 만듭니다.
사랑의 2단계는 상대방에게 빠져드는 상태입니다. 그 사람 생각 외에 다른 것엔 주의 집중이 불가능해지며, 금세 또 보고 싶어져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하고, 때론 식욕까지 잃습니다. 심한 경우 상대방 앞에서 말까지 더듬거리며,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속이 조마조마해집니다. 이는 뇌에서 몇 가지 화합물의 생성이 활발히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이들 화합물 군을 「모노아민」계라 칭하는데 노르에피네프린, 세로토닌, 도파민이 이에 속합니다. 노르에피네프린과 세로토닌은 흥분시키는 기능이며 도파민은 행복감을 느끼게 합니다. 따라서 이들을 사랑의 화합물이라 부르며, 우리 뇌의 신경전달 물질로서 감정과 행동에 중요한 영향을 줍니다.
여기에 근거해서 항우울제 중에는 세로토닌 생산을 지나치게 촉진시키는 것이 있는데 일부 전문가는 오히려 낭만적인 사랑에 해를 줄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촉진이 아니라 세로토닌 양이 상대적으로 적을 때 오히려 낭만적인 사랑과 함께하는 환상에 젖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3단계는 애착의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단순히 상대에 대한 매력을 지나 함께 하는 데서 만족감을 느낍니다. 두 가지 호르몬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옥시토신과 바소프레신입니다. 옥시토신은 「포옹 화합물」이라고 부릅니다. 연인들 사이의 애착심을 증가시키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이 옥시토신은 여성에게는 출산 시 자궁의 수축과 모유 수유를 도와주며 모성애를 발현하도록 합니다. 성적쾌감을 느낄 때에 (남녀 관계없이) 혈장에 이 옥시토신의 양이 증가합니다. 옥시토신은 시상하부 뉴런에서 합성되어 후배부 뇌하수체의 축색돌기로 이동된 후 혈액으로 배출됩니다. 일부는 뇌에서도 합성됩니다.
바소프레신은 ‘일부일처제화합물’이라는 별명을 지닌 애착유발화합물입니다. 지구상의 포유동물 중 약 3%만이 일부일처성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놀랍게도 인간은 이 일부일처제 군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남녀를 불문하고 문란한 성생활의 도덕적 문제는, 화학적 연구에서 보면 본능의 문제랄 수 있습니다.)
일부일처제 군을 대표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들쥐입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바소프레신의 사회적 행동에 미치는 영향이 주로 들쥐를 상대로 연구되는 정도입니다.
수컷 들쥐는 짝짓기 후에는 자기 짝 보호를 위해 다른 수컷들에게 매우 공격적으로 변하며, 자기 짝에 대한 지속적 애착을 유지합니다. 이런 행위는 짝짓기 후에 바소프레신이 뇌에서 평소보다 많이 발견되는 점을 보아, 옥시토신과 함께 바소프레신이 짝 결합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입니다. 바소프레신은 이밖에 항이뇨 호르몬 기능을 지니며, 동맥혈압을 증가시키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소프레신과 옥시토신이 같은 장소에서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 이 두 호르몬은 매우 가까운 사이(?) 임에 틀림없습니다. 화학구조를 보아도 아홉 개의 아미노산 중 두 개만이 다를 뿐입니다.
이렇게 사랑의 3단계를 넘어 지속적인 사랑을 위해서는 우리 몸이 스스로 만드는 진통제인 엔도르핀이 지켜줍니다. (진통제의 의미를 아시죠? 엔도르핀은 진통제입니다.)
자, 그렇다면 짝은 어떻게 만나질까요. 그저 하늘의 뜻에 맡기는 수밖에 없을까요? 이 질문에 일차적으로는 유전적 선택론이 가장 넓게 받아들여집니다. 인간은 알게 모르게, 보다 건강하고 보다 총명한 후손이 태어나 자랄 수 있게 자기와 다른 면역계를 지닌 유전자 소유자를 택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 진화론의 근간이기도 합니다만, 이 때문에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남녀가 부부가 되어 사는 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비록 그렇다 해도 대개는, 유전자가 본인 것과 너무 다르지는 않은, 그런 짝을 찾아 결합하게 된다고 합니다. 부부의 경우 성격은 물과 기름처럼 다르지만 참고 이해하며 동고동락을 오래 할수록 닮아가는 이유는 그 때문입니다. 참 신기하지요.
사랑의 각 단계에 완전히 다른 화합물 군이 관여한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사랑은 마음의 움직임이 아닙니다. 본능적으로 몸에서 생성, 소멸되는 화합물이 좌우합니다. 마음까지도 그렇게 움직이겠지요. 살면서 “내가 내 맘대로 움직여지지 않아!” 하는 경우를 다들 경험해 보지 않았습니까.
물론 이것이 최종 결과는 아닙니다. 인체의 신비를 어찌 다 알겠습니까. 특히 사랑의 화합물에 관한 연구는 아직 초보단계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을은 사계절 가운데 환절기적 특성이 가장 뚜렷한 시즌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중년 남성이 신체적 변화를 가장 먼저 느낀다고 합니다. 굵고 짙어지는 주름살과 급속하게 진행되는 탈모. 허리춤을 비집고 나오는 뱃살… 신체의 노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는 것 같은 느낌에 놀라는 중년 남성은 앞만 보고 달려온 삶에 허무함을 느낍니다. 남은 것은 내리막길이라는 인정하기 싫은 현실이 옥죄어 옵니다. 젊은이와 있을 때는 소외감이나 박탈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요즘처럼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내 인생의 정점은 지난 거야”하는 자각은 체념을 불러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일까요?
젊은이의 미래만이 희망이요 도전이고 중년 이후의 미래는 불안과 두려움뿐일까요? 늙은이의 과거는 어떻게 살았든지 상관없이 반성(反省)과 자위(自慰)로 채워지는 것일까요?
자연에서 반짝이는 삶의 교훈을 발견하는 안목이 열리는 중년 이상이 되면, 문득문득 감탄을 발할 현상들을 무수히 보게 됩니다.
대표적인 하나가 가을 나무입니다. 가을이 되면 온갖 수목(樹木)이 열매를 맺는데, 그 화려하고 넘치는 풍요로움을 즐기는 것은 잠시요 곧 모두 내려놓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봄여름 동안 정성으로 꽃피우고 푸른 잎으로 비바람을 막으며 보듬고 키워 성취처럼 이루어낸 열매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내려놓아 나누게 하고, 자신은 단풍으로 아름답게 몸단장 하며 떠날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아무 미련 없이 곧 떠납니다.
자연에서 겨울은 잠의 계절입니다. 인간이든 자연이든 잠은 신이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인간은 아침에 깨어나면 무에서 유를 창조하려고 활동을 시작하지만, 밤이 되면 다시 무(無)의 세계로 돌려지기를 갈망하며 잠을 청합니다. 자연 역시 봄이 되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활동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 한 시즌 이루어낸 것들을 다 내려놓고 다시 무의 세계로 돌아갈 준비를 합니다. 완전히 비워야 겨울 숙면(熟眠)을 할 수 있고, 푹 자고 일어나 봄을 맞으면 상쾌하게 새 출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지요. 잠을 푹 자고 일어났을 때 얼마나 상쾌하고 기운이 뻗치던가요.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내려놓지 못할 잔상(殘像)이 있으면 깊이 잠들지 못하고 설치게 되고, 그 후유증은 다음을 더 피곤하게 만들며 악화의 원인을 제공하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가을을 쓸쓸하게 여기지 말기를 바랍니다. 가을이 가르쳐주는 것은 ‘비움’이거나 ‘버림의 미학’입니다. 비어있는 것은 위대하고 만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비어있는 그릇에는 무엇이든 담을 수 있고, 누구나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구의 무엇이 담겨있으면 그 그릇은 주인 외에는 관심을 가질 이가 없고, 다른 것이 담길 가능성도 없어집니다. 때가 되면 욕심이든 미련이든 원망이든 과감히 버려 보는 것 ― 이것이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비결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깊어가는 가을— 쓸쓸해하기보다 모든 것을 비운 남자가 되어보는 것은 어떠실까요?
날씨가 차가와지자 부지런히 겨울을 향해 떠날 준비를 하는 나무의 모습들이 유난히 아름다워 보이는 계절입니다.
반취였습니다.
첫댓글 저는 가을이면 신계행의 가을사랑...미소라히바리의 고히비도요...오키히로시의 아키후유...세노래를 들으며 길가에 흩어지는 은행잎들을 밟고 산답니다.존경합니다.()
하하하! 나의 우리 덕화만발 가족을 향한 사랑은 어느 단계일까요?
첫째는 이끌림, 둘째는 빠져듦, 셋째는 애착 이 셋 중에 어떤 단계일까요?
아무래도 저의 사랑은 세단계 모두 인 것 같습니다.
인연이 빠름과 느림이 있어 골고루 사랑하고 이끌리고 빠져들고 집착하고를 반복할 수 밖에 없으니까요!
이 나이에 이성을 향한 그리움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거든요! 하하하하하!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 가을을 심하게 앓았었는데, 호르몬의 영향이었군요 ^^
긴 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
동감입니다. 청소년들중 유난히 여드름 많은 남학생 여학생들...해결책이 시집 장가 가니까 싹 없어집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