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에서 세계를 뒤흔들었던 나치 독일..한때는 연합국들을 궁지로 몰아넣으며 승리의 일보직전까지 가는 듯 했고,그들이 자랑하는 제 3제국의 계획도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것 같아 보였지만,결국 결정적인 몇몇 부분에서 전략적으로 실패하거나 간과한 부분으로 인해 패전하고 말게 된다.그러면,과연 2차대전에서 독일의 패인은 어디에 있을까?..사실 다 알만한 사실이기는 하나,가장 중요했던..그리고 결정적이었던 요인을 짚어보도록 한다.
1. 2% 부족했던 서부전선과 덩케르크:사실 독일군은 폴란드를 39년 9월에 전격 침공하면서 2차대전의 서막을 알렸고,이에 영국,프랑스 등의 연합국들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면서 다시한번 유럽은 세계의 화약고로 빠져들었다.폴란드는 신식무기로 무장한 독일군에 상대가 되지 못했고,결국 3주만에 바르샤바가 점령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불가침 조약에 의해 소련과 폴란드를 반으로 나눠 점령하게 되었는데..이후 독일군은 여세를 몰아 계속 전진할것 처럼 보였지만,이른 바 조용한 침묵이 유럽전선에 약 6개월동안 지속된다.프랑스는 자신들이 자랑하는 “마지노선”을 강력히 믿고 있었다.이상하리만치 조용했던 전선은 6개월 후,히틀러가 노르웨이와 덴마크를 점령하고,영국군을 견제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불붙기 시작한다.
그후,중립국인 베네룩스 3국을 점령하고,프랑스를 압박하기 시작했다.이때 독일군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전술인 “전격전”을 사용하여 연합군을 당황하게 만들었다.전차와 공군의 유기적인 연결이 핵심이었던 이 전술로 인해,독일군은 5월10일 아르덴 삼림지대를 돌파한 이후,2주만에 영국,프랑스 연합군을 덩케르크 해안까지 몰아낸다.프랑스의 항복은 이제 시간문제 였지만,여기서 한가지 히틀러가 실수한 것이 있다.알려진 바에 따르면,덩케르크 해안에서 철수하는 약 30만명의 영국,프랑스,벨기에 연합군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는 점이다.왜 히틀러는 이들을 괴멸시키지 않았을까?..만약 끝까지 몰아붙여 철수할 틈을 주지 않았다면,차후 영국 본토도 상당히 위험해 지는 건 물론이고,전쟁 기간도 더 길어졌을지 모른다.이것은 나중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허용하는 작은 씨앗을 만들게 된다.프랑스는 그로부터 몇주 후,항복했으나..바다 건너 영국으로 도망친 연합군을 내버려 둔것은 서부전선의 이른바 “옥의 티”로 남게 된다.
2.지지부진했던 영국과의 싸움:프랑스를 점령한 히틀러는 그후 약 1달동안 영국에 화평제의를 모색하기도 했다.영국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세계지배를 더 용이하게 만들 속셈이었다.그러나 그것은 꿈이었을 뿐,영국은 이미 5월달에 체임벌린 수상이 물러나고,처칠이 수상 자리에 오르면서 나치에 보다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그는 영국은 끝까지 싸워 승리할 것이라고 영국국민들과 약속했다.결국 히틀러에겐 다른 방도가 없었다.이른바 영국 침공 작전 “바다사자”가 40년 8월달에 시작되었지만..전통적으로 해군이 강한 영국을 상대하기엔 무리가 따르는게 사실이었다.독일도 이를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나치 공군 지휘관 괴링은 폭격기로 영국 공군을 괴멸시킨 후에 본토에 상륙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그러하여 메서슈미트와 허리케인의 대결이 영국 남부 상공에서 불꽃을 튀겼지만,여기서 독일군은 적지않은 공군의 손실을 입게 된다.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직시한 히틀러는 이제 영국의 도시들에 대한 무차별 공습을 통해 영국군의 전의를 꺾어보려 하였다.40년 9월에 런던 공습을 시작으로 영국 남부와 서부에 대대적인 공습을 감행했지만,이는 영국인들의 저항의지를 더욱 북돋아 줄 뿐이었다.
많은 인명피해를 내면서도 영국 공군을 비롯한 국민들은 용감히 맞써 싸웠고,이는 독일로 하여금 영국 침공을 포기하게 만들어 버린다.40년 12월,히틀러는 영국침공을 포기한 채로,다른 목표물을 향해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그 대상은 바로,히틀러의 오랜 숙원인 소련의 땅이었다.히틀러는 볼셰비키즘과 유태인을 혐오했고,소련은 그 근원지라 여겼다.그러나 영국침공을 끝내 완료하지 못한채 동부전선으로 눈을 돌리게 된것은 두고두고 독일의 발목을 잡을 것은 분명했다.이제 독일은 양면에서 싸워야만 하는 부담을 안게 된다.
3.바바롯사 작전의 실패와 스탈린그라드:41년 6월 22일,나치 독일군은 300만명의 정예병력과 전차 3500대,항공기 4000대..등 약 190여개 사단을 동원해 소련을 침공한다.이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규모 침공군이었다.스탈린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하루아침에 소련은 지상에서 항공기 1200대가 파괴되는 대 참사를 겪는다.
이후 바바롯사 작전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8월에 우크라이나를 점령하고,11월 말에 이르러서는 모스크바 약 60Km 부근까지 육박하게 된다.그러나 소련의 가장 강한 무기는 다름아닌 겨울의 혹한이었다.개전한지 3개월이면 항복시킬수 있으리라 여겼던 히틀러지만,이러한 자만심은 나폴레옹의 전철을 밟기만 할 뿐이었다.왠만한 방한복 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던 독일군은 12월 5일,소련군의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되면서 약 98만명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하고 만다.이로서 초기 연전연승했던 독일의 진격은 일단 멈추게 되고,다음해 여름까지 소강상태를 거치게 된다.
그 이후 다음해 8월,소련 남부의 석유를 비롯한 자원지대가 있는 바쿠로 공격목표를 돌린 히틀러의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를 향해 다시 진격했다.처음엔 독일군이 우세했고,치열한 공방전 또한 계속 되었지만,또다시 겨울이 되자 고전하기 시작했다.11월달,다시 소련군의 반격이 이어지고,독일군의 보급상황은 더욱 악화되어만 갔다.그러나 히틀러는 결코 항복하지 말라고 독일 육군 장교들에게 지시했다.이런 생고집은 막심한 사상자만 더 늘어나게 할 뿐이었다.독일 제 6군 파울루스 장군은 끝내 43년 2월에 독일군으로서는 최초로 항복을 결심하게 된다.그후로 동부전선에서의 소련군과의 대결은 조금씩 수세에 입장에 서게 되고,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하지 못한것은 몇 년 후 베를린까지 이어지는 상황을 초래한다.쿠르스크 전투 등,여러전투들이 있었지만,이제 전세를 뒤집기엔 힘에 부쳐 보였다.
4.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한 동맹국 이탈리아와 일본:독일은 40년 9월 이탈리아,일본과 3국동맹을 체결했다.원칙적으로는 이들과 협력관계에 있다고 하지만,실질적으로 독일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고,오히려 짐만 되어 돌아오게 된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로마제국의 재건”을 위해 지중해의 인접한 국가들을 차례로 침략해 나간다.38년에 알바니아를 합병했고,40년 6월에는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한 틈을 타,프랑스 남부에 진격했다.그러나 얼마후 토란토 해전에서 영국 항모 함재기들에 의해 이탈리아 해군은 괴멸되고,다른 방도를 찾던 무솔리니는 뜬금없이 발칸반도와 그리스를 침공했다.그러나 도리어 그들에게 역습을 당하게 되고,독일군의 지원이 필요한 상황까지 오게 된다.
상황이 이렇게 되는 가운데,무솔리니는 이번엔 북아프리카의 영국 식민지들을 공격했다.북아프리카에서 양적으로는 영국군보다 우세했지만,질적으로는 형편없었다.13만명의 이탈리아 군이 3만명의 영국군에 항복하는 어이없는 사태까지 벌어진다.이번에도 역시 독일군에 지원을 요청하게 되고,여기서 역사적인 인물 롬멜이 등장한다.북아프리카로 파견된 이후,롬멜은 영국군을 궁지로 몰아넣고,카이로 점령은 이제 시간문제 처럼 보였다.그러나 유능한 지휘관인 몽고메리가 나타나 영국의 구세주로 떠오른다.“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몽고메리는 롬멜의 독일군을 거의 궤멸시키고,그 이후 독일군은 북아프리카에서 열세를 면치 못한다.42년 12월에 미군이 모로코에 상륙하면서 이젠 미군과도 싸워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고,결국 43년 5월에 북아프리카에서 철수를 단행한다.그 이후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을 공격해 점령한 연합국은 드디어 이탈리아의 항복을 받아내고,무솔리니는 나치의 도움으로 무사히 도망친다.그리고 이탈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독일군이 이제 연합군과 상대하게 된다.이탈리아는 또 하나의 독일의 점령국이 되었다.
마침내 이탈리아 전선까지 떠안게 되면서 독일의 패배는 조금씩 예견되기 시작한다.결국 이탈리아는 독일의 패배를 앞당기는 촉매제의 하나로 작용하게 된다.
아시아에서의 일본은 37년 중국대륙을 침공한 이후,미국과 계속 대립해 왔다.향후 아시아 및 태평양에서의 주도권을 놓고 팽팽히 대립해오던 양국은 미국이 드디어 영국,중국,네덜란드와 손잡고 이른바 “ABCD"라인을 형성해 일본을 압박하면서 전쟁의 위기감이 감돌았다.41년 7월에 이르러서는 고철과 석유등의 일본으로의 수출을 금지했다.또한 미국 내 일본의 자산도 동결했다.상황이 이렇게 되자,일본은 겉으로는 미국과 평화협상을 시도함과 동시에,내부적으로는 점차 미국과의 전쟁 불사론이 힘을 얻어간다.
동남아시아의 석유와 고무등의 자원이 절실했던 일본은..그들의 계획에 방해가 되는 미 태평양 함대를 일거에 괴멸시킬 계획을 세운다.그것은 바로 “진주만 기습”이다.진주만에 정박한 미 항모와 더불어 태평양 함대를 파괴시키고,그 사이 아시아의 여러 서구열강들의 식민지와 태평양의 여러 미국 부속 섬들을 하나씩 점령하면서 미국과 단기간 내에 협상을 시도하려는 게 일본의 목표였다.하지만,진주만 사건은 그동안 “고립주의”를 지향했던 미국을 전쟁에 참여시킨 획기적 사건이었다.결국 미국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게되고,일본의 동맹인 히틀러의 나치독일은 미국과도 싸워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오히려 히틀러는 미국보다는 소련의 극동지방을 일본이 압박해주기를 바랬는지도 모른다.그리하여 양면에서 소련을 압박하는 작전을 이끌어 내려 하였지만,일본은 이미 41년 4월에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어버렸다.더군다나 2년전인 39년에 벌어졌던 노몬한 전투에서 소련군에 크게 당한적이 있는 일본군으로서는 소련과의 대결은 되도록 피하려 하였다.
진주만 공격이후,일본군은 동남아의 여러 서구 식민지들을 점령했고,한때 히틀러조차 동맹국 일본을 시기하기도 했었다.히틀러는 “일본인들은 호주를 비롯한 아시아,태평양지역을 손에 넣게 될것이다.그리하면 이곳에 있는 백인들은 자취를 감추게 될것이다.”..라고 하였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이탈리아와 일본으로 인해 독일만 더 힘들어졌을 뿐이었다.1차대전에 이어 역시 동맹국이 별다른 힘이 되지 못하고,단독으로 세계와 맞서 싸운 형국이 되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들이 더 있겠지만,가장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요인들만 모아봤다.독일군은 결국 우수한 무기들과 전술,군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저런 이유들로 인해 어쩔수 없이 패배를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첫댓글 2차대전갤에 유명한 명언이잇죠. 추측군이 뭘하든 맨하튼지하연구실의 시계는 돌아간다.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의 시계는 멈추지 않스빈다.
흠 ㄲㄲ
아라스 전투에서 독일군만 무찔렀어도 푸랑스가 그따위로는 안 됐을 겁니다. -ㅅ-
근데 아라스에서 독일군을 무찌르는게 쉬운일이엇을까요?
결국 히틀러는 단어 그대로 '신성로마제국 정도만' 바랬던게 아닐까 싶네요. 그래서 적당히 유럽본토먹고 적당히 '우리 멋지지? 우왕 쿧 ㅋ' 하고 세계 여러나라가 박수칠때 종전하고 싶었지만 이미 세계는 나폴레옹이나 1차대전 시기랑은 전혀 딴판이 되어버린 것이겠죠. 그래서 본의 아니게 공격한 영국 본토나 러시아랑의 맞짱뜨기는 아마 예정에 없었을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염두에 뒀다면 업그레이드 하지 않은 작은 기름통으로 영국까지 비행기 날릴 일도 없었겠죠.
사실 영국항공전에서는 런던폭격전에는 독일이 승리하는 가능성이 높았지만 전술폭격을 전략폭격으로 바꾸어버리면서 그 가능성이 날라갓죠....
런던폭격은 폭격기한대가 잘못으로폭격한걸 영국이 베를린에 보복폭격으로 이어진것 아님?
독일 폭격기 한대가 런던에 오폭 - 화난 처칠, 보복으로 베를린 폭격 - 분노한 히틀러, 런던 공습 명령 (이때부터 전략폭격으로 전환)
확실히 독일은 이길수없었고 이기면 안됬습니다. 드러운 전체주의 희생자가 아니라 다행임.
http://gall.dcinside.com/worldwar2/23081
2대갤 윤민혁님의 글입니다
수정 했습니다
흠... 독일군이 이기는건 어찌보면 불가능이였군요. 세계정세가 그렇게 되니까요..
독일의 암호체계가 영국에게 모두 뚫리고 있었고 독일은 모르고 있었다죠. 이걸로 정보전에서 승리한 영국...
그 누구도 천조국의 상대가 되지 못함 승리의 천조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