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워난 제국(30)
'이보게, 총각, 총각!'
한 손으로 다급히 손짓하며 인몽의 다른 손은 괴춤의 지갑을 끈째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나직한 폭포소리 같았다.
아니 어떤 신비스러운 벌레가 우는 소리 같았다.
상아는 실핏 든 잠에서 깨어났다.
진사 유치명의 부인 평산 신씨가 방문 앞 베틀에 않아 있었다.
등잔불에 비친 신씨의 그림자는 장지문에 삼각돛 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신씨의 베를 낚는 손이 빠르게 좌우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쉬익, 쉬익, 신씨의 손에 들린 북이 베를 지날 때마다 그 벌레 우는 소리가 가물거렸다.
도투마리에 감긴 삼줄기에서 안동포 특유의 좁쌀풀 냄새가 풍겨왔다.
'아우님은. 살림꾼이야.'
'그래 보이, 세 식구 살림이시더. 고향에서 시집살이하던 것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이라예.'
아직 사투리를 못 삭인 신씨의 소박한 목소리는, 그러나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무슨 불길한 생각이 옥죄어오는 듯 자꾸 장지문 밖을 살피는 기색이었다.
'성님 주무이소. 하루 종일 기진하시지 않았니껴. 지 걱정은 마시고. 지는 주인양반이 오실 때까지 베나 낚을 생각임더.'
'같이. 일어나 있을까. 요즈음은 잠이 들면 자꾸 헛것이 보여서.'
'헛것이라고요?'
'우리집 양반이 자꾸 보여.'
'호호호, 아이구 뭐라카시노, 이 대교 어른요? 호호. 그래, 이 대교 어른이 뭐라카시더니껴?'
'나는 벌써 죽었다고,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시지. 꿈에서.'
'예에?'
신씨 부인이 놀라 고개를 돌려 상아를 쳐다보았다.
상아는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질화로를 응시하고 있다.
새로 지펴놓은 숯불이 빨갛게 질화로 안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숯불을 응시하는 상아의 눈동자는 그 빛을 받아 빨간 석류알 처럼 빛난다.
그 눈동자와 어우러진 상아의 야윈 얼굴은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귀기를 띠고 있었다.
신씨는 뼛속까지 으스스해지는 느낌이다.
얄궂은 사교를 믿는다더니. 미친 것이 아닐까.
신씨는 상아를 집에 들인 것을 거듭 후회했다.
상아가 친정 동생의 부축을 받으며 유치명의 집에 나타난 것은 유진사와 신씨가 저녁상을 물릴 무렵이었다.
두 젊은 양주가 당황한 것은 당연하다.
오랫동안 성님 아우님 하며 지냈던 이 대교댁이었으나 무턱대고 반길 수 만은 없는 사람이 아닌가.
국금의 서학을 믿어 관에 쫓기고 있는 사람, 개종을 권하는 이 대교를 매섭게 거부한 끝에 가문에서 출처되었다고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차마 상아를 축객할 수 없었다.
그녀의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병색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아를 안방으로 안내한 뒤 들은 이야기는 너무 엄청난 것이었다.
전하께서 채제공 대감댁에 맡기신 금등지사의 이야기.
작년 채제공 대감께서 돌아가시자 이를 보관할 책임이 채이숙에게 돌아간 것은 얼추 짐작이 갔다.
그러나 그 어른이 갑작스럽게 형조에 끌려가 돌아가시고, 그 어른이 돌아가시기 직전 금등지사를 숨겨둔 장소를 이 대교
댁에게 알렸으며, 그 금등지사를 찾은 이 대교댁이 노론에 쫓긴 끝에 이 집까지 찾아왔다니. 오늘 벌어진 일은 소박하게
살아가는 이 부부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몸을 부르르 떨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상아가, '진사 어른, 이것이 전하께서 채 정승댁에 맡기신 금등지사예요. 부디 이걸 명덕산까지 전달해 주세요.
정경부인께 전하시면 부인께서 이 망극한 일을 주상 전하께 주달하실 것이어요.'하며 간곡하게 머리를 숙일 때 신씨 부인
은 이것이 끔찍한 부탁이란 것을 직감했다.
남편도 황극지도에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한 사람의 하나였다.
아직 젊은 남편이 이토록 중차대한 일을 못하겠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상대방은 정3품 우승지를 지낸 채이숙 어른도 예사로 죽여 없애는 노론. 배면서생인 우리 남편이야.
'알겠습니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유치명은 그 말 한마디 뿐이었다.
부리나케 의관을 차려입더니 즉시 상아가 내민 보따리를 들고 집을 나가버렸다.
그때가 건시(저녁8시).
자정이 가까워오는 지금쯤은 명덕산의 채 정승댁에 도착했을 것이다.
만약 도착하지 않았다면. 그 생각을 하자 신씨는 안타까움에 눈물이 핑 도는 것이었다.
그런 신씨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아는 눈을 내리깔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니, 비몽사몽간에 넋빠진 눈으로 그저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감옥에서 얻은 상처들과 집요한 추적이 가져온 불안과 공포가 그녀의 원기를 다 앗아간 것 같았다.
아, 뜬 세상 저리고 아픔이여.
그녀는 오랫동안 예견해 온 운명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고 있는 것을 느낀다.
물론 사람의 일이란 함부로 절망할 수 없는 것인 줄은 상아도 알고 있다.
절대로 위안받지 못하리라 믿었던 슬픔들도 돌이켜보면 어느덧 기억의 갈피 속에서 빛 바래간다.
아무리 뼈아픈 실패도, 또 아무리 가슴이 터질 듯한 괴로움도, 세월이 가면, 세월이 가면, 모든 것은 저물어 가는 노을의
안온함으로 따뜻하게 물들어가는 것이다.
살 수만 있다면,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오늘 이 무서운 일들도 그러리라.
하회별신굿의 가면들처럼 우스꽝스런 몸짓을 하며 낯익은 삷의 얼굴들 속으로 섞여가리라.
그러나 아무래도 이번만은 무사히 넘어갈 것 같지가 않다.
상아는 지금 자신이 물려받은 짐을 감당하기엔 스스로가 너무나 왜소하다는 사실을 마음속 깊이 알고 있었다.
이 나라 사직의 존망이 달린 일이라니.
채이숙 선생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면 머리가 빠개질 것 처럼 아파온다.
나같이 하찮은 아낙네가 이런 어마어마한 일에 말려들다니.
그리고 오늘의 이 숨가쁜 도망. 나는 이제 틀렸어. 봄날의 서리처럼 희망이 없어.
상아는 며칠 째 밤마다 똑같은 악몽을 꾸고 있었다.
그것은 상아 자신의 죽음을 알려주는 남편의 꿈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면 상아는 나무도 풀도 없는 황량한 대지를 헤메고 있다.
주위를 돌아보면 돌풍이 일어나 눈동자를 할퀸 듯이 쏟아진다.
어두운 평원 저편에서 소름 끼치는 통곡소리, 늑대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오고 상아는 겁에 질려 정처없이 앞으로
달린다.
나는 죽은 것일까.
죽어서 말로만 듣던 요단강을 건너온 것일까.
상아는 가슴속에 깃들인 말할 수 없는 어떤 감정에 이끌려 성경을 외기도 한다.
'주의 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픈 중에 다니나이다.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
그러면 목이며 가슴이 온통 번들거리는 땀으로 더러워진 남편이 나타난다.
남편의 얼굴은 명부(저승)에서 온 사람처럼 해쓱하다.
남편은 의심을 가득 품은 이상한 눈으로 상아를 본다.
'꿈에 당신이 죽는 것을 보았는데.'
'네?'
'당신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무엇엔가 쫓기고 있었지. 나는 당신을 부르며 달려갔소. 그러자 사방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리고 어두워졌소. 나는 당신을 잃어버리고 이리저리 헤매다 어떤 집에 들어갔지. 그 집 마당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마당에 등잔불을 단 초롱이 밝혀져 있었는데 흐득흐득 비내리는 빗발에 등잔불이 흐릿하게 흔들리고 있었지. 마당
한켠에는 벌써 빗물에 번거름하게 젖은 짚단과 수수깡들이 세워져 있고. 그 옆에 당신이 죽어 있었소. 온몸에 칼을
맞고 말이오.'
남편의 말은 거기서 끊어진다.
어둠이 조수처럼 밀려와 남편을 덮어버린다.
그리곤 뭐라고 기억할 수 없는 무수한 환상들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난다.
그 답답한 생각들을 떨쳐버리려 상아가 이마를 흔들 때였다.
'마님! 마님! 일어나 기신교?'
상아의 깊은 상념은 갑자기 방문 앞에서 들리는 다급한 목소리에 끊어졌다.
한 호흡 상간에 그 다급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깨닫자 상아는 불에 데인 듯이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툇마루 앞에 아까 인몽의 집에서 도망칠 때 데리고 온 종 장곤이의 새까만 얼굴이 있었다.
'무슨 일이냐?'
장곤이는 볼품없는 깡마른 체구를 벌벌 떨며 우두망찰 서 있었다.
겁에 질려 말소리 조차 얼어붙었는지 그저 그 조그만한 쥐눈으로 대문 밖을 눈짓하는 것이다.
그 눈길을 따라 대문 밖을 바라보다가 상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않았다.
집 밖 골목 어귀에서 여러 사람의 수군거리는 소리, 말울음 소리, 말발굽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히이이잉.
말 울음 소리는 고요한 밤공기를 타고 크게 울려퍼지며 차츰 가까워졌다.
상아의 옆으로 다가온 신씨 부인은 완전히 겁에 질린 얼굴로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서, 성님, 웬 사람들일까요, 이 밤중에?'
'글세.'
옷고름을 고쳐매는 상아의 얼굴도 똑같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상아는 다시 방안으로 돌어가 옷가지와 돈이 든 자신의 보따리를 들고 나왔다.
공포와 긴장이 금방 되살아나 쩌릿쩌릿 핏줄을 타고 흘렀다.
그때 상아의 시선은 횃불의 희미한 잔광으로 드러나는 이 집 마당의 한쪽에 고정되었다.
번쩍하는 섬광과는 같은 충격이 상아의 가슴에 칼날처럼 날아들었다.
보따리를 들고 저고리 고름 앞으로 모아쥔 상아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성님, 왜 그러셔요?'
신씨 부인의 시선이 상아의 그것을 따라 마당으로 향했다.
마당에는 주인 유치명을 기다리는 초롱이 밝혀져 있였다.
바람이 불어 초롱의 등잔불은 흐릿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상아의 시선이 머무는 마당 한켠에는 그저께 내린 눈이 녹아 번거름하게 젖은 짚단과 수수깡들이 있었다.
이럴 수가!
상아는 자신이 심연의 가장자리에 서 있음을 알았다.
마당의 등잔불, 젖은 짚단과 수수깡, 사방에서 들리는 말울음 소리. 꿈속에서 남편이 보았다는 그 집이 바로 이 집이야!
상아는 이 공포스런 깨달음에 맞서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눈앞이 어찔어찔하며 반딧불 같은 불빛의 환영이 어른거렸던 것이다.
오, 천주님.
그러나 잠시 뒤 슬프고 처연한 체념이 떠올랐다.
상아는 입술을 깨물며 흥분을 억눌렀다.
말 울음 소리가 집 앞으로 바짝 가까워졌다.
횃불이 보였다.
대문을 중심으로 담벽 너머의 어둠속에 붉은 구름 같은 횃불들이 타오르고 있었다.
'아우님, 어서 몸을 피하시오. 저이들은 나를 잡으러 온 사람들일세. 장곤아, 어서 마님을 모셔라.'
'네에? 그렇다면 저보다도 성님이.'
'아니야. 아이를 데리고 어서. 늦으면 아우님까지.'
상아가 결연한 표정으로 신씨 부인을 떠밀었다.
잡히면 그 자리에서 죽어!
신씨 부인이 상아의 얼굴에서 그 말없는 말을 읽었을 때,
'이리 오너라!'
꽝. 꽝. 무슨 몽둥이 같은 것으로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신씨 부인은 구르듯이 달려가 4살 먹은 외아들을 들쳐 안더니 안방에 난 작은 문을 열고 버선발로 뒷마당으로 나갔다.
장곤이가 낫으로 울타리 옆을 쳐서 개구멍을 만들었다.
그러나 신씨 부인은 상아를 버리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려 차마 나가지 못하고 이쪽을 돌아본다.
상아가 어서 가라고 손짓을 할 때,
'냉큼 문을 열지 못할까!'
하는 고함소리와 함께 식식하는 기분 나쁜 숨소리 같은, 흐릿한 소리가 들렸다.
쇠꼬챙이 같은 것을 집어넣어 대문 옆 울타리를 부수고 있는 것이다.
곧이어 울타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져나갔다.
상아는 아무 소리 없이 마당의 댓돌로 내려가 신을 찾아 신었다.
이윽고 대문이 열리고 푸른 철릭을 입은 사람들이 마당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여염집 울타리를 부수고 난입하다니, 이 무슨 화적질이오?'
'닥쳐라! 우리는 의금부에서 나온 사람들이다. 이 집에 서학쟁이 여편네가 숨어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소리를 지르며 상아의 앞으로 나서던 초관이 금방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손에 든 두루마리를 펼쳤다.
두루마리에는 한지 위에 여인네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초관의 날카롭고 냉혹한 눈동자가 그림과 상아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본다.
그를 에워싼 칼을 든 군인들 역시 그림을 힐끗거리며 집어삼키기라도 할 듯이 상아를 노려보았다.
상아는 조용히 눈을 감다가 다시 떴다.
'그 아낙이 바로 나요.'
유치명의 집에 의금부와 별기대의 무사들이 난입할 무렵 인몽은 수락산 명덕동 입구에 도착하고 있었다.
'하마하라! 여기부터 걸어간다.'
구재겸이 소리쳤다.
인몽은 어떻게 물너미고개에서 예까지 왔는지 잠시 망연한 느낌이었다.
인몽의 머릿속은 줄곧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주막집의 그 총각이 무사히 상아에게 갔을까.
인몽은 그것을 상아가 믿는 상제(하나님)에게도 빌었다.
인몽이 세검정까지 보낸 주막집 총각은 길목을 막고 있는 포졸들에 쫓겨 기겁을 하고 달아나버린 뒤였으나, 인몽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지금 인몽이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있는 것은 그 한 가닥 희망 때문이었다.
명덕동 입구는 한가히 바둑 두는 재미에 '도끼 자루가 썩는(난가)' 줄 모른다는 난가대.
일행은 몇 명을 난가대에 남겨 말을 맡기고, 경사진 벼랑을 따라 절벽에 늘어진 칡넝쿨을 잡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명덕동은 수락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동그란 고리처럼 에워싸고 있는 4천 평 남짓한 분지이다.
산골짜기 깊은 곳에 위치한 그 동그란 고리에 약간 터진 부분이 있으니 그곳이 난가대에서 동부로 들어가는 길인 것이다.
벼랑을 지나자 거대한 나무들이 빽빽이 밀생한 숲이었다.
달이 떠 있었지만 나무밑동과 가지가 길 위에 어둠을 내려뜨리며 사람을 위협했다.
얼마 올라가지 않아 인몽은 헉헉거리며 거친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두 다리가 납덩이 같았다.
길 양쪽의 나무들과 덤불들을 사운대는 찬바람 소리에 눈꺼풀이 저절로 무거워졌다.
인몽은 자신이 마치 깨어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악몽 속을 헤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로운 짐승이 사납게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바람결에 실려왔다.
인몽은 놀라 움찔 걸음을 멈추었다.
그 소리는 높이 올라가다가 낮아지더니 마지막으로 찢어질 듯한 고음을 내고 끝났다.
인몽은 자기 옆으로 걸어오는 구재겸의 소매를 붙들었다.
'구 총관. 나를 이렇게. 연명헌으로 데려가서 어쩌겠다는 건가? 이유나 알고 가세. 그것도 모르고 이렇게 어적어적 따라
갈 수는 없지 않는가.'
'허.'
'선비는 많은 말을 하려고 애쓰지 않지만 자기가 하는 말은 반드시 알고, 많은 일을 행하려고 애쓰지 않지만, 자기가 행하
는 일은 반드시 자세히 알아서 행한다고 했네.'
'
"공자가어"에 나오는 말이구먼. 조오은 말이지.'
험상궂게 생긴 이 구재겸이란 사내에겐 의외로 광대 기질이 있었다.
그러나 인몽은 먼 곳을 쳐다보며 짐짓 고개를 끄덕이는 구재겸이 목이라도 조르고 싶을 만큼 미웠다.
그런 눈치를 아는지 모르는지 구재겸은 인몽의 곁에 바싹 붙어서며 인몽의 팔을 끌고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임자가 할 일.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없다니?'
'상갓집에 문상도 안 가봤나? 임자는 그냥 그 집에 가서 문상을 하고 상주를 만나보고, 거기 온 자네 친구들이랑 만나서
놀면 돼.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한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당신, 정말 이런 식으로 나올거요!'
그 순간 구재겸과 인몽의 시선은 칼날처럼 번득이며 서로를 꿰뚫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구재겸이 물러섰다.
'허어, 정말이라니까 그러네. 임자도 이 모든 횡액이 임자의 내실 때문인 줄은 알겠지? 임자의 내실은 지금 관에서 찾고
있는 중요한 문서를 가지고 있소. 오늘 아침 형조에서 그걸 가지고 사라지는 바람에 지금 온 관아가 발칵 뒤집혔단 말이
야.'
'관에서 찾는 중요한 문서? 지금 선대왕마마의 금등지사를 말하고 있는 것 아닌가?'
'역시 규장각에 있는 사람이라 감이 빠르구만. 그 미친 개 같은 주상도 오늘 하루 종일 그걸 찾고 있었겠지?'
'아니, 어떻게 집사람 같은 아낙네가 그런 막중한 문서를 가지고 있단 말인가? 당신네들이 뭘 잘못 알아도 한참 잘못
안 것이 아니야!'
'흥, 답답한 양반 같으니.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좀 알려주지. 우리는 벌써 7년 전부터 그 금등지사를 찾고 있었네.
그런데 여태까지 우리는 그것이 창덕궁의 어떤 곳에 감춰진 줄 알았지. 7년 전. 주상이 종묘에 있는 정성왕후의 신주 밑
에서 '삭장동혜사'를 꺼내 보여 준 것 때문에 그만 그런 쪽으로 머리가 굳어버린 거지. 그래서 우리는 내시들과 상궁,
나인들을 시켜 창덕궁의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까지 샅샅이 뒤졌네.'
'.'
'그러나 교활한 주상은 우리의 그런 계산을 훤히 꿰뚫고 보고 있었던 거야. 7년 전 채제공의 상소가 올라와 한바탕 소동
이 일어난 직후 대궐 안 어디에 숨겨져 있던 금등지사는 채제공의 집으로 옮겨졌어. 1 년전 채제공이 죽자 금등지사를
보관할 책임은 그 상속자인 채이숙에게 같이 상속되었지. 우리는 그런 사정을 불과 한 달 전에야 알았어. 주상이 양위를
단행하여 상왕이 되려는 이제야 말야. 그러니 어떡하겠나? 주상이 수원행궁으로 가서 서울을 비우는 틈을 노려 무조건
채이숙을 잡아올 수밖에.'
'짐승만도 못한 놈들.'
구재겸의 말을 듣던 인몽은 지독한 전율을 느꼈다.
그런 사정들을 전혀 눈치도 채지 못하고 있었다는 경악과 함께, 이런 말을 풍문을 전하듯 태연히 말하는 구재겸의 태도
에 대한 경악이었다.
나를 벨 생각이구나.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서 묻어버릴 작정으로 이렇게 다 말해 버리는 것이리라. 이 찢어죽일 놈들!
구재겸은 인몽의 떨리는 손을 힐끗 보았다.
전율, 꼼꼼한 계산, 공포, 순간적인 살의, 구재겸은 지금 인몽의 가슴속에 교차하고 있는 그런 감정들을 낱낱이 다 간파
하고 있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어디까지나 무심하게 말을 잇는다.
'그런데 일이 참 수월하게 풀리더군. 이거, 없는 죄라도 만들어서 어떻게든 채이숙을 엮어넣어야겠다고 똥줄이 타는 판인
데, 채이숙이 제 손으로 꼬투리를 만들어주지 않겠어? 바로 며칠전 채이숙의 집에 유숙하러 온 사람들이 아무래도 천진
암에서 온 서학쟁이들 같다는 거야. 당장 이리로 달려와 채이숙과 그 길손이란 것들을 잡아 저넣었지. 이 명덕산은 완전
히 봉쇄해서 그 식구들을 묶어두고 말야. 임자의 여편네는 바로 그 때 채이숙과 같이 잡혀온 천진암의 길손이었던 거야.'
'으음.'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어요. 주상이 수원행궁으로 행차하기 전날 내시감을 통해 우리에게 역정보를 흘린 거야. 금등지사
가 규장각에 있다고 말이야. 우리는 정말 미칠 지경이었지. 그 정보를 전해들은 것은 채이숙을 잡아넣고 난 다음이었으니
말이야. 사실 채이숙이 금등지사를 가지고 있다는 확증도 없었거든. 게다가 본인이 완강히 부인하니. 어떡하겠나? 이러
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망설이다가 주상이 수원에서 환궁한 어젯밤에야 장종오를 죽이고 주상이 맡겼다는 그 책을 가져
와 보자는 결정을 내린 거야.'
'그것이 "시경천견록"이라는 책이었겠지. 그런데 그 책이 금등지사의 원본이 아니란 말인가?'
'모르지, 나는. 그 일은 내시부에서 알아서 한 일이니. 하여튼 금등지사의 원본은 아니야. 그게 원본이라면 대감들이 저렇
게 부뚜막에 올라온 물고기처럼 안절부절 못할 리가 없지 않은가?'
'대체 구 총관이 말하는 그 대감들이란 누군가?'
'쉿!'
구재겸이 인몽을 제지하더니 성큼성큼 행열의 선두로 걸어갔다.
어느새 행렬이 연명헌이 바라보이는 와룡폭포 상류에 도착한 것이다.
'총관 어른!'
어둠 속에서 도포를 차려입고 큰 갓을 쓴, 그러나 글 읽는 선비 같지는 않은 사람이 허겁지겁 달려나왔다.
'총관 어른, 큰일났습니다.'
큰 갓을 쓴 사내는 연명헌 여기저기를 손으로 가리키며 낮고 빠른 귓속말로 구재겸에게 소근거렸다.
구재겸의 얼굴에도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사내의 말을 듣고 있던 구재겸은 이윽고, 2초는 돌아가 저 보이지 않는 어귀에 잠복하라. 춥더라
도 모닥불을 피워선 안된다. 1초는 3인 1조가 되어 연명헌 안팎 각각 맡은 장소로 잠입하라.'
부하들을 돌아보며 단호한 어조로 지시했다.
'한수! 좌상 대감께서 연명헌 본당에 가셨다. 너희 조는 좌상 대감을 호종하라. 그리고 동표! 너희 조는 나를 따라와!'
명령을 받은 40여 명의 무사들이 소리도 없이 산지사방으로 흩어진다.
구재겸은 다시 성큼성큼 걸어와 인몽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와룡폭포로 흘러들어가는 물길을 따라 연명헌 쪽으로 인몽을 이끈다.
'이 대교! 애초에 임자를 데려온 것은 낚싯밥으로 쓰려던 것이었지. 하지만 이제 일이 급박하게 되었으니 아주 확실하게
협조를 해줘야겠어. 자, 나랑 같이 남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세.'
낚싯밥?
인몽의 얼굴에 확하고 열기가 올랐다.
인몽도 눈치가 빨랐다.
그 말의 의미가 금방 머리에 와닿았던 것이다.
시간이 이토록 지연된 이상 상아가 금등지사를 다른 인물에게 넘겼을 가능성이 많았다.
그러나 누가 금등지사를 입수했건, 그는 오늘 도성 안의 남인들이 다 모이는 채제공의 소상에 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자는 금등지사를 넘겨준 상아의 남편이자, 주상 전하의 측근지신인 이인몽을 찾아오지 않겠는가.
이인몽만 끌고 다니면. 하는 것이 구재겸의 계산인 것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방금 연명헌의 동정을 살피던 부하의 보고는 그 계산을 무색하게 했다.
아무래도 연명헌에 모인 남인들에게 금등지사가 전해진 것 같다는 것이다.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남인의 중진들이 갑자기 연명헌 본당으로 모였다는 것.
그 보고를 받은 심환지도 본당으로 달려가 억지로 남인들 사이에 끼여않았다는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면.
'이렇게 되면 금등지사를 주상 전하께 전달하려고 하는 중간에 가로채지 않을 수 없다. 임자는 남인들 사이에 끼여 있다
가 자원해서 그 전달의 책임을 맡아야 해. 아무튼 임자는 측근지신이니 말이야.'
'어, 어림도 없는 수작을. 주상 전하께서는 이 코앞에 와 계시다. 어디 네 놈들의 계산대로 될 것 같으냐?'
'닥쳐! 만약 일이 틀어지면 너의 두 아이 새끼를 죽여 까마귀밥으로 삼겠다! 네 놈은 뒤를 기약할 것도 없어!'
구재겸은 도포자락 안에 숨긴 짧은 요도를 흔들며 매서운 살기를 드러내었다.
인몽은 일시 기가 질려 눈을 내리깔았다.
그 때 오십 보도 채 안 되는 거리에 6칸 높이로 솟은 백향루와 적취정, 연명헌이 보이기 시작했다.
연명헌과 적취정은 남인들에게, 멀리 춘성당은 노론과 소론의 드문 문상객들에게 각각 배당되어 있었다.
심환지는 방금 춘성당에서 남인들이 있는 연명헌으로 달려간 것이다.
인몽은 구재겸에게 떠밀리며 연명헌 쪽으로 걸었다.
연명헌의 장원은 5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멀리 북쪽 산기슭에 들어선 조촐한 살림집, 그 훨씬 아래 장원의 중심인 연면헌, 연명헌을 마주보고 있는 적취정, 그 옆
의 연못 광영지에 들어선 백향루, 그리고 연명헌 서쪽의 복숭아밭을 지나 자리잡은 춘성당이 그것이다. 5 동이라곤 하지
만 다 팔아도 도성안의 번듯한 집을 사기 어려울 것 같은 검소한 장원. 이것이 채제공이 56 년에 걸친 관직생활 끝에 그
일족에 남긴 재산의 전부다.
30여 년 정승, 판서를 역임하는 동안 채제공이 늙은 부모를 모시고 살던 서울 보은동의 집 매선당은 셋집이었다.
그 집에는 이런 일화가 전한다.
채제공이 우의정에 임명되어 처음 재상의 지위에 오른 정조12 년(1788). 법에 따라 군기시 소속의 공노비 열 명이 우의
정 채제공댁에 배당되었는데 그 노비들은 모두 그날로 돌아왔다. 재상댁에서 양식도 부족하고, 재울 방도 없으니 돌아가
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군기시 판관이 하도 어이가 없어 그 보은동 집에 직접 가보니, 정말 손바닥만한 집에 오갈 데 없는
일가붙이며 곁식구들이 바글바글하더라고 한다.
노비 먹일 양식이 없다는 말이 이해가 가더라는 것이다.
당시 우의정의 녹봉은 1 년에 쌀 30석 6 두와 콩 16석. 어른 한 사람이 1 년에 1석반에서 2석의 쌀을 먹는다고 계산하면
다른 가용을 일체 제하고도 20 명 정도를 간신히 부양하는 살림이었을 것이다.
그런 채제공이 일흔여섯 살로 은퇴하면서(1795) 살림 일체를 정리하여 장만한 것이 이 궁벽한 산골의 연명헌이다.
후일 사람들은 그 이름을 곱씹어보고 비장한 느낌을 가지리라.
연명헌이란 '궁하거나 현달하거나 밝으신 임금을 생각하여, 농사짓고 누에치는 일도 도성 가까운 들에서 하게(궁달연명
주 경상역근교)라는 시에서 나온 것.
정조의 위태로운 신변이 걱정되어 차마 멀리 안전한 곳으로 은거하지 못했던 늙은 신하의 마음이 애처롭다.
얼마 못 가 채제공의 관직은 추탈되고 자손들은 모진 고초를 겪었으며, 식솔들은 뿔뿔이 흩어져 이곳 연명헌은 완전히
폐허가 될 운명이었으니.
물론 지금 연명헌으로 들어서는 인몽은 그런 미래를 알 리 없었다.
지금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연명헌 일대는 여느 대갓집의 소상날에 못지 않았다.
이 밤중까지 남아 있는 사람들도 100 명은 넘을 듯싶었다.
방방이 문상객들로 꽉 차 있었는데 이인몽 또래의 연배가 낮은 이들은 차일을 치고 모닥불을 피운 마당까지 밀려와 있었
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도 불구하고 여느 소상집 같지 않게 장내는 물을 끼얺은 듯 조용했다.
물론 채이숙의 비극적인 죽음 때문이리라.
주상 전하께선 어디에 계실까?
'이게 누구야, 도원이 아닌가?'
연명헌과 적취정이 마주보고 있는 큰 마당으로 인몽이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동에서 올라온 젊은 영남 남인들이었다.
개중에는 서산서원에서 동문수학하던 어린 시절의 친구들도 있었다.
그러나 인몽은 지금 일일이 예를 차릴 여유가 없었다.
잘못하다간 애매한 사람이 인몽의 등뒤에서 눈을 번뜩이고 있는 자들에게 화를 당할 형국이었다.
그러나 사람들 가운데 좌중을 헤치고 급히 걸어와 인몽의 소맷자락을 잡는 선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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