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지난시간의 ‘고향의 나그네’에 이어 ‘고향나그네의 고향 찾기’라는 주제로 법회를 가지고자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고향은 어디인가? 흔히 우리가 모든 메임과 얽힘 등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해탈이라고
한다. 이 해탈이 바로 고향이다. 중생들은 매일같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원하지 않는 것이 다가오는 대립과
갈등이 심한데, 이 모든 것이 평화롭게 조화되고 해결되는 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흔히 말하는 해탈열반이 고향이다. 불교에서 일체중생이 나그네생활을 하는데, 그 나그네생활이란 것이 자꾸
쫓기고 메이고 얽히며, 부딪치고 고통스럽다. 그러한 것에서 쫓김이 없고, 메이지 않고, 얽힘이 않으며 서로
부딪히고 대립하지 아니하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곳으로 돌아가면 그것이 바로 해탈 열반인데, 고향과 나그네로
비유해서 설명하면 그곳이 바로 고향인 곳이다.
고향은 어떤 곳인가? 초기불교에서는 ‘해탈을 이룬다’, ‘열반을 이룬다’는 말은 있지만 해탈의 성격이 뭔지
열반이 어떤 곳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그러나 대승불교에 와서 그것을 설명하였다.
해탈 열반이라는 그 곳은 죽음이 없는 곳이다. 그래서 무량수라 하였다. 또 그곳에서는 몸이 끝이 없다고 하여
무량광이라 하였다. 해탈열반의 수명은 죽음이 없고 끝이 없다고 하였다. 화엄경 여래현상품에서는 불신이
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라 하였다.
그 세계가 바로 고향인데 그 세계를 느끼는 감정의 세계로 이야기 하자면 ‘대안(大安)’이다. 편안한 것이 잠시
편안한 것이 아니라 끝없이 편안한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원효스님의 스승되는 스님의 호가 대안이었는데,
그 스님은 늘 거리를 다니며 대안이라 외쳤다고 한다. 그 뜻은 대안의 세계가 있으니 그 세계를 보아라는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한다. 법화경에 상불경(常不輕)보살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늘 “나는 당신을
가벼이 여기지 않습니다.”라 하였다 한다.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 불경(不輕)이다.
그래서 상불경보살이라는 호를 얻게 되었다고 하며, 그는 사람에 대한 존중의 메시지를 전해 주고자 하였다 한다.
또 늘 즐거운 상락(常樂)의 세계, 늘 편안함과 즐거움이 사라지지 않는 안락의 세계가 바로 해탈열반의 세계이다.
그곳이 바로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고향인 것이다. 안락이라는 것은 그 편안하다는 의미기 두려움이 없고 무서움이
없고 갈등이 없고 고뇌가 없는 곳이다. 또한 항상 기쁨을 느끼는 곳이다.
그렇다면 그 곳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인데, 문제는 우리가 늘 그 속에 있다는 것이다. 고향에 있으면서 늘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해탈열반(解脫涅槃) 무량수(無量壽) 무량광(無量光)의 세계에 우리 중생들이
있는 것이다. 따로 있는 세계가 아니라 단지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할 뿐인 것이다.
반야로 느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반야바라밀이라 한다. 그 세계는 반야지혜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극락은 몸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반야로 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중생이 한 생각 어두워지면 사바세계
(娑婆世界)요 한 생각 밝아지면 극락세계인 것이다. 우리가 제를 지낼 때 보면 반야용선(般若龍船)을 타고 가는
것으로 표현이 되어있는데, 용이 그려져 있는 배이다. 용은 공덕의 상징이므로 결국 반야의 공덕으로 간다는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같은 공간인데, 어리석은 생각으로 보면 고통의 세계이고, 지혜로운 생각으로 보면
극락세계인 것이다. 물건 하나를 놓고 “이것이 극락세계인지 사바세계인가?” 하고 묻는다면 무엇이라 대답하겠는가?
어리석은 생각으로 보면 이것은 사바세계이다. 지혜의 생각으로 보면 극락세계인 것이다. 어리석은 생각으로 헤매면
그 자리가 바로 타향이고, 지혜로운 마음으로 안정을 하면 그 자리가 고향인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밝은 지혜로
이루어진다고 해서 반야바라밀이라 하는 것이다.
사바세계 극락 세계를 누가 만드는 것인가 하는 것이 또 중요한 문제이다. 그것은 우리의 본 마음이다.
그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 대승불교이다. 남방불교는 초기 불교이고 우리가 하는 것은 조금 더 발전된 형태라
할 수 있는 대승불교이다. 초기불교에서는 관심의 대상이 우리의 몸이다. 우리의 몸은 변하고 바뀌기 때문에
무상하다고 하였다. 지금 우리의 몸은 태어날 때의 모습이 아니며, 자신이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자신 생활의 결과물인 것이다. 늙기 싫어도 늙으며, 죽기 싫어도 죽으며, 병 나기 싫어도
병이 난다. 그래서 괴로운 것이다. 무상하기 때문에 고가 오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으므로
무아이다. 그래서 초기불교에서는 몸의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해탈열반이라 하였다.
대승불교에서는 그 몸은 누가 만들었는가에 주목하였다. 그것이 바로 본성(本性)이요 청정심(淸淨心)이라고 한다.
그 몸은 바로 우리의 본래 마음이 만든다고 하여 ‘여래장(如來藏)’, ’진여심(眞如心)’, ‘본성심(本性心)’이라고도
하는데,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는 계속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마음이 몸도 만들고 마음이 세계도 만든다고 하여 화엄경에서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하는 것이다.
사바세계도 극락세계도 마음이 만든다는 것이다. 마음이 업을 지으면 업이 세계를 만든다. 이 몸은 업의 업조물인
것이다. 이 몸만 잘 관찰해보면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 다 알 수 있다. 업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 업을 짓는 주체는 본성이고 본심이다. 몸도 우리 본래 몸이 만들고 세계도 우리 본래 몸이 만듦을 가르치는
것이 경전인데, 그 중에서 화엄경에서 몇 가지 게송을 소개코자 한다.
화엄경 야마궁중게찬품(夜摩宮中偈讚品)에 보면
심여공화사(心如工畵師) 마음은 그림 그리는 화가와 같다.
능화제세간(能畵諸世間) 능히 모든 세상일을 다 그려낸다.
오온실종생(五蘊悉從生) 오온이 다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무법이부조(無法而不造) 무엇도 만들지 않는 것이 없다.
약인지심행(若人知心行) 보조제세간(普造諸世間)
어떤 사람이 만약 마음이 모든 세간을 만들어내는 줄을 안다면
시인즉견불(是人則見佛) 요불진실성(了佛眞實性)
이 사람은 바로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이고 부처님의 진실성을 아는 것이다.
약인욕요지(若人欲了知) 삼세일체불(三世一切佛) 만약 삼세일체불을 알고자 한다면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이 모든 법계의 성격을 보라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사람을 만나도 만나는 사람의 마음이며, 산을 만나도 만나는 사람의 마음이며, 물을 만나도 만나는 사람의
마음이다. 그런데 그것이 마음인줄 모르고 마음 밖의 다른 곳에서 온 것으로 알고 있다.
지혜있는 사람은 심외무법(心外無法)을 깨달아 알고 있는 사람이다. 마음 밖에 법 즉, 물질이 없음을 깨달은
사람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심외유법(心外有法)이라는 모든 존재가 자신의 마음과는 상관 없이 바깥에 있다는
미혹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다. 무엇을 보든 자기 마음으로 보는 것이며, 무엇을 들어도 자기 마음으로 듣는
것이다. 어디를 가나 자기 마음 만큼만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경허 큰스님께서는 자벌래에 비유하셨다. 자벌래는 자신의 몸길이 만큼만 움직일 수 있는데, 마치
중생이 제아무리 보고 들어봐야 자기 생각만큼만 보고 들을 수 있는 것과 같다는 말씀이다.
사람의 몸은 본성의 몸 즉, 고향의 몸이 있고, 우리가 한평생 왔다 갔다 하는 몸은 연생신(緣生身)이라 하여
인연에 의해 만들어진 몸이 있다. 이 몸이 유지되기 위해서 수많은 인연들이 있어왔다. 그런데 이 몸이 생기든
사라지든 상관없이 있는 본성신(本性身)인 무량수 무량광의 몸이 있는 것이다.
본성신으로 보면 고향이 어디냐고 한다면 가는 곳 마다 고향인 것이다. 고향의 나그네가 고향을 찾으려면
사물을 생각으로 보지 말고 지혜로 보면 되는 것이다. 지혜로 보면 죽는 몸 그대로가 죽지 않는 본성신이고
움직이는 몸 그대로가 움직이지 않는 본성신인데, 중생들은 생각으로만 보기 때문에 본성의 몸은 보지 못하고,
인연으로 생겨나고 인연으로 사라지는 연생신만 보고있는 것이다.
생로병사 그 자체가 지혜로 보면 무량수 무량광이다. 그것이 반야바라밀인 것이다. 그것을 느끼는 순간부터
가는 곳마다 고향이 되는 것이다. 스스로 좋다 나쁘다 하는 것도 모두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모르다 보니 애증(愛憎)이 생겨버리는 것이다. 꿈은 자기자신이 만드는 것인데 꿈 안의 극락
세계와 사바세계는 누가 만드는 것인가? 자기가 만들어 놓고도 꿈속에서 자신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반야로 돌아간다는 것은 바로 꿈에서 깨어나 자기가 꿈에서 만든 것임을 알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경전들 속에서 많이 나온다. 우리나라의 기본 불교교과서로 기신론, 능엄경, 원각경도 모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해석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경전이다.
능엄경에 보면 부루나의 미혹이 있는데, 부루나 존자가 부처님께 질문을 하기를, “청정본연(淸淨本然)한데
원하홀생(云河忽生) 산하대지(山河大地), 청정이 본연하건만 어떻게 홀연히 산하대지가 생겨났습니까?” 하였다.
그에 대한 답으로는 “청정본연한데 왜 산하대지를 만들어내느냐?” 라는 것이다.
산하대지를 누가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중생인 자기자신이 만든 것이다. 자기가 만든 함정에 자기가 빠지는
것이다. 자기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만들고 거기에 빠져서 스스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원각경 금강장보살장에 “중생마음이 본래 청정하다면 왜 무명이 생겨났습니까?”라고 질문 하였다.
이 질문은 “허공에 꽃이 보이는데, 하늘이 본래 깨끗하건만 왜 꽃이 있습니까” 라는 질문과 같은 것이다. 허공의
꽃은 본래 없는 것인데 보는 사람의 눈병이 만든 것이다. 이것을 병목생화(病目生花)라고 한다.
몸이 생기고 몸이 없어지고, 산하대지 우주만물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은 모두 연생이기 때문에 그것이 생긴들
없어진들 아무 문제가 없는데, 다만 중생이 미혹한 마음으로 좋아하고 싫어하는 생각을 일으킬 뿐이다.
그래서 애증(愛憎)만 사라지면 생기든 사라지든 아무 상관이 없다.
애증이 문제이지 생멸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반야바라밀이다. 생멸이란 것은 태어나고 죽는 것인데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에 애증이 생겨 태어나는 것은 좋아하고 죽는 것을 싫어함으로 문제가 발생
되는 것이다.
본성신과 연생신을 비유해보자면 본성신은 물과 같고, 연생신은 파도와 같다. 물에서 볼 때 파도가 생기든 파도가
사라지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누군가가 파도가 생기는 것을 좋아하고 사라지는 것을 싫어한다면
그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고통이 생기는 것이다. 애증이 문제이지 생멸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지혜가 높아지려면 싫은 것이 없어져야 한다. 신성한 ‘Yes’를 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개성을 살린다며
‘No’를 많이 외친다. 이것은 미숙한 것이다. 깊은 통찰력으로 오랜 시간을 꿰뚫어보면 모든 것은 포용할 수 있는
것이다. 본성신에서 연생신을 볼 때, 연생을 하든 연멸을 하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세계가 고향인 것이다.
이 세계란 모두를 말하는 것이다.
고향나그네가 고향을 찾으려면 생각으로 좋아하고 싫어하고 쫓고 쫓기기를 반복하면 영원히 안되며, 자꾸 생각을
가라앉혀서 지혜로 깊이 보면 일순간에도 볼 수 있고 어느 때 이건 다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고향나그네의
고향찾기이다. 경전을 보고 기도하는 것들이 모두 고향찾기를 하는 것이다.
고향을 찾고 보면 본래 그 자리에 있었음을 알게 되고, 고향을 떠난 적이 없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꿈을 꾸던
나그네가 꿈을 깨어보면 꿈속에서 돌아다니던 것은 일순간 사라지고 항상 그 자리에 있었음을 알게되는 것이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이라는 책에 보면 삽삼조사(三十三)가 나오는데, 그 중 17번째 조사로 승가란제가 나온다.
그 승가란제와 제자인 가야사와의 대화에 보면, 바람이 부니까 풍경(風磬)이 움직이는데, 그것을 보고 승가란제가
가야사에게 묻기를 “바람 소리이냐, 방울 소리이냐?” 그러자 가야사가 대답하기를 “저 소리는 바람소리도 아니고
방울소리도 아닙니다. 제 마음소리입니다.”라고 하였다. 그것으로 승가란제가 가야사에게 법을 물려주었다고 한다.
후일 혜능대사의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냐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냐?”라고 하는 일화와 일맥상통하는 이야기 이다.
우리가 순간적으로 좋을 때가 있고, 순간적으로 싫을 때가 있다. 자신의 마음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임은 까맣게
모르고 애증에 끌려다니며 끊임없이 윤회를 되풀이 하는 것이다. 그것을 벗어나려면 조견오온(照見五蘊)을 하고,
살펴야 한다. 싫다면 무조건 싫어하지 말고 그 싫어하는 마음을 살피고, 좋다면 무조건 좋아하지 말고 그 좋아하는
마음을 살펴보면 무엇인가 얻어지는 것이 있을 것이다. 이 몸이 또 우주 만물이 다 나의 그림자임을 알게 될 것이다.
한용운스님의 ‘님의 침묵’ 중 군말에 보면 “님만 님이 아니라 그리운 것은 다 님이다.”로 시작해서 마지막 부분에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이니라.”로 맺고 있다.
너라는 것은 님을 그리워하는 모든 사람이다. 그림자라는 것은 자기의 마음이다.
모두 님을 가지고 사는데, 님은 모두 자기 그림자이다. 그것을 확실히 보게 되면 애증에서 벗어나고, 애증에서
벗어나면 상락안락이 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고향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