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불을 밝히는 사람
마태복음 25:1-13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11월은 어둠의 계절이다. 동짓달 12월보다 11월이 더 어둡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 몸이 적응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어둠에 익숙한 사람은 별로 없다. 날이 일찍 어두워지니, 어둠이 깊을수록 일찍 불을 밝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11월의 어정쩡한 어두움과 쌀쌀함을 불편해 한다. 그래서 등불을 밝히는 일은 따듯한 경험이다. 어둠 속에서 드러나는 밝은 빛이나 쌀쌀한 날씨를 감싸주는 따듯함을 그리워한다.
성경에서 등불은 매우 상징적인 단어다. 잠언은 현숙한 아내를 등불을 관리하는 부지런한 사람으로 비유한다. “밤에 등불을 끄지 아니하며”(잠 31:18).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 왕국을 향해 바벨론의 침략을 경고한다. “맷돌 소리와 등불 빛이 끊어지게”(렘 25:10) 될 것이다. 맷돌이 일용할 양식을, 등불 빛은 시한부의 시간을 의미한다.
우리의 인생도 종종 등불로 비유한다. 인간의 불안함과 삶의 위기를 등불로 비유할 수 있다. 그럼에도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사 42:3)시는 주님이심을 고백한다.
초상집에 가면 불을 환하게 밝힌다. 상징적으로 등불은 임종 시 죽음의 어둠을 밝혀 주고, 내세로 인도하는 빛을 상징한다. 빛에는 종교성이 있다. 대림절 ‘기다림 초’나 4월 초파일 연등을 보면 등불과 종교는 분리될 수 없는 종교성이 있다.
우리는 “너희는 세상의 빛”(마 5:14)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하는 그리스도인이다. 생활 속에서 빛을 응용하는 일은 자연스럽다. ‘기다림 초’가 대표적이다. 색동교회는 대림절 첫 주간(12.1-5)에 ‘등불기도회’를 연다. 교회력 마지막 주일에는 대림절을 앞두고 ‘기다림 초’ 강습회를 열려고 한다.
베네딕토 수도회의 실야 발터 수녀는 우리에게 등불을 켜야 하는 이유를 잘 설명해 준다.
“주님, 주님이 오실 때에 누군가는 집에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는 밤낮으로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금 내 속의 등불을 확인해보자. 그리고 세상에 등불을 밝히라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1)
예수님의 비유는 천국에 대한 이야기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1).
우리나라의 청사초롱 역시 혼인과 축제를 알리는 축하의 등불이다.
예수님의 등불에 대한 말씀은 즐거운 혼인잔치 이야기가 아니다. 이야기의 결론은 네 인생의 어둠이 깊을지라도, 항상 준비하고 깨어 있으라고 하신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13).
늘 깨어있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바로 등불과 기름을 넉넉히 준비하는 것이다. 등불과 기름은 진실하고 부요한 삶을 살기위한 필수품이다. “샬롬! 샬롬!” 말하기는 쉽지만 평안히 살기란 쉽지 않다. 눈을 부릅뜨고 살아도 삶의 위기가 자주 들락거린다. 내 삶의 밖에만 문제가 아니라, 내 존재의 내면도 늘 공격을 받고 있다. 고달픈 인생, 불편한 관계, 불안전한 사회 등을 호소한다.
가수 하덕규가 부른 노래인 ‘가시나무’는 이런 심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내 안의 가시나무 숲 때문에 나도 병들고, 남도 찔린다.
기름 없는 등불은 심지만 태우고, 그을음 때문에 온통 시커매 진다. 예배실 강단에 있는 작은 촛불도 매일매일 관리해야 한다. 그러니 인생의 등불 하나 관리하는 일은 얼마나 많은 신경을 써야 하겠는가? 게다가 그 등불이 내 인생이라면 하룻밤에도 몇 번씩 뒤척거릴 수밖에 없다.
예수님의 이야기에는 열 명의 처녀가 들러리로 등장한다.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2). 그들은 모두 등불을 든 사람들이지만, 기름까지 넉넉히 준비하지는 않았다. 예수님은 기름을 넉넉히 준비했냐는 여부에 따라 미련한 사람, 지혜로운 사람으로 구분하신다.
인생을 그냥 되는 대로, 닥치는 대로 사는 사람도 많다. 열 명의 처녀 중에서 그 중에 다섯은 얼마나 사는 것이 얼마나 각박하고, 여유가 없던지, 여분의 기름조차 없다. 앞뒤 재며 살지 못할 만큼 하루하루가 빡빡하다. 남의 일에 그다지 신경 쓸 마음의 여백이 없다.
함석헌 선생은 이런 말을 하였다. “생각하면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 흔들리는 등불을 보면 흔들리는 인생을 생각하라. 그리고 내 영혼의 등불의 상태를 생각하라!
2)
저런! 혼인잔치에 차질이 생겼다. 신랑의 도착이 계속 미루어지고, 자꾸 늦어졌기 때문이다. 마을에서도 나무랄 데 없는 처녀들이었지만 졸음은 어쩔 수가 없어 모두 피곤한 나머지 맥이 풀려, 잠이 들고 말았다. 깊은 잠은 고달픈 삶을 뜻한다. 저마다 피로감이 깊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5).
사실 문제는 열 명의 들러리 모두가 잠든 때문이 아니다. 신랑이 오면 깨면 될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새 어둠이 깊어가고, 시간이 예상보다 훨씬 흘러가 버렸다. 물론 열 명 모두 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중 다섯은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다.
이윽고 한밤중에 한 외침이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6).
드디어 신랑이 온다는 황급한 목소리였다. 잠든 열 명의 처녀는 반사적으로 깼다. 그렇지만 절반의 처녀들에게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다섯 명의 처녀는 자기 등잔에 불을 밝히며 신랑을 맞으러 나갈 수 있었지만, 다섯 명의 처녀는 기름이 없어 등불을 밝힐 수도, 신랑을 맞으러 나갈 수도 없었다.
애초에 등을 준비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다만 기름을 충분히 예비하지 못했다. 그렇게 신랑이 늦게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자기 생각에 이 만큼이면 충분하겠지, 판단했을 뿐이다. 우리는 이 딱한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현실은 냉정하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에게 기름을 나누어 달라고 청하기도 하고, 가게에 가서 기름을 구하려고 문을 두드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문은 닫혔고, 늦은 대가로 거절당하였다. 문을 열어달라는 간청에 들려온 대답은 더 냉정하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12).
이 비유의 결론은 단순하고, 명료하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13).
평소에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의 약함과 고달픔을 이해하는 따듯한 눈빛이셨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참 무정하시다. 종말의 비유들은 공통적으로 여유가 없다. 그 사태가 엄중함을 일깨워 주려는 의도일 것이다.
다행한 일은 아직 열 처녀 비유 같은 재림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준비하면 된다. 깨어 있어야 하고, 기름을 준비해야 하고, 등불을 밝히면 될 것이다. 예수님은 그 때 가서가 아니라, 지금부터 준비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예비라는 의미이다.
인생을 등불로 잘 비유한 사람은 욥이다. 재난은 예고가 없다. 뜻밖의 재난으로 지독한 고통을 당한 욥은 자신의 좋았던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다. “그 때에는 그의 등불이 내 머리에 비치었고 내가 그의 빛을 힘입어 암흑에서도 걸어다녔느니라”(욥 29:3).
그러나 지금의 욥의 처지는 아예 등불이 꺼져 어둠으로 가득하다. “그의 장막 안의 빛은 어두워지고 그 위의 등불은 꺼질 것이요”(욥 18:6). 하나님의 보호와 함께하심을 뜻하는 등불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등불을 밝히라는 명령은 우리들을 향해 기쁠 때나 괴로울 때나, 기회가 있을 때나 좌절할 때나 그 어느 순간이든, 네 일상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의식하며 살라는 것이다. 그것은 막다른 벼랑에 선 인간들에게 새로운 희망에 대한 일깨움인 것이다.
요즘 카톡 유머가 인생의 선생노릇을 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인생의 어둠을 깨치게 하는 메시지를 받는다. 이런 명구도 있었다. ‘우리 인생에서 남는 것이 무엇인가?’ 사뭇 심각한 질문이다. 10대 이전에는 부모, 10대에는 친구, 20대는 이성, 30대는 자식, 40대는 취미, 50대는 여행, 60대는? 이빨이라고 한다. 치과의사들의 명언이라니, 너무 깊이 생각할 건 없다.
목포에 예닮(예다암)치과가 있다. 원장님이 임플란트 시술만 20년이 넘을 만큼 전문가라고 한다. 강진에 있는 오대환 목사님이 그의 글에서 소개해 주었다. 자기는 평소 “이 하나는 자신 있어”하며 살았는데 이젠 임플란트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가 얼마나 소중한가? 오죽하면 ‘이빨 빠진 호랑이’란 속담도 있다.
본래 이 치과 이름은 신우였다. 그런데 신우라고 말하면 입을 비죽 내밀고 꼭 다물게 되니 치과 이름으로는 부적합해서, 이름을 바꾼 것이 예닮이다. ‘예다~암’하면 그새 입을 쩍 벌리게 되기 때문이라나?
예닮치과 치과원장님은 임플란트 시술을 하면서 그를 위해 기도를 해 주셨다고 한다. “하나님이 주신 처음 이는 잃어 버렸지만 임플란트 시술이 잘되어서 사는 날 동안 어려운 일이 없게 해 주십시오”. 돌아올 때는 바로 먹을 수 있는 죽까지 포장해 주더라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그렇다. 사람은 날 때 잇몸만 갖고 출생한다. 어릴 적에 젖니가 빠지고 더 튼튼한 이로 교체한다. 살면서 이를 뽑고, 이를 때우고, 틀니를 하고, 이를 다시 심는 일은 누구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그 변화를 두려워 말아라. 여전히 내게 이를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의지하라.
3)
다행스러운 일은 우리에게는 아직 기회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번 주 목요일에 수능시험을 치룬다. 사실 수능시험이 당장 내 인생의 결정타처럼 보이지만, 돌아보니 그렇지 않더라. 대학진학도 내 인생의 결승타가 아니더라. 인생의 승부는 꽤 질기다. 기회는 여전히 남아있다. 다만 그때그때 최선을 다하라.
경건한 삶은, 진정 용기 있는 삶은 내 영혼에 등불을 켜는 일이다. 어둠이 두려워하는 것은 대낮이 아닌 새벽이다. 그래서 “어둠을 쫓으려면 촛불을 켜고 도깨비를 만나면 등불을 밝혀라”는 말도 있다.
우리의 몸과 영혼을 지으신 하나님은 등불을 예비해 주신다. 영혼은 육체에 깃들어져 있는 영원하고 변함없는 생명의 근원이다. 내 영혼을 지키기 위해 항상 등불을 밝히는 삶, 기름을 준비하는 삶이 필요하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흑암을 밝히시리이다”(삼하 22:29).
내 안에 등불을 켜는 일은 자신 뿐 아니라 남들이 나를 통해 빛을 느끼고 따듯함을 경험하도록 하는 아름다운 일이다. 그런 등불을 밝히는 인생을 살라. 내 안을 비추고, 우리 이웃과 사회를 밝히는 따듯한 인간이 되라.
예수님은 바로 그런 ‘등불을 밝히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육적인 삶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삶이 있음을 믿고 신령한 삶을 살도록 애쓰라.
하나님의 은총의 등불은 늘 나 자신을 향하고 있다. 나 자신 열 처녀 중 한 사람으로 부름 받았음을 명심하라.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1).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우셔서 등불을 밝히는 인생으로 세워주시길 바란다. 넉넉한 기름을 예비하는 복된 삶으로 형통케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