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계사 가람은 크게 대웅전 구역과 금당 구역으로 나누어진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명부전과 나한전, 진감국사대공탑비 좌우에 조선시대 후기의 건물인 설선당과 적묵당이 마주보고 있으며, 설선당 뒤는 해행료, 육화료, 종무소 등의 요사가 자리한다.
대웅전 중정의 진감국사 비는 방향이 엇박자다. 현재의 시각으로는 이해가 되지않지만 쌍계사에서 대웅전 영역보다 오래된 금당구역의 방향과 비교하면 수긍이 간다(물론 개인적인 생각이다)
대웅전은 처음 1641년(인조 19)에 벽암 각성 스님이 중건한 이래 1696년(숙종 21) 백암 성총 스님의 중수, 1735년(영조 법훈 스님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현재 보물 제500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바닥에 마루를 깔았고 중앙 후면의 불당 위에 닫집을 달았다. 3칸 어칸문은 사분합 빗살문이며, 창방 밑으로 교창, 좌우 끝 협칸은 정자살문을 달았다.
대웅전에는 석가여래를 본존불로 좌우에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불을 협시불로 봉안하였다.그 사이 사이에 관음, 세지, 일광, 월광 등의 네 보살 입상이 배치되어 있다.
대웅전 후불탱화은 영산회상도,아미타회상도, 약사회상도이며 답사시 아래 설명을 참고하길 바란다. 설명에 삼세불이라 표현 하였으나 오히려 삼계불이 옳을듯 하다.
"대웅전 아미타회상도. 화폭은 총 9폭으로 연결되어 있는 데, 각 폭의 크기는 약 36~41㎝이다. 삼세불도 3점 중 상태가 가장 양호한 편이나 상단 구름부분 등에 훼손이 되어 있고, 하단 부분은 접혀서 꺾여 있으며 이로 인해 화기 일부가 잘리는 등 훼손이 있다. 본존은 통견의 불의를 걸치고, 허리가 접힌 듯 넓고 짧은 상체와 여러 겹의 'ㄷ' 자형 불의 주름으로 인해 네모난 하체를 나타내어 사각형의 얼굴과 함께 전체적인 신체표현은 현저히 블록화 되어 있다.
본존 위에 지나치게 도식화되고 평면화 된 연화보개장식이 있는데, 본존의 정수리와 양쪽 귀에서 나온 세 갈래 광명이 연화보개로 뻗쳐있어 본존을 더 신성하고 존엄하게 장식하고 있다.
각 권속들은 서책, 꽃가지, 금강저 등을 들고 있으며, 그림 왼쪽에 ‘王’자가 그려진 가사를 입은 권속이 등장한다. 또한 다른 인물들과 달리 지장보살이나 관음보살은 눈 위에 눈꺼풀의 표현이 그려져 있는 것도 눈에 띤다. 필선은 철선묘(鐵線描)가 나타나는데, 얼굴은 안정되고 고른 선이 보이고, 불의 등에는 힘없고 도식적인 선이 사용되고 있다. 불의의 주름은 고려불화에 보이는 금선 대신 흰 선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약사회상도. 그림 위쪽의 나무 봉에는 봉안 시 사용한 복장랑(腹藏囊)이 있다. 여래 주위에 6보살과 2천왕, 약사 12신장이 호위하는 좌우대칭의 군도식 구도를 하고 있다.
대웅전 측면, 아미타탱(?),지옥탱
괘불지주, 구시. 말 없어도 말을 하고 있다.
무릇 격은 풍기는 것이지 요란하지 않다.
최근 출입통제가 해제된 금당구역. 108계단을 올라가면 '돈오문'이 선방구역임을 암시하지만 참배객에게 출입을 허용하여 고마운 일이지만, 사찰예절을 망각한 참배객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금당 구역은 육조정상탑을 모신 일명 탑전을 중심으로 한 구역으로 금당 아래에 동․서 방장실이 자리하고, 그 앞에 팔상전과 영모전이 있다. 팔상전 앞에는 또 하나의 누각인 청화루가 있어, 이곳이 대웅전 구역과 구분되는 별도의 공간임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청학루. 덤벙주초, 그랭이, 다듬지 않은 기둥, 맞배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를 하고 있다. 현재는 누하출입이 금지되었다.
청학루(靑鶴樓)라는 이름은 쌍계사 주변의 산세가 매봉산(좌청룡)·백학봉(우백호)가 있는데, 청학루는 좌청룡 기슭에 있기에 이름을 청학루로 하였다고 한다.
금당 하단 구역. 청학루를 맞보고 있는 팔상전, 우측에 영모전 전각
팔상도가 봉안된 팔상전 내부. 석가모니불 뒤로 아미타 탱을 모셨다.
자료에 의하면 영산회상도가 후불탱이라 했는데...
이사진을 찍기 위해 들어 갔다가 요사에서 청소중인 스님에게 혼이 났다.
진영. 어느스님의 진영인지 답사시 기록한 자료가 안보인다.
금당(金堂)은 육조 혜능 스님의 정상 사리를 봉안하였기 때문에 일명 정상사리탑전(頂上舍利塔殿)이라고도 한다. 삼법 스님이 당에서 모셔온 정상 사리를 돌로 만든 석감에 넣어 이 곳 땅 밑에 봉안치 했는데, 진감 국사가 건물을 세워 육조영당(六祖影堂)이라 했다.
지금 금당 안에 있는 칠층석탑은 1800년대에 주변에 있던 목압사의 석탑을 용당 스님이 옮겨와 세운 것이며, 그로부터 육조정상석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앞면에 걸려 있는 '세계일화조종육엽(世界一花祖宗六葉)'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선종의 종조 초조 달마(達磨)에서 2조 혜가(慧可), 3조 승찬(僧璨), 4조 도신(道信), 5조 홍인(弘忍), 6조가 혜능(慧能) 스님이다. 홍인 문하에서 훌륭한 두 선승, 신수(神秀)와 혜능이 나온 뒤부터 선의 법통이 둘로 나누어졌다.
혜능은 홍인으로부터 법(法)을 전해받고 가사(袈裟)와 바리때를 전수받은 뒤 남쪽지방으로 내려가 선을 전파했는데, 이를 남종선(南宗禪)이라 한다.
한편 신수는 홍인의 곁을 떠나 북쪽지방으로 가서 자기 자신을 바르게 하는 선을 전파했는데, 이것이 바로 북종선(北宗禪)이다. 남종선은 '생활의 선', 북종선은 '사색의 선'이라고도 한다.
혜능의 널리 알려진 저작 〈육조단경 六祖壇經〉에 의하면, 혜능은 젊었을 때 가난하고 무식했으며 장작을 팔아서 생계를 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장작을 지고 시장에 나갔다가 한 객승이 〈금강경 金剛經〉을 독송하는 것을 듣게 된 혜능은 불교에 귀의할 뜻을 굳히고, 당시 중국 불교의 중심지였던 중국 북부로 가서 선종의 제5대 조사로서 명망이 높은 홍인(弘忍)의 문하에 들어갔다.
〈육조단경〉에 따르면 661년 혜능이 그의 문하에 들어온 지 8개월가량 지났을 때 홍인은 자신의 법맥(法脈)을 이을 제자를 뽑기 위하여 제자들로 하여금 시를 짓도록 했는데, 가장 뛰어난 제자로 꼽히던 신수(神秀:605경~706)는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으니……/티끌이나 먼지가 끼지 않도록 하라"라고 읊었다. 그러나 이를 본 혜능은 "밝은 거울은 언제나 깨끗하니/어느 곳에 먼지나 티끌이 끼겠는가?"라고 읊었다. 혜능의 시를 들은 홍인은 그에게 자신의 법을 전했다.
다른 제자들의 시기로 인하여 비밀리에 홍인의 법맥을 잇게 된 혜능은 676년 중국 남부의 광둥 성으로 돌아가 〈열반경 涅槃經〉의 대가 인종법사(印宗法師:627~713)로부터 구족계를 받았으며, 그뒤 37년 동안 널리 가르침을 폈다. 〈육조단경〉에 의하면 혜능은 모든 사람에게 불성(佛姓)이 있으며 사람의 본성은 원래 순수하다고 선언한다.
경전을 읽거나 사찰을 건립하거나 재물을 바치거나 부처의 이름을 암송하거나 극락 왕생을 기원하는 등의 일보다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 중요하니, 그 안에 모든 석가모니 및 부처의 가르침이 갖추어져 있다.
자기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려면 마음이 고요하고 지혜로워져야 하는데, 그렇게 되려면 인위적 사고와 사물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앉아서 명상하는 등의 전통적 수행법은 무익한 것이니, 진정한 마음의 고요란 움직임이 없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 본성이 혼란되지 않는 상태이며 도착된 사고가 없는 상태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누구든 자기 자신의 본성을 보면 어떠한 외적인 도움도 없이 즉각적으로 깨달음에 이른다. 혜능은 이처럼 즉각적인 깨달음, 곧 돈오(頓悟)에 대한 혁명적인 선언을 하여 온갖 전통적인 불교개념·경전·수행법 등을 철저히 배척함으로써 점진적 깨달음, 곧 점오(漸悟)를 옹호하는 신수의 북종선과 그의 남종선 사이에 메울 수 없는 심연이 생기게 했다.
작년 10월 옛님 답사 자료중에 500년 세월 건너 우연의 일치인지 같은 봄날 답사한 탁영 김일손의 두류기행중 쌍계사 부문만 발췌했다. 관에서 사찰에 자행하는 수탈과 고은에 대한 탁영의 생각등 재미진 이야기가 보인다. 전문은 답사자료집을 참고하길 바란다.
김일손 ,두류기행 일시 : 1489년(성종 20) 4월 14일 ~ 28일
서쪽 산기슭에 오래된 성루가 있는데, 옛 화개현(花開縣)이라 하였다. 5리를 가서 시냇물을 건너는데 수석(水石)이 즐비하였다. 동쪽으로 1리를 가니 두 시내가 합류하였다. 그 옆에 두 바위가 마주서 있는데 ‘쌍계석문(雙磎石門)’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광제암문’이란 글자와 비교해보니, 크기는 훨씬 더 커서 말〔斗〕만 하지만, 글씨체는 그보다 못하여 아동이 습자(習字)한 것과 같았다. 석문을 지나 1리를 가니 귀부(龜趺)와 이수〔龍頭〕가 달린 오래된 비석이 있었다. 그 비석의 전액(篆額)에는 ‘쌍계사 고진감선사비(雙磎寺故眞鑑禪師碑)’라는 아홉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비석 끝부분에 ‘전(前) 서국도순관(西國都巡官) 승무랑(承務郞) 시어사내공봉(侍御史內供奉) 사자금어대(賜紫金魚袋) 신(臣) 최치원이 교서를 받들어 짓다’라고 씌어 있었다.
이 비석은 광계(光啓) 3년(887)에 세운 것이다. 광계는 당나라 희종(僖宗)의 연호이다. 지금까지 600여 년이나 지났으니, 오래되기도 하였다. 인물은 태어났다 가고 운수는 흥했다 폐했다 하며 끝없이 이어진다. 그런데 이 비석은 유독 썩지 않고 그대로 서 있으니, 한번 탄식할 만한 일이다. 이번 유람에 비석을 구경한 것이 많았다. 단속사 신행(信行)의 비석은 원화(元和, * 당 헌종의 연호)연간에 세웠으니 광계보다 앞선다. 오대산 수륙정사의 기문은 권적이 지었으니 그도 한 세상의 문사(文士)였다. 그런데 유독 이 비석에 대해서는 끝없이 감회가 일어나니, 이 어찌 고운의 손길이 여전히 남아 있고 고운이 산수 사이에 노닐던 그 마음이 백세 뒤의 내 마음에 와 닿기 때문이 아니랴. 내가 고운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그의 지팡이와 신발을 들고서 모시고 다니며 고운이 외로이 떠돌며 불법(佛法)을 배우는 자들과 어울리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운이 오늘날 태어났더라면·반드시 중요한 자리에 앉아 나라를 빛내는 문필을 잡고서 태평성대를 찬란하게 표현했을 것이며, 나도 그의 문하에서 붓과 벼루를 받들고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다. 이끼 낀 비석을 어루만지며 감개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다만 비문(碑文)을 읽어보니 문장이 변려문(騈儷文)으로 되어 있고 또 선사나 부처를 위해 글짓기를 좋아하였다. 어째서 그랬을까? 아마도 그가 만당(晩唐, * 당나라 말기)때의 문풍을 배웠기 때문에 그 누습을 고치지 못한 것이 아닐까? 또한 숨어사는 사람들 속에 묻혀서 세상이 쇠퇴하는 것을 기롱(譏弄)하며, 시속(時俗)을 따라가면서 선사나 부처에 몸을 의탁하여 자신을 숨기려 한 것이 아닐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비석의 북쪽 수십 보 거리에 백 아람은 됨직한 늙은 회화나무〔槐〕가 있는데, 뿌리가 시냇물에 걸쳐 있었다. 이 나무도 고운이 손수 심은 것이다. 이 절의 승려가 후원에 불을 놓다가 잘못하여 회화나무 밑둥치까지 불이 번져 이 거목이 쓰러지고 말았다. 썩다 남은 밑동이 10여 자는 되겠는데, 이 절의 승려들은 아직도 그 뿌리 위를 오가며 금교(金橋)라고 부른다. 아! 식물은 또한 생기가 있어 돌처럼 장수(長壽)하지 못하는구나. 절의 북쪽에 고운이 올랐던 팔영루(八詠樓)의 옛터가 있었다. 이 절의 승려 의공(義空)이 자재를 모아 누각을 다시 세우려 한다고 하였다. 의공과 잠시 앉아 있는데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까닭을 물어보니, 그 승려가 말하기를, "관청에서 은어를 잡는데 물이 불어 그물을 칠 수 없습니다. 조피나무〔川椒〕껍질과 잎을 가져다 물에 풀어 물고기를 잡아야 하는데 승려들에게 그것을 채취해오라고 독촉하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승려들보고 살생하는 데 쓰이는 물건을 준비하라고 하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라고 하여, 나도 한동안 이맛살을 찌푸렸다. 오대사의 주민들이 이정의 포학함에 시달린다고 들었는데, 쌍계사의 승려들도 물고기 잡는 물건을 관아에 바쳐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산속에 사는 것도 편치 못하구나.
내려오는길 낮은 담장 너머 부도전에 눈길이 머물렀다. 탐방객의 소란스러움에도 봄날을 되새김질 하며 한가히 졸고 있다.
탁영이 다녀간 시절에도 그들의 행장을 지켜 보았을 것이고, 전쟁의 참화에는 통곡하였지만, 이제 그 아픔도, 상처도 오롯이 품고 관조하며 오는 이 가는 이에게 말없이 생을 가르치고 계신 듯하다.
언제 다시 찾을지?
다시 올 기회가 있을까?
먼 하늘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물고기가 한없이 부러운 봄날....
2008.04.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