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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열왕기하 6장 13~14절
제목: 도단성을 지켜라
오늘 본문의 말씀을 간단히 설명하면
당시 아람이라는 나라가 북이스라엘을
점령하려고 하였지만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아서
북이스라엘의 왕을 먼저 죽이면 되겠다고 생각을 하고
왕이다니는 길목마다 미리 첩자를 심어놓아
동선을 다 살펴 놓았습니다.
그래서 아람이라는 나라가
북이스라엘 왕을 죽이기 위하여
왕이 다니는 길마다 자객을 숨겨놓았습니다
그런데 열왕기하 6장
전체 내용을 보면
한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너무나도 신비하게
자객를 숨겨놓은 날은
그길로 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이 너무나 이상한거예요.
그리고 신하들을 불러 놓고서는
우리 내부에 첩자가 있지 않고서는
북이스라엘 임금이 피할 수 있겠느냐?
분명히 내부에 첩자가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했더니 신하 한명이 이렇게 말합니다.
“안그래도 이게 너무나 이상해서
이스라엘에 심어놓은 첩자를 통해 알아보니
북이스라엘 땅에 도단성이라고 있는데
그 땅에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얼마나
신령한지 얼마나 대단한지 심지어는
임금님의 침실에서 나눈 은밀한 이야기를
다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북이스라엘을
점령하려기 위해서는 왕을 먼저 죽이는 것이 아니라
도단성에 살고 있는 엘리사를 죽이면 되겠구나
아람나라의 특공대를 밤중에 보내게 됩니다.
도단성은 규모가 작고 군사들이 머무는 성이 아니예요
군사도 없는 그저 보초병 경계병 밖에 없는 성이기에
밤에 아람의 특공대를 보내어서
도단성을 완전히 에워싸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아침이 밝아 아침에 사환이 일어나 보니까
성 밖에 아람 군대가 둘러싸여 있는 거예요.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도단성은 규마가 큰 성이 아니예요.
그렇기에 도단성 안에는 병사도 없었습니다.
그저 경계병 밖에 없는 성이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지 않지만
도단성에 경계를 서고 있던 군사들은
아람군대가 제압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환이 엘리사에게 찾아가서
우리는 죽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의 눈에 보이지 않느냐?”
그리고 엘리사가 기도를 하였더니
하나님이 사환의 눈을 열어 주셨어요.
눈을 열고 나서 보니까,
아람의 군사는 숫자가 적은 것이 아니지만
대략 어느 정도인지 셀만한 숫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낸 불마와 불병거
여호와의 군대는 산에 가득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보낸 군대는
눈으로 셀 수 없다는 것입니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여호와의 군대가
아람의 군대 뒤에
서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환의 눈을 열게 하면서
그들의 눈은 멀게 하였습니다.
아람 군사의 눈을 닫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많은 군사가 출전했을지도
아람의 군사가 눈이 다 닫혀버리고
갑자기 앞이 안보인까 엘리사가 명한대로
움직일 수 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이죠.
북이스라엘 임금이 도단성의 이야기를 듣고
아람의 군대를 다 죽이려고 하였을 때,
임금이 엘리사에게 물어봅니다.
당시에는 임금도 선지자를 아버지라 표현했습니다.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저들을 치리이까? 저들을 다 죽이리이까?”
그러자 엘리야는 죽이지 말라고 이야기 하며
그들이 밤새 도단까지 오느라 먹지도 못하고
이 성을 둘러싸고 있었으니
그들을 배불리 먹여서 도로 아람으로
돌려 보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그때 그들이 배불리 먹고 돌아갔는데
그때 왔던 병사들은 다시는
이스라엘 영내로 들어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토요일이라 길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간단하게 세가지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의 지도를 잘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의 왕 정도 되어지면
선지자가 말하였다고 해서
듣지 않을 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왕이
그 앞에서 알았다고 말한 후에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행하였으면
이 왕은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전 여러분이 말씀의 지도를 잘 받기를 소망합니다.
제가 첫날에 그랬죠?
이번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옥토가 되었으면 좋겠다고요.
내 귀에 들려진 말씀이
내 삶에 적용이 되어야 해요.
저는 예상하고 있어요.
하나님과 원수마귀가
같은 일을 하는 것이 하나있어요.
그것이 무엇이냐면
이번 부흥회가 끝나면
한번 슬쩍 흔들어 볼거예요.
여러분이 말씀을 들은대로
적용을 잘 하고있는지
홍브닌나, 박브닌나, 이브닌나를 통하여
여러분을 슬쩍 건드려 볼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그때 과연 들려온 하나님의 말씀을
인생 앞에 사람 앞에 적용하느냐?
한번 흔들어 볼거예요.
하나님은 여러분을 훈련하시기 위해
흔들어 볼 것입니다.
원수마귀는 여러분의 말씀을 멸망시키려고
슬쩍 흔들어 본다는 것이죠.
말씀이 말씀되어지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저는 영적으로 어떤 것을 느끼는 줄 아세요?
꼭 설교한대로, 그리고 설교를 들은대로
그 내용에 관한 일들이 생긴다는 것이죠.
여러분이 말씀을 잘 들었는지 안들었는지
여러분의 삶 속에 잘 적용하는지 아닌지
말씀의 내용과 같은 내용으로
흔들어 본다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자는 말씀을 듣고 나면
반드시 미워하는 일이 생겨요.
싸우지 마세요하고 설교하면
반드시 싸울 일이 생깁니다.
그래서 들은 말씀에 아멘이라고 했던
진위가 무엇인지? 습관성인지? 진정성은 있는지?
슬쩍 건드려 본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아멘에 속지 마세요.
저는 옹골차게 아멘이라고 대답을 하면서
그게 습관일때가 있습니다.
원수 마귀의 공격이 무엇이냐?
여러분임 말씀을 듣잖아요.
이 말씀이 적용되었는지
아니면 안되었는지 건든다는 거에요.
만약에 적용을 한 사람이라면
그 말씀으로 인해서 승리할 것이고
적용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엘리사가 말하는 거예요
“임금님, 오늘 내가 기도했더니
그 길로 나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 길은 위험하대요.”
그러면 우리 스타일은 무엇입니까?
“아멘~”이렇게 말해놓고서는
그 길로 갔다가 죽었다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우리의 영이 죽어 버리는 것입니다.
육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예요.
말씀다로 삶 따로입니다.
아멘따로 삶 따로입니다.
제가 옛날에 기도원 집회를 하면서
정말 깨달았다니까요.
제일 앞에서 옹골차게 아멘 하더라구요.
그런데 집회가 마치고 나서
그 사람이 식당에서 싸우는 것을 봤어요.
줄을 서고 있는데
누가 자신 앞에 새치기를 했나봐요.
“아멘” 이라고 하면서 그것도 감당을 못해요.
“아멘” 했을때 제가 느낌은 있었어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삶에 적용되어야 하는데,
이제 “아멘” 못해!
그렇다고 아멘에 기죽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도 테스트 해볼 때가 있습니다.
“너 아까 들려진 말대로 사는지
못 사는지 한 번 보자”라고요.
또 그 말씀을 들어야 할 사람인지
아니면 그 말씀을 또 들어야 할 사람인지
한번 테스트 해 보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인생 가운데
베다니를 만나게 하고,
베다니를 통과하지 않으면
예루살렘 성을 갈 수 없다고 말씀드렸죠?
그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영성이 되는지?
아니면 베다니에 걸려 넘어져 있는지?
하나님은 테스트 해보신다는 것이죠.
이게 하나님의 마음이예요.
북이스라엘 왕은 신앙이
두터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행인 것은 무엇이냐?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을 하고
자신의 삶 속에 적요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부지 할 수 있었어요.
그렇기에 내가 말씀의 현장에
앉아있다고 만족하면요. 큰일나요.
껍데기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고
표면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는 거예요.
내면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말씀이 적용되는 능력이 있어야 해요.
“하나님 내 귀에 들려진 대로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을 주세요.”
그래서 옆사람이 놀라야 돼요.
우리도 친한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그러면 친한 사람들이 잘 알잖아요.
이 사람이 부흥성회가 끝나고 나니까
예전과는 다른거예요.
말투도 변했어요. 생각도 변했어요.
그래서 이 사람이 미쳤나
그런 생각이 들정도로 변해야 하는 거예요.
"과거에 너가 한 말에 펄펄 뛰었잖아
너가 전해 준 말 때문에 잠도 못잤잖아
너 말 때문에 얼마나 상처를 경험했는데
그런데 이제는 아파도 말씀 때문에 아프고
좋아도 말씀 때문에 좋고 이제 그런 내가 될거야”
“왜냐면 이제부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로 결심했거든”
여러분 아멘 하셔야 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여러분에게
주실 축복이 없겠어요?
아니면 주실 열매가 없겠어요?
어제 12시 30분이 되었는데
15명 정도가 집에 안갔셨더라구요.
그래서 이렇게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기도 많이 하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능력이 없기에
주님이 아니면 능력을 받을 수 없기에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주님이 내게 임하셔서
나를 끌고 다녀 달라는 거예요.
오늘 이 왕도 말씀대로 행하니까
그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잖아요.
즉 우리가 살 방법은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잊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두 번째, 도단성을 지켜야 합니다.
왕을 죽이려고 했는데 죽일 수가 없었어요.
왜요? 도단성에 엘리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영적으로 무슨 말이냐?
어둠의 세력은 알았습니다.
우리의 육신을 파괴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을 파괴하지 못하면
다시 회복되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영을 파괴해 버리면
육신이 아무리 건장할지라고
반드시 망가지게 되어있습니다.
이제는 북이스라엘 임금의
육신적을 것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을 공격해야 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이
도단성을 지켜라입니다.
여러분 가끔 말씀드렸잖아요
요셉의 설교를 하면서요.
도단성이 어떤 성입니까?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웅덩이를 파놓았어요.
그런데 큰형인 루우벤이
죽이지 말자고 말렸습니다.
그리고 큰 형이 자리를 뜬 사이에
애굽의 상인이 그곳으로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말해서 요셉을
애굽의 상인에게 팔았습니다.
이 구덩이에서 요셉은 애굽으로 팔려갑니다.
요셉을 죽이기 위해 파놓았던
웅덩이가 있던 곳이 바로 도단성입니다.
그래서 도단이라는 이 말을
랍비들은 요셉의 우물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간 이후에
원망 불평 짜증 분노하는 장면이 없습니다.
계속 믿음을 잘 지켜내요.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아요?
지금은 내가 기가막힌 웅덩이에
빠져버린 인생이지만,
영적으로, 믿음만 잘 지켜내면
거기에 도단성을 세우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도단성은 보기에는 초라해 보이지만
영광의 성이라고 불리웁니다. 왜요?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는 성이기에
이게 바로 도단성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도단성을
넘보지 못했다는 말이 역사에
너무나 많이 등장한다는 것이죠.
군사도 많지 않은 성인데
이 성이 넘어가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이 임하신 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했잖아요.
기도하는 사람은
절대 건들지 말라구요.
기도하는 사람이 무서워서 그런게 아니예요
그와 함께 하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니
그래서 도단을 넘보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원수마귀는 어떻게든지
도단을 무너뜨리려고 해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게 하고
신앙을 보존하게 하지 못하게 하고
어떻게서든지 도단을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은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도
은혜를 붙잡아야 합니다.
도단을 지켜내야 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도단성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내가 겪는 아픔과 어려움을
영적으로 잘 지켜내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도단성이 되어 버립니다.
요셉 보세요. 여러분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얼마나 비참하겠어요. 아무리 내가 미워도
나를 노예로 팔아 버리려고 하고
어떤 형은 자신을 죽이자고 이야기도 했어요.
교회생활하면서 이보다
가슴 아픈 일이 있을까요?
나를 진짜로 죽이려고 했어요.
나중에 봐준 것이 무엇이냐면?
애굽의 노예로 팔아버려요.
당시의 노예는 종속노예가 아닌 사람이
더 힘들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볼때는 종속노예가 힘들것 같지만
일반 노예 보다는 쉬운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종속 노예는 아버지가 노예이기 때문에
내가 노예 되어진 사람은 인정을 받는게 있어요.
그래서 이쁜 여자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
기생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기생도 그 당시에 노예였다는 거에요.
얼굴보니까 “어후 다행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몇 명 있어요.
걱정마요. 아무나 안가요.
여러분 기생 라합이 이러잖아요
여호수아 2장을 보면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당신들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꺼냈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왜 라합이 믿은 줄 알아요?
나도 노예예요. 자신도 노예로 끌려와서
기생이 되어 버린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신 하나님이
나 하나쯤은 구원하시지 않겠느냐?
이것을 라합이 믿었다는 거예요.
무슨 이야기인줄 이해가 되시잖아요.
그러니 요셉이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종속노예는 대접이라도 받았습니다.
요셉은 평생 풀려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어요.
그런데 무엇을 잃어버리지 않습니까?
믿음을 내려놓지 않습니다.
도단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승질난다고 예배 안나오지 않습니다.
승질난다고 기도안하지 않습니다.
웃는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절대 도단을 잃어버리지 않아요.
그런데 원수마귀는 이렇게 볼 수 있어요.
요셉의 육신의 것을 다 뺏어갔어요.
17년간 채색옷을 입었어요.
여러분 종은요. 채색옷을 만질 수 없었다고해요.
채색옷은 일반 옷의 200벌 값이라고 했잖아요.
아버지 아들의 신분 다 잃어 버렸습니다.
다 빼앗아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말로 말하자면,
요셉이 도단 하나만큼은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원수 마귀의 작전이 실패한거예요.
그래서 결과적으로 보면
고생을 한 것 같지만
애굽의 총리가 되어져서
70명이나 되는 자기 가족들을 구원하고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중심의 인물이 요셉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센 땅으로 들어오게 하고
아이를 낳기 가장 좋은 땅에서
편안하게 먹고 자면서 여자들을
아이만 출산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창세기 17장에 언약하셨던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시겠다는
언약을 이루어 나가신다는 것이죠.
출애굽기 1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육하고
번성하였다고 말하잖아요.
고센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느새 200만이 되었다는 거예요.
그 중심에는 바로
요셉이 쓰임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도단을 놓아버리지 않으니까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죠.
원수마귀도 압니다.
여러분의 건강을 빼앗아 가는 것
여러분의 물질을 빼앗아 가는 것
이 땅에 좋아하는 몇 가지 빼앗아 가는 것
이것으로 원수마귀는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원수마귀의 진짜 목적은
신앙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이 목적이예요.
만약에 지금 원수마귀가 건강을 빼앗아 갔다면
내 건강을 뺏는 것이 문제일까요?
이 일을 통하여서 원망 불평 짜증나게 함으로써
내 신앙을 빼앗아 가는 것이 목적일까요?
원수 마귀의 최종 목적은 신앙을 빼앗아 가는 것이
최종 목적이라는 거예요.
자 똑같은 이야기 하나 더해볼게요.
하나님은 여러분에 돈을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예요.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건강을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예요.
그런데 돈도 주시고 건강을 주셔요.
돈만 주시는 목적이라면
오늘 밤 다 풀립니다.
오늘 밤 예배마치고
5층으로 다 올라갑시다.
만약에 돈을 주는 것이 목적이라면
무엇하러 우리에게 힘들게 주겠습니까?
건강을 주는 것이 목적이라면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분이
왜 그렇게 힘들게 주시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돈을 얻어가는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거예요.
건강을 얻어 가는 과정 중에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거예요.
여러분의 문제가 얼른 해결되면 좋겠죠?
하나님은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예요.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 중에
도단성을 짓게 하신다는 것이죠.
도단성도 안지었는데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잖아요?
그런 사람은 백발백중 먹튀합니다.
먹고 그냥 튀어 버려요.
문제 해결되어봐요.
기도하러 나오지도 않습니다.
예배의 자리에 나오지도 않습니다.
주님 앞에 보일 눈물도 없습니다.
어느 날은 무릎 꿇고 앉는 것도 어색해요.
자기도 느껴요. 스스로가 너무나도 어색해요.
그런데 돈을 얻어도
얻어지는 과정 중에 믿음이 생기면
얻고 나서도 이상하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과정을 주시는 거예요.
이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 과정을 거치지 않으려고 하면
육신이 나를 괴롭혀요.
눈뜨고 나면 병이 다 낫으면 좋겠어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제가 말씀 드렸잖아요.
3주 동안 평생 먹을 진통제를 다 먹었다고요.
얼마나 아프던지!
그런데 병원을 가지 말라는 것 아니예요.
병원을 갔는데 나아지는 것이 없으니까
그래서 주님에게 “그냥 마음대로 하세요.”
그렇게 말했어요.
저는 부흥회 다니면 괜찮게 해주실줄 알았어요.
그런데 제 기도의 분량을 채우게 하시니까
결국은 만져 주시더라구요.
제가 늘 깨닫는게 있어요.
하나님은 우리의 병을 고쳐주시는 분이 아니예요
돈을 주시는 분도 아니예요.
병을 고쳐 가는 중에
나에게 주시는 믿음이예요.
주님이 제 기도를
받고 싶어 하셨던 거예요.
제가 이번 집회 때 주의 임재를 말했죠?
요즘에 제가 주의 임재를 느껴요.
그래서 이번 부흥회 목표 중에 하나가
주의 임하심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도단성을 지키세요.
마지막입니다. 영적인 눈을 떠야 합니다,
17절 말씀 보겠습니다.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지금 상황이 기도하기 전에 봤어요?
아니면 보지 못했어요?
이것은 육적인 눈으로 볼 수 없는 거예요.
이것은 영적으로 볼 수 있는 거예요.
불마와 불병거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존재를 말하는 거예요.
이것은 영적이지 않으면 못느끼는 거예요.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눈을 여신 거예요.
여러분 기도하기 전과,
기도하고 난 후가
이렇게 너무나 달라요.
저는 하나님이 여러분의
눈을 열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여러분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으면
육적인 눈으로 볼 수 없는 거예요.
영적으로 느끼는 것이고,
영적으로 믿어지는 것이고,
영적으로 확신을 갖는 것이고,
영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제가 이름을 거론하지 않지만
어제 안수를 하는데 하나님의 빛이
얼마나 세게 임하는지 제가 눈을 못떳어요.
너무 빛이 강해서
그래서 제가 그분의
눈을 가려주었어요.
그런데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어제 기도 받으신 분도
너무나 강하게 빛이 임했다는 거예요.
목사님 어제 캄캄하던데요.
뭔 빛이 그렇게 내렸다는 거예요?
간증이 나쁜게 아니예요.
터놓고 말하면 조미선 집사님이예요.
어제 30분을 기도해 주는데
영적인 빛이 너무 세게 임하는거예요.
그래서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도를 많이 해주지 못했어요.
여러분 저는요
하나님이 눈을 열고 보니까
사람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불마와 불병거가 보이는거예요
그런데 제가 이것을 어떤 방법으로
어떤 지식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이런 말이 있어요.
“니들이 게맛을 알아?”
이것은 받아보지 않으면
이것은 경험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예요.
불마와 불병거를 누가 보겠어요?
어떻게 해석하겠습니까?
사람으로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임하신 거예요.
아람의 군대를 싹 눈이 멀게 하였어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역사예요.
제가 어젯밤에 기도하면서
가만히 이렇게 기도를 했어요.
“하나님 제게 소원이 있습니다.
한번만이라도 예배에 참석한
모든 무리, 이 공동체에게
한번만 쏟아 부어주세요.
여러 사람이 경험하게 해주세요.”
어제 묵상을 해보니까
공동체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더라구요.
거절할 수 없고, 거부할 수 없고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임하심
여러분이 거절한다고 거절할 수 있는게 아니예요.
한가지만 더 이야기 할게요.
여리고성의 함락도 이야기 했고,
출애굽기 설교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팔의 소리에 따라 신호를 보내는 거예요.
그런데 나팔을 길게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거예요.
나팔을 길게 불어야 하나님이 임재하세요.
기도의 나팔을 길게 불어야 해요.
이상한 이야기 하나 할까요?
이상한 이야기니까 이상하게 들으세요.
여러분 하나님 한 시간 안에 잘 안오세요.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어요?
하나님이 임하시려면 1초만에 임하시지
그렇게 못하시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그렇게 임하지 않으세요.
출애굽기를 보세요. 나팔을 길게 불때
하나님의 신이 임하더라
그래서 여리고 성을 점령 할 때에도
나팔을 길게 불 때, 주님이 임재하셨다는 것이죠
어떻게 하면 영성과 영권이 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느냐?
저는 교역자들에게 그랬어요.
우리가 좀 더 강해지자구요.
그럴려면 우리가 기도의 나팔을
길게 불어야 한다구요.
오늘 저는 여러분들이
기도를 하고 났더니
눈을 열어서 일반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경험하게 하시는 은혜가 있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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