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어느 식당에 들렸더니 테이블 위 지방지 석간이 놓여 있었다. 간지를 펼쳐 넘겨보다 농사철을 맞은 기사가 소개되었다. 남해 다랭이 마을에서 써레를 끄는 암소사진이 칼라로 실렸더랬다. 요즘 농촌에서 영농이 기계화되어 트랙터로 논을 갈고 이앙기로 모를 낸다. 다랭이 마을은 계단식 논이다 보니 사진 속에는 농부가 옛날식으로 힘들게 써레질하여 논바닥을 고르고 있었다.
좀체 영화관을 찾지 않는 내가 지난겨울 가족과 같이 한 번 갔다. ‘워낭소리’가 독립영화 관객 동원 기록을 세워가기 전이었다. 소와 함께 보낸 봉화산골 최씨 노인의 우직한 삶에 나는 잔잔한 감동을 받았다. 밭을 가는 일소의 입에 씌운 그물망이 눈길을 끌었다. 그것은 새끼로 꼬아 만든 부리망이었다. 다른 한 장면은 늙은 소를 대체할 송아지에 코투레 끼워 길들이는 장면이었다.
겨울방학 때 틈내어 전라도 담양을 찾은 적 있었다. 순천만 갈대숲을 지나 구례 운조루를 거쳐 갔다. 죽녹원에서 광활한 대나무 숲길을 걸어보았다. 면앙정과 송강정을 둘러 소쇄원을 찾아갔다. 근처 식영정과 환벽당이 자리한 곳에 한국가사문학관이 있었다. 문학관 뜰에 암소상이 있었다. 베적삼 입은 목동이 소를 타고 있었다. 소의 체격에 비해 코뚜레가 너무 커 보기 안쓰러웠다.
어린 시절 내가 자란 농촌에선 소는 상당한 대접을 받았다. 꼬마아이들은 모두 쇠꼴머슴이었다. 볏짚은 이엉을 엮어 지붕덮개로 써야했기에 사료가 부족했다. 옥수수나 밀 같은 대체사료가 없던 시절이었다. 초등학교 다니던 아이들까지 꼴망태 메고 산과 들의 풀을 베어 날랐다. 가마솥에 쇠죽을 끓여 여물을 푹 삶아 익혀 바쳤다. 소는 논밭 일에서 상일꾼이고 살림에 목돈을 안겼다.
송아지를 키우면 꼭 거쳐야하는 통과의례가 있었다. 사람으로 치면 사춘기를 지나는 성장통과 같다. 송아지가 일소가 되고 엄마소 아빠소가 되려면 큰 아픔이 하나 찾아온다. 어린 송아지의 코에 코뚜레를 꿰는 일이다. 이 일은 아무나 하지 못해 마을에선 한두 사람만 해낸다. 강심장으로 통하는 다부진 사람이 뾰족한 대침으로 송아지 주둥이를 잡고 단숨에 코에다 구멍을 뚫어버린다.
내가 자란 시골에선 우리집안 먼 아저씨뻘 되는 노인이 맡아 했다. 노인이 돌아간 후엔 전씨 성을 가진 젊은 분이 맡았다. 나는 코뚜레 꿰는 장면을 곁에서 지켜본 적이 있다. 송아지는 자기에게 다가오는 운명을 예감하지 못하고 순순히 목덜미를 잡혀야 했다. 아저씨는 대침을 가지고 잽싼 동작으로 코에다 구멍을 뚫어버린다. 그리고 동그란 코뚜레를 끼우고 간장을 품어 소독했다.
어려서 지켜본 송아지 코뚜레 꿰는 모습에서 나는 언제나 결정적인 장면은 외면해버렸다. 송아지에게 너무 가혹하고 몹쓸 일인 것 같아서다. 그리고 한편으로 코뚜레 끼워주는 아저씨가 원망스럽고 야속하기도 했다. 코뚜레가 끼워진 송아지는 아프다는 소리도 못하고 한두 달 지나면 새살이 돋아 통증은 사라졌을 것이다. 코뚜레 끼워진 송아지는 이제 멍에가 걸쳐진 일소로 길들여졌다.
지금껏 위에서 송아지 코뚜레 끼우는 얘길 나누었다. 어려서는 코뚜레 끼우는 나무를 잘 몰랐다. 나는 어른이 되어 코뚜레 끼우는 나무가 무슨 나무였을까 궁금했다. 객지 나와 살지만 고향을 더러 찾아간다. 고향산천 버드나무와 느티나무가 눈에 선하다. 조상 산소 성묘 다녀오느라 선산에 오르내린다. 선산에 올랐을 때 어릴 적 코뚜레 끼우던 나무가 무엇인지 유심히 살펴보았다.
지금 와서 보니 코뚜레 재료는 노간주나무였다. 요즘 내가 오르는 창원근교 산의 노간주나무는 꽤 높이 자랐다. 코뚜레 끼운다고 가지를 쳐주질 않다보니 우뚝했다. 그 시절엔 노간주나무 잔가지를 쳐서 아궁이불에다 휘어 동그랗게 만들었다. 동그란 코뚜레를 외양간 서까래에다 여러 개 걸어 두었다. 이제 일소도 드물어졌고 코뚜레 끼워주던 사람도 없어지고 말았다. 아! 코뚜레여. 2009.06.16
첫댓글 아, 그렇구나. 코뚜레 사연이여! 구수한 사연 정말 잘 읽었습니다. 노간주나무를 그냥 지나쳤는데 유심히 봐 주어야겠습니다.
축사에 가두어 키우니 요즘 소는 코뚜레가 없더군요. 인공수정에다 코뚜레도 없으니...인물이 비슷해요 소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