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소산성의 정문과 흙으로 쌓은 산성
6월 초라고 하지만 올 여름 날씨는 유난히 덥다. 부여를 찾아 오랜만에 낙화암을 찾아보리라고 몇 번을 망설이다가 막상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리 무더울 줄이야. 오늘따라 정장을 하고 넥타이까지 매었으니 남들이 보아도 더워보였을 것이다. 정작 본인이야 죽을 맛이 아니고 무엇이랴. 표를 끊고 부소산성의 정문을 들어선다. 낙화암만이 아니고 부소산성 안에는 정자가 많기 때문에, 정작 정자 기행을 하기 위함이니 발길이 무거울 리가 없다.
부소산성은 사적 제5호로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토석혼축산성이다. 둘레가 2,200m에 면적은 약 74만㎡ 정도로, 부여 서쪽을 반달 모양으로 휘어 감으며 흐르는 백마강에 접해 있는 부소산의 산정을 중심으로 축조된 산성이다. 테뫼식 산성을 1차로 축조하고, 다시 그 주위에 포곡식 산성을 축조한 복합식 산성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사비성, 혹은 소부리성(所夫里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538년(성왕 16)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천도하여 멸망할 때까지 123년 동안 국도를 수호한 중심산성이었다.
부소산성을 오르는 돌길과 백제 충신 세분을 모신 삼충사(하)
정문을 들어서면 산성을 오르는 길이 큰 돌을 깔아 길을 만들어 놓았다. 돌 하나하나를 밟으며 조금 올라가면 바로 삼충사가 보인다. 삼충사는 충남 문화재자료 제115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백제의 충신이었던 성충, 흥수, 계백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인 삼충사. 백제의 부흥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세분의 충정이 있어,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편히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머리 숙여 깊은 목례를 한다.
삼충사에 모셔진 충신 성충은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 때, 좌평으로 있으면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다 옥중에서 단식을 하다 죽었다. 흥수는 백제 의자왕 20년(660) 나당연합군이 공격해 오자 탄현을 지키다 대신들의 반대로 지키지 못하고 결국은 멸망하였다. 계백은 나당연합군이 공격해 오자 결사대 5,000여명을 뽑아 지금의 연산인 황산에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1957년 새로 지은 이 사당은 1981년 다시 지어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해마다 10월 백제문화재 때 삼충제를 지내고 있다.
해를 맞는다는 영일루와(상) 창고지인 군창터(중), 그리고 백제때의 병영 주거지(하)
삼충사를 나와 조금 더 오르면 영일루가 나타난다. 이층 누각인 영일루는 이름 그대로 해를 맞는 정자이다. 부소산의 동쪽 산봉우리에 있으며, 계룡산의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던 곳이란다. 영일루는 1964년 5월 홍산에 있던 조선시대의 관아 문을 옮겨 놓으면서 영일루라 이름을 붙였다.
영일루에서 또 하나의 정자인 반월루를 찾아가는 길 중간에는 창고터인 군창지가 있다. 문화재자료 지109호인 군창지는 백제시대에 처음 창고를 지어, 조선시대까지 창고를 지은 흔적이 발굴되었다. 군창지를 조금 지나면 수혈주거지가 나온다. 수혈주거지는 발굴 당시 나온 백제시대의 토기 뚜껑과 무구류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5~6세기 경 백제시대 병영의 움집자리로 추정을 하고 있다. 들어가 가만히 살펴본다. 전문가가 아니라서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연도며 아궁이, 침상 등 내용이 붙어있기 때문에 옛 모습을 그려볼 수가 있다.
부여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반월루와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사자루(하)
반월루, 백마강이 반달모양으로 끼고 도는 부소산의 남쪽 마루에 있으며, 부여 시가지기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이층으로 된 누각에 올라 부여시가지를 내려다본다. 바로 이런 장관을 볼 수 있어, 정자를 짓는 것인가 보다. 반월루를 나와 조금 더 가면 갈라진 길이 나온다. 우측으로 가면 궁녀사가 있고, 직진을 하면 백화정과 낙화암이 있다고 길을 소개하고 있다. 조금 올라가니 우측으로 사자루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갈라지는 길 한편에 물건을 파는 가게가 잇다. 제일 먼저 눈에 띠는 것은 <얼린물>이라는 글씨다. 얼른 한 병을 집어 모두 마셔버린다. 벌써 부소산성의 정문을 들어선지 두 시간이 지났다. 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이미 등줄기는 다 젖었고, 이마에서는 쉴 새 없이 땀이 흘러내린다. 손수건으로는 감당을 못할 정도다. 사자루에 오른다. 문화재자료 제99호인 사자루는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원래 달구경을 했다는 송월대가 있었던 곳이다. 아마 백제 때는 이곳에 망대가 있지 않았을까? 어느 곳을 가도 성 안에서 가장 높은 곳에는 적을 관측할 수 있는 망대가 있기 때문이다. 1919년 임천면에 있는 개산루를 옮겨오면서 사자루라 이름을 붙였다.
낙화암 위에 세워진 백화정과 궁녀들이 백마강으로 뛰어든 곳으로 추정하는 바위(하)
사자루를 둘러보고 내려와 가게를 끼고 돌면 낙화암과 고란사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사자루까지 계속 오르막이던 길은 여기서부터 급하게 경사가 져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한 계단씩 내려가다가 보니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백화정(百花亭), 부소산성의 북쪽 백마강변 험준한 바위 위에 몇 그루의 노송과 함께 서있는 백화정의 자태가 아름답다.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을 당할 때, 의자왕을 비롯한 많은 백제 사람들이 당으로 끌려갔다. 죽음으로 순결을 지키리라 마음먹은 궁녀들이 이곳 백화정 바위위에서 몸을 날려 백마강으로 꽃잎처럼 떨어져 숨져간 곳. 그 뜻을 기리고 한을 달래기 위해 1929년에 육각형의 정자를 지었다.
고란사와 구두레나루와 고란사를 연결하는 유람선(하)
백화정에 올라 백마강을 내려다본다. 바로 정자 밑 저 바위 위에서 수많은 백제의 궁녀들이 백마강으로 뛰어 들었다니. 화려한 옷으로 치장을 한 궁녀들이 뛰어들었다는 낙화암을 보기 위해 유람선을 타러 내려가는 길에 고란사를 만난다. 고란사를 들러보고 유람선 선착장으로 향한다. 평일인데도 유람선들은 쉴 새 없이 구두레나루터에서 관광객들을 실어 나르고 있다. 구두레로 향하는 유람선을 타고 낙화암 밑을 지난다. 이왕이면 동영상으로 찍고 싶어 캠을 꺼냈다. 세상에 어째 이런 일이. 배터리가 없단다. 항상 여분을 준비해 갖고 다니는데 오늘따라 마음만 급해 여분도 없이 나왔다. 이걸 어찌해야하나? 몇 번이고 다시 누르지만 방법이 없다.
그러는 사이 유람선은 구두레 선착장에 도착을 했다. 깎아지른 듯한 낙화암. 그 중간에 선명하게 음각을 하여 붉은 칠을 한 낙화암이라고 한자로 써 놓았다. 저 높은 곳에서 나라의 멸망을 안타까워하며 백마강으로 몸을 날린 궁녀들. 그 한이 서린 백화정은 절벽 위에 저리도 자태를 뽐내며, 지나간 한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리 말없이 서 있다. 백마강 강바람 한줄기가 시원하게 땀을 식혀주고 지나간다.
첫댓글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