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동장씨 인물자료
■ 돈녕부도정 노와 장윤종 묘갈명
(敦寧府都正 老窩 張胤宗 墓碣銘)
글: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우리나라 풍속은 대대로 내려오는 덕망(世德)을 중히 여겨 반드시 유학의 어진 선비(儒賢)를 일컫는다. 오래된 명문가에서 시(詩)와 예(禮)를 이어받는 것은, 겉으로만 깍듯하게 굴고 조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 풍치와 법도가 자연스럽게 세속의 흐름을 뛰어넘는 법이니, 돌아가신 도정(都正) 노와(老窩) 장공이야말로 참으로 선조(여헌 선생)의 총적(冢嫡: 종손을 말함)으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분이다.
공의 휘(諱)는 윤종(胤宗), 자는 계선(繼善)이다. 여헌(旅軒) 문강공(文康公: 張顯光)의 7세손이며, 부제학 청천당[聽天堂: 장응일(張應一)]의 후손이다. 고조부는 세자 익위사 위솔 휘 영(𨥭), 증조부는 세자익위사 부솔 휘 만기(萬紀), 할아버지는 통덕랑 휘 대유(大猷), 아버지는 익찬 휘 지덕(趾德)으로 모두 공의 윗대 분이다.
경종 3년(1723)에 태어난 공은 어릴 때부터 성인 같은 기국과 도량이 있었습니다. 학문에 나아가자 총명하고 기억력이 강해 문장과 글씨를 일찍 깨우쳤다. 15세에 봄을 읊은 시[春詞] 수백 구절을 지었고, 과거 시험 공부를 하던 중 시험장에서 암송하다 몇 구절을 틀리자 다시는 응시하지 않았다.
후에 제과(製科)에 응시할 때, 어떤 사람이 뒷거래(關節)를 제안했으나 받지 않았고, 마침내 과거 공부를 폐하고 문을 닫아건 채 자신의 뜻을 구하며 살았다. 18세에 스스로를 살피는 아홉 조항인 '자성설(自省說)'을 지었는데, 그중에 이르기를 "사람에게 이 마음이 있는 것을 '천군(天君)'이라 하니, 잡아서 보존하면 밝은 거울과 멈춘 물(明鏡止水)과 같고, 놓쳐서 잃어버리면 곧 짐승(禽獸)과 같다" 하였으니, 쌓은 수양의 깊이를 알 수 있다.
공은 밖에서 구하는 길(출세)을 끊고 오로지 자식의 도리를 닦는 데 전념했습니다. 선친(先親: 돌아가신 아버지)의 성품이 엄격하고 높았으나, 공은 아침저녁으로 온화하고 즐거운 빛으로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데 힘썼다. 집안은 본래 맑고 가난했으나, 공은 쓰임새를 아끼고 농사에 힘썼다.
연못을 파서 물고기를 기르고 부모님을 봉양함에 부족함이 없게 했다. 명절이면 자손들에게 색동옷을 입혀 춤추게 하고, 거문고를 타며 시를 읊었다. 집에는 길들여진 학이 있었는데 장단에 맞춰 춤을 추었고, 기이한 꽃과 수석을 앞에 벌여놓았다. 부모님의 마음이 가고자 하는 곳이면 반드시 힘을 다해 모셨다.
일찍이 관서 지방의 승려가 노잣돈을 구걸하자 선뜻 수천 전을 주었는데, 몇 년 뒤 그 승려가 돈을 갚으러 오자 사람들이 처음에는 비웃다가 나중에는 탄복했다. 또한 도둑이 들어와 물건을 훔치려 하자 공이 천천히 말하기를 "이미 집은 것은 가지고 가고,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마라"고 했다. 이 모두가 옛 성현들의 일화와 같다.
정조 대왕께서 공의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사용(司勇)의 직을 내리고 도신[관찰사]에게 명하여 공을 예우해 데려오게 했다. 곧이어 효릉참봉에 임명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정조 22년(1798, 戊午)에 특별히 돈녕부 도정(都正)의 품계를 내렸고 이어 중추부로 옮겼으며, 특별히 본도(경상도)에 명하여 녹봉(月廩)을 주게 하였다. 이는 선조(여헌 선생)를 추모하고 배려하는 뜻이 담긴 임금의 가르침이었으니, 공의 명망이 평소 높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었겠는가.
순조 즉위년(1800, 庚申) 정조 대왕의 국상을 당했다. 아직 장례(葬禮) 전이었으나 고을 수령이 연회를 베풀어 자기 부모의 장수를 축하하며 공을 초청했다. 공은 (국상 중이라) 나가지 않았다. 마침 공의 동생 중 다른 집으로 양자 간 이의 아들이 읍내 숙소에 머물다 정신병(心疾)이 발작하여 밤에 관청 문을 두드리며 미친 소리를 했다. 포졸들이 그를 잡아내어 낭떠러지로 던져 죽게 했다.
고을 수령은 일찍이 공이 연회에 오지 않은 것에 원한을 품고, 이 기회를 틈타 거짓으로 보고했습니다. 옥에 갇히게 되자 공은 말하기를 "나 자신의 억울함을 펴려고 하면 다만 화를 키울 뿐이니, 변명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관찰사(觀察使) 또한 자세히 살피지 않고 급히 호남의 남원(南原)으로 유배 보냈습니다. 대부(大夫)를 다스림에 왕부(의금부)를 거치지 않고 본도에서 바로 판결을 내린 것은 법에 어긋나는(枉法) 일이었다.
공은 태연하게 유배길에 오르며 말하기를 "운명이다"라고 했다. 유배지에서도 평소 고난을 대하던 태도로 경전과 서적을 읽으며 스스로 달랬다. 이듬해 순조 1년(1801, 辛酉)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79세였다. 그해 몇 월 며칠에 고향 마을의 서쪽 기슭에 장사 지냈다.
순조 35년(1835, 乙未)에 공의 손자인 석원(錫元)이 조정에 원통함을 호소하였다. 당시 고을에서 보고했던 유배 기록(徒流案)이 허위였음을 명백히 밝히니, 즉시 명을 내려 공의 죄명을 씻어주었다(疏蕩). 헌종 6년(1840, 庚子)에 고을 서쪽 임수리(臨水里) 임좌(壬坐) 언덕으로 묘소를 옮겨 다시 장사 지냈다.
부인 연안 이씨(延安 李氏)는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의 손녀로 일찍 돌아갔고, 후배 양주 조씨(楊州 趙氏)는 덕행이 공과 비견될 만큼 아름다웠다. 4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시추(時樞), 시기(時機), 시유(時瑜), 시표(時杓)이고 딸은 이구련(李龜蓮)에게 시집갔다. 이하 자손들의 이름은 가문의 족보 기록과 같다.
나[이원조(李源祚, 1792~1871)]는 아득히 먼 후생이라 공과 같은 세대에 살지는 못했으나, 다행히 공의 여러 손자와 사귀며 공께서 사시던 '사이당(四而堂)'에 오른 적이 있다. 공께서 사시던 옛집에는 연못과 대(臺), 꽃과 돌들이 여전히 남아 있어, 공께서 남기신 바람(遺風)을 슬프면서도 사모하는 마음으로 상상해 보았다.
공의 천품은 맑고 담박하며 간결하고 높았다. 스스로를 굳게 지켰으며 입과 귀로만 하는 학문(겉치레 학문)을 부끄럽게 여겼다. 오로지 안으로 마음을 닦는 공력(內修之工)에 힘썼고, 허위와 인색한 마음을 끊어냈으며, 남의 눈에 띄려 하거나 기이한 행동을 하는 흔적을 없앴다. 겉과 속이 옥처럼 맑아 한 점의 먼지 같은 번뇌도 없었으니, 바라보면 마치 신선이 탄 학(仙鶴)과 같았다.
그 거동과 용모는 이미 사람들을 엄숙하게 복종시켰고, 행실에 있어서는 자식으로서 어버이의 뜻과 물질적 봉양을 다했으며, 아비와 형으로서 자애롭게 보살피는 은혜를 다했다. 사람을 대할 때는 겸손하고 공손했으며, 집안에서는 자상하고 돈독했다.
아래로 종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즐겁게 공의 명을 받들었다. 한때 지부(知府)의 부탁으로 고을 학교의 일을 맡아 향약(鄕約)을 정하기도 했으나 곧 사양하고 물러났다. 임금의 은혜로운 부름이 예사롭지 않게 이어졌으나 한 번도 달려가 아부하지 않았으니, 세상의 영화와 이름을 마치 진흙이나 풀때기처럼 보았다.
이는 공의 천성이 아름다워 절로 도(道)에 가까웠던 것이요, 대대로 내려오는 덕망(世德)을 이어받아 스스로 하나의 모범이 된 것이니, 아! 참으로 훌륭하도다. 손자 록원(祿遠)이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 공이 지은 행장을 들고 와서 나에게 묘갈명을 청하니 내가 어찌 감히 이 일을 맡겠느냐고 예법에 따라 사양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그 행장에 기초하여 대략을 요약하니 다행히 큰 허물은 없을 것이다.
이에 서문을 쓰고 다음과 같이 명합니다.
문강공(여헌)의 종손이 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나
도덕의 정원에서 조상의 가업을 빛내셨도다.
아름다운 장공이여, 맑은 얼음 같고 영롱한 옥 같네.
안으로 닦음이 온전하니 밖의 유혹이 물러가고
젊어서부터 속세 따르지 않아 과거 공부에 발길 끊었네.
중년과 노년에는 여유로이 마음 가는 대로 노니시니
임금께서 수레를 보내 부르심은 예사로운 격식을 넘었네.
신하로서 절하며 사양했으니 어찌 음덕의 자리에 앉으려 하셨으랴.
공의 한 마디 마음은 오로지 순수한 붉은 빛(충심)뿐이었네.
궁벽한 곳에 살며 어버이 봉양함은 고기 반찬보다 귀했고
부엌에는 향기로운 음식, 뜰에는 꽃과 돌이 있었네.
거문고 타고 학을 춤추게 하며 아침저녁 색동옷 입으셨지.
또한 책더미 속에 묻혀 깊이 생각하고 묵묵히 이치 엮으셨으니
세속의 학문이 마음을 명예의 노예로 삼는 것과는 달랐네.
갑작스러운 재앙(국상과 모함)이 닥쳐 큰 화를 입으셨으니
옛 원한 품은 자가 기회를 틈타 허물을 뒤집어씌웠네.
변명하지 않고 명을 받아들이니 법식에 어긋난 판결이었네.
소인배의 악함은 끝이 없으나 공의 덕은 실로 두터웠도다.
유배지에서 운명하시니 길가는 이들 모두 슬퍼하였네.
어진 손자가 원통함을 호소하여 마침내 억울함이 밝혀졌도다.
인간 세상 아득하나 이제 다시 유택(幽宅)을 옮기어
우뚝 솟은 이 비석이여, 영원히 묘역의 나무들을 평안케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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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敦寧府都正老窩張公墓碣銘[凝窩 李源祚 撰]
東俗重世德。必稱儒賢。古家詩禮傳襲。未必擎跽曲謹。而風猷儀範。自然超拔於流俗。如故都正老窩張公。眞無愧爲先正冢嫡也。公諱胤宗字繼善。旅軒文康公七世孫。副學聽天堂諱應一。衛率諱𨥭。副率諱萬紀。通德郞諱大猷。翊贊諱趾德。公祖曾以上。考諱壽崙侍直。妣永陽李氏。承旨民宬孫。景宗癸卯公生。幼有成人器度。及就學。聰明強記。文辭蚤就。十五賦春詞數百句。間治經生帖。括試誦錯數句。不復應試。後赴製科。人遺以關節不受。遂廢擧杜門求志。十八作自省說九條。又曰人有此心。是曰天君。操而存之。明鏡止水。舍而亡之。乃禽乃獸。其所養可知也。公旣斷外求。惟日修子弟職。先公性嚴峻。朝夕怡愉。務悅親心。家素淸貧。而節用力穡。鑿池養魚。口體之奉。常優如也。每佳辰令節。令諸兒孫彩衣而舞。彈琴誦詩。家有馴鶴。應節踉蹌。奇花異石。羅列於前。凡親意所欲爲。必力致之。嘗有關西僧乞行資。輒與數千錢。後數年僧來償錢。人始笑而終服。又有偸兒探藏物。公徐曰已取者持而去。後勿復爾也。此皆古人事。 正廟聞其賢。付司勇。命道臣勸駕。旋拜孝陵郞。皆不赴。戊午超授敦寧府都正。旋移西樞。特令本道給月廩。有表念先正之敎。非公聞望素著。亦何能致此也。庚申遭國哀。未因山。主倅設宴壽其親速公。公不赴。適公弟爲人後者。有子居邑邸。有心疾夜叩官門。發狂易言。捕者出投崖死。主倅曾以不赴宴慊之。乘機誣報。及就獄。公曰欲伸己枉。徒張禍色。不如無辨。按使不之究。遽發配於湖南之南原。下大夫之不關由王府而自本道直勘。亦枉法也。公恬然就道曰命也。到配行以素患難。披覽經籍以自遣。翌年辛酉。歿于匪所。享年七十九。月日歸葬于故里之西麓。 純廟乙未。公之孫錫元。訟寃于朝。以營報徒流案白之。卽命疏蕩。憲宗庚子。改窆于府西臨水里壬坐原。配延安李氏。息山萬敷孫。蚤卒。後配楊州趙氏。德行媲美。生四男時樞,時機,時瑜,時杓。一女李龜蓮。時樞男錫祜,錫默。女金在七,權載洛。時機男錫元,履慶。女鄭麟休。時瑜男錫永,錫任,錫敏。餘男錫百。時杓嗣男履慶。錫祜男啓遠。錫默嗣男祚遠。錫元嗣男祿遠。錫永男奎遠,致遠。錫任男器遠。錫敏嗣男晉遠正字。錫百男命遠。履慶嗣男規遠。余以藐然後生。未及公之世。獲從公諸孫遊。登所謂四而堂。卽公舊居。池臺花石尙有存者。慨然想慕其遺風。盖公天姿淸澹簡亢。介然自持。耻爲口耳之學。專務內修之工。斷虛僞鄙吝之念。絶皎厲崖異之迹。表裏瑩然。無一點塵累。望之如仙鶴。其儀觀容止。已有以聳服人。而其見於行者。爲子弟而盡志物之養。爲父兄而盡覆露之恩。接人則謙恭退遜。處家則慈詳敦厚。下至僕隷。皆樂爲任使。常爲知府。委任校事。條定鄕約。而旋卽謝之。前後恩命非常。而一不趨造。視世俗榮名。若泥芥焉。此盖公天資之美。固有以近道。而又其世德相承。自有一副型範。於乎韙矣。孫祿遠持定齋柳公所撰狀。請余墓銘。余何人敢當是役。禮辭不獲則因其狀而最其畧。可幸無過。遂序而銘曰。
文康之世。難於爲嫡。道德園囿。箕裘赫舃。有美張公。淸氷瑩璧。內修旣全。外誘斯闢。少不循俗。公車斂跡。中晩優游。
惟意所適。王命勸駕。事異常格。臣拜曰辭。蔭豈敢席。臣有寸心。一是純赤。竆居養親。三牲不易。厨有肥馨。庭有花石。
彈琴舞鶴。彩衣晨夕。亦有案帙。潛思默繹。異乎人學。心爲名役。崑炎一劫。橫罹𥚁厄。宿憾乘機。執虛移鏑。不辨安命。
直斷違式。憸人罔極。公實厚德。鵩舍歸㫌。行路衋惜。賢孫籲寃。誣枉竟 白。人世茫茫。再遷幽宅。屹彼顯刻。永綏楸柏。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