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3.16.주일낮예배 설교
*본문; 행 16:30~31
*제목; 고난 이해하기(5) 발은 차꼬에 마음은 하늘에
1. 빌립보, 기도로 모든 문제를 풀다.
빌립보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들어간 바울과 실라는 “옷감 장사 루디아”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빌립보 전도의 교두보가 된다. 전도의 비용과 집회의 장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14~15절’을 보자.
“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15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행 16:15)
바울은 어떻게 처음 가본 빌립보에서, 일면식도 없는 루디아를 만나게 된 것일까? ‘13절’을 보자.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행 16:13)
안식일에 기도할 곳을 찾을 때이다. 그렇다. 믿음의 은혜와 역사는 먼저는 있어야 할 곳에 있을 때이며, 다음은 바로 “기도”할 때이다. 믿음의 사람으로 있어야 할 곳을 지키고, 모든 문제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바울도 빌립보 입성하여 막막한 앞날이었지만, 안식일을 지키며 모든 문제를 기도하길 원했다. 이런 그에게 준비되어 있던 루디아를 만나게 하시고, 이 교두보를 통해서 유럽 전도의 문을 열게 하신 것이다.
2. 빌립보의 귀신 들린 여인
이 곳에서 복음 사역을 하던 바울 일행은 가장 큰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빌립보에는 한 ‘귀신 들린 여인’이 사람들에게 점을 봐주면서 살고 있었는데, 그녀가 바울 일행을 보자마자 “여러 날”을 따라 다니며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16~18절’을 보자.
“16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17 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18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 (행 16:16~18)
귀신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알고, 구원의 길을 안다. 그러나 안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아는 것을 좇을 때에 완성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귀신보다 못한 존재들은 아닐까? 잘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면서, 잘 따르지도 않는. 회개하자, 우리 진심으로.
이 여인의 부르짖음이 어찌나 크던지, 바울은 그녀를 붙잡고 있는 귀신을 쫓아내어 버렸다. 문제는 여기서 출발한다. 그녀의 주인이 그녀가 점보는 일로 벌어들이는 돈으로 많은 이익을 얻고 있었는데, 귀신이 떠나면서 이 일도 끝나버린 것이다.
그래서 바울 일행을 무고하여 옥고를 치르게 한 것이다. ‘19~23절’이다.
“19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 갔다가
20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21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행 16:19~23)
돈에 눈이 어두워 무고한 사람을 옥고를 치루게 한 사람도 문제이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 바울 일행이 왜 이런 일들을 겪어야 하는가?
믿음은 정직하게 이 세상의 일이 아니다. 믿음의 하늘 나라의 일이다. 그런데 믿음을 이 세상의 기준으로, 욕심으로, 요구로 국한시키는 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적 사고이다. 다시 한번 더 이야기한다. “믿음은 하늘나라의 일이다.” 예수 믿으면 세상의 복을 받는다는 것은 다 거짓된 것이다. 예수 믿으면 하늘 나라의 복을 받는다. 이것이 믿음이다.
3. 발은 차꼬에 마음은 하늘에
어쨌든 이 때문에 바울 일행은 매를 맞고, 두 발이 “차꼬”에 매여 감옥에 갇히게 된다. 삶의 고난 가운데로 떨어진 것이다. 그런데 바울 일행은 그 고난 가운데에서, 그 고난에 매이지 않았다. 상황을 비관하고 하나님을 향한 불평과 세상을 향한 저주를 쏟아내지 않았다. 오히려 “찬송과 기도”를 한다. ‘24~25절’을 보자.
“24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행 16:24~25)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그들은 비록 그 발이 차꼬에, 현실의 고난에 매여 있어도, 마음만은 늘 하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의 상황과는 상관없이 마음에 담겨진 하늘 나라를 노래하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신의 마음은 어떠한가?
우리를 잘 표현하는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겠다.
두루미가 냇가의 고동을 먹기 위해 이리저리 헤매며 찾고 다녔다. 그런데 그의 머리 위해 백조 한 마리가 날아온 것이다. 그래서 두루미가 묻는다.
“너는 어디서 왔니?”
“나는 하늘 나라에서 왔어.”
“하늘 나라? 어떤 곳인데?”
“열두 진두 문이 있고, 예수님이 계시고, 늘 평화와 사랑이 넘쳐나는 곳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두루미가 궁금한 것이 하나 있다고 물었다.
“그런데 그 곳에는 고동이 있니?”
고동만을 찾는 우리는 천국에 데려다 놓아도 천국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있어도 천국을 꿈꾸며 살면 우리는 “찬양과 기도”가 넘쳐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일이 생긴다. ‘26절’을 보자.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행 16:26)
믿음은 세상의 것을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하늘의 것을 위해서 믿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마음이 하늘을 향할 때, 하늘의 것이 세상에 넘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메커니즘이다. 세상 것을 바라지 않고 하늘 것을 바랄 때, 하늘을 누릴 뿐만 아니라 세상 속에서 풍성함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결국 발은 차꼬에 매여 있지만, 마음은 하늘에 있던 바울 일행을 통해서 간수의 집에 하늘 나라가 임하게 된 것이다. ‘30~31절’을 보라!
“30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행 16:30~31)
‘고동’만 찾느라 임하는 하늘 나라를 놓치는 삶이 아니라, 발은 비록 차꼬에 매여 있더라도 천국을 향한 마음으로 인해 “찬송과 기도”가 넘쳐나는 삶, 그래서 결국 삶에서도 하늘 나라의 역사가 넘쳐나는 여러분이 되시길 기도한다. 아멘.
첫댓글 믿음의 자녀는 항상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고, '기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연약한 인생이 하늘 은혜를 누리며 살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면 일어나는 일들의 순서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하늘 나라가 먼저 확장됩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우리 삶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발은 세상의 차꼬(고난)에 있어도 항상 마음은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