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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쳐다 보며 노천명
나무가 항시 하늘로 향 하듯이
발은 땅을 딛고도 우리
별을 쳐다보면서 걸어갑시다.
친구보다
좀 더 높은 자리에 있어 보았자
명예가 남을 혼내 주어 본다는 일
그 까짓 것이 다아 무엇입니까.
술 한잔만도 못한
대수롭지 않은 일들입니다.
발은 땅을 딛고도 우리
별을 쳐다보며 걸어갑니다.
노쳔명은 이화여전을 나온 엘리트로 지목받는 신학 여성으로
개화기를 선두하고 달려온 인생을 구가합니다.
그런데 일제시대때 일본이 싱가폴을 장악하면서 여기에 겉맞는
부역시 한편 썼다가 해방되자 마자 친일자로 찍혀 사형을 구형받고
형무소에 갇히고 거의 저 세상으로 갈뻔하다가
그 다음 다음날 징역20년으로 선고받고 목숨은 부지했는데 징역살다가 개우 방면
되어 죽었다가 살아나온 여성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얼매 안 되어서 다시 정신을 수습한다음 별을 쳐다보며 라는 시를
지으면서 다시 등단하는 작품세계에 열중하기도 하였읍니다.
이때 쓴 시가 별을 쳐다보며 라는 시 입니다.
당시 혼이 떳다가 다시 돌아온 여성이지요. ㅎ
아이고! 안죽었으이까 별도 볼 수 있는기지요.
여린 여성이 혼이 나갈뻔 한 것이니 얼매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집안도 상당히 부유하고 재력의 집안에 태어났는데
성깔도 대단해서 시 중에 " 내 스스로 예민해졌는지
내 얼굴에는 살이 붙지 않아..." 라는 시도 있을 정도입니다.
성격과 개성이 좀 강하고 약간거만하기도 한 평가를 적잖게 받은 인물이기도합니다.
당시 사회성 정도에서는 탁 튀는 얼굴을 내밀었던 여성이였다 라고
짐작할 수 있읍니다.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였으니 언론계에서
재 출발은 한 셈입니다.
그리고 또 한편의 여성으로서 끼도 대단하지요
정열의 관성적 O 끼가 있다면 그 개성을 말려도 아니됩니다.
처녀로서 유부남 김광진이라는 사람과 밑도 끝도 없는 사랑을 하는데
김광진 조강지처가 이혼을 안 해 주어 정실부인으로는 실패하게 됩니다.
요건 남자의 어설픈 배반이지요. 인연의 소이도 되는데, 깨주발이는 김광진만 나는 것이 됩니다만
연과연의 과립현상은 모두가 피해자 로 되어지고 피의자로 작용하는 반연으로
역시 영혼의 이야기로 펼쳐 질 것입니다. 그것을 푸는 방법에는 감당이 안되는 것입니다
영혼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반대 기운을 겪어야 경험측으로 실행되어야 제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김광진만 일단 보여지는 입장에서 어? 되는거겟지요 ㅎ
확 쥘라면 둘다 쥐어야 하지요, 그거아니되면 골 아픕니다.
조강지처는 니 엿먹어보라 는 것이 더 일리가 있는 경우밥상 뚜드리는 퍼포먼스 일 수
밖에는 없지요, 그러니 하는 말입니다. 파도타기를 김광진이는 못 넘은 셈이지요.
결국 피죽을 썼으니까요. ㅎ
O 을 배반하여 결국 귀매 처럼 방황하는 영혼발질을 한참해야 하는 논증은 피죽이라는 현상을
다 겪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평상시는 우리는 모릅니다.ㅎ
도덕적인 페헤는 자기 의지와는 별게라 할 지라도
본질의 생명운동에 속하지 않는 인위적인 제도에 하나라 할지라도
O률 을 의미합니다 , 인과율의 외침으로
운명을 울려야 하기 때문에 별반 겪어내야 합니다..
영률의 개념은 무엇인가
O 의 울림을 말합니다. 빛은 울고 울리며 진동처의 기원을 가집니다. 이를 율여라 합니다
"O 은 울림과 같다". ( 영혼의 제 1 번 정리 개념)
그러므로 O 혼을 배반한 것에 대하여는 달게 감수해야 하지요.
노천명도 결국는 비극으로 끝나는 전제가 되는 것이 울림에 해당 사건이 됩니다.
그러나 그러함을 알고 가는 입장에서는 감수함에 대한 만감지정은 각오해야 함이
서려 있어야 합니다. 이를 일단 비탄이라는 용어로 방치해둡시다.
이 당시 노천명 의 또 다른 시를 소개 해봅니다.
이름없는 여인이 되어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싶소
초가지붕 박넝쿨 올리고
삼밭에 오이랑 호박을 놓고
밤이면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부엉이가 우는밤도 내사 외롭지 않소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이야기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오지리날 여자 아이래요? ㅎ
여우질도 하면서도 거대한 인생포물선의 위치를 가늠할 줄 압니다.
이루지 못하면서 강렬한 포인트는 역시 사랑행위이지요.
사랑의 용해력이 강한 특유의 사랑셈법이 확실한 여자다 라는 이미지를 줄 수 있읍니다.
이를 O 끼 라고 할 수 있겠지요.
O 이라 함은 원래 허무입니다. 이 본질이 여기에 위배되는 영률의 가치는 없읍니다.
이를 율여라고도 합니다.
울림은 같은 것이 가고 와야한다는 인과율을 말 합니다.
"영혼의 제 2 법칙 연기의 인과율 법칙"
그러므로 가능하지 않는 예감도 그림자로 비추어 생을 반추하는 이지적인 면도
아주 강한 추구성도 O 의 감성이 살아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이지요..
당시 동료시인 모윤숙등은 여성의 권리주장을 위하여 노천명이를 아주 많이
변호한 사건은 지금도 회자 됩니다만... 실패했읍니다. 실패가 O 의 울림이기 때문에
이미규정됩니다.
과연 문학적으로 김광진에 대하여 피해를 본 여성으로 정의될 수 있는가의 문제에서
분명한 삼각관계 에서는 조강지커가 피해자이고 나머지는 전부 공동정범 피의자 아닙니까ㅎ
공동피의의지는 반연하고 동시게 거슬로 와서 셈을 해야 합니다.
양희은의 노래 중에 요런 노래에 조금 해당되지요.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람"
이것은 사실 노천명이를 그리고 있는 대중적인 O 끼의 반발가사인 것입니다.
문화적 의미로서는 여성의 도발성을 많이 추구하는 현대적 문화양태가 급속도로
발전하던 시대가 있었지만 별로 성공하지 못한듯합니다.
사랑에는 죄가 없다.
하지만 인과율은 있는 것입니다. 이 후회를 반추하는 심정을 노래하는 시인이
대한민국에는 이상하게시리 많다 이 말입니다.
그림자 사랑의 추상성의 엘레지 꿈도 마음 다 잡아서 열정을 삼습니다.
문학적 이노베이셔널리즘의 반증추구이며 우리나라 여성은 사랑에는 깡다구가 셉니다 ! .
노골적인 O 끼를 정서적으로 구축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좋은 현상입니다.
이런기질을 조선 양반때 여성들을 너무 묶어놔서 말입니다 . 확 봇물터지듯 터지는 문화에서
정신없이 남자는 멀뚱해진 문화만 쫓아 갈 뿐이지요, 인과연입니다.
어찌했던 이러한 구축을 심성에 담아 동그라미 하나 장착하지 않으면 일단 문화를 리드하는 시인은 아닌 것입니다..
인생은 O 점 조준입니다. 목적이 여부에 관계없이 조준성이 우리들 생각을 장착하게 합니다.
내친김에 또 하나의 노천명 O 혼을 들여다 봅시다
사슴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부척 높은 족속이였나 보다.
물속에 제 그림자를 들여다 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 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플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바라본다.
이미 우울합니다, 그리고 인생의 저변에 엄습하는 자신의 운명과
배치되는 "그림자"라는 정체성으로 자신의 존재치를
가늠하며 반추하는 영혼을 잠재적으로 꺼내는 이야기가 사슴입니다.
사람은 말입니다 언제나 잠재적은 O 끼가 발동하게 되어있읍니다.
이를 종교적 통찰로서 이루어내야 하는 中觀(중관) 을 의미하고
중도이며 허무의 無 를 논하고 空(공) 을 표상하는 쟁점으로 진리여부로 설정하는 것이며
동양적인 프리즘으로서는
공자께서 이러한 중용을 논 하고 학설로서 정립화 하게 이릅니다.
하지만 아직도 중용이라는 산맥에 대하여 대부분 인류는 구체적이고 보편적인 명제
로 주어지는 점은 넘어서지 못하기 있읍니다
천년이 넘는 긴 난맥줄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뿐 이지요.,
하지만 잠재적으로 전부 O 운동으로 중관의 자리를 늘 펴치고 있음도 동시에 그렇게 행 하고 있읍니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중관의 확립개념을 창출하는것에 고민해야 합니다.
O 이 중용이고 無 이고 空이며 여래이며 여호아 이며, 십자이며 만다라이고
중관이고 미륵이며(메시아) 문수이고 소크라테스이고 사도바울이고 용수이며 원효의 화쟁사상이라는 것을
달리 여러갈래로 이견하고 모르는 것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지요
그러므로 글이나 생각줄의 객관화 부류인 문학 등이 정리이 이루어질 수 가 없었던 것입니다.
온 세계의 갈등화와 혼란성 등은 전부 O 문화를 구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발본하는 시대가 요청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대부분 예술가 중에서 시각예술 및 미술분야에서는 앞서 나아가고 는 있읍니다.
추상성이라, 구체화 실현의 문자개념을 보편화 시키는 방법은 묘연하다 이 말입니다.
그럼에도 모든 학인들은 진리의 본체는 O 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은 모두가 다 인정합니다.
풀어내지 못한다 에 봉착했을 뿐입니다.
사실 중국어 한자의 본질에는 논리적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분석적이며 논증적인 방법으로
진리 여부를 탐구하는 영어, 라틴어, 범어 의 논리보다 훨씬 뒤지는데도 불구하고
서양에는 이러한 영을 다루는데 (중관) 부족합니다. 희한하지요?
구체적일 수는 없는 범주에 속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이데아 정체같은
그러한 향수를 지니고 있는 명제는 아닌곳에 존재하는지 회의할 수 도 있을 것 입니다.
하지만 향수라는 것은 인과율의 확실한 정의 개념에 속해 있읍니다.
단지 찾지 못하는 고봉이 아닌가 .... 통찰의 부족이며 너무 현실과 동 떨어진 괴리같은
괴물 형태로 이메지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 할 수 도 있지요.
너무 막연하면 미신 아닙니까? 인간의 합리화 정신을 말합니다. 동떨어지면 괘씸한 것에 가까운
명제로 깔아 뭉개는 현상...
그럼에도 우리나라 시인은 모두가 영혼의 이야기가 절절하고 상당한 진리의 범주를
늘 잠재하여 시간과 공간의 벽을 넘어서 O 을 마주하는 심성이
아주 강한 시인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냥 살짝 살짝 건드리기만 해요.
문학의 경계점인 논해서는 아니되는 디엠젵트가 종교 개념영역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보면 O 의 문화는 종교문화의 점유물은 절대 아닙니다.
이러한 페단은 어디에서 생겨났는지 이해가 가지 않읍니다.
역사시대 와 문자시대로서 현대문명을 구성한 인류의 역사성 앞에서는
여전히 1 만년 이상이 지나가도 O 의 본질에 대하여 구체화 하지 못하고 있지만 늘 행하고 있읍니다.
이러한 명제에 대하여 우리나라 문학가 들은 대부분 O 을 변증화 하면서도
구체화 하는 시도를 계속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이상한 민족 디엔에이가 흐르고
있다는 유전인자 방편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유독 다릅니다.
디엔에를 과학적 배경으로 설명하는 유전인자 사진을 보면 양면의 테이크로 꼬여 있지요?
빛이 꼬여 있는 것을 그대로 반증하는 것입니다.
삶에 대한 숙주체가 빛으로 꼬여 있으면서 그 소식을 내 민다?
분명히 O 입니다. 그리고 세대가 지나도 고유한 색체이지요, 변화는 타지만 원류는 지닌다 입니다.
O 의 프레임이 우리들의 세포라는 사실을 의미있게 연구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민족혼이 천부경 사상이라는 사실은 이미 민족의 얼 안에 다 구축한
디엔에이 유전인자가 빛으로서 다 꼬여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다른 세계는 전혀 이러한 O 의 울림이 없읍니다.
그렇다면 O 의 문화를 열 수 있는 당사자는 누구인가? 예를 들어 바꾸어 말하자면
선두주자가 과연 누군가? 이러한 초 읽기에 들어서 있읍니다.
바로 문학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단 순수문학인이라야 됩니다.
단지 대한민국 출신의 민족들 중에서 시인이어야 합니다.
이 O 의 지평을 열 수있는 자 는
문확의 지성인 들이 언제즈음 일어서야 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
이로서 본인은 도솔천문화를 창출해야 한다 이렇게 개인적으로 지향한다 이 말이 됩니다.
도솔은 지족입니다, "앎의 가장 충만한 지점" 더이상 모르는 앎이 없는
지식의 임계처 는 지족이 O의 정체성과 본질성을 동시에 형성하는
문단의 출현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문학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철학이 다르며 법학이 다르고
정치가 모두 개념이 달라야 합니까?
이것을 감당하는 제 일의 원칙인 O 의 문화성인 정체를 본질적으로
주어져 있음을 발견하고 궁리하고 이 기본 O 의 본질을 구체화 하는 작업이
있어야 한다 이 말입니다.
진리를 분업화 한다? 말도 안되지요.
요즈음 살아내는 인류의 시선은 서로 같은데 서로 비난 비판 삽바매고 싸울질
하는 것과 같읍니다.
진리는 분열화가 없어지는 자리에 서 있읍니다.
분열화를 없애는 곳은 O 을 풀어내는 일이며 중관을 보는 구체화의 정립이 있어야 합니다.
그 시기가 오고 있다 이렇게 말 할 수 있읍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같음을 행하는자리를 말합니다.
서로 같으니까 모양이 없는 것입니다, 모양과 차별로서는 잡아낼 수 없는 정체성이 사랑이지요.
그러므로 성령이라 하여 O 을 구축합니다. 그리고 같음을 여호아! 라 하지요
불교는 空 이고 O 이고 無이고 여래라 합니다 용수존자는 나중에 이 진리어를 중관(中觀) 이라 하고
유경의 공자부께서는 중용이라 합니다.
이 모든 명제들이 다 응축하여 하나의 기원인 O 을 구체화 해야 합니다.
이를 할 수 있는 학도는 분명 문학인인 것입니다.
기독교를 믿는 신앙인이 무려 5 억이넘고
코란 이스람교를 믿는 신앙인은 무려 8 억명이 넘으며
불교도인은 3 억명이 채 아니되며
유교의 족적을 지닌자 들로 3 억명이 넘습니다.
전부 중도나 중관학, O 의 공통적인 본질을 믿어지님에도 불구하고
간단하게 O 이 무엇인가를 구체성으로 제시하는 자 는 단 한명도 없읍니다.
전부들 의미적인 가치와 영적인 심중을 지니고 믿음으로 극복하지만
그 진실한 자리의 구체성을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O 은 무엇일까요? 영원성입니다. 그리고 물리적 공간과 시간적 점진적 물자체 간에
섞힌 곳에서도
모두가 같아야 한다는 구체성을 지닌 이치의 명확한 발견자리가 O 이며 중관입니다.
(중을 보는자리)
말로서는 표현하지 못하는 정체이기 때문이지요.
용수존자 와 사도바울 이래 중관의 중과 O 을 구체성에는 실패했지만 어느정도 정립한
자는 우니라나 원효대사 밖에는 없읍니다.
그리고 1000 년이 지나도록 중관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읍니다.
불교의 계율을 파괴하고 파계승이 되어 중생을 제도하고자 한 원효도사의 해동불교의 중관 학인
화쟁론을 창출한 중도 발견의 사실을 설명한 원효대사의 금강삼맴경에 수록된 내용으로 소개 해 봅니다.
"可謂無理之至理 不然之大然矣 是謂斯經之大意也 艮由不然至大然
하위무리지지리 불연지대연의 시위사경지대의야 간유부연지대연
어떻게 이치가 없는데 이르는 이치가 있으니 스스로 그러하지 못하면서 크게 그러하고, 이를 위하여 그 경의
큰 의믜로 행하며 마땅하지 않은 연유를 보고 크게 스스로 그러하도다.
故能設之語 妙契環中, 無理之至理 故所詮之宗 超出方外 無所不破
고능설지어 묘계환중 무리지지리 고소전지종 초출방외 무소불파
고로 능히 말로 설한다면 묘하게 계합한 고리를 중이 가지니 이치없는 이치라 고로 석존의 의를 설명하는바이니
방(方)을 출현시키는 그 방을 비롯한바가 없으니 파괴할 수 도 없도다.
故名金剛三昧 無所不立 故名攝大乘經, 一切義宗 無出是二 是故亦名
고명금강삼매 무소불립 고명섭대승경 일체의종 무출시이 시고역명
고로 이름이 금강삼매이라 비롯한바도 없어 서지도 않는다, 고로 이름이 큰 섭사의 이름을 탄 경전이라
일체의 종(宗)이니 두개가 나타날 수 가 없고 (음양) 시고로 역시 이름이
無量義宗 且擧一目 以題其首 故言金剛三昧經也"
무량의종 차거일목 이제기수 고언금강삼매경야
한량이 없는 종지의 옳음이라 하나를 들어 목격함에 마땅히 머리의 제목이 고로 말한다면
금강삼매경이니라.
이 명제를 풀면 中 이며 空이며 無 가 나오며 진애(참사랑) 이 나옵니다.
이 중(中)을 우리는 모두 하나씩 건사하고 있다라는 中 의 모습을 해결한 원효대사의 금강삼매론 입니다.
말로 아니되며 보는 자리인데
본인은 이러한 영구순환의 묘쳬인 중관을 궁리하기 위하여 나를 어리석음에서 똥줄을 탄 사실이 있읍니다.
화엄종찰의 원효 해동불교와 의상조사의 게송에 이 답이 있었던 것입니다.
화엄경의 총 내용의 원래 기원쳐는 어디인가 하며는 바라문 경전 입니다, 인도 아리아 민족이라는 사실이고
중동의 히브리어 민족의 유태족이 발원 된 곳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아니됩니다.
이치를 보는 방법이 틀렸고 이러한 의미의 성인 말씀을 소화할 마음깜냥을 해의하지 못했을 뿐이지
원효대사는 이를 확실하게 목격하고 깨친 것이며, 헌장법사의 금강삼매경을 비판한 유일한 성인지위에
서신 분이 원효대사입니다. 원효 이래 1,000년 간
또다른 해의자가 없었다는 사실이고 단지 원효는 천부경의 O 을 공부하였기 때문에 비교 하며 수행에 몰두한 이면이 있어 가능한 것이라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화엄의 맥인 도솔문화는 풍기 고향에서 비롯할 수 있다라는 정의가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의사조사의 예지력을 확실하게 믿는 것입니다.
지금 아무리 中 을 소개하는 분이 있어도 전혀 다른 말씀을 하고 있는듯합니다만
구체화 하여 설명해 줄 수는 없는 영역입니다.
이를 증하는 수단은 영구동력으로 그 현상을 구체화로 목격하고 발견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명제입니다.
봐야 믿지요, 백문의 불여일견입니다.
우리는 부모님을 봤기에 확실히 믿는 것입니다. 그와 같읍니다.
증명됨과 동시에 윤리의 행간에서 이어지는 학인들의 선구적 활동을 지필 수 있다면
전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또 다른 문명의 발상지로 거듭 날 수 있는 것이 우리나라 라는 사실을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재미 있지 않읍니까?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간곡히 권 합니다 화엄경좀 읽고 참구해 보세요. 좋은 소식이 있읍니다. -합장- 두손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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