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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적산[ 元績山 , Wonjeoksan ]
인천광역시의 부평구와 서구의 경계 지점에 위치한 산이다(고도:165m). 산줄기가 북쪽으로 천마산(天馬山), 계양산(桂陽山)으로 이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부평부읍지」에 "부평부의 서쪽 15리 되는 곳에 있다."고 되어 있다. 『여지도서』에서도 지명이 확인된다. 『대동지지』와 『1872년지방지도』에 원적산이 표기되어 있고 산의 동쪽에 현재의 산곡동 일대에 해당하는 마장면(馬場面)이 위치하고 북쪽에 구십현(九十峴) 즉, 안하지 고개가 묘사되어 있다. 산의 서쪽으로는 서구 가좌동이 있고 동쪽으로는 부평구 산곡동이 있다. 『조선지지자료』에도 지명이 확인된다. 오랫동안 부평구와 서구 사이의 교통 장벽이었지만 1972년 원적산 길이 개통되었고 2004년 천마터널이 개통되었다. 천마터널은 원적산 지명이 한때 천마산으로 잘못 인식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출처:(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최초’의 극장: 애관극장
근대 극장 역사는 개항 및 일본인을 비롯한 외부인 이주와 함께 시작했다. 논란의 여지가 존재하지만 한국 최초의 근대 공연장은 인천 애관극장으로 기록된다. 애관극장은 근대 개화기부터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쳐 멀티플렉스 시대까지 한국 사회 극장의 변천을 보여 준다. 도시 공간 변화와 연관을 맺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달리한 애관극장 역사는 미래의 극장에 시사점을 제공한다.
협률사, 축항사 그리고 애관
일반적으로 인천을 포함한 한국 사회 극장의 역사는 1895년 조선인 정치국(丁致國)이 설립한 협률사(協律社)를 출발점으로 본다. 협률사의 등장에 앞서 인천에 일본인을 위한 공연장이 존재하지만, 협률사가 ‘조선인이 설립한 최초의 극장’이라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중요한 문제는 ‘최초’의 여부를 묻기보다 그 ‘최초’를 문제시하는 극장이 자리한 지역과 그곳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들, 그리고 사람들의 면모일 것이다. 인천의 협률사는 경기도 인천부 경정 238번지에서 개관한 국내 최초의 옥내극장으로 평가된다. 협률사는 1910년대 초반 축항사(築港社 또는 築港舍)로 명칭을 변경하고 1920년대 초반 애관(愛舘 또는 愛館)으로 이름을 바꿨다. 극장 호칭은 나름의 시대적 의미를 담은 것으로 보인다. 근대 초기 극장이 희대(戱臺)로 불린 바와 같이, 협률사는 노래와 춤, 재담 그리고 묘기를 선보인 재인(才人)들의 공연장으로 기록된다. 또한 ‘축항’이라는 명칭은 항구 구축에 따른 근대도시로서 면모를 갖춘 인천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1920년대 후반 애관 건물은 정치국의 작고(作故) 이후 관리 부실로 순회 연극단 공연조차 무대에 올리기 힘들 정도로 노후했다. 이에 따라 조선인의 위상을 독려할 극장 건립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애관의 새로운 주인으로 지역 유지(有志) 김윤복(金允福)이 등장하면서 전기(轉機)를 맞이했다. 즉, 1927년 10월 10일 애관이 극장 건물을 신축하여 낙성식을 거행한 것이다.
이러한 애관의 변신은 일제강점기 조선인을 위한 공공장의 출현이자 세계 도시로서 도약을 꿈꾸는 지역민의 욕망을 드러낸 것이었다. 애관이 낙성식을 거행하면서 극장을 조선인의 공공적(公共的) 모임에 언제든지 개방할 것을 알렸기 때문이다. 또한 1928년 애관은 외화 수입사 기신양행(紀新洋行)의 도움을 받아 전 세계와 비슷한 시기에 할리우드 영화를 상영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7일 ≪대중일보≫ 영화 광고란에 소개된 인천부(仁川府) 소재 극장은 애관을 위시한 동방극장(東邦劇場)과 개관을 앞둔 인천영화극장뿐이었다. 광고란에 소개된 애관이 ‘영화상설’을 강조한 것으로 보아, 당시 지역 극장이 영화를 단속적(斷續的)으로 상영하는 상황에서도 애관은 상설 영화관으로서 지위를 유지한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애관은 인천의 중심 ‘경동’에 자리해 국내외 세계상 변화를 신속히 전했다. 1947년 12월 13일 창단한 인천관현악단이 처음으로 서양 고전음악을 소개한 곳도 애관의 무대였다.
1960년 전후 지역 극장의 ‘춘추전국시대’와 애관극장
애관은 한국전쟁으로 건물이 소실되자 신축하여 지역 대표 극장으로서 명성을 이어 갔다. 1950년대 후반 애관은 단체 관객을 동원할 정도로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애관은 1956년 8월 28일부터 닷새 동안 시내 국민학생(‘초등학생’의 전 용어)과 중 · 고등학생 7000여 명을 대상으로 <아푸리카의 횡단>을 상영했다. 교육용 영화로 짐작되는 이 영화에 학생 단체 관람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영화 업무 담당 부서인 문교부와 영화를 주요 교육 매체로서 간주한 지역 교육 엘리트의 협조 때문이었다. 영화는 외부 세계를 학습하는 훌륭한 시청각 교재였고, 애관은 그것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공간이었다. 1960년대 들어 애관은 다시 한 번 새로운 역사를 기록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에 걸쳐 인천 지역에 신규 극장이 경쟁적으로 등장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인천의 극장들은 애관이 자리한 중구(中區)를 넘어 도시 전체에서 증가했다.
즉, 동구(東區) 항구와 가까운 곳에 인천극장을 비롯하여 동인천역과 중앙시장 근처에 미림극장과 문화극장 그리고 현대극장이 개관했다. 또한 남구(南區, 현 미추홀구) 장안극장과 도원극장 그리고 중앙극장은 물론, 북구(北區) 부평극장과 대한극장 및 금성극장 그리고 미군부대 집결지 산곡동 서부극장(이후 백마극장)이 영업을 시작했다. 게다가 중구에도 인천키네마와 세계극장 그리고 자유극장이 등장하여 인천은 극장의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했다.
이러한 가운데 1960년 애관이 ‘애관극장’으로 명칭을 변경한 것은 주목할 일이었다. 즉, 동년 9월 6일 애관은 <산아제한>(임희재, 1960) 개봉 광고를 신문에 게재하면서 ‘신장개관(新裝開舘)’을 널리 알렸다. 이 광고는 상호를 애관이 아니라 애관극장으로 기재하였고, “싸운드 스크린 완비”와 “현대시설의 대휴게실” 그리고 “팔미도, 월미도, 작약도를 조망할 수 있는 옥상(屋上) 전망대”라는 광고 문구를 실었다. 도시 전체에 대한 파노라마(panorama) 시각을 제공하는 전망대를 설치해 여타 극장과 차별화를 꾀한 것은 근대 극장의 기원으로서 애관극장의 자존심이었다. 1960년대 초반 애관극장은 한국 영화사에서 최고의 흥행작 <성춘향>(신상옥, 1961)을 상영하여 흥행 ‘대박’의 영광을 이어 갔다. 하지만 애관극장을 비롯한 중구 소재 개봉 극장은 상대적으로 고가의 입장료 때문에 누구든 쉽게 드나들 수 없었다. 당시 애관극장 평균 외화 입장료는 200환 이상이었고, 한국 영화 입장료 역시 만만치 않아서 <울려고 내가 왔던가>(김화랑, 1960)의 ‘조조할인’ 입장료도 200환이었다. 1961년 1월 7일 애관극장이 <가거라 슬픔이여>(조긍하, 1957)의 입장료를 150환으로 인하했지만 그 역시 저렴한 것은 아니었다. 같은 날 정오 현재 지역 물가 지표는 ‘광목(廣木) 한 마’에 210환과 ‘돼지고기 한 근(斤)’에 500환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의식 생활비에 육박한 애관극장 입장료는 지역민들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관극장은 지역 신생 극장의 모태 역할을 수행했다. 애관극장에서 오랫동안 매표(賣票)를 담당하면서 경력을 쌓은 총무 양원석이 1960년 남구(현 미추홀구) 숭의동에 도원극장을 신축 · 개관하여 운영했기 때문이다.
멀티플렉스 시대 애관극장
1998년 ‘CGV강변’을 시작으로 등장한 멀티플렉스는 단관(單館) 극장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했다. 스크린을 한 개만 갖춘 단관 극장이 전국적으로 휴업 또는 폐업하는 가운데 애관극장은 다시 한 번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2004년 애관극장이 멀티플렉스로 탈바꿈한 것이다. 기존의 스크린에 더하여 슈퍼디지털 시스템을 갖춘 4개관을 신설하여 총 5개관으로 변신한 애관극장은 2017년 현재 한창 영업 중이다. 애관극장이 역사적 국면과 극장 산업 변화에 따라 건물 외관과 극장의 성격을 달리하듯이, 애관극장을 소유하고 운영한 사람들도 여러 명이었다. 애관극장은 최초 협률사 설립자 정치국 이후 일제강점기 홍사헌과 극장 건물을 신축한 김윤복, 해방을 맞은 1945년 실업자전도회(失業者轉導會) 대표 최복산, 한국전쟁 이후 김태성과 김석신 그리고 1960년 이봉렬 등 여러 관주(館主)의 손을 거쳤다. 1972년 애관극장은 월남민 사업가 탁상덕을 주인으로 맞이하였고, 멀티플렉스 시대 그의 후손 탁경란이 가업을 잇고 있다. 애관극장은 개관 이래 120년이 넘는 시간을 지나오면서 자신의 역사를 시작한 그 자리 그곳에서 우리의 곁을 지키고 있다.
참고문헌
고일(1955). 『인천석금』. 경기문화사.
김남석(2012). 인천 애관(愛館) 연구: ‘협률사’ 설립에서 1945년 광복까지. ≪인천학연구≫, 17호, 255~318.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위경혜(2016). 인천의 극장 문화: 한국전쟁이후~1960년대를 중심으로. ≪한국극예술연구≫, 53집, 45~88. 한국극예술학회.
유동현(2015). 『동인천 잊다 있다: from 1899 to 2015 굴다리에서 채미전까지』. 인천광역시 대변인실.
인천광역시 중구사편찬위원회(2010). 『인천광역시 중구사: 상(上) 발자취와 사람들』. 인천광역시 중구문화원.
인천부청(仁川府廳) 편(1933). 『인천부사(仁川府史)』. 인천부청.
애관극장 www.ak5.co.kr
출처:(한국의 극장)
인천 신포국제시장
요약 인천 신포국제시장은 인천의 개항 이후 형성된 전통시장이다. 개항기 때 외국인이 살았던 조계지 인근에 위치해서 외국 문물이 수입되는 창구 역할을 했고 오늘날에는 다양한 먹을거리와 생활에 필요한 상품들을 판매하고 있다. 분류 > 지역소재지시장 유형형성 시기시장 현황먹을거리같은 지역 다른 시장주변 볼거리전화번호
목차
1. 신포국제시장의 개요
인천은 바다와 면한 항구도시이다. 수도인 서울과 인접해 있고 철도와 도로 교통이 좋아 접근성이 뛰어나다. 시장이 발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인 교통이 완비된 도시이다. 해상교통과 육상교통이 맞물리는 지점에 자리하고 있는 신포국제시장은 역사적으로 인천의 격심한 변화를 함께 겪어왔다. 개항 이후 외국인들이 몰려들면서 이들의 생활을 지원하는 시장으로 형성된 신포시장은 당시 중국인과 일본인을 비롯해 여러 외국인들이 찾는 시장이었고, 말 그대로 국제시장이라 할 수 있었다. 신포국제시장은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상설시장으로, 2002년 시장 현대화 작업을 통해 시설을 정비했다. 동인천역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어 접근성이 뛰어나며 반찬거리를 파는 골목, 수산물을 파는 골목, 의류를 판매하는 골목 들이 구획별로 잘 정리되어 있다.
시장의 내부 모습신포시장은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상설시장이다.
2. 신포국제시장의 어원
신포시장이라는 이름은 신포라는 지명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포동은 바다로 통한 내가 있다고 해서 예부터 순우리말로 ‘터진개’ 또는 ‘탁포’라고 부르기도 했다. 1883년 개항 이후 이 마을은 터진개라는 이름을 한자로 써서 ‘개포동’이라 불렀다. 1903년에 ‘새롭게 번창하는 포구’라는 뜻에서 신창동이라고 부르다가 일제에 의해 1914년 일본식 이름인 신정(新町)이 되었고, 해방 이후 우리식으로 지명을 고치면서 신포동으로 바꾸어 불렀다. 매립해서 새롭게 생긴 땅이 많은 지역이다.
3. 신포국제시장의 탄생 및 발달 · 변천 과정1) 개항장에 개설된 신포시장
인천은 1883년 개항되기 전까지는 그저 작은 포구에 불과했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배를 타고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들이 인천에서 출발했지만 조선시대부터 육로를 활용하게 되면서 인천은 오랫동안 잊힌 한촌이었다. 그러나 수도 한양과 가깝다는 지리적 이유로 가장 먼저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는 항구도시가 되었고, 내외국인이 몰려들게 되었다. 인천으로 들어와 살게 된 외국인들은 현재의 자유공원 인근에 ‘조계(租界)’라고 부르는 외국인 거주지를 형성했다. 일본인들은 주로 중앙동 일대에 살았고, 중국인(청나라)들은 선린동 일대에, 서양인들은 일본 조계 서쪽을 따라 일본과 중국 조계를 감싸듯이 거주했다. 오늘날 이 지역에 근대 건축물들이 즐비한 것은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 개항 이후 일제는 한강과 인천 연안을 잇는 항로를 개설했고 서해의 항구들, 즉 진남포, 군산, 목포를 잇는 항로를 열어 인천을 중심으로 하는 해상 교통망을 갖추었다. 하지만 1899년 9월 경인철도가 부설되면서 육로를 통한 물류가 증가하고 장거리인 해상 물류는 약화되었다. 그 대신 인천의 연안과 황해도와 충청도를 잇는 근거리 해상무역이 발달했다.
한편 한국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개통되면서 우마차나 도보에 의지하던 육상 교통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인천에서 노량진까지 걷거나 가마를 타고 1박2일이나 걸리던 이동 시간이 불과 1시간 40분으로 단축된 것이다. 또한 유통 방법의 한계로 물자 이동이 지극히 제한되었던 수송량 역시 철도를 이용하면서 획기적으로 늘어났다. 여기에 1937년에 인천과 수원을 잇는 수인선 협궤열차가 개통되면서 인천, 특히 인천항이 있던 중구는 외국 문물이 항구를 통해 들어오는 관문이 되었다. 또 항구로 들어온 다양한 물품들을 서울과 경기도 이남으로 이동시키는 교통의 중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아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인천에서 가장 번성했던 시장은 신포시장이었다. 현재 신포시장은 동인천역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신포시장은 외국인들의 거주지인 조계와 가까운 위치에 있어 다른 시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리한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다시 말해 동인천역 북쪽에 있던 시장들이 일본인들에게 밀려나 고단한 삶을 살았던 가난한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시장이었다면, 동인천역 남쪽에 있던 시장들은 상대적으로 부유한 계층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성장해 왔다.
신포시장은 개항장이었던 중구 신포동에 개설된 시장이었다. 당시 신포시장은 채소를 취급하는 채소 시장과 수산물을 취급하는 어시장이 따로 있었다. 그리고 어시장 서쪽에 닭전 거리에서는 닭과 달걀을 중심으로 육류를 팔았다. 하지만 이들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행상을 주로 했기에, 시장의 성장에는 한계가 있었다. 채소 시장에 공급되는 채소는 주로 인천에 거주하던 중국인들이 재배한 것이었다. 당시 모습을 조형화한 조각상이 신포시장 내에 세워져 있는데 화농(華農)이라 불리던 중국인이 재배한 채소를 일본인이 사는 모습이다. 당시 중국인들은 오늘날의 인천 남구 도화동과 숭의동 일대에서 농사를 지었다. 이들이 인천에서 농사를 짓게 된 것은 1887년 중국의 범선인 정크선 승무원들이 중국 산둥성 일대에서 종자를 가져와 채소를 재배하면서였다.
인천 차이나타운의 입구중화가(中華街)라 적혀 있는 패루는
중국 문화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문으로, 중국에서 기증한 돌로 세워졌다.
(국내 시장백과, 이경덕, 박재영, 가디언 출판사,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인천차이나타운
인천 관광 100선 130여 년 전 짜장면의 탄생지
춘장에 갖은 야채를 넣고 센 불로 볶아낸 짜장면 소스는 그 자체만으로도 군침을 돌게 만든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짜장면은 누구나 즐겨 먹는 음식, 추억의 음식, 간편하게 끼니를 때울 수 있는 국민음식이다. 짜장면이 처음 시작된 곳이 인천차이나타운이다. 130여 년 전 인천항 개항 이후 선린동 일대는 청의 치외법권 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중국의 건축 방식을 본뜬 건물이 세워졌고 중국 상인들도 하나둘 모여들며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었다. 당시 중국 산동에서 건너온 화교들은 선린동 지역에 중국요리점(구, 공화춘)을 열었다. 그들은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개발했는데 그 노력 끝에 만들어 진 것이 짜장면이다. 차이나타운의 주요 먹거리 역시 짜장면이다. 인천역에서 제1패루 안쪽으로 걷다보면 짜장면과 짬뽕이 주메뉴인 음식점들이 즐비해 짜장면거리가 형성돼 있다. 최근에는 근대음식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등록문화재 제246호 공화춘에 국내 최초로 짜장면박물관을 개관해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출처:(인천관광 100선, 2016. 11.)
2024-10-02 작성자 명사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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