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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을 나서는 날에 비가 심하게 내렸다. 관왕묘(關王廟.관우사당)에 도착하니, 천장(天章.이명한) 형제와 건중(建中.홍주원)이 맞이하여 술을 마셨다. 천장이 나의 부채를 찾더니 절구 한 수를 써 주었다. 우리 좌상은 광릉(光陵)에 봉심(奉審)하러 갔다 돌아왔고, 지국(持國.장유)도 왔다. 내 부채에 쓴 시를 보고는 한 글자를 고치고 떠났다.
2. 건중이 보제원(普濟院)까지 나를 따라왔다. 빗속에서 우산을 펴고 풀을 헤치고 앉아 술잔을 들어 권했다. 짐 속에서 종이를 꺼내 절구 한 수를 써주었는데 청초하여 읊조릴 만하니, 가공자(佳公子)라고 부르기에 충분하다.
3. 종암(鐘巖)에서부터 비가 퍼붓듯 내렸다. 밤이 칠흑같이 어두워 하인이 길을 잃어서 그저 산을 향해 골짜기 사이로 갈뿐이었다. 산의 계곡이 험해서 거센 물살이 무릎까지 잠겨 약한 나귀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니 사람 마음을 두렵게 하였다. 얼마 있으니 반딧불이 수풀 속에서 반짝였는데 순식간에 산에 등이 켜진 듯 나무에 불을 놓은 듯 수많은 불빛을 이루어서 보기에 매우 신기하였다. 십여 리쯤 가니 멀리서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들렸는데, 바로 도봉서원(道峯書院)으로 들어가는 골짜기 입구였다. 밤이 벌써 반이 지났다. 이것은 내 평생에 가장 어려운 여행이었지만 절로 속되지 않았다.
4. 밤에 강당에서 묵고 아침에 침류루(枕流樓)로 나왔다. 침류루 아래 시냇물은 비가 온 뒤라 갑자기 불어나 흐르는 소리가 몹시 커서 사람의 말을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도봉(道峯)의 녹음이 처마와 기둥 사이로 들어오고 바위의 기세가 울퉁불퉁하니, 참으로 “일천 바위는 수려함을 다투고 일만 골짜기는 앞 다투어 흐른다[千巖競秀 萬壑爭流].”라는 말과 같았다. 저물녘에 원생 서형리(徐亨履), 서홍리(徐弘履), 윤문거(尹文擧), 윤선거(尹宣擧), 조수익(趙壽益)이 마중 나왔는데, 모두 오랜 벗이다. 짐 속에서 술을 꺼내 얼큰하게 취할 때까지 마셨다. 학곡(鶴谷) 홍 총재(洪冢宰.홍서봉)가 원생들에게 지어준 시에 화운하여 남겨두었다.
5. 비 때문에 사흘 동안 서원에 발이 묶여 있다가 막 출발하려는데 의창군(義昌君.이광)이 혼자서 말을 달려 도착하였다. 누대 위에서 술동이를 열고 기분 좋게 취하자 데리고 영귀문(詠歸門)을 나섰다. 시냇물 가까이 바위 위에 앉아서 피리 부는 종에게 태평소를 두세 곡 불게 하였는데 온 계곡이 응답하는 듯하였다. 곧 일어나 작별하였다. 신선의 산에 가기도 전에 흥이 벌써 한가로웠다.
6. 가다가 지치면 큰 시냇가에 가서 풀을 깔고 앉아 종에게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잡게 하고 얼른 삶아서 술안주로 삼았다.
7. 밤에 포천(抱川) 앞 시내를 건너려는데 수심이 깊어 건널 수 없었다. 고을 사람들이 가마를 가져와 물살을 가로질러 현사(縣舍)에 도착하였다. 현사는 조용하여 마치 시골 마을 같았다. 밥을 차려 주는데 산나물과 들나물이 모두 정갈하고 신선하여 참으로 산수에 노니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밥상이었다. 이날 태평소를 잃어버려 하인들이 꽤 소란스러웠는데, 잃어버린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줍는 사람이 있는 법이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금수정(金水亭)은 바로 철원 부사(鐵原府使) 김확(金矱)의 별서(別墅)이다. 백로주(白鷺洲)의 물이 여기에 이르러 커지는데, 높은 절벽이 맑은 물에 꽂혀 병풍을 펼친 듯한 모습이 몇 리나 이어진다. 물 가운데의 암석은 마치 소머리 같은데 이름도 우두연(牛頭淵)이라고 한다. 십여 명이 앉을 수 있는데 중간이 움푹 패여 절로 술동이 모양을 이루었다.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절구 두 수를 새겨놓았다. 봉래는 이곳에 산 적이 있는데 사암(思菴) 박순(朴淳)이 물러나 지낸 곳이 하류에 있어서 나룻배로 왕래했다고 한다.
8. 삼부연(三釜淵)은 박연(朴淵)보다 더 기이하고 웅장하다. 골짜기가 깊고 으슥하여 대낮에도 음산하니 오래 앉아 있기 어렵다. 용과 이무기의 소굴이다.
9. 김화 현감(金化縣監) 황영(黃泳)은 오랜 벗이다. 현의 재실은 자못 정결하여 밤에 술을 마시니 매우 흡족하였다. 취중에 벽에 적힌 시를 보았는데 바로 청음(淸陰.김상헌)이 지은 것이었다. 경솔히 화운시를 지었다. 금성(金城)의 경계에 들어서자 산은 더욱 높아지고 물은 더욱 거세졌다. 높은 비탈길에 올라 백여 장 아래를 굽어보니 아래에 세찬 여울이 있었다. 여러 산이 빽빽하게 모여 있어 마치 그림 같았다. 우리 일행이 가장 높은 곳에 있었는데, 지명이 관원전(官員轉)이라고 한다.
10. 금성의 포상각(苞桑閣)은 좁고 누추한데 벽 위에는 무려 수백 편의 시가 있다. 현감이 나에게 시를 남겨달라고 하였다. 내가 농담 삼아 답하기를, “벽에 작은 틈도 없으니, 누각을 새로 지으면 그때 시를 짓겠습니다.” 하였다.
11. 통구(通溝)는 산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경계가 넓게 트였고 거주하는 사람이 매우 드물다. 행궁 터와 어정(御井)이 있는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광릉(光陵.세조)이 오대산과 금강산에 행차했을 때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12. 단발령(斷髮嶺) 위에 두 그루 노송나무가 있는데 앉아서 한참을 쉬었다. 마침 해가 서쪽으로 기울자 금강산 전체가 마치 은을 녹인 빛깔 같았다. 여기서부터는 세계가 달라지면서 가슴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13. 장안사(長安寺)는 화재로 소실되고 외문만 남아있다. 문에 설치된 사천왕상(四天王像)이 매우 웅장하다. 절에 보관된 부처의 사리와 무진등(無盡燈)은 모두 원나라 순제(順帝) 때의 물건인데 지금까지 훼손하거나 잃어버리지 않았으니 기이한 일이다.
14. 영원동(靈源洞)에 들어서니 산이 둘러싸고 물이 돌아 흘러 하루 종일 맑고 그윽하고 기이한 곳을 다녔는데 그 모습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가다가 지치면 번번이 쉬면서 종자에게 붓을 잡게 하고 시를 지었는데, 시를 다 짓고 나면 술을 가득 부어 마셨다. 저물녘에 영원사에 도착하였다. 절은 백마봉 등 여러 봉우리를 마주하고 있는데, 봉우리가 허공에 높이 솟아 금빛 벽이 찬란하게 빛났다. 두 명의 승려가 금식하며 면벽 수도를 하고 있었는데 자못 도기(道氣)가 있었다.
15. 영원사에서 돌아와 현불암(現佛菴) 서대(西臺)에 도착했다. 서대는 불정대(佛頂臺)와 높이를 다툰다. 누대 위에는 ‘파선(坡仙)’이라는 글자가 있는데 오숙우(吳肅羽.오숙)가 새긴 것이다. 자갈길을 십여 리쯤 올라가니 발 아래에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나는데, 굽어보아도 장안사(長安寺)와 정양사(正陽寺) 등 여러 사찰들을 구분할 수 없었다. 대송라암(大松蘿菴)에 도착하니 비가 내리기 시작해 결국 불정대에는 오르지 못하고 그저 쇠사슬로 공중에 매달린 모습만 바라보았다.
16. 만폭동(萬瀑洞)은 금강산에서 제일가는 곳이다. 양봉래(양사언)의 글자와 나옹(懶翁.이정)이 새긴 불상과 보덕굴(普德窟)의 구리 기둥과 정양사의 육각전(六角殿)은 장관이다. 육각전 벽 위에 있는 그림은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안가도(安可度.안견)가 천등사(天燈寺)에 있는 오도자(吳道子)의 유적을 탑에서 얻어 옮겨 그렸다고 하는데 채색을 한 곳이 모두 입체적이니, 기교가 입신의 경지를 넘어섰다고 할 만하다. 승려의 말에 을사년 홍수 때 계곡이 자못 신비로웠다고 한다. 나는 바위 위에 율시 한 수를 썼다.
17. 기공(機公)은 천덕암(天德菴)에 살고 있는데 고요하고 깨끗하였다. 그의 장실(丈室)을 보니 티끌 하나 묻지 않았다. 석이버섯, 떡, 산 과일, 송이버섯을 공양하고 햇차를 내려주었다. 분향하고 쉬었다. 저물녘에 승려 예(羿)와 마하연(摩訶衍)에 투숙하였다.
새벽에 비로봉 골짜기로 들어갔는데 매우 깊숙하였다. 십여 리쯤 더 가서야 봉우리 아래에 도착했는데, 그 사이에 맑은 물과 거센 여울이며 기이한 바위와 괴상한 돌이 구경할 만하고 사랑스럽기도 하며 두렵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여 뭐라 형용할 수 없었다. 가장 높은 꼭대기에 오르니 등향(藤香)이 덩굴져 털방석처럼 펼쳐져 있었다. 문득 여러 산을 바라보니 마치 낮은 언덕 같아 감히 비로봉과 맞서는 것이 없었다. 그제야 이 봉우리가 가장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흰 구름이 구룡연에서 뭉게뭉게 피어올라 잠깐 사이에 바다 위를 전부 덮었다. 봉우리 아래에 있는 구름은 마치 평평한 마루 같고,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은 푸른 하늘을 등지고 조금의 그늘도 없으며, 쌍무지개는 마치 채색 다리처럼 일출봉과 월출봉 사이에 걸려 있었다. 참으로 장관이었다.
18. 의영(義瑩) 장로는 아흔 살로 수염과 눈썹이 흰데 여전히 눈과 귀가 밝으며 순후하고 과묵하다. 삼장사(三莊寺)에 살고 있는데 금식하는 승려 한 명이 모시고 있었다. 의영은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의 고제(高弟)로 도승(道僧)으로 일컬어지는데 산문(山門)에서 종사(宗師)로 모신다고 한다.
19. 일찍이 전하기를 비로봉에 올라가 피리를 불거나 혹은 노래를 부르고 장난을 치면 구룡연(九龍淵)에서 반드시 구름이 일어 시야를 가린다고 한다. 이날 아들 경(炅)이 피리 부는 종과 승려 한 명을 데리고 먼저 올라가 피리를 불게 하였다. 잠시 후 과연 구름이 구룡연 가운데서 일어나 순식간에 넓은 바다를 전부 가렸으니, 기이한 일이다.
20. 묘길상(妙吉祥)은 금강산에 있는 유명한 암자인데 사는 승려가 없어 황폐해지고 버려졌다. 등나무 덩굴이 벽을 뚫고 들어가고 초목이 무성하게 뒤덮었다. 마하연에도 승려가 없었는데 우리 일행 때문에 불을 붙이긴 했으나 이 또한 폐사(廢寺)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맑고 깨끗하여 인간세상 같지 않았다. 전에 수암(守菴) 박지화(朴枝樺)가 이곳에서 천상의 음악을 들었다고 한다.
21. 이허대(李許臺)는 계곡 물가에 있는 바위인데 고(故) 대간 이명준(李命俊) 공이 강릉 부사로 있을 때 산에 들어왔다가 물가에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마음에 들어 이곳에서 쉬었다. 함께 유람 온 사람의 성이 허씨(許氏)였기에 마침내 ‘이허대’라고 새겼다고 한다. 대간의 호는 잠와(潛窩)로, 다름 아닌 우리 외삼촌이다. 맑은 절개와 높은 명망이 이 산과 견줄 만큼 높지만 이미 고인이 되셨다. 그 분을 생각하며 눈물을 훔친다.
22. 내금강에 언기(彦機)라는 승려가 있는데 불경을 꽤 섭렵했다. 외금강에 있는 응상(應祥)도 교종(敎宗)이다. 내가 산에 들어갔을 때 기공(機公)이 장안사에서 마중나오고 마하연에서 배웅하였으며, 상공(祥公.응상)은 유점사(楡岾寺)에서 함께 자면서 밤늦도록 선담(禪談)을 나누었으니, 이 두 사람은 불문의 좋은 친구들이라 할 만하다.
23. 수점(水岾)은 내금강과 외금강의 경계이다. 외금강의 승려들이 가마를 가져와 내금강의 승려들과 교대하고 하직을 고하였다. 그리고는 시를 구하였는데, 무려 수십 명이나 되었다. 시를 짓는 것이 청아한 일이기는 하지만 남의 요구에 응하여 지으면 하나의 일거리가 되니, 억지로 짓게 되면 괴로워진다.
24. 수점을 떠나 술에 취한 채 은신암(隱身菴)에 들렀다. 암자에는 승려 한 사람만 있었는데 이름이 보주(普珠)이다. 그를 데리고 은신대(隱身臺)로 올라갔다. 은신대는 반쯤 공중에 솟아 큰 바다를 굽어보고 있으며, 구정봉(九井峯)의 십이폭포는 마치 용이 여의주를 차지하려고 싸우는 듯 꿈틀꿈틀하였다. 어젯밤 비가 내렸기에 폭포수가 떨어지는 기세가 더욱 웅장하였다. 이곳이 내외 금강산 가운데 가장 웅장한 경관이다.
25. 이 지역의 여러 종사(宗師)들이 휴정대사를 기리기 위해 금강산에 비석을 세우려고 한 장 반 높이의 비석감을 마련했다. 월사(月沙.이정귀) 상국이 비문을 지었는데, 내게 글씨를 써 달라고 청하였다.
26. 백련암(白蓮菴)의 법견(法堅) 장로는 나이가 여든인데 병으로 자리에 누워 있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기개가 맑고 높으며 호방하여 아주 호쾌한 데가 있었다. 조용한 가운데 실컷 토론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27. 만경대(萬景臺)는 외금강의 최고봉이니, 동쪽으로는 푸른 바다를 마주하고 있다. 바다와 하늘이 하나의 색으로 삼산(三山)과 십주(十洲)를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을 듯하여 훌쩍 구름을 타고 날아가는 기분이 든다. 순 중랑(荀中郞)이 북고산(北固山)에 올라가 바다를 바라보면서 진(秦)나라와 한(漢)나라의 임금들이 반드시 옷을 걷고 발을 적셨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만약 순 중랑이 이곳에 왔다면 과연 경치가 어떠하다고 말했을까?
28. 유점사(楡岾寺)는 큰 사찰이다. 건물이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큰 시내 위에 걸쳐있는 산영루(山影樓)는 더욱 멋지다. 화룡담(化龍潭)도 절경이고, 오탁정(烏啄井)은 고적(古蹟)이다. 세조의 어압(御押)이 있는 교서와 원나라 황제의 칙서가 소장되어 있다.
29. 산영루는 큰 시내에 걸쳐있는 큰 건물로 붉은 난간과 그림이 그려진 기둥들이 아래위로 어리비친다. 완연한 가을빛이 바위에 비단처럼 곱게 아롱거렸다. 피리 부는 종에게 몇 곡조를 불게하고 술을 따라 마셨다.
30. 외금강의 물은 산영루에서 커져서 수십 리를 굽이굽이 흐른다. 여러 골짜기의 물이 백천교(百川橋)에서 합류하는데, 주변의 경치가 시원하게 트였고 바위의 형세는 기괴하다. 산에 들어온 사람이 이곳에 오면 마음이 씻겨진다. 옛날에는 크고 아름다운 정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이미 무너지고 없다.
31. 노춘(盧偆)은 유점사(楡岾寺)에서 존숭하는 사람인데 지리지에 보이는 내용은 허황하여 믿을 수 없다. 구점(狗岾) 위에 노춘정(盧偆井)이 있는데 길가는 사람들이 반드시 목을 축인다. 고려조의 재상 민지(閔漬)가 지은 산수기(山水記)는 더욱 황당하여 믿을 수 없다.
32. 구점의 길은 양의 창자처럼 한없이 구불구불한데 노춘 부인(盧偆夫人)의 사당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땅이 평평해진다. 수십 리를 가는 동안 맑은 시냇물과 하얀 돌을 보며 자못 한적하고 확 트였다는 생각이 든다. 살고 있는 사람이 매우 적어 쓸쓸한 풍경이 더욱더 맑고 그윽하다.
33. 외금강은 백전암(柏巓菴) 등 바다를 마주한 여러 암자들에서부터 형세가 매우 시원해진다. 발연(鉢淵)의 물놀이〔水戱〕와 동석(動石)의 유적은 절경이라 부를 만하다. 신계동(新溪洞) 쪽은 산봉우리의 물과 돌이 곳곳마다 그 모양이 전혀 다르다.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그 아래에 집을 지었는데 옛 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신계사(新溪寺)는 불타 없어졌는데, 인근 역의 역노(驛奴)가 말을 몰고 험한 곳을 다니는 유람객을 괴롭게 여겨 절에다 불을 질렀다고도 한다. 수년 사이에 초목이 우거져 산문(山門)과 계곡의 길이 막혀 지날 수 없게 되었다.
34. 삼일포(三日浦)에서 배를 타고서 붉은 글씨가 새겨진 석벽을 손으로 만져보고 사선정(四仙亭)에서 술을 마셨는데, 거나하게 취하자 태수 이경인(李敬仁) 극보(克甫)가 노래를 불러 흥을 돋우니 나도 모르게 흥이 일어나서 나 역시 절구시 한 수를 부채 머리에 써서 화답하였다.
35. 탕천(湯泉)에 목욕하러 갔는데, 탕천은 바로 금강산의 바깥쪽이다. 세조 때 목욕하러 오셨던 옛 행궁 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목욕을 마치고 양진역(養珎驛)에 투숙하였는데 촌사(村舍)가 몹시 누추하였다. 큰비가 하루 밤낮으로 내려 개울물이 크게 불어서 사람들이 통행하지 못하였다. 곁에 있던 승려 쌍흘(雙仡)과 신헐(神歇)은 불가의 인과설을 잘 말해서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듣고 있자니 지루한 줄 몰랐다.
36. 고성(高城)의 온 경내는 산, 바다, 호수, 정자는 물론이고 평범한 바위조차도 모두 의태(意態)가 있으니, 새나 짐승의 모양 같아서 날아가는 듯하기도 달려가는 듯하기도 하다. 남강(南江)은 바다로 흘러들어 가고 칠성석(七星石) 등 여러 바위들이 바다 입구에 나열되어 있어 마치 옥으로 된 죽순과 옥비녀 같다. 해산정(海山亭)이 높은 곳에서 내려보니 참으로 신선들이 사는 곳이다.
37. 삼일호(三日湖) 근처에는 몽천사(夢泉寺) 옛 터가 있는데, 규모가 작은 절이긴 하지만 그 맑은 절경은 오중(吳中)의 북고(北固)와 우위를 다툴 만하다. 태수가 거사(居士)에게 초가지붕을 엮게 하고 장차 집을 지을 것이라고 한다. 붉은 글씨는 삼일호 서쪽 절벽 위에 있는데 비스듬히 기울어지고 움푹 패여 사람의 발자취가 닿기 어렵다. 새겨진 글자의 서법(書法)이 아주 고풍스러우니, 홍춘정(洪春亭.홍귀달)이 관찰사를 지낼 때 글을 짓고 검은 돌에 새겨서 바위를 깎아내고 그 안에 넣었다. 그 위에는 매향비(埋香碑)가 있다. 글자가 이미 떨어져 나갔지만 그래도 읽을 수 있는 부분도 있었는데 대개는 향을 묻은 사람들의 성명을 기록한 것이다.
38. 부용호(芙蓉湖)는 관찰사 정하숙(鄭下叔.정두원)이 살 곳으로 정한 곳이다. 호수가 외금강 아래에 있어서 경치가 빼어날 뿐만 아니라 골짜기도 깊숙하고 조용하며 씨 뿌리고 모내기 할 만한 땅이 있으니 은자가 숨어 살 만한 곳인데, 머물 수 없어 아쉬웠다.
39. 감호(鑑湖)는 사방이 몇 리나 되며 물이 맑고 투명해서 머리카락까지도 환히 비춘다. 앞으로 구선봉(九仙峯)을 마주 대하니 완연히 금강산의 향로봉과 백탑동 등의 승경과 같았다. 그 아래는 집의 규모가 들쭉날쭉한데 왼쪽에는 양사언(楊士彦)이 살던 옛 집이 있고 촌락이 그림처럼 숲 사이로 은은히 보이며, 오른쪽에는 키가 큰 소나무가 있는데 가지가 바다 입구를 가릴 정도이다. 그 소나무 너머에 사봉(沙峯)이 하늘을 향해 우뚝 서 있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옥처럼 보인다. 호숫가에 정자를 세운 사람은 토호였던 정전(鄭沺)이라고 한다. 바닷가에 호수가 참으로 많지만 이 감호를 으뜸으로 삼아 마땅하다.
40. 간성(扞城)으로 가는 길에 바다 갈매기 수천 마리가 떼를 지어 물가 모래밭으로 내려앉는 것을 보고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이리저리 살펴보는 사이에 굽이진 해안으로 나오니 어부의 집이 해안을 따라 있고 아녀자와 아이들이 섞여 앉아 있었다. 언덕처럼 쌓아놓은 물건이 있는데 바로 작은 물고기들이었다. 갈매기 떼가 와서 채 가도 꺼리지 않았다.
41. 동해의 거룻배는 통나무를 파서 만드는데 네댓 사람이 탈 수 있다. 대구를 낚는 것으로 생업을 삼는데, 해가 뜨면 곧 돛을 펼치고 나가 순식간에 보이지 않는다. 신시(申時) 무렵 하늘 밖 저쪽에 점 하나가 나타났다가 잠깐 사이 해안가에 닿으니, 경쾌하게 나는 듯이 다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대(仙臺)와 능파정(凌波亭)은 모두 바닷가의 승경인데 훌쩍 세상을 버리고 우뚝 서 있는 듯한 의취가 있다.
42. 영랑(永郞)이라는 이름이 붉은 글씨로 쓰여 있다. 금강산에 영랑점(永郞岾)이 있고 고성(高城)에 영랑호(永郞湖)가 있으며 간성(扞城)에 또 영랑호가 있다. 이른바 영랑이라는 사람은 어디 사람인지, 또 어느 시대 사람인지 모른다. 영동 사람들이 전하는 말로는 신선의 부류라고 한다. 고성의 호수는 매우 그윽하고 간성의 호수는 더욱 맑고 시원하다. 솔숲과 암석이 인간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하여 반나절만 돌아다니면 영랑을 만날 것만 같다.
43. 고성(高城)에서 수석이 기이한 곳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현종암(懸鐘巖)은 마치 종을 엎어 놓은 것 같은 모습인데, 그 안이 벌집처럼 텅 비어 십여 명이 들어갈 수 있으니, 조화옹(조물주)의 교묘한 솜씨를 보기에 충분하다.
44. 선유담(僊游潭)은 원래부터 신령스런 곳이다. 내가 피곤하여 소나무 뿌리에 기대어 잤는데, 꿈에서 옛날 의관을 입은 사람과 함께 도가과 불가의 일을 실컷 이야기했다. 잠에서 깨어난 뒤에도 그 말이 여전히 기억나니, 기이한 일이다.
45. 열산호(烈山湖)는 바다에 접해 있는데, 관동에서 제일 크다. 아득한 물결을 바라보자니 띄울 배가 없는 것이 아쉬웠다.
46. 명사(鳴沙) 수백 리를 가마를 타고 가기도 하고 나귀 등에 걸터앉아 가기도 하면서 마음 내키는 대로 가고 쉬었다. 처음 고성을 빠져나왔을 때는 길을 가다가 마음에 드는 곳을 만날 때마다 앉아서 쉬니 행보가 한참 더디었다. 앞으로 가면 갈수록 경치가 더욱 빼어나 감상하기에 겨를이 없었다. 매향포(埋香浦), 우두대(牛頭臺), 화진(花津) 등 몇몇 곳은 경치가 더욱 빼어나다.
47. 9월 13일, 청간정(淸澗亭)에 이르렀다. 달빛과 파도가 서로 일렁이는데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어 대낮처럼 밝았다. 이에 나는 만경대에 올라 돌을 베고서 누웠다. 밤이 깊어지자 서늘한 이슬이 옷을 적시고 청량한 기운이 뼈에 스며들었다. 종이 만경대 아래에서 피리를 불자 어룡이 모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다. 이 밤, 이 달은 천하가 함께하는 것이지만 나처럼 만족스레 바라보는 이는 없을 것이다.
48. 청간정은 바다에 매우 가까워 사나운 파도가 뜰 가에 시끄럽게 치니, 그 소리가 매우 웅장하여 잠을 이룰 수 없다. 당나라 사람의 시에 “파도 소리는 처음 온 나그네를 유독 두렵게 하네[潮聲偏懼初來客].”라고 한 것은 실제의 경치이다.
49. 청간정 기둥 사이에 비스듬히 적힌 스무 글자가 있는데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이 유람왔을 때 쓴 것을 후세 사람이 새긴 것이다. 세월을 헤아려보니 소재옹의 나이 23세에 쓴 것이다.
50. 명사(鳴砂)라고 하는 것은 밟으면 사각사각 소리가 난다. 관동 수백 리에 걸쳐 그렇지 않은 곳이 없다. 해당화가 그 위에 줄지어 피면 마치 담요를 펼쳐놓은 듯, 비단 장막을 둘러쳐 놓은 듯하다. 가을이 깊어지면 금앵자(金櫻子) 같은 열매를 맺는다.
51. 바닷가의 길이 모두 명사(鳴砂)이기는 하지만 드문드문 바윗길도 있는데 돌출되어 파도가 일렁이는 곳이면 반드시 대를 이루니 하나도 평범한 것이 없다. 평지에는 반드시 푸른 소나무들이 녹색 일산처럼 울창해서 몇 리에 걸쳐 뻗어 있다. 길가는 사람들이 대부분 소나무 아래로 다니는데 한여름에도 시원한 기운이 있다.
52. 천후산(天吼山)은 양양(襄陽)에 있다. 그 골짜기와 산봉우리는 금강산과 나란히 일컬을 만하다. 우뚝 솟아 평평한 곳이 넓지는 않다. 유명한 사찰이 있는 정토(淨土)라서 많은 고승이 이곳에 암자를 짓고 거처한다고 한다.
53. 내가 일출을 본 곳이 모두 세 곳인데, 그중 해산정(海山亭)에 머문 기간이 가장 길었지만 비가 자주 내려 세 차례 밖에 보지 못했다. 청간정(淸澗亭)과 낙산사(洛山寺)에 있을 때는 모두 맑게 개었는데, 낙산사에서 본 것이 더 대단하였다. 세상에서 낙산사의 일출을 일컫는 것도 다 까닭이 있나보다.
54. 양양 부사가 낙산사 이화정(梨花亭)에서 나를 위해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반쯤 술에 취하자 의상대(義相臺)로 자리를 옮겼다. 몇 개의 점이 하늘가에서 오는 것이 보였는데 마을 사람이 고깃배가 곧 도착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잠시 후에 하얀 돛배가 해안에 정박해 바다의 진미를 제공하기에 마침내 술을 실컷 마셨다. 자리에 있던 어린 기생이 송강(松江.정철) 상국의 〈관동별곡(關東別曲)〉을 불렀는데 자못 맑고 아름다워 듣노라니 정신이 왕성해졌다.
55. 상운역(祥雲驛)의 유객당(留客堂)은 자못 정갈한데, 뜰 주변의 오죽(烏竹)이 울창하여 사랑스럽다. 한쪽 면은 바다와 접해 있는데 키 큰 소나무가 수십 리에 뻗어 흰 모래 위에 그늘을 드리우니 관동의 명소이다. 역관이 배 다섯 알을 가져왔는데 크기가 몇 되나 되는 바가지만 하였다.
56. 강릉의 경계로 들어가니 지세가 자못 넓고 마을은 풍요로웠다. 관란정(觀瀾亭) 아래에 푸른 소나무가 시내를 따라 십 리에 이어져 있다. 때는 깊은 가을이었는데 바닷가의 가을빛이 더디게 사라지고 있어 울긋불긋 붉은 단풍잎이 볼 만하였다. 정자에는 제영시가 벽에 가득하였는데 모두 벼슬하러 온 사람들의 시이다. 세월을 따져보니 5, 60년이나 된 것도 있는데 이미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아! 세상의 이름난 벼슬아치는 누구나 헛된 성명을 훔쳐 한때 드날리건만 죽고 난 뒤에 이름이 일컬어지지 않음이 이와 같으니, 슬프다.
57. 우두대(牛頭臺) 곁에 곱게 단장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기에 가서 보니 강릉의 관기(官妓) 옥랑(玉娘)이었다. 젊었을 적 평강(平康)에 있을 때의 옛 벗인데 만나지 못한 지 십여 년이 지났다. 옛날에는 댕기머리를 땋은 어린 관노였는데 벌써 나이가 든 모습이었다. 그도 내 수염과 머리를 보고서 놀랐다.
58. 강문교(江門橋)를 건너 멀리 바라보니 붉은 칠에 공중으로 솟은 호숫가 누각이 숲 사이로 은은히 비쳤다. 말을 달려 가서 사립문을 두드려 보니 정자는 비었고 주인은 없었다. 뜰 주변에 있는 벽오동과 긴 대나무가 마음에 꼭 들었다. 호수와 바다가 다투어 기이한 모습을 자랑하는데, 때마침 석양이 호수를 물들이고 파도가 아득히 먼 하늘에 닿으니, 바닷가에서 제일가는 곳이다.
59. 9월 15일, 경포대(鏡浦臺)에 올라갔다. 저녁놀이 거꾸로 비치니 바다가 울긋불긋한 채색비단 같았다. 잠시 후 벽옥 같은 달이 하늘에 뜨자 비단 같던 호수와 바다가 뒤바뀌어 수정 세계가 되었다. 취한 몸을 이끌고 누대 아래로 내려가 작은 배에 기생과 악공을 태우고 물 한가운데에서 술을 마시며 놀았다. 밤이 깊어지자 차가운 기운이 생겨 이슬이 촉촉하게 내리니 신선이 노니는 것 같았다.
60. 한밤중에 경포대에서 초당으로 돌아오니, 주인이 술을 준비하고 기다렸다. 내가 취한 몸을 이끌고 올라가 촛대를 잡고서 벽에 있는 시를 보니 백여 편이나 되었다. 나는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의 시 한 수에 화답하고 기생들에게 음악을 연주하게 하여 마음껏 즐겼다. 땅의 형세가 평평하고 넓으며 건물이 정교하고 아름답기가 명주(溟州.강릉)에서 으뜸이었다.
61. 경포대는 잠와공(潛窩公.이명준) 이 중건한 것으로 널찍하지만 양포(楊浦) 최전(崔澱)의 시 한수와 계곡(谿谷) 장유(張維)의 기문만 걸어두었고, 편액은 내가 쓴 것이다. 명주에는 호족이 많아 저택이 크고 화려하다. 성의 동문 밖은 모두 사대부들이 사는데 붉은 기와와 그림이 그려진 서까래가 즐비하다. 시골에만 이런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서울도 난리를 겪고 나서는 이만하지 못하다.
62. 한송정(寒松亭)은 옛날부터 신선들이 놀며 쉬던 곳이라 하는데, 아직도 단약을 만들던 아궁이와 우물이 남아있다. 푸른 소나무와 하얀 모래사장이 참으로 정토(淨土)인데, 해변에 이와 같은 곳이 또한 적지 않다.
63. 대관령에 올라서 마을의 집들을 보니 개밋둑처럼 작고 경호(鏡湖)는 말만 하였다.“태산에 올라서 천하를 작다고 여겼다.”라는 말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64. 대관령은 웅장하다고 할 만하다. 강릉에서 곧바로 고개 위까지는 사십 리나 되는 먼 길이고, 고개를 넘으면 횡성(橫城)의 경계가 나오는데 여기서부터는 평지이다. 그 사이의 역로는 모두 고갯길로 백이십 리이다.
65. 강릉 일대는 가을빛이 한창 아름다워 단청을 칠한 듯 찬란하다. 횡계(橫溪)에 이르니 절벽과 골짜기가 떨릴 정도로 추웠다. 서리가 내린 지 이미 오래이고 나뭇잎은 모두 다 떨어졌다. 거리는 수십 리인데 기후는 전혀 다르다.
66. 오대산(五臺山) 앞의 들은 ‘성평(省坪)’이라 하는데 거기에 어림대(御林臺)가 있으니, 대(臺)는 작은 언덕이다. 민간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세조께서 오대산에 행차하셨을 때 이곳에 말을 멈추고서 문사와 무사를 뽑았다고 한다. 그런데 무사를 뽑을 때 활과 말로 시험을 치르지 않고 소를 타고 가파른 고개 아래로 달려가게 하여 떨어지지 않은 사람을 합격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강릉에는 ‘소를 타는 걸로 급제했다[騎牛及第].’라는 이야기가 있다.
67. 오대산의 크기는 금강산과 비교하면 제나라와 추나라 차이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봉우리는 원만하고 통통하며 물과 돌도 특별히 뛰어난 곳이 없다. 그러나 우동수(于同水)만은 작은 절구 정도의 크기인데도 한강의 근원이 되니 신기하다. 세간에 이 물이 아주 특이하다고 전하는데 내가 한 모금 마셔보니 달고 차가웠으며, 차를 끓이니 더욱 맛이 좋았다.
68. 상원사(上院寺)는 세조의 원찰(願刹)로 규모가 크고 화려하기는 비할 데가 없고, 소장하고 있는 그릇이 매우 많았다. 흰 병풍은 청지(淸之.안평대군)의 글씨이니 진귀하다고 하겠다. 월정사(月精寺)의 중문(重門)에는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의 오언 율시 두 수가 걸려 있는데 읊조릴 만하다.
69. 오대산은 좋은 재목이 모여 있는 울창한 곳으로 나무가 하늘을 찌르고 해를 가릴 정도이다. 큰 것은 둘레가 수십 아름이나 되었다. 옛 사람이 “바다를 보고 나니 다른 물은 물이라 하기 어렵다.” 하였는데, 나도 오대산을 보고 나니 다른 나무는 나무라 하기 어렵다고 하겠다.
70. 월정사에는 불교 교리에 대해 말하는 승려가 없었다. 동쪽 관음암(觀音菴)에 금식하는 늙은 승려가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서 불러오고자 하였다. 이름은 성정(性淨)이고 나이는 예순 여덟 살이며 몸은 흙덩이나 나무토막 같은데 암자에서 나오지 않은 지 이미 7년이나 되었으며 말도 하지 않고 먹지도 않은 지가 아주 오래되었다고 한다. 내가 방편(方便)의 말로 질문을 하자 드디어 눈을 뜨고 빙그레 웃으며 “당신은 같이 이야기할 만합니다.” 하였는데 묻는 말에 메아리처럼 응답하였다.
71. 나는 승려를 좋아하는 벽(癖)이 있고 승려 중에도 나를 좋아하는 이가 많다. 서산대사 이후로 유명한 승려들은 만나지 못한 이가 없고, 직접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그들의 계행(戒行)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또 금강산에 살고 있는 선사들을 두루 만나보니 성정(性淨)만큼 지행(知行)이 모두 높은 이는 없었다. 그가 입정(入定)하면 깨어나지 않는 것이 오래된 우물과 같았고, 외물과 접촉하면 정신이 활발하고 예리한 말이 빼어나 비록 크게 의심스러운 일이라도 한마디 말로 해결하였다. 그의 뜻과 기개를 보니 한 시대를 능가하기에 충분하다.
72. 내가 묻기를,
“사교(四敎)에는 원래 공안법(供案法)이 없었는데 조주(趙州)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지금의 수행법은 사교를 본받지 않고 단지 조주의 면모에만 의지하고 있으니, 이와 같이 해도 도(道)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성정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선비께서는 도리(道理)를 아십니까? 불가의 말을 의심하시니, 유가를 예로 들어 증명하겠습니다. 공자와 맹자는 단지 제자와의 문답으로 설파하였을 뿐인데, 송(宋)나라의 유자들이 비로소 주경설(主敬說)을 내놓았습니다. 유가의 ‘주경(主敬)’은 바로 불가의 공안의 뜻입니다. 성인의 시대가 멀어지니 그 말씀도 없어져 큰 도가 황량해지고 인욕이 천리를 없애게 되었습니다. 유가나 불가가 모두 마땅히 마음에서 구해야 하니, 마음을 구하는 요령은 욕심을 없애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가르침으로 삼아 혹은 ‘경(敬)’으로써 하고 혹은 ‘무(無)’로써 하지만 인욕을 없애고 뜻을 정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인욕이 깨끗이 사라지면 천리는 저절로 드러나게 됩니다.” 하였다.
73. 막혀서 앞이 안 보이는 대관령의 바위들을 지나 청심대(淸心臺)에 이르니 자못 높고 시원하였다. 누대 옆에 우물이 있는데, 여기 이름도 우동(于同)이었다. 물맛이 아주 훌륭하여 오대산의 우동수와 다르지 않았다.
74. 대화역(大和驛) 옆에 석굴이 있는데, 입구는 한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정도이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면 점점 높아지고 넓어져서 몇 리를 가도 끝나지 않는다. 옆으로 뚫린 동굴이 셀 수 없이 많은데, 불을 가져다 비추어 보면 바위 틈이 아주 기이하여 뭐라 형용할 수 없다. 아래쪽에서 여울물 소리가 들리지만 물은 보이지 않으니, 땅속에 필시 매우 큰 물이 흐르고 있을 것이다. 종유석은 엿 같은데, 동굴 문을 나서면 돌처럼 딱딱해지니 기이하다.
75. 원주(原州)와 횡성(橫城) 사이는 촌락이 거의 없고 산수도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그러나 거센 여울이나 기이한 석벽을 만나면 말을 멈추고 시를 읊으며 완상하였으니, 만나는 곳마다 흥을 돋우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76. 섬강(蟾江)과 여강(驪江) 일대에는 누대의 승경이 없고, 청심루(淸心樓)에 이르러서야 자못 시야가 트였다. 용문산(龍門山)의 산세는 평평하게 멀리까지 뻗어 있는데 목은(牧隱) 이색(李嬙)이 남긴 자취가 있어 오랫동안 나그네로 다니는 이의 회포를 달래기에 충분하다.
77. 한밤중에 배를 타고 용진(龍津)에 닿으니 멀리 강가에 불빛이 보였다. 아이들이 내가 오기를 기다린 것이었다. 배에서 내리자 아우와 아이 셋이 와서 절을 하는데 마음이 흔쾌하였다. 천 리의 명산이 애욕의 뿌리를 끊지 못했구나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78. 일행 중에 정예남(鄭禮男)은 노자와 불가의 말을 제법 알고 있었고, 최기남(崔奇男)은 시도 잘 짓고 글씨도 잘 썼으며, 승려 계정(戒淨)은 일자무식이었지만 잘 따르고 살가워 어울릴 만하였다. 이 세 사람은 유람하며 부리기에 충분하여, 매번 기생이 있는 곳에 가거든 계정에게 기생과 어울려 노래하고 춤을 추게 하며 세속의 법도를 벗어나 놀기도 하였다.
註: 금강산 유람 소기는 1631년(인조9) 가을에 신익성(申翊聖 1588~1644)이 고성(高城) 탕천(湯泉)에서 목욕을 한 뒤 금강산 일대를 유람한 일을 기록한 것이다. 낙전당 신익성은 상촌 신흠의 아들이고 선조의 부마로서 동양위로 봉해졌다. 번역: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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