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각이 여삼추라는 말은 간절히 기다린다는 의미로 많이 쓰이는 옛 말인데 여기서 일각이란 몇 분을 말하는 걸까요?
이 질문은 며칠 전 TV에서 본 퀴즈 문제이다. 세 번의 가을이라...그러고 보니 말이 참 맛깔스럽다. 글귀에 무슨 사연이 있으련 하고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다. 언뜻 살피니 그 말이 속담 코너에 박혀있다. 솔직히 낭패감이 들었다. 어찌 그 말이 ‘계집 바뀐 건 모르고 젓가락 짝 바뀐 건 안다 ’ ‘고기는 씹어야 맛이요 말은 해야 맛이라’ 같은 너부데데한 말들 틈에 끼어 있단 말인가. 이건 분명 까마귀 노는 틈에 끼어 있는 백로다. 좀더 세밀히 들여다보니 그런대로 봐 줄만한 구석이 나온다.
시경 왕풍이란 시에 나오는 말로 멀리 떠난 남편을 기다리면서 ‘하루를 보지 못하는 것이 세 가을만 같다’ 라고 하여 一日如三秋란 말이 유래되었노라고 적혀있다. 시에서 나왔다니 이제 제대로 믿겨진다. 내가 이 글귀가 묘미가 있다고 보는 것은 비유에 가을을 집어넣었다는 것에 있다. 겨울의 冬도 넣을 수 있고 年을 넣을 수 있는데 왜 가을이라 했을까?
가을은 진한 색채이다. 고운 색채는 사람의 감정을 자극한다. 가을은 그래서 다른 계절과는 분명히 다른 감정의 소나기다. 그리움이고 세월을 의미한다. 그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글의 뜻은 모른다하더라도 가을이란 단어 때문 그립거나 애절함이 있을 것이란 연상이 쉽게 이루어진다. 아니나 다를까 일각이 3년과도 같다 하니 기다림의 그 애절함이라니.
헌데 그 말을 지금 쓰는 말로 풀어 놓으면 맛이 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15분이 3년의 가을과도 같다.’로 풀어질 것인데 우선 현세에서의 시간개념으로는 15분이면 빠른 감을 전혀 주지 않는다. 숫자적 개념으로야 1년이 8760시간이고 1시간은 15분의 4배에 해당되니 엄청난 비율(105,120:1)로서 간절함이 대단하다 하겠지만 실감이 나지를 않는다. 그러니 여기서 일각은 그냥 빠른 시간쯤으로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어쨌거나 멋들어진 표현임엔 틀림이 없는데 그렇다면 왜 9도 아니고 1도 아닌 3이란 숫자를 동원했을까.
석 삼이라 하니 의외로 속담에 삼이란 말이 많이 들어가 있다.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양반’ 이란 속담도 그러하고 ‘세 살 버릇 여든 간다’ 도 있고 ‘잘하면 술이 석 잔 못하면 뺨이 세 대’ ‘삼 세 번’에 ‘ 코가 석 자’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런 점에선 속담에 끼워 넣어도 그럴 듯 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기엔 여전히 가을이란 말이 아깝다. 그래서 더 뒤져보니 3이 또 묘한 숫자이다.
3은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선 꽤나 길수로 중요시 여겨왔다. 삼월 삼짇날이 길일이고 중국사람 최대 명절 9월9일이 3을 반복한 수로서는 최상이다. 36계 줄 행랑이라 하면 3의 반복이 열두 번으로 대단한 속도로 도망갔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열두 번이란 ‘열두 번도 더 헤아려 보았다’ 라는 말의 뜻에서 보듯이 대단히 많이 라는 말을 내포하고 있다.
3을 더 파헤치니 단군 신화가 나오고 삼일 신에 삼위일체가 등장하고 삼신할머니가 나온다. ‘환웅은 천부인 3개를 받아 3000명을 거느리고 인간의 일 360가지를 다스렸다고 했다. 삼신 할매 덕에 나서 삼 줄을 끊고 삼칠일 금기를 하고 만세도 삼창이다.’ 대충해서 얻어지는 말들이 모조리 3이다. 얼마만큼 우리조상들이 그 3이라는 숫자를 좋아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니 3자가 그곳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어쨌거나 그 말로 이것저것 많이도 배우게 되는데 저 글귀를 겨우 속담에서는 구출을 하였지만 수필을 쓴다는 사람이 시적 표현으로 가름을 하고 끝을 낸다는 것이 좀 그러하다.
그래서 두드린다. 저 표현은 그야말로 수필 같은 흐름의 표현이라고 말하련다. 글이란 모름지기 정서(情緖)와 사상(思想)과 상상(想像)이 똘똘 뭉쳐 심금을 울리는 것이다. 이를테면 시가 주로 정서의 상상화를 하는 장르라 한다면 소설이 상상의 사상 화를 말할 것이고 수필이 정서와 사상의 구체화를 떠들 일이라고 볼 것인데 그런 점에서 저 문구는 다분히 수필의 형태를 닮았다.
시라 할 것 같으면 ‘같다’라는 如를 굳이 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차라리 ‘일각이 무엇 무엇 이다’ 라는 단정을 하는 상상력을 발휘하였을 것이다. 거기에 일각도 시간 개념이고 삼추도 시간이 들어간 개념인데 그렇게 설명적인 느낌으로 접근도 아니 했을 것이다. 수필은 물 흐르듯 다분히 설명적이고 실태적인 글이다. 만약 ‘일각으로 삼추를 사노니, 그대여!’로 씌어진 글이라면 나는 굳이 수필 같은 글이라고 고집은 안 부린다. 그래서 그 글은 수필 같은 글이다.
그런 쓸데없는 말꼬리는 길게 늘이면 혼 줄이 나니 이정도가 딱 좋겠다 싶은데 어쨌거나 나에게 있어서 지금 일각이 여삼추 같은 것이 있다. 책 한번 내보겠다고 쓴 글, 대충 정리는 끝냈는데 글 해설을 맡으신 선생님이 두 달이 다되도록 여태 답을 안 주신다. 그렇다고 경박하게 아직 덜 됐습니까? 묻기도 무엇하고 가만있자니 몸이 달고 만다. 솔직히 저번 한 번 안부를 묻는답시고 전화를 하긴 하였는데 대답이 영 시원치가 않으셨다. ‘난 시간이 걸린다고 했지요.“ ”아, 예 그럼요.” 정말 가는 세월에 一抄가 如三月(비율은 129,600:1)이 되고 말 것 같다.
*3에 대한 참고자료
“1”은 하나의 수량을 말하지만 동시에 사물의 전체와 태극(太極)을 나타내고 있는 수이다. 음양의 이치에서 보면 1은 수와도 섞이지 않은 순양의 수이다. 또는 최초의 수이므로 1에서부터 모든 사물이 생겨나게 된다는 뜻이 담겨있다.
“2”는 하나가 아닌 최초의 단위이자 최초의 음수짝수) 이며 순음의 수이다. 또한 음과 양, 하늘과 땅, 남과 여 등과 같이 둘이 짝하여 하나가 된다는 대립과 화합의 의미를 담고 있다.
“3”은 양수의 시작인 순양 1과 음수의 시작인 순음 2가 최초로 결합하여 생겨난 변화수이다. 즉 음양의 조화가 비로소 완벽하게 이루어진 수가 3이다. 따라서 3은 음양의 대립에 하나를 더 보탬으로써 완성, 안전, 조화, 변화를 상징하고 있다.
아들을 극히 선호한 전통사회에서는 이미 딸을 잉태하였다 하더라도 주술적인 수법에 의하여 사내아이로 바꿀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딸을 아들로 바꾸는 ‘전녀위남(전녀위남)의 민속이 뿌리박게 되었다. 이때 ’3‘이란 숫자는 바로 아들을 뜻하는 길수로 사용된다. 이는 양수(홀수)가 남성이고 음수(짝수)가 여성이라는 음양사상에 기초를 둔 것으로, 순양인 1은 아버지를, 순음인 2는 어머니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어머니와 아버지인 1과 2가 결합하여 생긴 3은 양의 수이므로 아들이라 생각한 것이다.
우리 민족은 또한 양수가 두 번 겹친 것을 좋아하여 이를 길수로 여겼다. 우리 민족이 기리는 설날(1.1), 삼짇날(3.3), 단오(5.5), 칠석(7,7),중양절(9,9)등은 모두가 뜻있는 날이다. 이들은 모두 1,3,5,7,9의 양수가 두 번 겹쳐 이루어진 날이다. 이와 같은 원리가 적용된 숫자 중에서는 특히 길수인 ‘3’인 중수(중수), ‘삼십삼(33)’을 꼽을 수 있다. 33은 가장 완벽한 수, 강력한 전체성을 상징하는 독특한 수 관념을 형성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이세상의 중심에 수미산에 높이 솟아 있다고 하고, 그 꼭대기에 이 세상의 선악을 관찰하고 다스리는 도리천(도리;인도어로 33을 뜻함)이 있다고 한다. 이 도리천을 우리는 33천이라고 많이 부르고 있다. 즉 여기에서의 33은 지상에서 가장 높고 세상의 모든 것을 포괄하며 관장하는 수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 33사상은 고려시대 때부터 시작된 과거의 문과 정원으로도 제도화 되었다. 과거의 선발 인원을 일정한 성적에 도달한 사람 모두 뽑거나 필요한 수만큼 뽑지 않고 나라의 모든 것을 다스린다는 주력 적 뜻에서 33명만을 뽑았던 것이다. 이같이 33이 지닌 사상은 근대에 이르러 각 단체의 발기인 수로 정착되기도 하였다. 한말에 보부상 단체의 발기인 수도 33명이었고, 3.1독립선언의 민족 대표도 33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