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운(朱永云, 82세 법명 行願) 행원문화재단 이사장. 남들은 그를 두고 무소유를 실천한 사람이라 한다. 십수년째 성실한 불자들을 선정해서 장학금을 주기 때문이다. 성공한 사업가인 그가 기업 이윤을 고스란히 세상에 회향하는 모습에 ‘자비거사’란 말도 듣는다. 하지만 그는 그런 칭호들을 싫어한다. 그저 평범한 불자라고만 소개한다.
일제강점기 ‘국민학교’만 겨우 졸업한 어느 가난한 집 외아들이 옆길로 새지 않고 앞만 보고 살아왔을 뿐이라며 겸손해한다. 지난 24일 조계사에서 만난 주 이사장은 팔순 넘은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건강했다. 지독했던 삶의 풍상 지나가니 ‘마음의 평화’ 찾아와 ‘좇아도 미칠 수 없더니 홀연히 스스로 오도다’ 애송
사진설명: “부처님 가르침을 널리 펴기 위해 노력하는 스님과 불자들에게 작은 힘을 보태려 한다”는 주영운 이사장.
조계사 만발식당에서 점심공양을 마친 그는 찻집에 앉자마자 생강차를 주문했다. 인터뷰를 시작하려들자, 양복 안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뒤적이다 깨알같이 적힌 글자들을 보여줬다.
재단 이사장이니까 재단운영과 관련된 내용들이거나 개인이력 정도거니 했다. 수첩에는 뜻밖에 아홉명의 여성이름과 그들의 주민번호 전화번호가 빼곡했다. 아내와 여덟 딸이다.
“이 아홉명의 여성분들은 내인생의 든든한 버팀목이죠. 이들이 내곁에서 날 감싸고 다독여주고 웃게 해준 덕에 지식도 없고 기술도 없고 돈도 ‘빽(back)’도 없던 내가 이렇게 평범하고 행복하게 늙어갈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주 이사장은 1924년 경기도 개풍군 토성마을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평안남도 개성지역이다. 일본의 식민통치가 강화될 무렵 외동아들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가정형편상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됐다. ‘신동’으로 불릴만큼 총명했던 그가 집안환경으로 인해 공부를 중단할 위기에 처하자, 담임교사부터 지원에 나섰다. “일본인 오사다까 선생님이 우리 담임이었습니다. 그 선생님은 학비를 지원하겠으니 공부를 계속하라고 설득했죠.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 전하니 일본사람의 도움은 절대 받을 수 없다고 극구 반대하셨습니다.”
그의 독학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지금의 방송통신대학과 같은 ‘(일본)중학교 강의록’을 통해 천자문 일본어 한문 영어 등을 익혔다. “낮에는 닥치는대로 일하고 밤에는 눈이 쓰리도록 살을 꼬집으면서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아버지 없는 설움, 가난한 아픔, 가망없는 나라현실 등 그 모든 고통이 오히려 나를 강인하게 이끌어준 약이 되었나 봅니다.”
그는 1939년 한국운수주식회사(대한통운 전신) 공채에 합격했다. 각종 서류 심부름, 우편물 배달, 사무실 청소 등 밑바닥 월급쟁이부터 간부생활까지 22년간 일했다. 그 뒤 운수회사를 나와 1962년 한일시멘트 공업주식회사에서 경리과장을 거친 뒤 전무이사로 퇴임했다. 그때가 1985년이다.
이사로 있을 때는 경기도 용인시 일대에 4만평의 부지를 매입해서 농장을 경영하기도 했다. 밤나무 농사로 한해 수확물만도 380가마에 달했다. 사슴, 돼지, 꿩, 곰 사육, 심지어는 연못을 만들어 ‘양식’도 했다. “농장 경영하면서 한마디로 육해공군 다해봤습니다. 당시 고된 농장일로 아내의 몸이 많이 상하긴 했지만, 그 농장이 오늘날 문화재단의 기반이 되었던 것입니다.”
농장과 회사를 넘나들면서 이일 저일에 치이다 생애에 큰 아쉬움도 남겼다. “다섯째로 사내아이를 출산했는데 미숙아인 줄도 모르고 낳자마자 돌보기를 소홀히 했습니다. 사흘만에 아들을 보내면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겪었죠. 하지만 제 가슴속에는 여덟딸과 함께 내아들도 언제나 살아 숨쉬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는 〈금강경〉에 나온 ‘증도가’를 줄곧 왼다. ‘유(有)를 버리고 공(空)에 집착하면 병이기는 또한 같으니, 물에 빠지지 않으려고 불에 뛰어드는 것과 같도다.’ 집착을 아예 끊기는 어려우나, 되도록이면 버리려고 노력했던 그가 1991년 새롭게 시작한 프로젝트는 문화재단 설립이었다. 농장을 청산한 전 자본을 사립대학에 기부하려다, 당시 중앙승가대학 학장이었던 혜성스님의 권유로 문화재단을 만들었다. 2억원으로 출발한 재단 기금이 이제 7억원을 훨씬 넘어서고 수상 영역도 대폭 확대됐다. 올해부터는 장학금도 인상한다.
기업에서 얻은 이익을 재단에 출자한 주 이사장의 자비행 덕분이다. 그의 자비행은 단순히 남아도는 재산을 나누는 행위도 아니요, 명예를 위한 겉치레는 더욱 아니다. 어쩌면 불우한 시대와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도 버티고 또 버틴 결과 마침내 맞이한 ‘마음의 평화’를 세상에 자랑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당신은 굶고 외아들 등굣길에 조밥 도시락을 손에 꼭 쥐어줬던 어머니, 열아홉에 모자(母子)만 남기고 먼길 떠난 아버지, 남들 학교 갈 때 배곯으며 공부했던 어린시절, 이제 살만하니 뒤늦게 찾아온 위암 판정 등등 그가 겪은 아픔과 상처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모진 풍파를 피하기보다 정면으로 맞부딪쳐 당당하게 이겨냈다.
여덟 딸을 다 시집보내고 아내와 단둘이 사는 그는 날마다 새벽 3시반이면 어김없이 깨어나 맨손운동을 한다. 부인과 함께 아파트 주변 공원에서 산보도 한다. 휴일에는 남산을 한바퀴 돌며 봄 이슬, 여름 신록, 가을 낙엽, 겨울 나무와 이야기를 나눈다. 산길을 포행하며 즐겨 읊는 도천선사의 게송은 그의 삶을 많이 닮았다. ‘아침에는 남악산을 유람하고 저녁에는 천태산에 가도다. 좇아도 미칠 수 없더니 홀연히 스스로 오도다. 홀로 가고 홀로 앉아 얽매임이 없으니, 너그러운 마음의 경지를 얻어서 다시 너그러운 마음이로다.’
행원문화재단은…
불교문화 공로 불자에 지원금 1991년 설립…올해 상금 인상
행원문화재단은 주 이사장의 원력으로 1991년 서울시 교육장으로부터 재단법인 설립 허가를 받아 창단됐다. 재단 이름은 그가 지난해 2월 열반에 든 김천 직지사 조실 관응스님으로부터 수계받은 법명 ‘행원’을 본 땄다. 주 이사장이 출생일이기도 한 9월24일에는 매년 행원문화재단 시상식을 갖는다.
불교사상을 토대로 문학이나 예술 불경 번역에 앞장선 불자들을 선정해 ‘역경상’ ‘문학상’ ‘예술상’을 시상, 불교문화 고양과 전승발전에 기여한다. 중앙승가대에 재학중인 학인스님들을 대상으로 각 학년별로 3명을 선발해 졸업할때까지 등록금 전액을 지원하기도 한다. 또한 중앙승가대에 의뢰해 불교학 연구에 노력하는 교수를 대상으로 연구지원비로 지급한다.
부문당 300만원의 상금을 수여하는 행원문학상도 올해부터는 500만원으로 인상된다. 현재 행원문화재단의 총 적립금은 7억7000만원을 넘어서고 있다. 경제불황으로 인해 기업경제가 추락하고 있는 현실이지만 행원문화재단은 장학혜택이나 상금액을 오히려 대폭 증가할 계획을 갖고 있다.
현재 아산레미콘 주식회사 대표이사로 있는 주 이사장은 “사업 운영 등을 통해 얻은 이익금 일부를 재단기금으로 출현하고 있다”며 “재단 기본 자산을 10억까지 늘려 보다 많은 불교인재 양성에 힘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인재불사는 불교계가 끊임없이 지속해야할 가장 소중한 숙원”이라며 “죽기전까지 재단 기반을 보다 튼실히 해서 불교를 위해 공부하는 스님과 학생들에게 작은 힘이나마 보태겠다”고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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