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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의 파리를 꿈꾸던 유럽 지향적 문화
언제나 유럽을 바라보면서 유럽을 추구하고 갈망하는 아르헨티나 사회를 두고 아르헨티나인 스스로 하는 말이 있다. “이탈리아어를 말하고 프랑스인을 찬양하면서 영국인이 되고 싶어하는 스페인적인 문화이다.” 이는 아르헨티나가 겪어온 굴곡의 역사와, 그로 인해 왜곡된 아르헨티나인의 정체성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아르헨티나는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항해와 더불어 서구의 사회사에 편입된 이래 오랜 식민기를 거치는 과정에서 스페인의 혈통과 문화유산이라는 첫 번째 낙인을 받았다. 그리고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대규모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유입되면서 라틴아메리카 스페인어 중에서도 고유의 어휘들과 독특한 발음 양상을 지닌 언어로 자리 잡았다. 대부분의 스페인어권 국가들이 작별인사 말로 '아디오스'를 쓰는 데 비해 아르헨티나에서는 '차우'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것이나, '세비야'를 '세비쟈' 또는 '세비샤'로 발음하는 현상은 모두 이탈리아어의 영향이다.
한편, 귀족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파리를 여행하는 게 관례였고, 귀족이나 실업가의 자제라면 당연히 파리 유학을 하던 문화가 지배적일 만큼 프랑스에 대한 선망도 두드러졌다. 파리 패션에 대한 모방이나 문학예술의 거점인 살롱의 유행은 프랑스에 대한 선망의 산물이었다. 그러면서도 아르헨티나인은 19세기와 20세기 전환기에 세계경제를 주도하던 영국인의 실용적인 사고와 경제력을 부러워했다. 아르헨티나인은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이라는 여러 이질적인 특질들을 동시에 취하기를 열망한 모순적인 존재인 것이다. 표현이 조금은 과장된 측면은 있지만 아르헨티나인의 성향이 유럽 지향적이고 복합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 기점은 바로 아르헨티나의 근대 형성기에 있다.
아르헨티나 인구의 90% 이상이 백인이다. 19세기 중반부터 시행된 유럽인 이민정책이 라틴아메리카 남단의 아르헨티나를 백인 국가로 만들었고,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유럽화한 나라로 만들었다. 지난 세기 소가 인구보다 더 많았고, 소 한 마리만 팔면 유럽 여행을 거뜬히 할 수 있을 정도(사진 9, 10)의 세계 10대 부국에 드는 경제대국이었다.
영화로웠던 옛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쇠락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월감과 자부심이 강하지만 제3세계 주변국이라는 원죄 아닌 원죄는 벗어날 수 없고, 그래서 아르헨티나인의 자존심은 늘 반쯤은 구겨져 있다. 그리고 2001년의 경제위기를 겪은 이후에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으로 번창해가는 칠레 등 이웃국가의 존재 때문에 그 자존감은 더 훼손되었을 듯하다.
아르헨티나가 라틴아메리카의 독보적인 나라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근대화 시기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근대의 시작은 '아르헨티나 공화국'이 수립되던 1880년부터였다. 1810년 5월 25일 혁명과 더불어 라플라타 부왕제도가 무너지고 크리올 세력에 의해 평의회가 구성되면서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은 이루어졌지만, 1880년까지는 국내의 두 세력이 갈등했고 국가 조직도 완전히 정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독립은 이루었지만 단일한 민족국가라기보다는 지방의 각 주(州)의 호족들과 이전에 라플라타 부왕청이 있었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크리올 세력 사이에 알력과 긴장이 존재했다. 항구(사진 2)로서의 지정학적 이점을 독점하고 싶어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와 그 수혜를 공유하고자 한 내륙연합 사이의 갈등이었다.
이 갈등은 독립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독립과 더불어 더 거세졌다. 1816년 독립 후 소집된 최초의 의회인 투쿠만 의회에서 각 지역 대표자들이 모였을 때 내륙의 대표자들은 '라플라타 연방체'의 결성을 주장했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라플라타 전 지역에 걸친 단일국가의 수립을 주장했다. 이렇게 하여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파와 내륙 13주가 연합한 연방파의 갈등이 전면화됐다.
독립의 실효를 거두고 명실상부한 공화국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조속히 해결해야 할 문제였지만, 갈등의 해결은 결국 무력을 통해 이루어졌다. 중앙집권파와 연방파가 각각 1852년의 카세로스 전투와 1859년의 세페다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1861년 파본 전투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 군대가 승리를 거둠으로써 비로소 오랜 정쟁이 종결됐다. 그러나 대립의 여파는 1880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수도로 한 아르헨티나 공화국이 선포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연방 수도가 됨으로써 오랜 정쟁은 막을 내렸지만, 그것으로 헌정 질서가 완전히 확립된 것은 아니었다. 해결해야 할 또 다른 과제는 팜파스 남쪽의 황야 지역에 거주하는 인디오를 국가질서 안으로 통합시키는 문제였다. 그러나 인디오를 국가질서 안으로 통합시킨다는 게 실제로 무엇을 의미했는지는 훌리오 A. 로카 대통령의 '인디오 토벌전'이 증명해준다. 공식적인 국가 구성원, 곧 '국민'으로 포섭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된 인디오 계층을 대규모 전쟁을 통해 오늘날의 파타고니아 지역으로 축출하고 말살하는 것, 그것이 '통합'의 실체였다.
이 글을 쓴 조영실 박사는 서울대학교 서어서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스페인 콤플루텐세 대학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수학했고, 아르헨티나 라플라타대학의 국제관계연구소에서 초빙연구원으로 근무했다. 현재 서울대와 숙명여대에서 스페인어, 스페인어권 명작, 중남미 문화, 중남미 문학 등을 강의하고 있다. 논문으로는 '마누엘 뿌익의 '거미여인의 키스'를 둘러싼 성 억압 기제의 극복', '문학생산의 장(場)과 보르헤스', '20세기 초 아르헨티나 대중소설 연구', '아르헨티나 끄리오이스모 문학과 모더니티의 상관성 연구', '로베르또 아를뜨의 작품에 나타난 근대저널리즘과 근대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 '테러리즘의 기억을 둘러싼 지식인들의 성찰적 담론' 등이 있다. 역서로는 '마술적 사실주의'(공역, 한국문화사, 2003), '세피아 빛 초상'(2005, 민음사),'세상에서 나가는 문'(2006, 다림)이 있다.
유리원판 필름을 제공한 사진연구가 정성길 씨는 사진의 매력에 빠져 인생과 사진을 바꾼 사람으로 대구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을 맡고 있다. 30년 전부터 국내 고서점과 미국, 독일, 일본 등을 돌며 사재를 털어 유리원판 필름과 사진을 수집했다. 정 씨는 그동안 '백년 전의 한국', '한국의 백년'이란 제목의 기록사진첩을 출간했지만 1세기 전의 세계문화기행을 담은 유리원판을 공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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