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수서[隋書] 동이열전(東夷列傳)
차 례
1. 고구려(高句麗)
2. 백제(百濟)
3. 신라(新羅)
4. 말갈(靺鞨)
5. 찬자평(撰者評)
○ 수서(隋書)[註001]
동이열전(東夷列傳)[註002]
1. 고려(高[구(句)]麗)[註003]
1)
○고려(高[구(句)]麗)[註004]고려(高麗)의 선조는 부여(夫餘)로부터 나왔다.[註005] 부여(夫餘王)이 일찍이 하백(河伯)의 딸[註006]을 잡아 방 안에 가두어 두었는데, 햇빛이 따라 다니면서 그녀를 비추었다. [그 빛을] 받고 마침내 임신을 하여 큰 알 한 개를 낳았다. [그 알 속에서]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오니 이름을 주몽(朱蒙)[註007]이라 하였다.[註008] 부여(夫餘)의 신하들이 주몽(朱蒙)은 사람의 소생이 아니라고 하여 모두 죽이자고 청하였으나, 왕(王)은 듣지 않았다. 그가 장성하여 사냥터에 따라 가서 [짐승을] 잡은 것이 가장 많자, 또 그를 죽이자고 [王에게] 청하였다. 그 어머니가 주몽(朱蒙)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니, 주몽(朱蒙)은 부여(夫餘)를 버리고 동남쪽으로 달아났다. [중도에] 큰 강[註009]을 만났는데, [물이] 깊어서 건널 수가 없었다. 주몽(朱蒙)이,“나는 하백(河伯)의 외손이요, 태양의 아들이다.[註010] 이제 어려움을 당하여 [나를] 추격하는 군사가 곧 뒤쫓아 오는데, 어떻게 하면 건널 수 있겠는가?” 하고 말하자, 물고기와 자라들이 [함께] 모여서 다리를 만들어 주어 주몽(朱蒙)은 건너 갈 수 있었으나, 추격하던 [(부여)夫餘의] 기병(騎兵)은 [강(江)을] 건너지 못하고 돌아갔다. 주몽(朱蒙)은 나라를 세워 스스로 국호(國號)를 고구려(高句麗)라 하고[註011] 고씨(高氏)로 성(姓)을 삼았다.[註012]
2)
○ 주몽(朱蒙)이 죽고 아들 여달(閭達)[註013]이 뒤를 이었다. 그의 손자 막래(莫來)[註014] 때에 와서는 군사를 일으켜 드디어 부여(夫餘)를 병합(幷合)하였다.[註015] 후손 위궁(位宮)[註016]에 이르러서는 위(魏) 정시(政始) 연간(A.D.240~248; 高句麗 東川王 14~中川王 1)에 서안평(西安平)[註017]을 침입하여 왔는데, 관구검(毋丘儉)이 그들을 물리쳤다.[註018]
3)
○ 위궁(位宮)의 현손의 아들은 소열제(昭列帝)[註019]라고 하는데, 모용씨(慕容氏)에게 격파되었다. [모용씨(慕容氏)는] 마침내 환도(丸都)에 들어가 그의 궁실(宮室)을 불태우고 크게 약탈한 뒤 돌아왔다. [註020] 소열제(昭列帝)는 뒤에 백제(百濟)[군(軍)]에게 피살되었다.[註021] 그의 증손 련(璉)[註022]이 후위(後魏)에 사신을 파견하였다.[註023] 련(璉)의 6세손 탕(湯)[註024]이 [북(北)]주(周)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조공(朝貢)하니,[註025] 무제(武帝)[註026]는 탕(湯)에게 상개부(上開府)[註027] 요동군공(遼東郡公)[註028] 요동왕(遼東王)[註029]을 제수(除授)하였다.[註030] 고조(高祖)[註031]가 [북주(北周)로부터] 선양을 받자, 탕(湯)이 다시 사신(使臣)을 보내어 궁궐(宮闕)에 이르렀다. [이에] 대장군(大將軍)[註032]으로 [장군호(將軍號)를] 올려주고 고려왕(高麗王)으로 고쳐 봉하였다. [이 뒤로부터] 해마다 사신(使臣)과 조공(朝貢)이 끊이지 않았다.[註033]
4)
○ 그 나라는 동서가 2천리, 남북이 1천여리이다.[註034] 국도(國都)는 평양성(平壤城)[註035]으로 장안성(長安城)[註036]이라고도 하는데, 동서가 6리이며 산을 따라 굴곡이 지고 남쪽은 패수(浿水)[註037]에 닿아 있다. 또 국내성(國內城)[註038]과 한성(漢城)[註039]이 있는데, 모두 도회지(都會地)로서 그 나라에서는 「삼경(三京)」[註040]이라 일컫는다.[註041] 신라(新羅)와는 늘 서로 침공하고 약탈하여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註042] 관위(官位)에는 태대형(太大兄)[註043]이 있고 그 아래에는 대형(大兄)[註044]· 소형(小兄)[註045]· 대로(對盧)[註046]· 의후사(意侯奢)[註047]· 오졸(烏拙)[註048]· 태대사자(太大使者)[註049]· 대사자(大使者)[註050]· 소사자(小使者)[註051]· 욕사(褥奢)[註052]· 예속(翳屬)[註053]· 선인(仙人)[註054]의 모두 12등급[註055]이 있다.[註056] 또 내평(內評)·외평(外評)[註057]· 오부(五部)[註058] 욕살(褥薩)[註059]이 있다.[註060]
5)
○ 사람들은 모두 가죽 관(冠)을 쓰는데, 사인(使人)은 새의 깃을 더 꽂고,[註061] 귀인(貴人)은 관(冠)[註062]을 붉은 비단으로 만들어 금(金)· 은(銀)으로 장식한다. 옷은 소매가 긴 적삼과 통이 넓은 바지를 입으며, 흰 가죽 띠에 노란 가죽신을 신는다. 부인(婦人)은 치마와 저고리에 선을 두른다.[註063] 병기(兵器)는 중국(中國)과 대략 같다.[註064] 매년 봄·가을에 사냥 대회를 여는데, 왕(王)이 몸소 참가한다.[註065] 인(人)[두(頭)]세(稅)는 베 5필(匹)에 곡식 5석(石)이다. 유인(遊人)[註066]은 3년에 한번을 내되, 열사람이 어울러서 세포(細布) 1필을 낸다. 조(租)는 [상(上)]호(戶)는 1석(石), 다음은 7두(斗), 그 다음은 5두(斗)이다.[註067] 반역을 한 자는 기둥에 묶어 불로 지진 다음 목을 베고, 그 집은 적몰(籍沒)한다. 도둑질을 하면 [그 물건의] 열배[註068]를 배상해야 한다. 형벌을 시행함이 매우 준엄하므로, 법을 범하는 자가 드물다.[註069] 악기(樂器)로는 오현(五絃)· 금(琴)· 쟁(箏)· 필율(篳篥)· 횡취(橫吹)· 소(簫)· 고(鼓) 등이 있고, 곡조(曲調)에 맞추어 갈대로 [만든 피리로] 합주한다.[註070] 해마다 연초에는 패수(浿水)가에 모여 놀이를 하는데, 왕(王)은 요여(腰輿)를 타고 나가 우의(羽儀)를 나열해 놓고 구경한다. 놀이가 끝나면 왕(王)이 의복(衣服)을 물에 던지는데, [군중들은] 좌우로 두 편을 나누어 물과 돌을 서로 [그 옷에다] 뿌리거나 던지고, 소리치며 쫓고 쫓기기를 두세 번 되풀이하고 그만 둔다.[註071] 풍속은 쪼그려 앉기를 좋아하며, 청결한 것을 즐긴다. 종종 걸음 치는 것을 공경으로 여기고, 절을 할 때는 한쪽 발을 끈다. 서 있을 적에는 반공(反拱)을 하고, 걸을 적에는 팔을 흔든다.[註072] [사람들의] 성격은 간사한 점이 많다. 부자(父子)가 한 시냇물에서 목욕을 하고 한 방에서 잠을 잔다.
부인(婦人)은 음란하고, 유녀(遊女)가 많다.[註073] 시집 장가드는 데도 남녀(男女)가 서로 사랑하면 바로 혼례를 치른다. 남자의 집에서는 돼지고기와 술을 보낼 뿐 재물을 보내는 예는 없다. 만약 재물을 받는 자가 있으면 사람들이 모두 수치로 여긴다. 사람이 죽으면 집 안에 안치하여 두었다가, 3년이 지난 뒤에 좋은 날을 가려 장사를 지낸다.[註074] 부모 및 남편의 상(喪)에는 모두 3년 복(服)을 입고, 형제의 [경우는] 3개월간 입는다. 초상(初喪)에는 곡(哭)과 읍(泣)을 하지만 장사지낼 때에는 북치고 춤추며 풍악을 울리면서 장송(葬送)한다. 매장(埋葬)이 끝난 뒤 죽은 자가 생존시에 썼던 의복(衣服)과 거마(車馬)를 모두 거두어다 무덤 옆에 두는데, 장례에 모였던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가져 간다.[註075] 귀신을 섬기어 음사(淫祠)가많다.[註076]
6)
○ 개황(開皇)(A.D.581~600; 高句麗 平原王 23~嬰陽王 11)초에는 입조(入朝)하는 사신(使臣)이 자주 있었으나, [註077] 진(陳)을 평정한 뒤[註078]로는 탕(湯)이 크게 두려워하여 군사를 훈련시키고 곡식을 저축하여 방어할 계획을 세웠다.
7)
○ [개황(開皇)] 17년(A.D.597; 高句麗 嬰陽王 8)[註079]에 문제(文帝)가 탕(湯)에게 새서(璽書)를 내려 말하였다. “짐(朕)이 천명(天命)을 받아 온 세상을 사랑으로 다스리매, 왕(王)에게 바다 한구석을 맡겨서 조정의 교화를 선양하여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저마다의 뜻을 이루게 하고자 하였오. 왕(王)은 해마다 사신(使臣)을 보내어 매년 조공(朝貢)을 바치며 번부(藩附)라고 일컫기는 하지만, 성절(誠節)을 다하지 않고 있소. 왕(王)이 남의 신하가 되었으면 모름지기 짐(朕)과 덕(德)을 같이 베풀어야 할 터인데, 오히려 말갈(靺鞨)을 못견디게 괴롭히고[註080] 거란(契丹)을 금고(禁錮)시켰소.[註081] 여러 번국(藩國)이 머리를 조아려 나에게 신첩(臣妾) 노릇을 하는게 [무엇이 나쁘다고 그처럼] 착한 사람이 의리를 사모하는 것을 분개하여 끝까지 방해하려 하오? 태부(太府)의 공인(工人)은 그 수가 적지 않으니, 왕(王)이 반드시 써야 한다면 [나에게] 주문(奏聞)하는 것이 당연한 데도, 여러해 전에는 몰래 재물은 뿌려 소인(小人)을 움직여 사사로이 노수(弩手)를 그대 나라로 빼어 갔소. 이 어찌 병기(兵器)를 수리하는 목적이 나쁜 생각에서 나온 까닭에 남이 알까 봐 두려워서 [사람을] 훔쳐 간 것이 아니겠소? 그때 사자(使者)를 보내어 그대 번국(藩國)을 위무한 것은 본래 그대들의 인정(人情)을 살펴보고, 정치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자 함이었소. 그린데 왕(王)은 사자(使者)를 빈 객관(客館)에 앉혀 놓고 삼엄한 경계를 펴며, 눈과 귀를 막아 영영 듣고 보지도 못하게 하였소. 무슨 음흉한 계획이 있기에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 관원을 금제(禁制)하면서까지 방찰(訪察)을 두려워하오? 또 종종 기마병(騎馬兵)을 보내어 변경 사람을 살해하고, 여러 차례 간계를 부려 사설(邪說)을 지어 내었으니, 신하로서의 마음가짐이 아니었소.
짐(朕)은 창생(蒼生)을 모두 적자(赤子)와 같이 여겨 왕(王)에게 땅을 내리고 벼슬을 주어 깊은 사랑과 남다른 혜택을 원근(遠近)에 드러내려 하였지만, 왕(王)은 오로지 불신감(不信感)에 젖어 언제나 시의(猜疑)하여 사인(使人)을 보낼 때마다 소식(消息)을 밀탐하여 가니, 순수한 신하의 도리가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소? 이는 모두 짐(朕)의 훈도(訓導)가 밝지 못한 연유이므로, 왕(王)의 잘못을 모두 너그러이 용서하겠으니, 오늘 이후로는 반드시 고치기 바라오. 번신(藩臣)의 예절을 지키고 조정의 정전(正典)을 받들어, 스스로 그대 나라를 교화시키고 남의 나라를 거스리지 않는다면, 길이 부귀를 누릴 것이며 진실로 짐(朕)의 마음에 드는 일이오.
그곳은 비록 땅이 협소하고 사람은 적지만, 넓은 하늘 밑은 다 짐(朕)의 신하가 되는 것이니, 이제 만약 왕(王)을 내쫓는다면 [왕(王)의 자리를] 비워둘 수는 없으므로, 결국은 조정 관원을 다시 가려 보내 그곳을 안무(安撫)하게 될 것이오. 왕(王)이 만약 마음을 씻고 행동을 바꾸어 헌장(憲章)을 그대로 따른다면 [왕(王)은] 곧 짐(朕)의 양신(良臣)이 되는 것이니, 무엇 때문에 수고롭게 따로 훌륭한 관원을 보내겠소. 예전에 제왕(帝王)은 법(法)을 마련할 적에 인(仁)과 신(信)을 우선으로 하여, 선(善)이 있으면 반드시 상을 내리고 악(惡)이 있으면 반드시 벌을 주니, 사해(四海)의 안이 함께 짐(朕)의 뜻을 따랐소. 만약 왕(王)이 죄가 없는 데도 짐(朕)이 갑자기 병력을 가한다면, 나머지의 번국(藩國)들이 나를 어떻게 말하겠소! 왕(王)은 반드시 허심탄회하게 짐(朕)의 이 뜻을 받아 들여 의혹을 갖지 말고 다시 생각을 돌리기 바라오. 지난 날 진숙보(陳叔寶)[註082]는 여러 대에 걸쳐 강(江)[남(南)][註083]에 있으면서 인민(人民)을 잔해(殘害)하고 우리의 봉후(烽候)를 놀라게 하며 우리의 변경을 약탈하였었소. 짐(朕)이 타이르고 훈계하기를 10년이나 하였으나, 그는 장강(長江)의 바깥이라는 것만 믿고 한 구석의 무리를 모아 미친듯이 거들먹거리며 짐(朕)의 말을 좇지 않았소. 때문에 장수에게 명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흉역(凶逆)을 제거토록 하였는데, 오가는 날짜는 한 달이 못되었고 군사도 수천 명에 지나지 않았었소. 역대의 포구(逋寇)를 하루아침에 말끔히 소탕하니, 원근이 안녕을 누리고 사람과 귀신이 모두 기뻐하였소. 그런데 왕(王)만이 이를 한탄하고 마음 아파한다는 말이 들리고 있소. [관리를] 물리치거나 박탈하고 지우거나 드러내는 것은 짐(朕)의 직권이니만치, 왕(王)에게 죄를 준다 하여도 진(陳)이 멸망되어서가 아니고, 왕(王)에게 상을 내린다 하여도 진(陳)이 존재하여서가 아닌데, 어찌하여 그처럼 화(禍)를 즐기고 난(亂)을 좋아하고 있소? 왕(王)은 요수(遼水)[註084]의 폭이 장강(長江)과 어떠하며, 고려(高[구(句)]麗)의 인중(人衆)이 진국(陳國)과 어떠하다고 보고 있소? 짐(朕)이 만약 포용하여 길러 주려는 생각을 버리고 왕(王)의 지난날의 허물을 문책하고자 하면 한명의 장수로도 족하지 무슨 많은 힘이 필요하겠소! 간절히 깨우쳐 주어 개과천선(改過遷善)할 기회를 허락하노니, 마땅히 짐(朕)의 뜻을 알아서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기 바라오.” 탕(湯)은 이 글을 받고 황공하여 표문(表文)을 올려 사죄하러 하였으나, 마침 병으로 졸(卒)하였다.[註085]
8)
○ 아들 원(元)[註086]이 왕위(王位)에 오르니, 고조(高祖)는 사신(使臣)을 [파견하여] 원(元)에게 상개부의 동삼사(上開府儀同三司)를 제수(除授)하는 한편, 요동군공(遼東郡公)을 세습시키고 옷 한벌을 내려 주었다. 원(元)이 표문(表文)을 올려 사례함과 아울러 상서(祥瑞)를 축하하면서 왕(王)으로 책봉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고조(高祖)는 특별히 원(元)을 책봉하여 왕(王)으로 삼았다.[註087] 이듬해[註088]에 원(元)이 말갈(靺鞨)의 기병 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遼西)[註089]에 침입하였는데 영주총관(營州總管)[註090] 위충(韋沖)[註091]이 물리쳤다. 고조(高祖)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한왕(漢王) 양(諒)[註092]을 원수(元帥)로 삼고 수군과 육군[註093]을 총동원하여 고려(高[구,句]麗)를 치게 하는 한편, 조서(詔書)를 내려 그의 작위(爵位)를 삭탈하였다. 이때 군량 수송이 중단되어 육군(六軍)의 먹을 것이 떨어지고, 또 군사가 임유관(臨渝關)[註094]을 나와서는 전염병마저 번져 왕사(王師)의 군대는 기세를 떨치지 못하였다. [수군(隋軍)이] 요수(遼水)에 진주하자, 원(元)도 두려워하여 사신(使臣)을 보내어 사죄하고 표문(表文)을 올리는데, ‘요동(遼東) 분토(糞土)의 신(臣) 원(元) 운운(云云)’하였다. 고조(高祖)는 이에 군사를 거두어 들이고, 과거와 같이 대우하였다.[註095] 원(元)도 해마다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朝貢)하였다.[註096]
9)
○ 양제(煬帝)가 제위(帝位)를 이어 받으매 천하(天下)가 전성하여, 고창(高昌)[국(國)]왕(王)[註097]과 돌궐(突厥)의 계인가한(啓人可汗)[註098]이 친히 대궐에 나아와 조공(朝貢)을 바쳤다. 이때 원(元)에게 입조(入朝)케 하니, 원(元)이 두려워하여 자못 번신(藩臣)의 예절을 소홀히 하였다.
10)
대업(大業) 7년(A.D.611; 高句麗 嬰陽王 22)에 [양(煬)]제(帝)가 원(元)의 죄를 물어 토벌하기 위하여 친히 요수(遼水)를 건너 요동성(遼東城)[註099]에 군영을 설치한 뒤,[註100] 길을 나누어 군사를 출동시켜[註101] 각기 그 성(城) 아래로 집결하도록 하였다. 고려(高[구(句)]麗)는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저항하였으나 대부분의 싸움에서 불리하자, 모두 성(城)을 닫고 굳게 수비하였다. [양(煬)]제(帝)는 제군(諸軍)에 명하여 성(城)을 공격케 하였다. 또 여러 장수들에게 조칙(詔勑)하여, “고려(高[구(句)]麗)가 만약 항복을 하면 바로 받아들이고, 함부로 군사를 풀어 공격하여서는 아니된다.” 고 하였다. 성(城)이 막 함락될 즈음, 고구려(高句麗)가 곧 항복하겠다고 청하였으나, 여러 장수들이 제지(帝旨)에 따라 함부로 그 기회를 이용하여 공격하지 못하고, 먼저 [양제(煬帝)에게] 달려가서 아뢰었다. 답보(答報)가 도착할 무렵이면 적들의 수비 역시 정비되어 [다시 성(城)을] 나와서 저항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세 번을 되풀이하였으나 [양(煬)]제(帝)는 깨닫지 못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군량은 다하고 군사는 지친 데다, 군량 수송마저 중단되어 제군(諸軍)이 패전하니, 결국 반사(班師)하고 말았다. 이 출전에서는 단지 요수(遼水) 서쪽에 있는 적(賊)의 무려라(武厲邏)[註102]만을 함락시켜 요동군(遼東郡)[註103] 및 통정진(通定鎭)[註104]을 설치하고 돌아왔을 뿐이다.[註105]
11)
○ [대업(大業)] 9년(A.D.613; 高句麗 嬰陽王 24)에 [양(煬)]제(帝)가 다시 친정(親征)하였다. 이때는 제군(諸軍)에게 상황에 맞게 적절히 대응하라고 칙지(勑旨)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길을 나누어 성(城)을 공격하니,[註106] 적의 군세가 날로 위축되었다. 이 무렵 양현감(楊玄感)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반서(反書)가 도착되자,[註107] [양(煬)]제(帝)는 크게 두려워하여 그날로 육군(六軍)을 이끌고 돌아 왔다. [이때] 병부시랑(兵部侍郞) 곡사정(斛斯政)[註108]이 고려(高[구(句)]麗)로 망명하여 들어가니, 고려(高[구(句)]麗)가 정보를 낱낱이 알고서 정예병을 총동원하여 추격을 가하여 후속의 부대는 대부분 패하였다.
12)
○ [대업(大業)]10년(A.D.614; 高句麗 嬰陽王 25)에 또 다시 천하(天下)의 군사를 징벌하였으나, 때마침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 인민이 유망(流亡)하고, 곳곳마다 교통이 두절되어 군사가 대개 기한(期限)에 맞추어 오지 못했다. 요수(遼水)에 이르자, 고려(高[구(句)]麗)도 피폐되어졌기 때문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항복을 청하는 동시에 곡사정(斛斯政)을 압송하여 속죄하였다. [양(煬)]제(帝)는 이를 허락하고 회원진(懷遠鎭)[註109]에 주둔하면서 항관(降款)을 접수하였다. 아울러 포로와 노획한 군기(軍器)들을 이끌고 돌아왔다. [양제(煬帝)는] 경사(京師)에 이르러 고려(高[구(句)]麗)의 사자(使者)로 하여금 친히 태묘(太廟)에 고(告)하도록 한 뒤 억류시켰다. 이어서 원(元)을 불러 들여 입조(入朝)토록 하였으나, 원(元)이 끝내 오지 않았다. [양(煬)]제(帝)는 제군(諸軍)을 엄중히 정비하여 다시 토벌할 것을 꾀하였으나, 마침 천하(天下)가 크게 어지
러워져 결국 시행하지 못하였다.[註110]
2. 백제(百濟)
○ 백제(百濟)[註001]
1)
○백제(百濟)의 선대(先代)는 고려국(高[구,句]麗國)에서 나왔다.[註002] 그 나라 왕의 한 시비(侍婢)가 갑자기 임신을 하게 되어 왕(王)은 그녀를 죽이려고 하였다. 시비(侍婢)가 말하기를, “달걀같이 생긴 물건이 나에게 내려와 닿으면서 임신이 되었습니다.” 고 하자, 그냥 놓아 주었다. 뒤에 드디어 사내 아이 하나를 낳았는데, [죽으라고] 뒷간에 버렸으나 오래도록 죽지 않았다. [왕(王)이] 신령스럽게 여겨 기르도록 명하고,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였다. 장성하자 고려왕(高[구,句]麗王)이 시기를 하므로, 동명(東明)은 두려워하여 도망가서 엄수(淹水)[註003]에 이르렀는데, 부여(夫餘) 사람들이 그를 모두 받들었다.
2)
○ 동명(東明)의 후손에 구태(仇台)[註004]라는 자가 있으니, 매우 어질고 신의(信義)가 두터웠다. [그가] 대방(帶方)의 옛 땅에 처음 나라를 세웠다.[註005] 한(漢)의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가 딸을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註006] 나라가 점점 번창하여 동이(東夷) 중에서 강국(强國)이 되었다. 당초에 백가(百家)가 바다를 건너 왔다(제,濟)고 해서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라 불렀다.[註007] [이때부터] 십여대 동안 대대로 중국(中國)의 신하 노릇을 하였는데, 전사(前史)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개황(開皇)(A.D.581~600; 百濟 威德王 28~武王 1) 초에 그 나라의 왕(王) 여창(餘昌)이 사신(使臣)을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치니, 창(昌)을 상개부(上開府) 대방군공(帶方郡公) 백제왕(百濟王)으로 삼았다.[註008]
3)
○ 그 나라는 동서로는 450리 이고 남북으로는 900여리며,[註009] 남쪽은 신라(新羅)에 닿고, 북쪽은 고려(高[구,句]麗)가 버티고 있다. 국도(國都)는 거발성(居拔城)[註010]이다. 관직(官職)은 16품계가 있다.[註011] 제일 높은 것은 좌평(左平)[註012]이며, 그 다음은 대솔(大率)[註013]· 은솔(恩率)· 덕솔(德率)· 간솔(杆率)· 내솔(奈率)· 덕장(將德)으로, [이상은 모두] 자대(紫帶)를 두른다. 그 다음으로 시덕(施德)은 조대(皂帶)를, 고덕(固德)은 적대(赤帶)를, 이덕(李德)은 청대(靑帶)를 두른다. 대덕(對德) 이하는 모두 황대(黃帶)를, 문독(文督)[註014]· 무독(武督)· 좌군(佐軍)· 진무(振武)· 극우(剋虞)는 모두 백대(白帶)를 두른다. 관제(冠制)도 아울러 같고, 단지 내솔(奈率) 이상만은 은화(銀花)로 장식을 한다.[註015] 장사(長史)[註016]는 3년에 한 번씩 교체한다. 기내(畿內)는 5부(部)[註017]로 나뉘는데, 부(部)에는 5항(巷)이 있으며, 사인(士人)들이 산다. 5방(方)에는 각기 방령(方領) 한사람씩을 두는데, 방좌(方佐)가 그를 보좌하였다. 방(方)마다 10군(郡)이 있고 군(郡)에는 장수(장,將)를 둔다. 사람들은 신라(新羅)· 고려(高[구,句]麗)· 왜(倭) 등이 섞여 있으며, 중국(中國)사람도 있다.[註018]
4)
○ 의복(衣服)은 고려(高[구,句]麗)와 대략 같다.[註019] 부인(婦人)은 분을 바르거나 눈썹을 그리지 아니하고, 처녀는 머리를 땋아 뒤로 드리웠다가[註020] 시집을 가면 두 갈래로 나누어 머리 위로 틀어 올린다. 풍속이 말타기와 활쏘기를 숭상하며, 고서(古書)와 사서(史書)를 읽고, 관리의 일도 잘 본다.
또 의약(醫藥)· 시구(蓍龜)[註021]· 고상술(古相術)도 안다. 두 손을 땅에 닿게하는 것으로 공경을 나타냈다. 승니(僧尼)가 있고, 사탑(寺塔)이 많다.[註022] 고각(鼓角)[註023]· 공후(箜篌)[註024]· 쟁(箏)[註025]· 우(竽)[註026]· 호(箎)[註027]·적(笛)[註028]의 악기가 있고, 투호(投壺)[註029]· 위기(圍棊)[註030]· 저포(樗蒲)[註031]·악삭(握槊)[註032]· 농주(弄珠)[註033]의 놀이가 있다. 송(宋)의 원가력(元嘉曆)[註034]을 사용하여 인월(寅月)을 세수(歲首)로 삼는다. 나라 안에는 여덟 씨족의 대성(大姓)이 있으니,[註035] 사씨(沙氏)[註036]· 연씨(燕氏)[註037]· 이씨(刕氏)[註038]· 해씨(解氏)[註039]· 정씨(貞氏)[註040]· 국씨(國氏)[註041]· 목씨(木氏)· 백씨(苩氏)[註042]이다. 결혼하는 예절은 대개 중국(中國)과 같고, 상제(喪制)는 고려(高[구,句]麗)와 같다.[註043]
5곡(穀)과 소· 돼지· 닭이 있으나 대개 화식(火食)을 하지 않는다. 토지는 낮고 습하여 사람들은 모두 산에서 산다.[註044] 굵은 밤(율,栗)이 난다. 해마다 매 계절의 중월(仲月)에 왕(王)은 하늘 및 오제(五帝)의 신(神)에게 제사한다. 그 시조(始祖) 구태(仇台)의 사당을 도성(都城) 안에 세워 놓고, 해마다 네번씩 제사한다.[註045] 나라의 서남쪽에 사람이 살고 있는 섬이 15군데 있는데, 모두 성읍(城邑)이 있다.
5)
○ 진(陳)을 평정한 해에[註046] 어떤 전선(戰船) 한척이 표류하여 바다 동쪽의 모라국(牟羅國)[註047]에 닿았다. 그 배가 [본국으로] 돌아올 적에 백제(百濟)를 경유하니, [여(餘)]창(昌)이 필수품을 매우 후하게 주어 보냈다. 아울러 사신(使臣)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올려 진(陳)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였다. 고조(高祖)는 이를 갸륵하게 여겨 조서(詔書)를 내려, “백제왕(百濟王)이 진(陳)을 평정한 소식을 듣고 멀리서 표문(表文)을 올려 [축하하였으나] 왕래하기가 지극히 어려워서 만약 풍랑을 만난다면 인명이 손상될 것이오. 백제왕(百濟王)의 진실한 심정은 짐(朕)이 벌써 잘 알고 있소. 서로 거리는 멀다 하여도 [밀접한 관계는] 얼굴을 마주 대하고 이야기 하는 거나 마찬가지이니, 어찌 반드시 사신(使臣)을 자주 보내와 서로 다 알아야 되겠소? 이제부터는 해마다 따로 조공(朝貢)을 바칠 것이 없소. 짐(朕)도 사신(使臣)을 보내지 않으리니 왕(王)은 알아서 하시오.” 라고 하였다. 사자(使者)가 춤을 추며 돌아갔다.[註048]
6)
○ 개황(開皇) 18년(A.D.598; 百濟 惠王 1) [註049]에 창(昌)이 그의 장사(長史)[註050] 왕변나(王辯那)를 보내와 방물(方物)을 바쳤다. 마침 요동정벌(遼東征伐)을 일으키자, 사신(使臣)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올려 [수군(隋軍)의] 선도(先導)가 될 것을 청하였다. [문(文)]제(帝)는 조서(詔書)를 내려,“지난해에 고려(高[구,句]麗)가 직공(職貢)을 닦지 않고 인신(人臣)의 예의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장수들에게 명하여 토벌하라고 하였소. 고원(高元)의 군신(君臣)이 두려워하여 죄를 스스로 인정하고 복종하므로, 짐(朕)은 벌써 죄를 용서하여 주어 토벌할 수가 없소.” 라고 하고, 그 사신(使臣)을 후대하여 보냈다. 고려(高[구,句]麗)가 대략 이 사실을 알고, 병사를 내어 백제(百濟)의 국경을 침략하였다. 창(昌)이 사(死)하니, 아들 여선(餘宣)이 왕위(王位)에 올랐다. [여선(餘宣)이] 사(死)하니, 아들 여장(餘璋)이 왕위(王位)에 올랐다.[註051]
7)
○ 대업(大業) 3년(A.D.607; 百濟 武王 8)에 장(璋)이 사자(使者) 연문진(燕文進)[註052]을 보내어 조공(朝貢)하였다. 그해에 또 사자(使者) 왕효린(王孝鄰)을 보내어 공물(貢物)을 바치면서 고려(高[구,句]麗)의 토벌을 청하였다. 양제(煬帝)는 이를 허락하고, 고려(高[구,句]麗)의 동정을 엿보게 하였다. 그러나 장(璋)은 안으로는 고려(高[구,句]麗)와 통화(通和)를 하면서 간사한 마음을 가지고 중국(中國)을 엿본 것이었다. [대업(大業)] 7년(A.D.611; 百濟 武王 12) [註053]에 [양(煬)]제(帝)가 몸소 고려(高[구,句]麗)를 정벌하려 하자, 장(璋)이 그의 신하 국지모(國智牟)를 보내와 출병(出兵)의 시기를 물었다. [양(煬)]제(帝)가 크게 기뻐하여 상을 후하게 내리고, 상서기부랑(尙書起部郎) 석률(席律)을 백제(百濟)에 보내어 [시기를] 서로 알게 하였다. 이듬해에 6군(軍)[註054]이 요수(遼水)를 건너니, 장(璋)도 군사를 [고구려(高句麗)의] 국경에 엄중히 배치하고, [수(隋)]군(軍)을 돕는다고 공공연히 말만 하면서 실제로는 양단책(兩端策)을 쓰고 있었다. 얼마 안 되어 신라(新羅)와 틈이 생겨 자주 전쟁을 하였다. [대업(大業)] 10년(A.D.614; 百濟 武王 15)에 다시 사신(使臣)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고, 그 뒤로는 천하(天下)가 어지러워져 마침내 사명(使命)이 끊겼다.
8)○ 그 나라의 남쪽에서 바다로 석달을 가면 모라국(牟羅國)이 있는데, 남북으로는 천여리이고 동서로는 수백리이며, 토산물로는 노루와 사슴이 많다. 백제(百濟)에 부용(附庸)되어 있다. 백제(百濟)에서 서쪽으로 사흘을 가면 맥국(貊國)에 이른다고 한다.
3. 신라(新羅)
○ 신라(新羅)[註001]
1)
○신라국(新羅國)은 고려(高[구,句]麗)의 동남쪽에 있는데, 한대(漢代)의 낙랑(樂浪) 땅으로서 사라(斯羅)라고도 한다. 위(魏)나라 장수 관구검(毋丘儉)이 고[구]려를 토벌하여 격파하니, [고구려]는 옥저(沃沮)로 쫓겨 갔다. [그들은] 그 뒤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는데, [이때에 따라가지 않고] 남아 있던 자들이 마침내 신라(新羅)를 세웠다.[註002] 그러므로 그 나라는 중국·고[구]려·백제의 족속들이 뒤섞여 있으며 옥저(沃沮)·불내(不耐)·한(韓)·예(獩)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 그 나라의 왕(王)은 본래 백제(百濟) 사람이었는데,[註003] 바다로 도망쳐 신라로 들어가 마침내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
2)
○ 왕위(王位)가 김진평(金眞平)에 이른 개황(開皇) 14년(A.D.594; 新羅 眞平王 16)에 견사(遣使)하여 방물(方物)을 바쳤다.[註004] 고조(高祖)는 진평(眞平)을 상개부(上開府)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 그의 선대(先代)는 백제에 부용(附庸)하였는데, 뒤에 백제의 고려(高[구,句]麗) 정벌로 말미암아 고려인(高[구,句]麗人)이 군역(軍役)을 견디지 못하고 무리를 지어와 신라(新羅)에 귀화하니, [신라는] 마침내 강성하여져 백제(百濟)를 습격하고, 가라국(迦羅國)[註005]을 부용국(附庸國)으로 삼았다.
3)
○ 그 나라의 관직은 17등급이 있다.[註006] 1등급은 이벌간(伊罰干)이라 부르는데 존귀하기가 [중국의] 상국(相國)과 같다. 다음은 이척간(伊尺干)· 영간(迎干)· 파미간(破彌干)[註007]· 대아척간(大阿尺干)[註008]· 아척간(阿尺干)· 을길간(乙吉干)[註009]· 사돌간(沙咄干)[註010]· 급복간(及伏干)[註011]· 대내마간(大奈摩干)· 내마(奈摩)[註012]· 대사(大舍)· 소사(小舍)[註013]· 길토(吉土)· 대오(大烏)· 소오(小烏)· 조위(造位)[註014]의 차례이다. 지방에는 군(郡)과 현(縣)이 있다.[註015]
문자(文字)와 갑병(甲兵)은 중국(中國)과 같다. 건장한 남자는 모두 뽑아 군대에 편입시켜 봉수(烽燧)· 변수(邊戍)· 순라(巡邏)로 삼았으며, 둔영(屯營)마다 부오(部伍)가 조직되어 있다.
4)
○ 풍속(風俗)· 형정(刑政)[註016]· 의복(衣服)은 대략 고려(高[구,句]麗)· 백제(百濟)와 같다. 매년 정월(正月) 원단(元旦)에 서로 하례(賀禮)하는데, 왕은 연회를 베풀어 뭇 관원의 노고를 치하한다.[註017] 이 날에는 일신(日神)과 월신(月神)에게 제(祭)를 올린다. 8월 15일에는 풍악을 베풀고 관인(官人)들로 하여금 활을 쏘게 하여 말과 베를 상으로 준다.[註018] 국가에 큰일이 있으면 뭇 관원을 모아 자세히 논의한 다음에 결정을 한다.[註019] 복색(服色)은 흰 빛을 숭상한다.[註020] 부인(婦人)들은 변발(辮髮)하여 머리 위로 감아 올려 갖가지의 비단과 구슬로 장식을 한다. 혼인 의식에는 술과 음식뿐인데, 잘 차리고 못 차리는 것은 빈부(貧富)에 따라 다르다. 신혼날 저녁에 신부는 먼저 시부모에게 절을 올린 다음 신랑에게 절한다. 사람이 죽으면 감습(歛襲)을 하여 관(棺)에 넣고, 시체를 땅에 묻고는 봉분을 세운다. 왕(王)과 부모 및 처자의 상(喪)에는 1년간 복(服)을 입는다.[註021] 땅이 매우 비옥하여 논곡식과 밭곡식을 모두 심을 수 있다. 오곡(五穀)·과일·채소·새·짐승 등 물산(物産)은 대략 중국과 같다.
5)
○ 대업(大業)(A.D.605~616; 新羅 眞平王 27~38) 이래 해마다 조공(朝貢)을 바쳤다.[註022] 신라(新羅)는 지리상 산이 많고 길이 험하므로, 백제와 사이가 나빠도 백제 역시 그들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4. 말갈(靺鞨)
○ 말갈(靺鞨)[註001]
1)
○말갈(靺鞨)[註002]은 고려(高[구,句]麗)의 북쪽에 있다. 읍락(邑落)마다 추장(酋長)이 따로 있어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 않다. 모두 7종(種)이 있다.
그 첫째는 속말부(粟末部)[註003]로서 고려(高[구,句]麗)와 인접하여 있는데, 정병(精兵)이 수천명으로 용감한 병사가 많아, 늘 고려(高[구,句]麗)를 침입하였다.
둘째는 백돌부(伯咄部)[註004]로서 속말(粟末)[부,部]의 북쪽에 있으며, 정병(精兵)이 7천이 다.
세째는 안거골부(安車骨部)[註005]로서 백돌(伯咄)[부,部]의 동북쪽에 있다.
네째는 불녈부(拂部)[註006]로서 백돌(伯咄)[부,部]의 동쪽에 있다.
다섯째는 호실부(號室部)[註007]로서 불녈(拂)[부,部]의 동쪽에 있다.
여섯째는 흑수부(黑水部)[註008]로서 안거골(安車骨)[부,部]의 서북쪽에 있다.
일곱째는 백산부(白山部)[註009]로서 속말(粟末)[부,部]의 동남쪽에 있다.
[이들은] 정병(精兵)이 모두 3천에 불과한데, 흑수부(黑水部)가 가장 굳세고 건장하였다. 불녈(拂)[부,部]에서부터 동쪽지방은 화살이 다 돌촉(석족,石鏃)[註010]인데, 곧 옛날 숙신씨(肅愼氏)의 [땅이기 때문이다.]
2)
○ 주거(住居)는 대개 산수(山水)에 의지하며, 우두머리를 대막불만돌(大莫弗瞞咄)[註011]이라 하는데, 동이(東夷) 가운데에서는 강국(强國)이다. 도태산(徒太山)[註012]이라는 산이 있어 풍속에 매우 숭상하고 두려워한다. 산 위에는 웅(熊)· 비(羆)· 표(豹)· 한(狠)이 있으나 모두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사람도 이들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註013] 지대가 낮고 습하여[註014] 흙을 둑과 같이 쌓고 구덩이를 파서 거처하는데, 출입구를 위로 향하게 내어 사다리를 놓고 드나든다.[註015] 두사람이 짝을 지어 밭을 간다.[註016] 곡식으로는 조·보리·검은 기장이 많이 난다. 물맛은 소금기가 배어 있으며, 나무 껍질 위에도 소금이 엉긴다.[註017] 가축으로는 돼지가 많다.[註018] 쌀을 씹어 술을 만드는데, 마시기만 하면 취한다.[註019] 부인(婦人)은 베옷을 입고 남자는 돼지가죽으로 옷을 해 입는다. 오줌으로 세수를 하는데, 모든 오랑캐 가운데서도 가장 불결하다.[註020] 풍속이 음탕하고 투기가 많다. 남의 아내가 외간 남자와 간통한 것을 어떤 사람이 그 남편에게 알려 주면 남편은 즉시 아내를 죽이는데, 죽이고는 후회를 하여 반드시 알려 준 자를 죽이곤 한다. 이로 말미암아 간음(姦淫)에 대한 일은 끝내 폭로되지 않는다.[註021] 사람들은 모두 사냥으로 업(業)을 삼는데 각궁(角弓)[註022]은 길이가 3척(尺)이고 그 화살은 1척(尺) 2촌(寸)이다. 해마다 7∼8월에 독약을 만들어 화살에 발라 새나 짐승을 쏘는데, 맞는대로 그 자리에서 죽는다.[註023]
3)
○ 개황(開皇)(A.D.581~600; 高句麗 平原王 23~嬰陽王 11) 초에 [여러 부족이] 서로 어울려서 사자(使者)를 보내어 공물(貢物)을 바쳤다.[註024] 고조(高祖)가 그 사자(使者)에게 조서(詔書)하여, “짐(朕)은 그곳의 사람들이 대체로 용감하고 민첩하다고 들었는데, 이제 만나 보니 실로 짐(朕)의 마음에 든다. 짐(朕)은 너희들을 아들과 같이 여기고 있으니, 너희들도 짐(朕)을 아버지처럼 공경하라.”고 말하니, [그 사자(使者)가] “신들은 한 구석에 외지게 살고 있어서 길은 멀고멀지만, 중국(中國)에 성인(聖人)이 계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와서 조배(朝拜)를 하는 것입니다. 위로를 받고 친히 성안(聖顔)을 뵈오니 하정(下情)의 기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길이 노복(奴僕)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라고 대답하였다.
4)
○ 그들의 나라가 서북쪽으로 거란(契丹)과 서로 닿아 있어서 늘 서로 침략하였다.[註025] 뒤에 그 사신이 왔을 적에, 고조(高祖)가,“내가 거란(契丹)을 생각해 주는 것은 너희들과 다를 것이 없다. 의당 저마다의 국경이나 지키고 있다면 어찌 안락하지 않겠는가. 무엇 때문에 수시로 서로 공격을 하여 나의 뜻을 이다지도 저버리는가,”라고 타이르니, 사자(使者)가 사죄를 하였다. 고조(高祖)가 따뜻하게 위로하여 주고 어전(御前)에서 연회를 베풀어 술을 마시게 하였더니, 사자(使者)가 그의 무리들과 함께 일어나 춤을 추는데, 몸놀림이 대개 전투를 하는 자세였다.[註026]
고조(高祖)는 시신(侍臣)을 돌아보며, “천지(天地) 사이에 이런 물건들이 있어 항상 전쟁할 뜻을 가지고 있음이 어찌 이리 심한가.”하였다. 그러나 그 나라들은 수(隋)와 아주 멀리 떨어져 있고, 속말(粟末)[부,部]와 백산(白山)[부,部]만이 가까웠다.
5)
○ [수(隋)] 양제(煬帝) 초에 고려(高[구,句]麗)와의 싸움에서 자주 그들을 물리치니, 그의 거수(渠帥) 도지계(度地稽)[註027]가 그 부(部)의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해 왔다. [양제(煬帝)는 그에게] 우광록대부(右光祿大夫)를 제수(除授)하고, 유성(柳城)[註028]에 거주시켜 변방 사람과 내왕을 하게 하였다. 중국(中國)의 풍속을 좋아하여 관대(冠帶)를 청하니,[註029] [양(煬)]제(帝)는 이를 가상히 여겨 금기(錦綺)를 내려주고 총애(寵愛)하였다. 요동정벌(遼東征伐)[註030] 때에도 도지계(度地稽)가 그 무리들을 이끌고 종군(從軍)하였는데, 전공(戰功)을 세울 때마다 상을 매우 후하게 내렸다. [대업(大業)] 13년(A.D.617; 高句麗 嬰陽王 28)에 [양(煬)]제(帝)를 따라 강도(江都)에 갔다. 얼마 후 유성(柳城)으로 돌아가는데, 중도에서 이밀(李密)의 난[註031]을 만나 밀(密)이 군사를 보내어 요격하므로, 앞뒤 십여 차례의 싸움을 치르고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고양(高陽)[註032]에 이르러서 다시 왕수발(王須拔)에게 함락 당하였다. 얼마 안 되어 나예(羅藝)[註033]로 도망쳐 갔다.
5. 찬자평(撰者評)
○ 사신(史臣)은 말한다. 넓은 계곡과 큰 시내는 생김 자체가 다르므로 그 사이에서 사는 사람들의 풍속도 다르다. 기욕(嗜欲)이 같지 않고 언어(言語)도 통하지 않는다. 성인(聖人)이 시의(時宜)에 따라 가르침을 베푸는 것도 그 뜻을 전달하고 습속을 통하게 하자는 것이다. 구이(九夷)[註034]가 살고 있는 곳은 중화(中華)와는 아주 동떨어져 있다. 그러나 천성(天性)이 유순하고 광폭(獷暴)한 기풍이 없어서, 비록 산(山)과 바다로 막혀 있어도 도어(導御)하기가 쉽다. 하(夏)· 은대(殷代)에도 이따금 조근(朝覲)을 왔고, 기자(箕子)가 조선(朝鮮)으로 피하여 가고부터는[註035] 비로소 팔조(八條)의 금법(禁法)[註036]을 두니, [그 법(法)이] 성글면서도 빈틈이 없고 간촐하면서도 오래갈 수 있어, 교화(敎化)의 영향이 천년토록 끊이지 않았다.
이제 요동(遼東)의 여러 나라들이 혹은 의복(衣服)에 관면(冠冕)의 모양을 갖추고, 혹은 먹고 마심에 조두(俎豆)의 그릇을 마련하였으며, 경술(經術)을 숭상하고 문사(文史)를 좋아하여[註037] 경도(京都)에 유학(游學)을 오는 자가 길에 끊이지 않고 더러는 일생을 마치도록 돌아가지 않기도 하니, 선철(先哲)의 유풍(遺風)이 아니었다면 그 누가 이런 일을 이룩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공자(孔子)는 ‘말이 충신(忠信)하고 행동이 독경(篤敬)하면 만맥(蠻貊)의 나라일지라도 통할 수 있다’고 하였다. 참되도다. 그 말씀이여 ! 그 풍속에서 취해 올만한 것이 어찌 고시(楛矢)의 공물(貢物) 뿐이겠는가. 고조(高祖)가 [북(北)]주(周)를 통치한 이래 중국(中國)에 은혜를 베풀기 위하여 개황(開皇)(A.D.581~600; 高句麗 平原王 23~嬰陽王 11) 말기에는 바야흐로 요좌(遼左)를 토벌하였으나,[註038] 천시(天時)가 불리하여 결국 전공(戰功)을 세우지 못하였다.
이세(二世)가 제위(帝位)를 이어받고서는 우주(宇宙)를 포용할 뜻으로 자주 삼한(三韓)의 땅을 짓밟고 여러 차레 천균(千鈞)의 쇠뇌(노,弩)를 쏘아대니,[註039] 조그마한 [고구려(高句麗)]국(國)은 멸망할까 두려워한 나머지 궁지에 몰린 짐승처럼 하였고, 중단없는 싸움에 천하가 어지러워져 드디어는 흙더미처럼 무너져, [양제(煬帝)] 자신도 죽고 나라도 망하였다. 「병지(兵志)」에 ‘덕(德)을 넓히는 데에 힘쓰는 자는 번창하고, 땅을 넓히는 데에 힘쓰는 자는 멸망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므로 요동(遼東)의 땅[註040]이 [중국(中國)의] 군(郡)· 현(縣)에 편입되지 않은 지는 오래지만, 모든 나라에서 조근(朝覲)과 조공(朝貢)은 빼놓은 해가 없었다. 그러나 이세(二世)는 나만한 사람은 없다고 여기고 떠들썩하게 으시대느라, 문덕(文德)으로 회유하지 못하고 급히 간과(干戈)를 움직였으니, 안으로 부강함을 믿고 밖으로는 국토의 확장만을 생각하여, 교만으로 원한을 사고 분노로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고도 망하지 않았다는 것은 예로부터 듣지 못하였다.[註041] 그러므로 사이(四夷)가 준 경계(警戒)를 어찌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