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당진에서 사역하는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공세리 성당에 들렀다. 이 성당은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지어진 고딕 성당(1922년)으로,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아담한 건물이지만, 그 규모에 걸맞지 않게 성당 주변에는 330년이 넘은 팽나무들이 세 그루 넘게 서 있었다. 성당을 둘러싼 정원과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묵상할 수 있는 오솔길이 조성되어 있어, 이곳의 고요한 아름다움은 방문자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차분하게 만들었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이라는 별칭을 가진 공세리 성당을 걸으며, 오래전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알려진 멜 깁슨(Mel Columcille Gerard Gibson)이 감독한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가 떠올랐다. 이 영화는 예수님이 로마 군인에게 체포되신 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의 과정을 묘사한 작품으로, 부활절이 다가오면 고난주간 동안 많은 교회에서 상영되곤 한다. 영화는 예수님의 죽음의 과정을 극도로 사실적으로 표현해 논란을 일으켰지만, 그리스도인들 중에 거부감을 보이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천주교(로마가톨릭) 신학의 핵심 사상, 즉 고통에 대한 과도한 집중과 묵상이 담겨 있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천주교 신학에서는 사랑(은혜)의 열매인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사랑의 씨앗을 자라게 하는 양분인 순종이 필수적이다. 이 양분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순종인 것이다. 십자가의 길은 곧 예수님처럼 고난을 겪는 것을 뜻하기에, 천주교 영성가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을 자신의 몸에 새기는 것을 순종의 극치로 여긴다. 예를 들어,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오상(五傷: 손과 발, 옆구리에 난 다섯 개의 상처)의 고통을 예수님을 닮기 위한 것(imitatio)이며, 예수님과 하나가 되기 위한(conformitas)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천주교에는 이러한 영적 체험을 경험한 영성가들이 400명이 넘는다. 이로 인해 천주교에서는 일상생활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겪는 고난과 고통보다, 예수님과 동일한 육체적 고통을 겪는 것을 더 큰 순종과 선행으로 간주한다. 당연히 천주교에서는 사랑의 열매인 구원을 이러한 고통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이 더 우선적으로 받을 수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성경은 예수님이 받으신 인간적이고 육체적인 고통이 예수님 양쪽에 있던 강도들도 동일하게 당한 것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이 단순히 고통이라는 사건으로 환원될 수 있는지,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의 이러한 고통을 그리스도인이 따를 최고의 순종의 삶으로 가르치셨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천주교 신학에 따르면, 부활이라는 궁극적 구원을 위해 성도 개개인이 십자가의 길을 지나야 하고, 그 길의 절정에 있는 골고다의 십자가와 그 고통과 죽음(순교)은 부활(구원)로 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이러한 천주교의 구원론과 신학적 관점을 통해 보니, 내가 방문한 공세리 성당에 걸린 그림들과 스테인드글라스, 성당을 둘러싼 십자가의 길을 장식하고 있는 예수님의 수난 조각들이 더 깊이 이해되었다. 한국에 초기에 세워진 성당들 대부분이 순교자의 터 위에 세워지고 그들을 묵상하게 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반면, 개신교는 엄숙주의와 고통을 묵상하는 것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다. 나는 개신교의 균형을 좋아하고 옳다고 믿지만, 현대의 개신교는 너무 가볍고 고통의 정반대에 있는 행복과 즐거움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어 아쉽다. 인생이 단순히 고통과 행복만으로 이분될 수 없다는 깨달음이 나이가 들수록 깊어가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천주교는 엄숙주의에도 불구하고 오래전부터 술과 담배, 나이트클럽을 허용해 왔다. 오래전 천주교 신자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청년부 MT로 속초에 가서 나이트클럽에 갔고, 젊은 신부님도 함께했다고 한다. 이러한 모습은 로마가톨릭 내에서도 오랫동안 있어 왔다. 공식적으로 난잡한 카니발을 허용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찰스 테일러 같은 세속화 연구자들은 카니발 문화를 일종의 ‘포치(porch)’ 문화라고 말한다. 포치란 길과 집 사이의 중립적인 공간으로, 손님을 맞이하고 배웅하는 곳이다. 예수님의 고통을 따르는 것이 경건이라 여기는 영성과 세속적인 일상 사이에 위치한 중립의 영역에서 일탈을 허용하고 즐기게 하는 기간이 카니발인 것이다. 일종의 세속적 욕구를 해소하게 하는 장소인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요즘 불교에서 ‘뉴진스님’이라는 이름으로 어느 개그맨이 클럽에서나 할 법한 디제잉을 하고, 이를 조계종 차원에서 장려하는 것을 보면 비슷한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엄숙주의와 고통, 수행을 강조하는 종교일수록 일상의 윤리와 문화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거룩과 속세의 경계가 분명하기 때문에, 세상 속에서는 구원을 위한 길이 없고 세속의 도덕은 상대적이며 무의미하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오직 거룩하고 성스러운 영역에서만 이러한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결국 세상에서는 세속적으로 살면서, 교회나 사찰에 와서 속죄 의식이나 백팔배를 하고, 헌금과 시주를 통해 성직자가 대신 죄를 위해 기도해 주는 구조를 만든다. 신도는 자신의 노력으로는 천국에 갈 수 없기 때문에 돈을 벌어 성직자의 생활을 돕고, 대신 그들이 기도하게 하는 공생 관계가 형성된다. 사실 이러한 종교적 전통은 한국의 무속과 불교를 통해 한국인들의 종교성에 깊게 뿌리 내려 있다. 한국의 개신교 목사들에게도 이러한 역할이 요구되고 있다. 일부 목사들은 영매처럼 행동하며 신도들을 정신적·경제적으로 압박하기도 한다.
최근 천주교의 영성을 찬양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하는 개신교 신학자들과 목사들의 목소리가 있다. 이들은 이것이 마치 오래 감추어진 진정한 기독교 영성인 것처럼 포장한다. 그러나 왜 종교개혁자들이 로마가톨릭에서 개혁을 부르짖으며 개신교회를 만들었는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라는 이들의 외침은 단순한 표어가 아니었다. 이는 기독교의 성과 속의 이분법을 벗어나 이를 통합하는 참된 영성을 되찾기 위한 선제 조건이었다.
끝으로, 공세리 성당에 들어서며 이 공간이 주는 분리감과 거룩함에 놀랐다. 그러나 이러한 분명한 경계가 지닌 위험성을 생각할 때, 종교개혁자들의 불편한 균형은 참으로 쉽지 않은 선택이었음을 다시 깨닫는다. 요즘 개신교회에서도 이러한 분명한 경계를 통한 거룩함과 영성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보이지만, 그 위험성과 결과에 대해선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으려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