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만리를 왔어도 밝은 눈 갖춘 이가 없어, 구년이나 소림의 봄을 보냈더라. 만일 신광이 예배하지 않았다면 이 流沙( 황하와 타클라마사막)를 달리는 건달이 될뻔했구나.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갔을 때 일본승려 悟初가 달마도를 가져와서 사명대사께 讚을 써 주신 것이다 ㅡ사명대사어록에서 발췌ㅡ
<해설> 남인도 왕자였던 달마대사가 위진남북조시대 북위 때 양나라 양무제를 찾았을 때 양무제가 말하기를 이렇게 이렇게 많은 불사를 했는데 대사, 나의 공덕은 얼마요.? 달마대사. 不識 (모르오)
이 후에 소림사에 있는 동굴로 들어가서 벽면 9년 하고 있을 때 신광(달마대사 첫번째 제자 혜가)를 생각하면서 사명대사께서 찬을 쓰신 것이었다.
위진남북조 시대는 정토불교가 흥행할 때라 '나무아미타불 ' 를 부르면 극락갈 수 있다고 해서 온통 중국불교가 염불 불교였을 때이었다. 그래서 달마대사께서 선종의 가르침을 펴기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 생각하고 9년 면벽에 들었던 것이었다. 신광(혜가)를 만나지 못했다면 중국 선종은 홍법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달마도는 2012년 대구 경북 불교대학에서 유식학 강의할 때 곡성 태안사 선방에 불교대 학생들과 하안거 대중공양 갔을 때 태안사 주지스님이 주신 것이다.
이 달마도를 보는 순간 달마대사의 에너지가 아주 강렬했다. 시중에 나와있는 달마도에서는 볼 수 없는 그림에 에너지가 녹아나 있었다. 이 달마도를 그린 일본승려 오초스님의 수행력을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달마도 복사본을 여러 장 선물로 받아 와서 표구를 해서 나눠주었던 달마도입니다.
수행력이 높으면 수행자가 그린 그림이든 글씨든 그 에너지가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
한국 고승 중에는 경봉스님의 글씨가 가장 높은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달마도는 이 달마도만큼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그림은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