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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6/22
‘6.20 합의’가 알려지자마자 경찰조직은 극심한 내홍에 휩싸였습니다. 경찰 수뇌부가 합의안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는 공식 논평을 낸 것과는 대조적으로 경찰의 내부 통신망은 이에 반발하는 경찰관들의 글이 폭주하여 발표당일 내내 접속이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저는 이 일의 주무부서인 수혁팀의 일원으로서 ‘6.20 합의’에 대해 조직원들에게 알리고 설명할 직무상 의무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표 후 3일이 지난 오늘 이 시간까지 그 직무상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수혁팀은 수사구조개혁에 관한 사무를 수행하는 경찰청의 수족입니다. 따라서 수사구조개혁사무에 관해서 수혁팀원은 경찰청과 다른 의사표시를 할 수 없는 것이 원칙입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6. 20 합의’에 대한 수뇌부의 입장에 결코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직무의 수행이 양심에 반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고민 끝에 저는 침묵함으로써 간접적으로나마 제 의사를 표현하고자 하였습니다.
당연히 저의 침묵은 경찰청으로부터는 질책을, 조직원들로부터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렇더라도 수혁팀원으로서는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여기며 애써 참았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침묵하고 있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사실이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음으로 해서 엉뚱한 오해와 억측이 생길 조짐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아침에는 마치 수혁팀이 뭔가 정당하지 못한 처사를 하였기 때문에 침묵한다는 식의 글까지 등장했더군요.
이하에서는 ‘6.20 합의’가 있기까지의 진행상황과 ‘6.20 합의안’에 대한 저의 입장에 대해서 쓰겠습니다.
1. 6월 19일까지의 상황
5월 30일 한나라당은 의원총회를 열어 ‘경찰 수사권 명문화 방안’을 총리실의 조정에 맡기기로 하였습니다. 당시 수혁팀은 총리실의 조정은 성공할 수 없는 무의미한 지체에 불과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조정이 성립하려면 양 당사자가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해야 하는데 “196조 1항의 개정이 핵심”이라는 경찰의 입장과 “196조 1항은 절대 손댈 수 없다”는 검찰의 입장 사이에 타협의 여지는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혁팀은 총리실의 조정절차가 최대한 빨리 종료되도록 하면서, 총리실이 독자적으로 법제화안을 만들 가능성에 대비하여 경찰입장을 납득시키는데 주력했습니다.
총리실의 조정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드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총리실은 여러 차례 양 기관을 불러 조정을 시도했지만 검찰이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 바람에 조금도 진전이 없었습니다.
6월 19일까지의 조정과정에서 총리실은 모두 5개의 조문안을 제시했습니다. 이 중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6월 17일 제시된 안입니다. ‘6.17 조정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196조(사법경찰관리)
①수사관, 경무관, 총경, 경정, 경감, 경위는 사법경찰관으로서 수사에 관하여 검사의 지휘를 받는다.
②사법경찰관은 범죄의 혐의가 있다고 인식하는 때에는 범인, 범죄사실과 증거에 관하여 수사를 개시·진행하여야 한다.
③사법경찰관(리)은(는) 수사의 모든 단계에서 검사의 지휘가 있는 때에는 이에 따라야 한다.
④사법경찰관은 범죄를 수사한 때에는 관계서류와 증거물을 지체없이 검사에게 송부하여야 한다.
6월 17일 조정회의에 경찰을 대표해 참석한 경찰청 차장께서는 ‘6.17 조정안’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돌아왔습니다.
다음 조정회의는 6월 19일 일요일 저녁 8시에 열렸고 이번에도 차장께서 참석하였습니다. 저희들은 사무실에서 다음날 오후에 있을 경찰청장의 사개특위 출석에 대비한 ‘예상질문과 답변’을 만들면서 회의 결과를 기다렸습니다.
밤늦게 돌아온 차장께서는 조정이 최종적으로 결렬되었다면서 총리실에서 더 이상 조정회의를 하지 않기로 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총리실의 조정이 최종 결렬됨으로써 이제는 6월 20일과 22일, 두 차례의 사개특위 전체회의만 남았습니다.
수혁팀은 다소 홀가분해진 심정이 되었지만 ‘예상질문과 답변’을 만드느라 20일 새벽 3시를 넘기고서야 귀가할 수 있었습니다.
2. 6월 20일의 상황
수혁팀은 밤을 새다시피 했지만 6월 20일 아침 7시 30분쯤에는 대부분 출근했습니다. 오후 2시에 열리는 사개특위 전체회의에 대비하여 경찰청장께서 답변할 내용을 미리 검토하는 ‘독회’가 오전에 예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8시 30분쯤 되어서 급한 전갈이 왔습니다. 청와대에서 행안부장관과 차관, 법무부장관과 차관을 불렀는데 행안부 장관이 ‘수사권 명문화’에 대한 경찰입장을 제대로 말할 수 있도록 관련 자료를 행안부로 보내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수혁팀은 청와대에서 왜 이들을 부르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총리실의 조정결과를 국회에 통보하는 방식을 정하기 위한 거 아니겠느냐는 막연한 추측만 하였습니다.
9시쯤 경찰청 9층 무궁화 회의실에서 ‘독회’가 열렸습니다. 청장을 비롯하여 몇몇 국관들이 참석하였고, 저도 수혁팀장과 함께 참석하였습니다.
그런데 독회가 시작될 무렵 청장께서는 “청와대에서 행안부 장관과 차관을 불렀는데, 내가 장관에게 전화해서 행안차관 대신 경찰청 차장이 참석하도록 했다.”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경찰입장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한 당연한 조치였습니다.
그런데 독회가 진행되던 중 청장께서 전화를 받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차장 대신 청장께서 청와대에 간 것이었습니다. 이때 청장을 수행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즉, 청와대 회의에 경찰청에서는 청장 혼자만 참석한 겁니다.
그리고 2시간 가까이 지나서 “수혁팀 전원은 즉시 9층 회의실로 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9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누군가 “혹시 ... 뭔가 합의하고 오신거 아냐?”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설마.... 조정이 최종결렬되었다고 했는데.”라고 생각했지만 웬지 불안한 마음이었습니다.
9층 회의실에서 청장께서는 그 자리에 참석한 차장을 비롯한 국관들과 수혁팀원들에게 “서명하고 왔다.”고 통보하였습니다. 그리고 ‘6.20 합의안’의 조문내용을 불러준 다음 “196조 2항은 경찰의 수사주체성을 확실히 규정한 것”이라는 취지로 설명하였습니다.
이상이 제가 알고 있는 6월 20일의 상황입니다.
2. 합의안에 대한 저의 입장
이번 합의안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제196조(사법경찰관리)
①수사관, 경무관, 총경, 경정, 경감, 경위는 사법경찰관으로서 모든 수사에 관하여 검사의 지휘를 받는다.
②사법경찰관은 범죄의 혐의가 있다고 인식하는 때에는 범인, 범죄사실과 증거에 관하여 수사를 개시·진행하여야 한다.
③사법경찰관리는 검사의 지휘가 있는 때에는 이에 따라야 한다. 검사의 지휘에 관한 구체적 사항은 법무부령으로 정한다.
④사법경찰관은 범죄를 수사한 때에는 관계서류와 증거물을 지체없이 검사에게 송부하여야 한다.
이번 합의안의 해석에 대한 저의 입장은 이 글 아래에 황정현 경감이 올린 글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황정현 경감의 해석에 거의 대부분 동의합니다. 다만 몇 가지를 덧붙이거나 분명히 해 두고자 합니다.
첫째, 합의안 196조 2항은 그 자체만 놓고 보면 경찰의 수사주체성을 규정한 것이라고 봅니다. 즉, 경찰은 단순히 ‘검사의 보조자’가 아니라 ‘수사의 주체’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둘째, 합의안 196조 4항은 이른바 ‘송치의무’를 규정한 것입니다. 경찰에게 송치의무가 있다 함은 경찰에게는 ‘수사종결권’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지금도 경찰은 입건한 모든 사건을 검찰에 송치하고 있습니다.
이 조항에 대해 단순한 ‘송치의무’를 규정한 것이 아니라 “수사를 개시한 직후에 모든 서류와 증거물을 검사에게 보내서 검토를 받아야 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주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현재 송치의무를 규정하고 있는 사법경찰관리집무규칙 54조가 “사법경찰관이 수사를 종결한 때에는”이라고 규정되어 있는데 비해서 합의안은 단순히 “사법경찰관은 범죄를 수사한 때에는”이라고만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 그 근거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다소 무리한 법해석이 아닌가 싶습니다. ‘수사한 때에는’ 이라는 문구는 ‘수사를 마친 때에는’이라고 해석될 가능성이 큽니다.
셋째, 합의안 196조 1항 중 ‘모든 수사에 관하여 검사의 지휘를 받는다’라는 부분은 해석의 폭이 대단히 넓을 것입니다.
법조항은 가장 간결한 문장으로 구성됩니다. 따라서 법조문에 들어있는 모든 단어와 조사에는 일정한 의미가 있다는 전제하에 해석을 합니다. 즉, ‘수사에 관하여’라는 규정과 ‘모든 수사에 관하여’라는 규정은 다른 의미라고 보는 것이 법해석의 상식입니다.
아마도 검찰로서는 ‘모든 수사’에 최대한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자 할 것입니다. 내사도 포함된다고 하거나 수사행정도 포함된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경찰청장께서는 “‘모든 수사’에는 내사는 제외된다”고 합의하였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합의가 향후 법해석이나 판결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질지 의문입니다.
넷째, 합의안 196조 3항의 2문에는 “검사의 지휘에 관한 구체적 사항은 법무부령으로 정한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이대로 법개정이 된다면 거의 재앙수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법무부령에 어떤 내용이 규정되는지에 따라서 검사의 지휘권의 범위는 크게 달라지는데 법무부령은 법무부장관이 마음대로 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칫하면 제2항에서 규정한 ‘경찰의 수사주체성’이 형해화 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경찰청장께서는 “경찰이 합의해 주지 않으면 법무부령을 제정하지 못하도록 합의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합의는 법적 구속력이 없습니다. 어쩌면 법무부령을 제정할 때는 이러한 합의가 지켜질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향후 합의 당사자들이 바뀌고 난 후에도 합의가 지켜질 지는 의문입니다.
게다가 법무부령의 제정이나 개정과정은 이번 총리실 조정과정과 유사한 양상을 띠게 될 것이 확실시 됩니다. 즉, 양 기관은 서로 자기주장을 한 치도 양보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 또 누군가 높은 사람이 양 기관 총수를 불러 합의를 종용하면 별 수 없이 서명하고 나오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종합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합의안에서 유일하게 찾을 수 있는 의미는 ‘경찰의 수사주체성이 규정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과 ‘법무부령’ 때문에 ‘경찰의 수사주체성’이 무의미하게 될 수 있고, 나아가 오히려 지금보다 일선의 수사환경이 더 열악해 질 위험마저 있습니다.
물론, 다른 가능성도 있습니다. 즉, ‘모든 수사’의 개념이 확대해석 되지 않고, ‘법무부령’의 제정과 개정에 반드시 경찰의 동의를 구하는 관행이 확립된다면 이번 합의안을 ‘개선’이라고 불러도 좋을 겁니다.
그렇지만 법문상 위험성이 명백히 제거되지 않았다는 점만으로도 이 합의안은 ‘개악’이라고 확신합니다.
3. 조직원들의 반발에 대하여
위와 같은 해석은 결코 극단적인 것이 아닙니다. 경찰관 대부분은 위와 같은 해석을 수긍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와 같은 해석에 동의하는 이상 경찰관이라면 누구나 크게 반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이번 합의안은 앞에서 언급한 ‘6.17조정안’을 놓고 양 기관이 절충한 결과물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6.17조정안’과 합의안의 조문을 비교해보면 이번 합의안이 ‘6.17조정안’보다 경찰에게 훨씬 불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6.17조정안’은 이미 차장께서 거부한 바 있습니다. ‘6.17조정안’을 거부한 경찰청이 그보다 훨씬 불리한 안을 받아들인 것을 과연 누가 쉽게 납득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지금 조직원들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뿐만 아니라 조직원들의 반발은 반드시 필요하고 오히려 다소 반발의 강도가 약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합의안은 곧 법사위에 회부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법사위 심사과정에서 합의안 중 문제있는 부분이 시정될 것이라고 낙관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두 기관의 총수들이 합의하였고, 공식적으로 수용의사를 밝힌 마당에 법사위원들이 무슨 명분으로 합의안을 수정하겠습니까? 이러한 상황에서 ‘경찰관들의 강력한 반발’은 법사위원들을 움직일 거의 유일한 명분입니다.
설령 법사위에서 수정 없이 그대로 통과된다고 하더라도 ‘경찰관들의 반발’은 두고두고 부담으로 남으므로 언제든 재개정이 추진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합니다.
이처럼 조직원들의 반발이 당연할 뿐 아니라 전략상 반드시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문제시하면서 어떻게든 반발을 희석시키려 애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대단히 부적절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수사권에 아무 관심도 없던 자들이 청장을 흔들기 위해 반발분위기를 조성한다”고 공공연히 말하더군요. 참으로 우려스런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의 이 분노와 아픔이 미래를 위한 밑거름으로 승화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자면 조직원들의 반발을 억누르려고 하거나 왜곡하여서는 안 됩니다.
물론 경찰청은 조직원들의 입을 막을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온갖 기법을 동원하여 반발을 희석시키거나 순화시키는 것도 가능할 겁니다. 하지만,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그리 하여야 합니까?
경찰청으로서 가장 염려해야 할 것은 눈에 보이는 반발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조직원들의 불신과 냉소입니다. 지금으로서는 훗날 진정한 수사권 독립을 위한 절호의 기회가 온다고 한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누가 경찰청을 믿고 따를지 걱정스럽습니다.
이제라도 경찰청은 잘못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조직원들에게 사과해야 합니다. 그리고 책임 있는 자에게 응분의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책임 있는 자 속에는 물론 저도 포함됩니다. 그런 연후에 비로소 ‘단합’을 입에 올릴 자격이 있습니다.
아직 하고 싶은 얘기가 많습니다
글 올리겠다고 예고해 놓고 너무 시간이 많이 지났네요. 저는 이 글을 쓰면서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고 건조하게 쓰고자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글이 지나치게 밋밋해 졌습니다만 이 글의 주된 목적이 ‘설명’이라는 점을 헤아려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하고 싶은 얘기가 많습니다만 오늘은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할 말을 남겨 놓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죽림누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