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글은 지금도 역사의 스토리텔링 사업으로 이용되는 신라의 千年古都,이른바 반도의
慶州를 지칭하는 말이다.역사서(삼국사기)에 씌여져 있는 신라가 천년동안 한번도 위치를
변경하지 않고 나라의 首都로 삼았던 곳이 바로 지금의 慶州라는 거짓말은 아직도 열심히
뿌려지고 통용된다.교육의 목적도 洗腦에 있는 것이기에 旣往之事 정해 놓은 것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이제 열린시대에 적당히 했으면 좋겠다.경주는 역사 신라의 천년
고도가 될 자격이나 首都의 환경도 조성되어 있지 않은 아주 비루한 곳이다.나라의 수도는
중요한 품격과 가치를 지니기 때문에 아무렇게 적당히 정해지지 않는다.거짓말을 해도
시대가 변하면 거짓말 내용을 변경해야 한다.나라의 首都라 함은 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정치,경제,문화,교통의 중심지' 를 말한다.또한 특출한 인물들의 집결지이자 물산의 집합
소 이기도 하다.
때문에 수도(都城)가 경주처럼 강역의 귀퉁이나 모서리에 위치해 있으면 나라의 중심이
되지 못하고 가치를 보존하지 못한다.우선 여러 나라들의 역사 수도는 '풍부한 자연환경과
굳건한 천연적 要塞(산맥,준령)' 를 갖춘 지역에 建都되어 있다.때문에 타당한 근거없이
나라의 수도가 정해지는 경우는 없다.아무곳이나 수도라고 정해놓고 천년고도란 엉터리
역사문화 상품을 파는 곳은 아마도 반도의 경주가 유일할 것이다.그것도 천년동안 수도를
옮기지 않고 나라의 중심 역할을 했다고 깡짜를 부리나 천년의 증빙인 흔적(史蹟)은 경주
어디에도 없다.특히 봉건왕조 시대의 수도(도성)가 있었음을 과시하고 증명하는 '垓字(壕:
outer moat,)' 는 유흔조차 없다.천년세월 도성(내성과 외성)의 흔적도 없고 동질의 사정은
공주,부여,한성(한양),개성(송도)도 같다.
2, 영국의 유명한 지리학자 방간(banghan)이 저술한 '그레이트 케피탈(Great Capitals :
나라의 수도)'을 보면 한나라의 수도가 될려면 '요새(Fortress=천연요새=준령과 큰 고개),
곡창지대(Granary=대평원),교통(Grossway=사방의 중심지)' 등이 갖추어 있어야 한다고
했다.또한 현세기 중국의 역사지리학자 였던 사념해(史念海,1912~2001)는 그의 저술인
'中國古都硏究' 를 통해 중국의 1200년 古都인 장안(長安=西安)에 대한 지리적 기본 바탕
에 대해 말하길 '四關(4곳의 천연 요새및 관문을 통해 들어오는 중심지),關中平野(千里
平原),渭水(풍부한 물자원)'를 들고있다.이른바 농본주의 사회에서 그것도 풍수지리를
중요시 했던 동양에서는 背山臨水는 말할것도 없고, '山川으로 수도(나라)를 견고하게
지킨다(山川以爲固)' 는 建都의 기본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라의 首都는 나라 무게의 4/5를 차지 할 정도로 비중이 높다.어찌보면
수도란 그자체가 나라의 전부라고 말할수도 있다.예속된 지방은 결국 수도의 식민지라고
말할수 있다.지금도 전쟁이 발발하여 수도가 함락이 되면 나라가 함락됨과 동시에 패한 것
이며 멸망한것이 된다.이처럼 처음의 수도에서 시작해 세월이 흘러 천년고도가 유지되는
중요한 요소는 바로 ' 풍부한 식량자원,外敵을 막아주는 험준한 山勢(要塞)' 였다.이러한
조건이 갖추워져 있어야 조용히 千年古都의 文明을 꽃 피울수가 있다.특히 杜甫같은 문인
도 그의 秋興八首란 詩중 제6수에서 '秦中은 옛부터 제왕의 神州' 라고 찬양한바 있다.
여기서 진중이란 지금의 甘肅省과 陝西省 일대의 관중평원 지역을 말하는 것이고,神州란
신(황제)이 거주하는 안전한 곳이란 뜻이다.
3, 또한 천년고도인 長安과 關中의 풍요로움을 찬양했던 역사가 司馬遷은 중국 문명이 꽃
을 피웠던 關中지역은 모든것이 모여드는 집중지역이라고 말하면서 '關中은 천하의 1/3 이
고,인구는 3/10 이고, 富는 천하의 6/10 이라고 그의 저술 사기 貨殖傳(129권)에서 밝힌바
있다.결국 천년고도 장안의 문화는 곧 중국 문화의 축소라고 까지 말한다.아무튼 이러한
장안(서안)은 천년고도란 표현과 걸맞게 화려한 이력을 지닌 고도로 자리하고 있고 지금도
복원작업은 열심이다.된다.이러한 조건을 갖춘 지역의 장안이기에 기원전 1027년 周가 殷
나라를 멸망 시키면서 장안지역을 도읍(수도)으로 정한이후 '秦(BC249~207),西漢,新莽,
前趙,前秦,後秦,西魏,北周,隋,唐,'란 고대 나라들의 首都 였다.
이밖에 동한의 獻帝,서진의 愍帝등도 잠시 장안에 수도를 정했었고, 분립정권을 세웠었던
安祿山과 黃巢도 스스로 제위에 오르면서 國都를 장안으로 삼은적이 있었다.또한 李自成이
세운 大順이란 나라도 장안을 수도로 정했었다.처음으로 周나라가 도읍을 정했을때 장안의
이름은 '豊京(풍요로운),鎬京 이었지만,진시황에 이르러서는 위수의 북쪽인 咸陽으로 수도
를 옮긴다.장안(위수의 남쪽)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은 서한의 고조 劉邦이 책사 장량의 건의
를 받아들여 '長期通治(장기통치)의 長과 長治久安(오랜안녕)의 安' 을 바라는 말을 합성한
수도명으로 정했다.이후 낙양과 개봉의 번성으로 장안은 서안으로 바뀌고 西安은 서쪽의
안녕한(편안한)고을의 뜻을 지닌 지명이다.별명으로 關中과 陝西도 있다.낙양,개봉,남경등
역사 수도들은 모두 풍요로운 평야의 중앙인 江南에 있다.
4, 천년고도 였다는 장안이 포함된 關中이란 표현은 앞에서 말한 四關의 안(內)이란 뜻이다.
즉 '북쪽의 관문을 뜻하는 肅關이란 관문은 서역으로 통하는 관문으로 지금의 감숙성 固原
에 있었던 관문이다.서쪽의 관문인 大散關(散關) 은 섬서성 寶鷄市 남쪽에 위치한 대산령에
있는 관문으로 지금의 四川省(成都) 지역으로 왕래하는 길목에 있다.동쪽으로는 函谷關이
있는데 이 함곡관은 시대에 따라 조금의 차이가 있다.전국시대와 진나라 시대이자 초한지와
열국지 시대의 함곡관은 지금의 하남성 靈寶市(인근에 삼문협 협곡과 댐이 있다)에 있었으
나,위오촉의 삼국시대 이후는 지금의 하남성 新安縣에 함곡관을 두었다.이어 남쪽으로는
武關이란 관문을 두었는데 이곳은 지금의 섬서성 남쪽의 상현의 남쪽 商南에 두었다.바로
이 사관문의 안쪽을 바로 關中(秦中) 평원지역이라고 한다.
이 드넓은 평원지역의 4방 끝에는 바로 산맥과 준령으로 형성된 요새지(지리적 요건을 갖춘
지역)가 외적으로 부터 천년고도 장안과 관중을 지켜주고 있다는 뜻이 된다.바로 이런 경우
라면 천년고도에 걸맞는 문화와 문명이 자리를 잡을수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천리 관중평야
와 장안지역에 대한 4관문의 설명에는 약간의 異見이 있기는 하나 大同小異하다.작은의미의
4관으로 '함곡관과 대산관 사이라는 說이 있고,함곡관,대산관,소관과 무관 사이라는 설도 있
다.어떤이는 동쪽이자 북동쪽인 지금의 龍門이자 용문산이 있는 섬서성 韓城市와 산서성의
河津市 지역을 한곳의 관문으로 취급하는 이도 있다.그러나 어떻게 말하든 군사적으로 요새
같은 지리적 조건이 갖추워진 곳임은 분명하다.
5, 그럼 반도에 식재된 천년고도의 경우를 보자.지금의 서울을 근세조선의 수도로 만들고,
그것도 정도 6백년으로 정하여 정치,경제,문화,교통의 중심지 였다로 만들려 했으나 실제로
600년 세월의 역사 수도및 古都 흔적을 찾을수가 없다.이북의 왕씨 고려국 開城도 그렇하지
만 스스럼 없이 천년고도란 말을 세뇌하는 반도의 경주를 보면 한심하기 그지없는 고도가
된다.즉 말로만 천년고도다.우선 앞에서도 역사고도의 설정에 대한 기본사상이자 자연환경
설명에서 열거 했지만,반도의 경주는 천년고도란 흔적(크고작은 역사도시 흔적과 윤곽)도
찾아 볼수도 없지만 우선적으로 古代와 어울리는 수도및 古都가 갖추워야 할 기본요소를
전혀 갖추고 있지 않다.특히 반도의 경주에는 천년을 증명하는 史蹟群들이 없다.
慶州는 수도를 지켜야할 '관문이나 요새도 없고,풍부한 식량을 생산할 평야도 없으며,수도의
많은 인구들(헌강왕 시대 100만 인구)이 먹고 살만한 수원이나 식량생산의 중요한 기준인
평야와 대강의 흐름' 도 없다.그렇다고 반도의 경주가 천년고도나 나라의 수도가 견지해야 할
교통의 중심지나 요충지로서의 환경(육로나 수운)도 갖추고 있지 않다.그래도 한성부는 한강
이란 강이 흐르고 扶餘나 公州는 역사서 와는 크게 다르지만 錦江이란 강이 흐르는 지역이라,
권력이 억지를 쓰면 넘어 갈수 있으나 반도의 경주는 그런 강도 흐르지 않는다.그냥 반도의
평범한 산골 마을이나 소도시처럼 실개천만 흐른다.당연히 풍요로운 평야도 있을수 없다.과연
무엇으로 신라의 천년고도 경주를 주장할 것인가? 어느 역사서(정사서)에 반도의 경주가 신라
천년의 수도 였다는 가록이 있는가? 문헌적 기록도 없고 史蹟群 흔적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