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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상 글 >
전교의 달(묵주기도 성월)을 맞이하여...
글 : 복자 알베리오네 신부님
선과 평화를 전파하는 걸음은 행복합니다.
교회인 어머니의 마음을 소유하며 섬기는 자는 행복합니다.
신비로운 침묵 속에 온 세계를 향한 길을
공부하고 연구하고 기도하면서
사람들을 찾아가는 이들은 행복합니다.
교회의 길을 들어보지 못하거나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아가는 하느님의 사신들은 행복합니다.
가정마다 사랑의 기쁜 소식과 주님의 사랑을
가져다주는 주님의 배달부는 행복합니다.
길, 진리,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침묵 속에 설교하는
사제들의 협력자는 행복합니다.
걸어가는 길 위에 겸손과 사랑과 결백함의 향기를 풍기는
이들은 행복합니다.
목동과 동방박사, 그리고 성전에서 또 제자들과 온 세상에
예수님을 낳아주신 마리아를 본받는 이들은 행복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소유하고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고,
아버지와 함께 고통과 기도와 활동을 함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길을 걷는 이들은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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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교님의 전례 이야기 >
전례, 어떻게 하면 거룩하게, 아름답게, 기쁘게 거행할 수 있을까 ?
< 전반부 >
이 빈첸시오(병호) 주교님
<전주교구장>
강원도 산골에 작은 본당이 있습니다. 신자 총수가 250명인데, 주일 미사 참석자 수도 250명. 어느 농촌이나 산간 지역의 사정이 그렇듯, 젊은 사람은 다 도시로 떠나고 거의 노인만으로 이루어진 이 본당이 주일미사 참여율이 100 퍼센트라는 점에서만 놀라움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본당으로서 자체 살림을 충분히 꾸려갈 뿐 아니라, 불우 이웃을 돕는다거나 외국에라도 자연재해가 발생하여 딱한 일이 벌어졌을 때, 모금을 하면 얼마나 많이들 희사를 하는지, 도시의 큰 본당들도 놀라곤 한다는 것입니다.
냉담률의 증가, 주일미사 참석 신자 수의 감소 등의 현상 때문에, 걱정하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에서 점점 크게 들리는 마당에, 강원도 산골에 있는 이 본당의 비결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눈과 귀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확 들어오는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미사 때, 주례 신부님과 함께 참석자 전체가 미사 전례기도를 아주 천천히 큰 소리로 또박또박 바친다는 점입니다. 처음 참석한 사람에게는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천천히 기도를 외우는데, 그도 그럴 것이, 신자들이 거의 다 노인들이시기 때문에, 기도를 조금만 빨리 바치면 따라오지 못 하시는 분이 생기고, 한 분이라도 처지거나 포기하면, 공동체 기도인 미사가 그만큼 빈약해지고 힘을 잃는다고 생각하신 본당 신부님께서, 그 점을 대단히 강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미사에 참석한 모든 이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한다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헌장의 기본 정신을 아주 잘 구현하는 것입니다. 집에서 혼자서도 얼마든지 잘 바칠 수 있는 개인기도나 묵주의 기도 등은 바치는 사람의 형편과 취향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할 수가 있습니다. 기도상을 준비하여 촛불을 켜놓고 하시는 분들도 점점 불어나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때로는 자리에 누워 잠이 들 때까지 바칠 수도 있습니다. 장소도 마찬가지입니다. 들에서, 산에서, 길을 걸으며, 또는 운전을 하면서도 기도는 얼마든지 바칠 수 있고 실제로 많이들 그렇게 하시지요. 예수님께서 가끔 혼자 산에 가셔서 기도드리시고, 중대한 일을 앞두셨을 때에는 밤을 새워 기도하신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은 때때로 혼자서 하느님만을 마주하고 있을 때가 필요하고, 그것이 있어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드리는 기도도 더욱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그러나 전례기도,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대표적 위치를 차지하는 미사는 개인기도가 아니라 공동체의 기도이기 때문에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 참석자 가운데 한 분이라도 구경꾼처럼, 혹은 이방인처럼 몸이나 마음으로 떨어져 있지 않고, 한 몸 한 마음으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 중의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지 다 들어주실 것이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마태 18,19-20).
전례기도, 여럿이 하나가 되어 드리는 기도는 혼자 개인이 드리는 기도와는 전혀 다릅니다. 하느님 백성으로서 다른 형제자매들과 함께 드리는 전례기도는 교회생활을 떠받쳐주는 가장 기본이 되는 기도입니다. 더구나 미사에서 기억하며 재현하는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는,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교 전체를 서있게 하는 받침돌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를 지금 여기서 재현하여 거기에 담긴 은총을 오늘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미사가 얼마나 깊은 의미를 지니는지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미사를 어떻게 준비하여 그 깊은 뜻에 실제로 걸맞게 드릴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신비가 말해주는 특별한 지혜에 관해서 사도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지혜는 하느님의 심오한 지혜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천지 창조 이전부터 미리 마련하여 감추어 두셨던 지혜입니다. 이 세상 통치자들은 아무도 이 지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깨달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에는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 1고린 2,7-9 )
부활에 관해서도 사도께서는 더할 수 없이 간단 명료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 1고린 15,14 ).
그러니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를 지금 여기서 재현하여 거기에 담긴 은총을 오늘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미사가 얼마나 깊은 의미를 지니는지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미사를 어떻게 준비하여 그 깊은 뜻에 실제로 걸맞게 드릴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도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이 신비를 파고들자면 한이 없겠지만,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며 쉬운 점만 개선하고 마음을 써서 드리면, 미사가 확 달라지고, 본당 공동체가 당장 바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십여 년 전부터 사목교서에서 이 점을 비롯한 전례 전반을 강조해 왔기 때문에, 본당에 따라서는, 미사전례가 대단히 활기차고,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있는 공동체의 면모를 잘 드러냄으로써, 본연의 역할을 잘 하고 있는 데가 많고, 그 수가 점점 불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반갑고 기쁜 일입니다. 그런 본당은 하나같이 냉담자가 감소하고 미사 참석률이 증가합니다. 그리고 예비자가 계속 늘어납니다. 미사전례를 제대로 거행하면, 강원도 산골 성당의 예는 어디에서나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미사전례를 제대로 거행하는 것인가?그동안의 경험에 비추어, 교우 여러분들이 아셔야 할 것 가운데 제일 긴요하다고 생각되는 것 몇 가지만 소개하겠습니다.
1. 성당에 가기 위해서 준비할 때부터 이미 미사는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침 일찍이라면,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하고, 옷을 깨끗한 것으로 갈아입고, 주님의 축제에 초대받아 가는 사람답게 마음을 써서 산뜻한 차림을 하는 일이 모두 축제의 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2. 미사는 본당 공동체의 구체적인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는 기회입니다. 따라서, 사목회, 각종 신심 단체 등 본당의 구조와 거기서 각자가 하는 역할이 가능한 대로 미사에서도 그대로 드러날 수 있도록, 전례 안에서도 여러 가지 역할을 나누어 작은 일이라도 분담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모두가 주인으로서 적극적인 자세로 미사와 공동체의 일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3. 미사에 오시는 분들을 환영합시다. 본당의 사목회원들과 전례위원들이 앞장서서, 정장을 하고 어깨띠를 둘러 그 역할을 분명히 한 뒤에, 이런 일을 하고 있는 본당이 많은데,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성당에 들어가서도 앞에서부터 차례로 앉을 수 있도록 자리에까지 인도해 드리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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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7주일 / 군인주일
2014. 10. 5
마태오 21, 33 ~ 43
♠ 복음 연구
* 33절 : “확”은 포도송이를 짓이기는 평평한 돌에 구명을 낸 것이며, 그곳에서 포도즙이 나오고, 그 밑에 그릇을 놓아 흘러나오는 포도즙을 받게 되어 있다. “망대”는 지붕은 밀짚으로 덮었고 거기에 밭지기가 살고 있었다. 지주는 스스로 농사를 짓지 않고 소작인에게 밭을 맡겼다. 소작인은 지방에 따라 약간씩 다르지만, 대개 수확의 1/2이나 1/3 혹은 1/4을 지주에게 바친다.
* 34절 : 종들은 몇 세기를 지나는 동안에 차례차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진 예언자들을 상징한다.
* 35절 : 돌로 쳐 죽였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이 예언자를 어떻게 다루었는가를 나타내고 있다.
* 36절 : 인간의 구원이라고 하는 감탄할 만한 사실에 비한다면, 장엄하고 비장한 아름다움을 지닌다. 실로 이 부당한 대우는 이스라엘 나라에 보내진 예언자들이 받은 대우였던 것이다.
* 37-38절 : 의심스러울 만큼 관대한 주인의 태도를 이해하려면, 이 주인이 하느님이시며 그 아들이 예수님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 39절 : 예루살렘성 밖 골고타 언덕을 상징한다.“이와 같이 예수께서도 당신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히브13,12) 라고 사도바오로는 예수님의 죽음을 회상시킨다.
* 40-41절 : 이 질문은 대사제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들은 포도밭 주인이 “악한 자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실” 힘을 가지신 하느님이심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스라엘의 포도밭을 짓밟은 로마인이라고 오해하였다.
* 42-43절 : “모퉁이의 머릿돌”은 시편 118,22-23의 인용이다. 살인자 소작인들은 벌을 받게 되고 포도원은 다른 충실한 소작인의 손으로 넘어갔다. 피살된 이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아들”이 예수님이라면 부활할 것이리라. 그리고 그분을 죽음에 넘긴 잔인한 이 소작인들까지도 개심만 한다면 그분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을 수 있으리라.
♠ 복음 요약 : 이 비유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특히 그들이 하느님께 직접적으로 반역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집주인은 하느님을, 소작인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상징한다. 그리고 종들은 예언자들을, 주인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확실히 실제 생활에 있어서는 상식 밖의 일이겠지만 비유 가운데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르치기 위해 참으로 적절한 이야기인 것이다. 이 비유를 구원의 역사에 비교한다면 아들을 보낸 사실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 성자를 죽음에 넘기신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잘 상징하고 있다. 이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전선하심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외아들을 죽음의 땅에 보내실 만큼 이 세상을 한없이 사랑하신다. 결국 포도원은 도조를 잘 내는 이방인들, 즉 예수님의 교회로 돌아갔다.
♠ 대화 방향 : ① 하느님께서 당신에게는 어떤 선행을 맡기셨다고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수확의 일부, 즉 도조를 잘 내고 있습니까? 즉 믿음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② 성서형제회를 당신에게 맡기셨다고 믿을 때 당신이 맡은 임무를 잘 수행하고 있습니까?
♠ 생활적용 방향
① 33절을 생각하며 내가 교회를 통하여 맡은 임무를 충실히 하기
② 41절을 생각하며 성서형제회의 특은이 다른 사람이나 단체에 넘어가지 않도록 성의를 다하기.
♠ 참고 문헌 : ▪ 신약성서 주해집 (크리스챤 출판사)
▪ 주석 성서(신약) (성요셉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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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8주일
2014. 10. 12
마태오 22, 1 ~ 14
♠ 복음 연구
* 1~2절 : 예수님은 하느님의 왕국을 아들의 혼인잔치를 연 임금에 비유하셨다. 세상종말에 천상에서 성취될 이 왕국은 이미 예수님의 가르침과 활동을 통해 실현되기 시작했다. 하느님은 당신 종들을 보내 이스라엘 백성을 기쁨이 넘쳐 흐르는 메시아의 혼인잔치, 즉 당신의 왕국에서 개최되는 잔치에 초대하기 시작하셨다.
* 3~6절 : 유다인들과 지도자들은 당신의 왕국으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초대를 거듭 무시했다. 그 분은 그들을 잔치에 초대해야 할 의무가 없는데도 호의를 베푸신 것이다. 임금이신 하느님은 사랑이 많은 분이어서 다른 종들, 즉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과 이분의 제자들을 보내 당신이 이미 잔칫상을 마련하고 황소와 살찐 짐승을 잡아 잔치 준비를 마쳤으니 초대된 이들을 불러오게 하셨다. 그러나 초대된 이들, 즉 유다인들은 대부분 일상사를 핑계로 초대를 무시하고 일터로 가버렸다. 이보다 더 가혹한 일은 나머지 사람들이 종들을 붙잡아 치욕을 주고 죽여 버린 것이다.
* 7절 : 임금은 진노하여 군대를 보내 그 배은망덕한 살인자들을 섬멸하고 그들의 도시를 불태워 버렸다. 이는 하느님이 예수님과 제자들의 복음을 배척한 유다인들을 심판하신다는 뜻이다. 이 심판은 기원 후 70년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 8~10절 : 임금은 종들에게 혼인잔치는 준비되었지만 참석할 이들이 자격이 없다고 한탄하며 도시의 출구로 나가 아무나 만나는대로 다 잔치에 불러오라고 일렀다. 이처럼 하느님은 예수 메시아의 구원 잔치를 취소하지 않고 끝까지 유다인들의 구원을 위해 복음을 계속 선포하게 하셨다. 제자들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즉 유다인과 이방인을 포함해서 죄인들과 의인들을 가리지 않고 만나는대로 데려와 잔칫방을 손님들로 가득 채웠다. 이는 메시아의 잔칫방이 자격이 없는 이들로 가득 찼다는 뜻이다. 교회는 죄인들과 의인들이 모두 섞여 사는 곳이다. 하느님이 제자들의 복음 선포를 통해 그들을 교회로 부르셨기 때문이다.
* 11~12절 : 하느님은 잔치상에 온 손님들 중에서 혼인예복을 입지 않은 이를 발견하고서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들어왔는지 따지셨다. 이 예복은 산상수훈에 제시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 자비를 베푸는 삶과 의로운 생활을 상징한다. 하느님은 최후심판을 집행하며 의롭게 살지 않고서 어떻게 구원을 받으려고 왔는지 질문하셨는데, 예복을 입지 않은 그 사람은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벌을 받아도 변명할 여지가 없는 구제불능 상황에 놓여 있었다.
* 13~14절 : 하느님은 천사들을 시켜 의롭게 살지 않고 심판 대전에 온 사람들의 손과 발을 묶어 어둠 속으로 내던져 영원한 심판을 받게 하신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이는 심판이 참담하고 가혹함을 강조한 표현이다. 많은 이들이 구원으로 부르심을 받았으나 복음을 믿고 따르지 않아, 구원받기 위해 선택된 수는 소수이다. 유다인들은 부르심을 받았을 뿐이고 선택되지는 못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자처했지만 복음을 거절함으로써 이 특권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 복음 요약 : 왕자의 혼인 잔치에 초대된 이들이 오지 않았다. 왕은 그들을 벌하고 이제 아무나 다 잔치에 초청하였다. 손님들은 누구나 예복을 입어야 한다. 그런데 왕의 초대를 거절하고 불참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사실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처음에 초대받은 사람이 오지 않은 이유는 밭으로 또는 장사하러 가야했기 때문이다. 일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왕의 부르심을 대수롭지 않게 또는 귀찮게 여겼다는데 있다. 하느님 나라보다 세상의 영광을, 영적인 가치보다 물질을 더 중히 여긴 것이 문제다. 최상의 의로움을 버리고 부차적인 것을 택함이 비극이다. 우리도 그럴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자주 혼인 잔치에 비유하신다.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그곳은 하느님 나라의 모습이다.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했다고 다 기쁨의 잔치에 참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잔치 예복을 입어야 한다. 세례를 받아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됐다고 해서 모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 대화 방향 : ① 천상에서 열리는 메시아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기 위해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이 사랑의 계명을 지키지 않을 때마다 혼인잔치의 초대와 그 기쁨을 거절하는 것이고 심판을 피할 수 없다. 나는 이 초대를 잘 받아들이는지 생각해 봅시다.
② 세상일에 전념하여 하느님의 일은 잊고, 물질을 추구하며 영적인 일에 무성의 하지는 않는지 생각해 봅시다.
♠ 참고 문헌 : ▪ 말씀의 등불 (가톨릭 신문사) ▪ 말씀의 두레박 (생활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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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주일 /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2014. 10. 19
마태오 28, 16 ~ 20
♠ 복음 연구
* 16-17절 :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한다. 하지만 아직도 의심하는 제자들도 있었다. 아직 제자들은 성령을 체험하지 못했다.
* 18절 :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을 설명하신다. 죽은 사람을 살리신 예수님, 수많은 기적들을 제자들은 예수님 옆에서 보았다.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셔야만 할 수 있다.
* 19-20절 :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예수님의 말씀을, 명령을 가르치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세상 끝날 때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지금 우리들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그 곳에 너를 위해 있으리라". 하느님은 이 세상 모든 것에 현존하고 계시며, 특히 우리 인간들 안에 더욱 친밀하게 현존하고 계신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예수를 '임마누엘'이라고 부른다. 이는 곧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또한, 마태오 복음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는 약속으로 끝을 맺고 있다.
♠ 복음 요약 :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는 것은 우리 기도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때론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는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기도가 될 수 있다. 아무런 말이나 생각도 없이 그저 빈 마음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는 것이다. 이 때 우리는 어둠 속에서 나를 비추시는 하느님 은총의 빛 줄기를 상상하거나 미소를 지으신 하느님의 따뜻한 사랑의 기운이 나를 감싸고 있는 것을 상상할 수도 있다. 또한 온 세상 하나 가득 넘쳐흐르는 하느님의 사랑을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사랑의 예수성심이라는 바다 속에 내 전 존재를 담그고 우리의 몸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느껴 보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 체험을 사는 사람은 그 삶으로 자연스럽게 전교를 하는 것이 된다. 가장 가난한 사람을 살며 그 속에서 관상을 하는 예수의 작은 자매의 우애회 수녀님들은 달동네에서 살면서 주변 이웃들에게 성당에 나가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과 함께 이웃이 되며 자신들이 사는 모습을 이웃에게 보여주는 것뿐이다. 그런데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분들의 삶을 보며 주변의 이웃들은 주님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는 방법은 각자의 삶 속에서 다양하다. 예수회 라우렌시오 수사는 그의 마지막 생애를 하느님의 현존을 언제나 체험하며 살았다. 시끄러운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면서 접시가 부딪히는 소리들이 나는 시끄러움 속에서도 영성체를 하러 나갈 때처럼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사람을 살았다. 이것은 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 대화 방향 : 임마누엘의 하느님을 항상 느끼는 각자만의 방법과 체험이 있다. 이것을 나누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소중한 체험이 될 수 있으며, 하느님 현존을 느끼는 또 다른 방법이 된다
♠ 참고 문헌 : ▪ 하느님 현존 체험 연습 (바오로딸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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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0주일
2014. 10. 26
마태오 22, 34 ~ 40
♠ 복음 연구
** 부활신앙을 부정하는 사두가이들이 부활 논쟁을 벌이다가 낭패를 본모양이다.(22.23-29) 그들은 모세오경 만 경전으로 믿었기 때문에 모세의 율법(창세38.8:신명 25.5-10)을 근거로 예수님께 괴변을 늘어놓자 “하느님은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22.32)라는 말씀으로 그들의 말문을 막아버렸다는 소문이 퍼지자, 세금 논쟁에서 예수님의 답변에 탄복하고 물러났던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이길 수 있다는 우월한 집단임을 사두가이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모여서 의논을 한다. 의도는 두 가지다. 첫째로 사두가이들이 그랬듯이 예수님을 시험하고 궁지로 몰아넣을 셈이였으며, 둘째로 사두가이를 눌러 이기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당대에는 인간의 잣대로 하느님의 법을 평가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모든 계명을 똑 같게 준수하였고, 바리사이들은 모든 계명을 포괄적으로 핵심계명을 추구하려는 경향도 있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율법이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으리라고 강조하시면서도 (5.17-18), 이 논쟁에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장 큰 계명으로 제시하신다. 라삐들은 율법의 정수를 한 가지 계명으로 제시했지만, 예수님처럼 두 계명을 아울러 제시하신 방식은 독특한 것이었다. 마태오릿치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인(仁)으로 풀이한다.
☞☞☞☞ 대주제 : 가장 큰 계명
* 34절 : “한 데 모였다”는 표현은 세상의 임금들과 군주들이 주님을 거슬러 함께 모의한다는 시편 2.2의 말씀을 연상시킨다. 예수님을 이길 수 없자 무리를 이루어 적대하는 바리사이들의 모임이 정기적이고 조직적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 35-36절 : 율법교사 한 사람은 바리사이들 가운데 율법 지식에 탁월하고 출중한 사람으로 오래도록 사색하고 논의하던 물음을 제기한다. 당대에는 준수규정 248조항과 금지규정 365조항을 합하여 613조항을 율법으로 규정하여 준수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가장 큰 계명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전체 율법을 통달하지 않고서는 답변 할 수 없었다. 율법 전체에 대한 올가미에 씌울 기회를 노리고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질문한다.
* 37-38절 :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예수님은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도록 당대 유대인의 집 문패에 써 놓고 집을 드나들 때, 수시로 바치던 “쉐마” 기도문에 담긴 신명기 6.5절을 꼽으신다. 이는 십계명의 1-4계명의 요약으로도 볼 수 있겠다.
* 39절 : “둘째도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의 표현은 중요도의 순서가 아닌 나열된 순서다. 예수님은 레위기 19.18의 이웃 사랑의 계명을 거론하여 율법 규정의 가장 큰 게명만이 아닌 그 다음 계명도 언급할 수 있을 만큼 율법에 정통하심을 드러내신다. “너 자신처럼”은 이웃도 나와 똑 같은 요청을 하는 사람으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때 실제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가르침이다.(잠언 17.5참조). 산상설교에서 설교한 내 이웃은 원수들까지도 포함할 수 있어야 한다는 지침으로 발전한다.(5.43-48). 이 부분은 십계명 중에 5-10계명에 해당할 수 있겠다.
* 40절 : 울법교사는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을 물었는데 예수님은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있다”고 확장시키신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는 첫째 계명은 둘째 계명을 수행하는 길을 준비해주는 한편 둘째 계명에 의해 확립된다고 풀이하여 두 계명이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가르친다.
♠ 복음 요약 : 세 번째 논쟁은 바리사이들이 등장하여 가장 큰 계명에 대한 질문으로 예수님을 시험한다. 예수님은 구약성서 전체를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요약하여 답변하시면서 사랑의 새 법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즉 하느님 사랑(신명 6.5) 못지 않게 이웃 사랑(레위19.18)도 중요한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천명하신다.
♠ 대화 방향 : ① 사랑의 계명은 우리들 삶의 모든 것일 수 있습니다. 오늘 날 그리스도인들은 613조항의 율럽을 지키도록 요구하지 않지요. 그러나 율법의 정신인 사랑을 실천한다면 율법을 능가하는 행위를 수행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사람을 미워하는 자들을 보게 됩니다. 그 사람이 바로 나라면 왜 예수님께서 수많은 율법 가운데 하느님 사랑과 아웃사랑을 한데 묶어 가르치셨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순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이기적인 사랑을 사랑이라고 하고 있지 않은지요?
②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기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본질은 사랑이니까요.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우리는 모든 이를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은 내 앞에 있는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은 구체적인 행동이며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다. 내 사랑이 필요한 눈앞에 있는 그 사람을 이런저런 핑계로 외면하지 않고 우리 마음을 늘 사랑이 가득한 선물이 되어 있어야 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삶의 가치는 어디에 두고 있는 지, 나를 바라보고 사랑의 은총을 청하면서 나를 하느님의 사랑으로 더욱 이끌어 갈 기도와 삶은 어떠해야 되는지 다짐한 바를 나누기로 합시다.
♠ 참고 문헌 : ▪ 마태오복음 (이우식 지음. 바오로딸 출판사, 한남성서연구소 공동계획, 이우식 지음 )
▪ 여정 마태오복음 강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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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연수회 스케치 >
2014 연수회
안산 원곡동 세르브스 팀 FB
기록원 : 권 토마 (순)
+ 찬미 예수님
우리 성서형제회의 3대 행사 중의 하나인 연수회를 2박3일로 정하고서 이런 저런 염려를 안고 각 지역에서 사강 예수그리스도수녀원으로 모여들었다. 이번 연수회를 위해서 수녀원 측에서도 내적, 외적으로 많은 준비를 해주심에 깊이 감사들 드린다. 그동안 없었던 1층 교육실에 에어콘을 설치하여 시원하게 해주셨고, 마당의 모든 연수할 공간과 정원, 마당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그 밖에 우리를 맞이하느라 수녀님 4분의 허리가 분명 휘셨을 것이다. 먼저 도착한 영등포 산상수훈팀 4명은 프랭카드를 걸고 몇 가지 연수장소 준비를 마쳤다. 잠시 후에 웃음이 많아 더욱 반가운 전주식구들이 도착하셨다. 갑작스럽게 조용하던 곳이 사람 사는(?) 곳으로 변한 듯 싶다. 까르르 깔깔~ 호호호~ 하하하~
무리를 지어 속속 도착한 형제자매님들은 명찰을 찾아 가슴에 착용하고 성당으로 모여 전국말씀봉사자의 연수회 시작성가 및 시작기도에 이어, 안셀모 형제님의 주송으로 <빛의 신비> 묵주기도를 봉헌했다. 1층 교육실로 이동하여 ‘오리엔테이션’ 도중, 클레멘트 지도신부님께서 연수회 동안 우리와 함께 해주시기 위해 먼 곳에서 오셨다. 신부님의 삼종기도와 함께 식사를 하고, 팜필로 형제님의 진행으로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비록 짧은 시간이기는 하지만 바깥바람을 쐰 후, 이어서 신부님께서 고백성사와 미사를 집전해주셨다. 약 2시간에 걸친 미사를 통해서 우리는 서로 간에 허물을 받아주고 내 아픔으로 이해해주는 형제애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비록 2박3일의 첫날이라서 약 20명이 채 안된 것이 아쉬웠지만, 참가자들의 마음은 뿌듯한 상태로 첫날을 마감하게 됐다.
아침이 변함없이 우리의 하루를 시작하도록 재촉한다. 수녀원 정원수에 날아든 새들도 부지런히 지저귀면서 노래하고, 형제자매들은 왜 그렇게 부지런한지 모르겠다. 이미 다들 일찍 깨서 세면단장하고 아침기도를 위해 2층 성당으로 모였다. 최 미카엘 형제님의 주송으로 아침기도를 바쳤다. 식사하기 전에 하느님께서 지어내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자연을 산책하면서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침 삼종기도로 시작해서 아침식사를 맛있게 먹었는데, 말미에 팜필로 형제님이 갑작스럽게 권 토마 형제님에게 ‘식사 후 소화제’를 제공하도록 시켰다. 그래도 준비해온 비틀즈의 ‘Let It be’곡에 성서형제회에 대한 인사와 감사의 가사를 얹혀서 감미롭게 노래한다. 그리고 짧은 토크와 교황 방문시의 에피소드가 이어진다.
둘째 날 첫 강의는 이문동 팜필로 형제님의 회칙소개와 해설이 있었다. 창설자 신부님께서 만드신 교본을 가지고 진행하셨다. 그리고 코이노니아 모범시간에 안나 수녀님이 코이노니아에 대한 절차에 대해서 소상하게 말씀해주셨다. 그동안 다소 회칙과 무관하게 코이노니아를 이끌어온 면이 있었기에 오늘의 말씀은 우리에게 더욱 더 절실했다. 그리고 조 편성 한대로 코이노니아를 했다. 참고로, 저는 2종에 편성되어있어서 수녀원의 마당에 있는 정자마루에서 진행했다. 자연스럽지만 타이트한 시간으로 이어지고, 중식시간을 맞이한다.
그날 지도신부님이 마려하신 긴 미사시간 중간에 율동과 복음암송이 있었다. 얼떨결에 저는 작성해온 복음내용을 읽다시피 하여서 복음암송에 참여한 꼴이 되었다. 이날의 하이라이트 긴 미사가 이어진다. 미사전례는 평일 미사로 이어졌으나, 강론 대신에 오늘의 주제를 말하기 전에 첫날 참석하지 못하는 이들, 저를 포함해서 인사말로 시작하고, 안나 수녀님이 프란치스코 교황에 이야기를 지도신부님이 이어받는다. 동정과 공감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내 인생을 좌우하는 성서 귀절과 이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주로 가족이나 친지간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애환이 주로 말씀의 대상이 되었다.
평소 미사는 이미 한참 전에 끝나고 저녁식사를 할 시간이었지만, 그날은 그 시간을 넘기고 밖은 캄캄하게 어두워져가고 있는데도 사람들의 고백으로 이어지는 열기는 식지가 않았다. 그 안의 감동적인 많은 고백이 있었지만, 개인 고백인 관계로 이를 소상하게 밝힐 수는 없다.
좌우지간 ~, ‘이런 것이 아닌데~’ 하면서도 이를 지루하거나 이를 멈출 ‘무엇인가’를 찾지 못했다. 지루하게 말하는 이나 듣는 이 모두가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 부었던 그날인 것 같았다. 중간 휴식시간 20분을 별도로 하고서도, 장장 6시간 40분 동안의 미사시간을 가졌다. 늦은 저녁식사 후, 휴식 겸 긴 소화제, 여러 가지 노래가 다 들어있는 종합선물세트의 연가가 이어진다. 그래서인지 전통적인 성극 시간이 사라졌다. 늦어도 해야 하는 시간, ‘봉사자회의’ 때에 ‘소식지에 대한 토론’ 과 ‘다음 월례회의 시각과 장소’에 대해서 논의로 둘째 날을 마감한다.
셋째 날은 지도신부님의 바쁜 일정으로 파견미사로 시작된다. 그리고 오전 강의는 안나 수녀님께서... 중식과 레크리에이션에 이어서, 오후에는 데레시아 수녀님의 강의와 파견식을 끝으로 해서 대단원의 수련회를 마친다.
안나 수녀님은 성서사도직활동, 그리고 살아오신 이야기로 말문을 여신다. FB선서와 복음나누기, 그리고 수도회 서원, 코이노니아 이야기 등 그동안 겪은 경험담을 쏟아낸다. 그리고 이어서 착한 사마리아의 관상이야기이며, 쓰러진 할아버지 치유 이야기며, 간질병에 걸린 자매, 휠체어 탄 자매의 이야기를 FB공동체와 함께 한 묵상이야기를 연계하면서 우리들을 치유시킨 사건들이 코이노니아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하시면서 우리의 소명거리로 나서라는 교황님의 말씀인 사명 나의 아픈 곳을 고백하게 하는 ‘봉사자의 이끔’을 통해 치유된다고 하시면서 봉사자의 사명을 강조하신다. 데레시아 수녀님은 창설자 신부님의 사랑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면서 시작하신다. 가난한 사람 - 아나윔정신 까리타스의 생활성서에 영향을 준 우리의 교본인 하느님사랑에 머무는 삶의 의미를 말씀하신다. 마태오복음의 산상설교가 주는 가난함을 설명하시고, 주님께 고백하는 베드로를 얘기하면서 교황님이 약자에게 다가서는 모습들을 생생하게 말씀하십니다.
그 외에 제 노트에는 여러 가지 영성 단어가 작성되어 있었지만, 강의의 진정한 의미를 복원하기가 두려워서 언젠가 다시 듣기로 하고, 여기에 기록은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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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연수회 소감 기고 >
은총은 늘 내 곁에...
영등포 당산동 산상수훈 팀 FB
이 안셀모 (기대)
주님의 이름은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
FB 연수회의 여운이 감소할 때 마다 신부님 및 수녀님들의 강의 내용을 메모한 노트를 봅니다.
네가 주님에게 드리는 것은 미약하나 저에게 주시는 은총은 왜 이리도 큰가...
신부님의 미사 중 형제자매님들의 삶의 회한을 일일이 귀 담아 주시는 배려는 큰 감동으로 남았습니다.
연수회는 항상 새로운 무엇인가 감동으로 내 가슴에 아로 새겨지는 느낌입니다.
새로운 만남은 항상 나의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주님으로 이루어지는 삶은 참으로 모두에게 버팀목이 되는 것 같습니다.
내적으로 부가 없어지고 하느님으로 채워지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새로운 직장으로 시간적 여유을 주신 것은 나에게 무엇인가 하라고 명하신 것인데, 무엇인지 지금 열심히 찾고 있습니다.
은총은 말로만 하다가 직접 경험을 하고 나니, 늘 내 곁에 은총은 있었으나, 내가 추수를 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나의 가슴에 항상 주님의 말씀을 담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도록 노력해야 함을 이번 연수회를 통해서 절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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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재정 회계 보고 >
☧ 매월 FB본부로 보내주시는 의연금은 본당별로 보내지 말고, 각 팀별로 회계 정산하시어, 금액이 크든 적든 매월매월 꾸준히 보내주셔야 합니다...
✟ 2014년 8월 1일 ~ 31일 수입 지출 내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