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冬柏)
노병철
사람들은 귀한 것을 좋아한다. 남들 다 피는 봄에 피는 꽃은 그냥 좋아할 뿐이지 이처럼 감탄사를 연발하지는 않는다. 눈 속에 핀 매화를 설중매(雪中梅)라고 하며 사람들은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겨울에 꽃을 본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겨울꽃이라면 동백(冬柏)꽃을 빼놓을 수가 없다. 아주 진하게 붉은 동백.
이상하게 동백꽃은 정이 안 간다. 억세다는 느낌을 자꾸 받게 되는 것은 딱딱해 보이는 잎사귀 영향일까 아니면 바로 뒤따르는 부드러운 목련의 화사함 때문일까. 여자고 남자고 간에 너무 튀는 성격을 가진 사람은 어쩐지 피곤하다. 혹 내 성격이 피곤한 성격이라 남들이 날 멀리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짙은 색깔이나 독한 향보다는 부드러운 파스칼 색이 좋고 은은한 향이 좋다. 그래서 술집 아가씨의 짙은 입술이 너무 싫어 룸살롱엔 안 간다고 집사람에게 항상 이야기한다. 일종의 세뇌 교육이다. 요즘은 잘 안 먹힌다.
“얘! 너 느 아버지가 고자라지?”
춘천에 가면 김유정 문학촌이 있다. 김유정 선생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동백꽃에 나오는 섬찟한 대사다. 요즘은 자꾸 ‘고자’라는 단어에 민감해진다. 여기에 동네 처녀인 점순이가 주인공인 머슴아를 어찌해보려다 말을 잘 안 듣자 욕하는 거다. 여기에 동백꽃이 나오는데 노란색이고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냄새가 난다고 표현한다. 강원도에선 생강나무꽃을 동백(동박)꽃이라고 부른단다. 비비면 생강 냄새가 나고 모양은 영락없이 산수유다. 김유정의 소설 제목인 ‘동백꽃’은 생강나무꽃을 일컫는 것이다. 점순이에게서 나는 냄새는 우리가 아는 동백 냄새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동백꽃은 지금이 절정이다. 경남 통영 장사도, 거제 지심도의 동백 원시림, 여수 오동도의 동백숲, 강진 백련사의 1,500그루 동백숲, 고창 선운사 동백꽃은 거의 환상적이다. 동백을 보고 싶어서 일부러 찾은 것은 아니다. 어쩌다 가다 보니 시기가 맞았고 어우러진 동백꽃을 볼 기회가 많지 않기에 입이 벌어진 것뿐이다. 소매물도에도 동백이 많이 피는데 내가 갔을 땐 온 천지 수국밖에 없었다. 그래서 누가 소매물도 동백을 이야기하면 난 수국 이야기가 먼저 나오는 것이다. 나에게 동백의 가치는 이 정도 수준이다.
동백은 꽃이 질 땐 한 잎씩 날리지 않고 통째로 떨어진다. 그래서 떨어져도 여전히 붉게 빛난다고 하여 ‘두 번 피는 꽃’이라고도 한다. 어떤 이는 자기 딴에는 제법 감성적인 척한다고 자기 가슴 속에서도 핀다고 하여 ‘세 번 피는 꽃’이란다. 같잖아서 픽 웃다가 콧물이 다 튀어나온다. 동아시아에서만 볼 수 있는 나무가 은행나무라면 가장 동아시아적인 꽃이 동백꽃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참 귀한 대접을 받는다. 우리나라 국민훈장은 꽃 이름으로 정해진다. 무궁화장, 모란장, 동백장, 목련장, 석류장 순이다. 이번에 국민훈장을 받는 사람들 명단이 발표되었다. 평생 근검절약하며 모은 재산 30억 원을 가난한 이웃을 위해 기부한 노부부가 국민 추천으로 훈장을 받는데 국민훈장 동백장이다. 12년간 100억을 기부한 모 장학회 이사장도 동백장의 영예를 안았다. 어떤 기준에서 꽃 이름이 바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훈장을 왜 꽃 이름으로 한 것인지 늘 궁금했고 장미나 유채, 산수유는 왜 빠졌는지도 항상 궁금했다. 그래서 난 늘 배가 고픈 모양이다.
“꽃 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조용필 노래에도 나오듯이 부산에 가면 동백섬이 있다. 여수에 가면 오동도라는 동백섬이 있다. 이상하게 남쪽 섬에 가면 동백을 참 많이 본다. 북쪽엔 잘 피지 않는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이미자 노래도 좋지만, 장사익 노래는 더 쥑인다. 애간장이 타들어 간다. 정말 가슴을 쥐어짠다. 동백 아가씨 노래이다.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오.”
어느 시골에 처녀, 총각이 사랑을 했다. 총각이 돈 벌러 배 타러 간다고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처녀는 요즘의 샤넬 5 버금가는 동백나무 열매를 가져오라고 한다. 그 동백기름으로 총각을 완전히 뻑 가게 만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남쪽으로 가니 이쁜 여자가 천지이고 이미 동백기름보다 더 좋은 동동구리모 바른 여자가 널려있어 집에 가는 날짜를 차일피일 미루게 된다. 처녀는 날마다 헤어진 남자가 돌아올 날만 손꼽아 기다렸지만, 소식은 없고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가슴에 빨갛게 멍이 든 채 숨을 거둔다. 나중에 정신 차린 총각이 동백나무 열매를 가지고 왔건만 여자는 이미 죽고 없다.
여기까지는 박달재의 박달과 금봉이 이야기와 비슷한데 여기에선 죽은 금봉이는 한이 맺혔던지 박달이를 죽게 만든다. 하지만 이름 모를 이 처녀는 총각을 죽였다는 이야기는 없다. 그냥 무덤가에 동백을 심었는데 붉은 동백이 무덤을 덮었다는 이야기로 끝맺음을 한다.
죽은 처녀는 이 총각을 용서해주었을까? 오뉴월에도 서리를 부르는 여자의 한을 너무 띄움 띄움 보는 것은 아닐까. 절대 그냥 용서해주었을 리가 만무하다. 그래서 동백에 관한 스토리텔링을 좀 더 길게 엮어보려 한다. 늦게 나타난 죄로 ‘고자’를 만들어 버릴까 싶다. 아마 처녀도 그냥 혼자 죽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동백꽃의 암술은 수술의 꽃가루를 받아들여 수정한다. 그리고 수술의 효용이 없어지자마자 암술은 슬그머니 꽃봉오리를 땅으로 밀어버린다. 땅으로 떨어진 꽃봉오리는, 자신이 왜 떨어졌는지도 모른 체 멍하게 땅에 나뒹군다. 쓸모없어지자 여자에게 버림받은 남자의 몰골이 연상된다. 분명 그 처녀는 죽어서라도 그 남자에게 분명 죄를 물어 버려버린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래서 동백이 난 이상하게 싫다. 무섭다.
첫댓글 그 바쁜 중에 작품을
부지런히 쓰십니다.
이제야 수필에 마음을
제대로 두었나 싶어
마음 속으로 박수를
보냅니다. 글을 열심히
발표한 후 노국장님이
사회경험도 많고 엄청
유식하다는 평이 도는거
아나 모르겄네.
나도 동백꽃에 관하여
글을 쓰다 그만둔게 있는
데....핫팅입니다.
저는 동백을 좋아합니다. 목련이 귀부인 자태라면 동백은 촌아낙 같잖아요. 그렇게 고상하고 우아하던 목련이 떨어지면 얼마나 지저분한지 아시지요. 동백은 떨어져도 통째로 떨어져 땅에서 다시 핀다고 할 정도이니 나같은 사람은 동백을 좋아하나봅니다.
ㅎㅎㅎㅎㅎ
선생님의 글을 여러 편 읽어보았는데
읽고 나면 미소가 번집니다. 그래서 다음 편 또 읽고 싶어집니다.
도덕책 같은 수필은 자꾸만 나를 반성하게 해서 그 다음 편은 미루게 됩니다.^^
동백은 피는 것인지, 지는 것인지 항상 씨저구리해서(표준말은 안어울리네예^^) 좀...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