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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8월 16일 토요일
[(녹)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헝가리의 성 스테파노 또는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에게,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주님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이 당신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며 그들에게 손을 얹어 주신다(복음).
제1독서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 여호수아기의 말씀입니다. 24,14-29
그 무렵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4 “이제 너희는 주님을 경외하며 그분을 온전하고 진실하게 섬겨라.
그리고 너희 조상이 강 건너편과 이집트에서 섬기던 신들을 버리고
주님을 섬겨라.
15 만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너희 눈에 거슬리면,
너희 조상들이 강 건너편에서 섬기던 신들이든,
아니면 너희가 살고 있는 이 땅 아모리족의 신들이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
16 그러자 백성이 대답하였다.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주님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우리에게 없을 것입니다.
17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집에서 데리고 올라오셨으며,
우리 눈앞에서 이 큰 표징들을 일으키신 분이 바로 주 우리 하느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걸어온 그 모든 길에서,
또 우리가 지나온 그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우리를 지켜 주셨습니다.
18 또한 주님께서는 모든 민족들과 이 땅에 사는 아모리족을
우리 앞에서 몰아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19 그러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주님을 섬길 수 없을 것이다.
그분께서는 거룩하신 하느님이시며 질투하시는 하느님으로서,
너희의 잘못과 죄악을 용서하지 않으신다.
20 너희가 주님을 저버리고 낯선 신들을 섬기면,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선을 베푸신 뒤에라도,
돌아서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망시켜 버리실 것이다.”
21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였다.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22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너희가 주님을 선택하고
그분을 섬기겠다고 한 그 말에 대한 증인은
바로 너희 자신이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가 증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3 “그러면 이제 너희 가운데에 있는 낯선 신들을 치워 버리고,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마음을 기울여라.” 하자,
24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주 우리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25 그날 여호수아는 스켐에서 백성과 계약을 맺고
그들을 위한 규정과 법규를 세웠다.
26 여호수아는 이 말씀을 모두 하느님의 율법서에 기록하고,
큰 돌을 가져다가 그곳 주님의 성소에 있는 향엽나무 밑에 세웠다.
27 그러고 나서 여호수아는 온 백성에게 말하였다.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인이 될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다.
그래서 이것은 너희가 너희 하느님을 부정하지 못하게 하는 증인이 될 것이다.”
28 여호수아는 백성을 저마다 상속 재산으로 받은 땅으로 돌려보냈다.
29 이런 일들이 있은 뒤에 주님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죽었다.
그의 나이는 백열 살이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13-15
13 그때에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1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최근 청년들이 혼인을 기피하거나, 결혼하고도 자녀를 가지지 않으려는 경향이 적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배우자는 사랑하지만, 아이는 싫어합니다. 반대로 난임과 불임으로 고통받는 부부도 있습니다. 부부의 삶의 방식을 잘 알지 못하면서 이래라저래라 강요할 수는 없지만, 성경에서 하느님 말씀이 신앙인에게 어떤 방향을 보여 주는지 살펴볼 수 있겠습니다. 마태오 복음서 19장은 초반부터 혼인과 이혼, 혼인과 독신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이 문제들에 대한 답은 언제나 하느님 나라와의 관계에서 찾게 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오늘 복음은 어린이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며 그 일관된 흐름을 이어갑니다.
그러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마태 19,14)이란 어떤 이들을 가리킬까요? 이러한 측면에서, 어린이는 완전한 의존 상태에 놓인 사람을 가리킵니다. 어린이 자체로 죄 없음을 상징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주위의 어린이들이 마냥 순수한 천사인 것만은 아닌 이유이겠지요. 오늘 복음에서 어린이는 단순함과 순종, 순응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이고 은총이며 선물입니다. 이 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순종과 순응으로, 그리고 그들처럼 경탄과 감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날 부부에게 자녀 출산 문제는 사회, 경제 문제로만 여겨질 일은 아닙니다. 신앙인으로서 하느님 나라와의 관계를 생각하며, 그분 창조 사업에 동참한다는 마음으로 이 문제에 다가가 보는 것은 어떨까요?(김상우 바오로 신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시고 존중하시는 주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요즘은 아이들을 금지옥엽, 애지중지 키웁니다만, 과거에는 아이들에 대한 대우가 정말이지 밑바닥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거하시는 존귀한 존재, 우리의 미래를 책임질 가능성으로 충만한 존재로 보기보다는, 아직 익지 않은 열매로 봤습니다.
아직 인간으로서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미성숙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특히 남성 및 어른 중심의 과거 문화 안에서 어린이는 온전한 한 인격체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유다 문화 안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지배적이었다는 것을 복음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고 계실 때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와 축복해달라고 청합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들을 향해 꾸짖습니다.
“이 사람들이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지금 스승님께서 설교하고 계신 것 안보입니까? 지금 엄청 바쁘시거든요. 그러니 좋은 말 할 때 저 아이들 당장 데리고 나가세요! 자~ 애들은 가라!”
제자들은 당시 분위기에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행동을 취했습니다. 당시 사람들 사고방식에 따르면 온전한 인간 존재도 아닌 어린이들, 세상 물정도 모르는 어린이들, 축복하고 기도해줄 가치조차 없는 어린이들, 괜히 시간 낭비할 필요 없는 어린이들을 쫒아낸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 꽤나 화가 나셨습니다. 인간 존재를 대하는 예수님의 사고방식과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에서 큰 차이가 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눈에 어린이들을 비롯한 나병 환자들, 이방인들, 세리와 죄인들, 중풍 병자들, 마귀 들린 여인들, 임종 환우들은 인간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눈에는 생명 붙어있는 인간이라면 그 누구라도 소중했습니다. 그 누구도 당신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어린이들의 순진무구함, 무죄함을 높이 칭찬하시며 속이 구린 어른들은 그들을 본받으라고 외치십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14)
우리 인간들과는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이 너무 다른 이런 하느님이 너무 좋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비뚤어진 시선으로 바라본다 할지라도 주님만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때로 내 처지가 너무나 억울하고 분통 터지더라고, 울고 있는 내 모습을 측은지심으로 바라보고 계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큰 위안이 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제 삶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부모님께 물려받은 이름입니다. 저는 저의 이름을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부모님께서 저의 이름을 정해 주었습니다. 이름의 뜻은 균형을 이루고 살라는 의미입니다. 다른 하나 역시 부모님께 물려받은 신앙입니다. 저는 저의 신앙을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저의 세례명은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천사라는 의미입니다. 제가 선택하지 못했지만, 저는 저의 이름과 신앙이 좋습니다. 신앙에서 제가 선택한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사제가 되고자 신학교에 입학한 것입니다. 부모님도 응원해 주셨고, 신학교는 제 삶의 못자리가 되었습니다. 신학교를 선택한 이후에 혼인 성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논문 주제입니다. 저는 설교학을 선택했고 저의 논문은 제 사제 생활에 큰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돌아보니 선택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선택한 것에 대해서 책임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을 합니다. 어떤 선택은 아주 가볍고 일상적이지만, 어떤 선택은 우리의 인생 방향을 결정짓는 중대한 선택입니다. 정치, 직업, 결혼, 진로, 이주와 같은 인생의 갈림길에서 우리는 늘 마음속으로 ‘저울질’을 합니다. 이런 저울질을 속어로 “밀당(밀고 당기기)”이라고도 합니다. 인간관계에서 밀당은 어느 정도 필요합니다. 때로는 거리두기를 통해 관계를 성숙하게 만들기도 하고, 너무 빠르지 않게 조율하면서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기도 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 사이에 그런 중재를 잘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수송아지로 우상을 만들 때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벌하려고 하였을 때입니다. 모세는 하느님께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데려다가 광야에서 모두 벌하신다면 다른 신들이 하느님을 우습게 여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이야기를 듣고 이스라엘 백성을 벌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와 메추라기는 질린다고 불평했을 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불 뱀’을 내려서 이스라엘 백성을 벌하셨습니다. 그때도 모세는 하느님께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해 주기를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구리 뱀’을 만들어 높이 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하느님과도 밀고 당기시겠습니까?” 이 질문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던졌던 질문입니다. “너희가 하느님을 섬길 것인지, 이방 신을 섬길 것인지 지금 선택하라.” 여호수아는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 사이에서 중재하는 ‘밀당의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백성에게 자신의 신앙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요구했습니다. 우리는 모세를 통해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밀당을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진노하셔서 백성을 벌하시려 할 때, 모세는 백성을 감싸며 하느님께 간청했습니다. 때로는 하느님의 뜻을 백성에게 전하면서도, 또 때로는 백성의 불평을 하느님께 전달했습니다. 이런 모세의 중재 덕분에 이스라엘은 멸망을 면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다릅니다. 그는 더 이상 백성의 책임을 대신 지지 않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이 말은 지도자로서 백성 앞에 내놓은 고백이자 선언이며, 신앙의 결단입니다.
진정한 선택은 ‘자유’로부터 비롯됩니다. 하지만 그 자유는 철저한 내면의 순수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고 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아이들은 순수합니다. 계산하지 않고, 조건을 따지지 않고, 주는 대로 받고, 마음을 열고, 쉽게 사랑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른이 되면서 자주 계산합니다. 신앙 안에서도 우리는 계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에게 “네가 가진 것을 다 팔고 나를 따르라”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돌아섰습니다. 가진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계산했습니다. 잃는 것이 더 크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계산의 영역이 아니라, 헌신의 영역입니다. 믿음은 이득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조건 없이 따르기를 바라십니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구리 뱀을 바라보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때때로 죄와 불신앙의 뱀에게 물려 괴로울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구리 뱀처럼 높이 들린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살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선택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여호수아처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직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 고백이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주며, 이미 우리 안에서 하늘나라의 삶을 시작하게 합니다. 신앙은 밀당이 아닙니다. 신앙은 결단이요, 순수한 선택입니다. 그 선택은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하늘나라의 기쁨을 우리에게 가져다줍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어린이>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어른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어린이들은
어른들을
따라 나설 뿐입니다
어린이들은
스스로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할 수 없으니까요
어른들이
어린이들에게
손을 얹어 기도해 달라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어린이들은
어른들이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가만히 있을 따름입니다
어린이들은
스스로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할 수 없으니까요
제자들이
어린이들을 데려 온
어른들을
꾸짖습니다
어린이들은
어른들이 혼나는
까닭을 모르고
다만 곁에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스스로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할 수 없으니까요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스스로 할 수 없어
스스로 하지 않는
어린이들을
지금처럼 놔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스스로 할 수 없어
스스로 하지 않는
어린이들을
스스로 하게 하지 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스스로 할 수 없어
스스로 하지 않는
사람임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몸소 하실 수 있어
몸소 하시는
하느님께
오롯이 맡기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이들에게
손을 얹어 주십니다
어린이들이
예수님의 손에
스스로를 모두 맡깁니다
끝까지
어린이들은
스스로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할 수 없으니까요
마침내
어린이들은
스스로 하지 않음으로써
꿈을 이룹니다
오늘의 성인
성 스테파노(Stephen)
신분 : 왕
활동지역 : 헝가리(Hungary)
활동연도 : 969/970?-1038년
같은이름 : 스더, 스테파누스, 스테판
헝가리 게자(Geza) 대공과 그의 아내 아델라이데(Adelaide)의 아들로 태어난 바이크(Vaik)는 10살 때에 세례를 받고 스테파누스(Stephanus, 또는 스테파노)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는 훗날 하인리히 2세 황제가 된 바이에른(Bayern) 공작의 누이동생인 기셀라(Ghisela)와 결혼했고, 997년 그의 아버지가 사망하자 마자르족(Magyars)의 통치자로 군림하였다.
그는 일련의 그리스도교적인 정책을 펼쳐 성공을 거두었고, 1001년에는 헝가리의 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성 스테파누스 왕은 성 아달베르투스(Adalbertus, 4월 23일)의 지도하에 교계제도를 구성하고 교회 재건을 도모하며, 온 나라를 평화롭고 지혜롭게 다스림으로써 헝가리 국가를 창건하고 그리스도교화 시킨 최초의 헝가리 왕이었다. 그는 자신이 후계자로 여겨 왔던 신심 깊은 아들 성 에메리쿠스(Emericus, 11월 4일)가 사냥 도중 사고로 죽자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친척들간의 암투와 음모로 큰 시련을 겪고, 말년에는 건강마저 악화되어 고통을 받았다. 그는 1038년 성모 승천 대축일에 사망하였다.
성 스테파누스가 사망한 후에도 헝가리 국민들의 가슴 속에는 그에 대한 존경심이 남아 있었으며, 묘지를 참배하러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고 기적을 체험하기도 하였다. 1083년에 라디슬라스 1세 왕은 교황 성 그레고리우스 7세(Gregorius VII, 5월 25일)의 허가를 받아 헝가리의 주교들과 수도원장, 고관들의 회의를 소집하여 그의 유해를 장엄한 예식으로써 공경하도록 결정하였다.
그와 그의 아들 그리고 아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던 성 게라르두스 사그레도(Gerardus Sagredo, 9월 24일)의 유해는 부다페스트의 성모 성당에 안치되었는데, 1686년에 부다페스트는 터키인들에게 점령되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교황 인노켄티우스 11세(Innocentius XI)는 성 스테파누스의 축일을 9월 2일로 선포하고 전세계 교회에서 공경하도록 하였다.
한편 헝가리의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2000년 8월 21일 부다페스트에 있는 성 스테파누스 성당에서 성 스테파누스를 그리스 정교회의 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이로써 성 스테파누스는 그리스도교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분리된 1054년 이후 서방교회의 성인이 동방교회에서도 성인으로 공식 인정받은 첫 사례가 되었다.
성 로코 (Roch)
활동년도 : 1295-1378년
신분 : 평신도, 증거자
지역 :
같은 이름 : 로꼬, 로꾸스, 로케, 로쿠스, 로크
프랑스의 몽펠리에(Montpellier) 출신인 성 로쿠스(Rochus, 또는 로코)의 부친은 그 지방의 장관이었다. 그러나 20세 되던 해에 부친을 잃자 그는 로마(Roma)를 순례했는데, 그 당시 이탈리아를 휩쓴 전염병의 희생자를 돕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역시 피아첸차(Piacenza)에서 전염병에 감염되었으나 기적적으로 완치되었다. 이때부터 그에게는 치유의 은사가 풍성하게 드러났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순례자로 변장한 스파이 혐의를 쓰고서 5년 동안이나 투옥되었다. 성 로쿠스는 감옥에서 죽었는데 나중에야 그가 전직 장관의 아들이며 현 장관의 조카임이 판명되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치유의 은사를 베푸는 사람으로 유명했고 또 그렇게 공경을 받았다. 그는 이탈리아에서는 로코(Rocco), 에스파냐에서는 로케(Roque)로 불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