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저기 길 앞에 조그만 정자가 보이는데.....
구로정(九老亭)이다
이곳 월림리 성북마을에 살던 아홉 노인들이 계를 조직하여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1955년에 그 자손들이 건립한 정자로 아담한 규모다
난간과 정자 바닥은 최근에 새로 전면 개수를 하였는지 풋풋한 나무냄새가 나고 있었다
구로정의 역사와 함께
아홉 노인들의 이력이 빼곡히 기록되어 있다
구로정 앞의 풍광
구로정을 떠나 안의로 가는데 안의 시내가 가까운지 길이 넓어지고 주변의 집들도 많이 보인다
잔디마당과 조경수가 멋진 어느 주택
그늘을 찾아 다리 아래에서 여가를 줄기고 있는 어느 가족의 모습이 부럽다
관북마을회관을 지나고
오리숲은 점점 가까워지는데
다슬기를 잡고 있는 저 남자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하여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지켜보는데
다슬기잡이에 열중한 채 한 눈도 팔지 않는다
안의 오리숲
안의면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금천변의 오리숲은
옛날에는 아까 지나온 월림마을회관이 있던 월림리의 밤숲에서부터
여기 교북리 앞까지 五里(약2km) 길이로 물버들나무가 군락을 이룬 긴 숲이었는데
지금은 교북리 일부분만 남아 있다
지금은 새로운 환경조성을 위해 중장비로 공사 중이어서 숲속으로 들어가 보지도 못할뿐더러
하천 바닥을 뒤엎어 놓아 물과 함께 어우러져 있는 숲의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할 수도 없어 아쉽다
<참고사진 : 펌>
안타까움에 수량이 풍부할 때의 사진인 남의 사진을 빌려본다
오리숲 옆에는 각종 선정비를 한곳에 모아둔 곳이 있는데
안의 지역 곳곳에 흩어져 있던 선정비를 이곳으로 한데 모아서 보존하고 있었으나
이것도 광풍루 뒷쪽으로 옮기기 위해 곧 이전 작업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한다
조선조 때의 안의현은 지금의 거창군 일부(마리면, 위천면, 북상면)도 포함하고 있었으나
1914년에 함양군 안의면으로 축소되었다
조선 태종 때는 안음현(安陰縣)이었으나 영조 때 안의현(安義縣)이 되었다
그러나, 영조4년이던 1728년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안의의 정희량이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꾀했지만
실패하여 참수된 뒤 영조는 안의현을 함양과 거창에 분속시켰고
그후 1914년 일제에 의해 지금의 안의면이 설치되기 전까지 그 이름을 잃어버렸다
안의대교 위에서 바라다 보이는 오리숲
최근 장마와 태풍으로 많은 비가 내렸는데도 이 금천의 수량은 그리 풍부하지가 않다
공사를 위해 윗쪽에 물막이를 해 두었나?
이제 오늘의 마지막 답사지인 광풍루가 보인다
광풍루는 안의 시내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있다
광풍루(光風樓)
정면 5칸, 측면 2칸의 우람한 팔작지붕 누각으로
조선 태종 12년(1412년)에 지은 누각으로 당시의 이름은 선화루(宣化樓)였으나
1494년(성종 25년)에 안의현감으로 재직했던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이 중수한 뒤 지금의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광풍루를 마지막으로 답사하고 안의초등학교로 가는 길에
안의면사무소를 지나고
안의파출소 건너편에
커다란 노거수와 함께 특이한 형태의 일주문과 종각이 있는 사찰(法印寺)이 있어
안으로 들어가보니 그냥 평범한 절집이었다
안의초등학교는 안의파출소와 안의소방서 옆에 위치해 있는데
1912년 4월 안의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한 이후, 2019년 2월 제105회 졸업생을 배출한 유서깊은 학교다
안의초등학교는 옛날 안의현청의 부속건물이 있던 자리로
연암 박지원 선생의 사적비가 있어 그 사적비를 보기 위해서 찾았는데
교정 한 쪽에 있는 세 그루의 플러터너스 고목이 눈길을 사로 잡는다
가까이 가서 팔을 벌려보니 장정 두 사람이 겨우 안을 수 있을 정도의 규모에 놀랍다
이 학교 동문들에게 이 플러터너스는 자랑스러운 모교의 역사를 한마디로 함축하는 것이리라
교사 앞 화단에 1986년 세워진 '연암박지원선생사적비'가 있다
'열하일기'라는 불세출의 견문록을 남긴 조선후기 실학파의 거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55세에 안의현감으로 부임하여 5년간 재직하면서 이 고장에 훌륭한 업적을 남겼는데
먼저 이곳에 있으면서 지은 문집인 燕巖集에 수록된 40여편의 저작활동을 통해 이 고장을 빛냈고
북경에서 체득한 실학지식으로 베틀, 양수기, 물레방아 등을 만들어 농업생산에 활용토록 하였고
벽돌 만드는 기술도 전수하여 관아의 부속건물과 연지(蓮池)도 만들었고
민생치세에 힘을 기울여 큰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휼하였으며
상습수해지역에 제방을 쌓아 홍수를 막았고 옥사(獄事)의 판결에 神明하여 어려운 옥사를 여러 건 해결하였으며
이 고장의 문화와 禮俗을 존중하여 지방의 문헌을 발굴하고 학술을 진작하여 훌륭한 지방문화를 발전시키기에 힘썼다
안의초등학교의 사적비까지 답사를 마치니 시간은 오후 2시 15분이다
안의면에서 북쪽으로 용추자연휴양림이 있는 용추계곡(안의3동의 하나인 심진동 계곡) 입구의 용추폭포로 가는 길에
'연암 물레방아공원'이 있는데 거리는 약6km로 버스로 35분 정도 걸린다고 하지만
거기로 가는 버스가 1시간마다 있다고해서 포기를 한다
함양에서 부산으로 가는 직통버스가 오후4시에 있는데
이곳 안의에서 함양가는 군내버스가 3시에 있다(30분 간격)
안의에서 함양까지 30분 정도 걸리니 3시 군내버스를 타면 시간이 맞다
지금 2시15분이니 군내버스 시간인 3시까지는 시간여유도 있고
점심이라고 작은 크로아상 빵 세 조각만 먹었던지라 시장기도 있다
안의에는 소갈비탕과 소갈비찜이 유명하다는데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갈수는 없다
버스정류장 앞에 갈비탕 식당이 여러 집이 보이는데 원조라는 간판에 이끌려 이 식당으로 들어선다
그 나물에 그 밥이 아니겠는가
메뉴판을 보니 갈비탕 한 그릇에 1만4천원이나 한다
조금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리를 잡고 호기롭게 막걸리 한 병까지 주문을 한다
갈비는 이것들 세 조각 뿐이었지만 국물맛은 담백하니 먹을만 했고
땀에 찌들은 옷을 갈아입고 막걸리 한 잔을 넘기니 세상 부러울게 없다
문득 수년 전 해운대에서 안의갈비찜이라는 식당을 했던 초등학교 여자동기의 갈비찜 생각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