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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와 엘리야가 변화산에서 변형되신 예수님과 이야기하다
마태복음 17장 1-8절(막 9:2-8, 눅 9:28-36)
마태복음 17장 1-8절 / 1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4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6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7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8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세 명의 제자를 데리고 변화산에 오르신후 변형하심
누가복음 9장 28절을 보면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시고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예수님을 좇을 것을 말씀하신 후 8일쯤 되어 변형하시는 사건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엿새 후’라고 기록하고 있어서 2일간의 차이가 있는 듯이 보입니다. 이에 대해 박윤선은 “누가의 기록은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떠나시던 날과 변화산에 도착하시던 날을 계산하였고, 마태는 그 중간 날수만 계산한 듯하다.” 라고 하였습니다.
변화산에 도착하신 예수님은 열 두 제자 중에서 특별히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눅 9:28). 예수께서 이렇게 따로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사람만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신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전에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에도 이 세 사람만 데리고 들어가셨으며, 훗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기도하실 때에도 또한 그랬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떤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의도적으로 이렇게 세 사람만 동행시키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김홍전은 “주께서는 어떤 중요한 문제에 당면해서는 이 세 사람만을 데리고 가셔서 그들에게 훗날에 다른 동무들과 그 사실을 얘기로 나누게 하셨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왜 하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일까요? 헤르만 리델보스는 변화산 사건을 주해하며 말하기를, “이 세 명이 항상 뽑혔던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의 최초의 제자들이라는 점과 관련이 있음이 분명하다. 더욱이 베드로는 모든 제자들 중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했다. 마태복음 16장 23절에서 예수님의 심한 질책을 들은 이후에도 이 위치를 상실치 않았다. 도리어 여기서 그를 택하므로 예수께서 다시 보이신 신뢰는 그의 위치를 재보장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번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사람을 따로이 데리고 후에 여기에서 있은 사건으로 변화산이라고 이름 붙여져 불리는 산에 올라가신 것은, 산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크신 영광을 나타내 보이시기 위하여 자신의 모습을 변형시키는 일을 통해서 예수께서 무엇인가를 제자들에게 보여 알게 해주고자 해서 입니다. 예수께서는 기도하시는 동안 그 얼굴 모습이 변하고 옷 또한 희어져 눈부신 광채로 빛났습니다(눅 9:29). 베드로는 후일에 자기가 변화산에서 예수께서 변형하신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영광을 목격한 것과 그 큰 영광 중에서 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그의 두 번째 서신인 베드로후서에서 증거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얘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벧후 1:16-18).
예수님은 자신의 변형된 모습에서 하나님의 크신 영광을 나타내 보이시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신 것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실체를 보고 듣게 하는 것에서 그들에게 알게 해 주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관계 있는 변형의 이적이 갖는 성격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얼굴이 변하고 입은 옷 또한 희어져 눈부신 광채로 빛나는 형상을 보이셔서 하나님의 크신 영광을 나타내신 것은, 앞으로 자신이 하실 사역과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영광으로 변형하신 예수께서 자신의 곁에 두신 두 사람 모세와 엘리야와 나눈 대화의 내용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別世)하실 것을 말씀할 새”(눅 9:31).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오르시고 기도하시는 중에 변형되셨는데, 이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의 구속을 위하여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에 순종으로 자신을 드릴 것을 기도하시는 것이요 또한 자신을 좇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통해서 이루실 구원의 성격 - 죽음과 부활에 의한 속죄와 영생 - 과 그 구원을 주시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이해와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응답으로 그동안 ‘사람의 형상’으로 가려 있어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크신 영광’을 나타내 보이시고, 사람과 같이 되신 예수님이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 선언하셨고(마 3:17), 앞서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신앙고백 한 바와 같이(마 16:16),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이심을 다시 한번 선언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예루살렘에서 죽음을 당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이 ‘하나님의 일’로서 있는 일이요,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임을 믿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육신을 입은 사람의 형상으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 가리워져 있어 사람의 눈으로는 사람 되신 예수님의 모습만 보지만,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참 사람이요 참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변화산에서 변형하셔서 사람의 형상으로 가리워져 있던 하나님의 크신 영광을 나타내 보이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보냄을 받은 자신의 존재를 확연하게 드러내 보이셔서 그 신앙고백으로 있는 제자들의 믿음을 더욱 견고히 세워주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여 하나님의 크신 영광을 나타내심으로써 하나님의 크신 위엄을 보이심은 얼마 후면 있을 십자가의 죽음 뒤에 펼쳐질 ‘부활’에 의해 있을 하나님의 영광 속에 제자들을 두시고 그들 또한 그 영광에 참예하는 기쁨을 갖게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이끌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표징으로 변형하신 예수님의 곁에 모세와 엘리야 두 사람을 두시고 그들과 함께 얘기를 나누시는 모습을 보이시며, 그 내용을 듣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은 믿음으로 의로운 자로 받아들여지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영광스런 자리에 올라와 있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롬 8:15),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1-2).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며 그분의 사랑을 온 몸으로 받습니다. 요한은 이러한 제자를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를 받았다고 말합니다(요 1:12) 이 사람은 종처럼 삯을 받고 일하는 자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업을 이어받아 누릴 자인 ‘하나님의 후사’로 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롬 8:17). 하나님의 기업이란 하나님의 나라와 생명에 들어가는 구원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자는 구원이 약속되어 있는 자이니 그 약속을 소망으로 기다림으로써 구원 받습니다 구원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요한을 비롯한 사도들이 그 영광을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감격을 가지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문자대로는 아버지의 외아들의 영광을 보았다는 말인데,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내 주시고 있는 아버지의 영광가운데 들어가신 것과 같이 요한을 비롯한 사도들도 아버지의 영광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영광을 지금 변화산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선험적(先驗的)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 뒤에 부활하심으로써 모든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아버지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참여하였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에게서 본 하나님의 크신 영광을 이제 우리가 우리에게 내재해 계신 그리스도의 영에게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를 받은 사람들의 자랑스런 특권입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라.”(고후3:17-18) 라고 말하였습니다. 현대어성경을 보면 이 문구의 뜻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생명을 주시는 영이시며 영이 계시는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얼굴을 가리는 수건 -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고 있는 것 - 이 없습니다.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환하게 비출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우리 속에서 일하시므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영광 속에서 더욱더 주님을 닮아갑니다.” 바울은 자신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에게서 보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기 위하여 그는 자기의 전 생애를 맡기고 달려갔습니다. 사실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를 받은 자의 특권이라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를 받은 자가 아니고서는 그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는 모습을 보이신 의미
예수께서 변형되셨을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는 모습이 세 명의 제자들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자들이 들으니 대화의 내용은 하나님의 거룩한 구속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죽으실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이러한 대화를 나누는 인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전해 받은 하나님의 율법에 이스라엘 백성을 두고 하나님을 섬겨 따름에 있게 한 모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맡겨 주신 예언을 전해 받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달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게 한 엘리야 라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대화를 나누는 인물이 모세와 엘리야 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떻게 모세와 엘리야인줄을 알았는가 하는 것은 본문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중요한 관점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셔서 그들과 주고받는 얘기를 제자들이 듣게 하는 것에서 지금 자신이 하시는 일의 구속사적 의미와 그 일을 하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한 일을 수행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한층 구체화하여 알 수 있게 하심으로써 그에 대한 믿음 속에 있게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변형에서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과 대화는 예루살렘에서 겪을 예수님의 죽음의 결과로 나타나질 부활에 의한 하나님과 그 나라의 영광이 구약 율법에서 말씀되고 선지자들에 의해서 예언되어져 온 ‘메시야의 사역’의 성취라고 하는 진리를 묵시(黙示)적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곳에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대표들로서 율법[모세오경]과 모든 선지자의 글이 말해왔던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알게 해 주고 있는 것이니,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죽으심으로써 자신들의 일을 완성시키실 분이심을 예언적 계시의 성격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이 사실을 세 분의 대화에서 확실하게 깨닫고 인식하여 그에 대한 믿음 속에 있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갖고 있어야 할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펼쳐나가시는 구속사적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는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로 받고 섬겨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의 성격은 현하 모든 성도들의 믿음의 뿌리를 이룹니다. 이 믿음의 바탕에서 하나님을 예배[경배]하며 섬김이 하루하루가 다르게 올라와 그 실체를 나타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것은 그만큼 현대 교회는 ‘종교적인 틀’속에서 스스로 종교의 본질을 잃은 상태에 놓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포
누가복음 9장 32-33절을 보면, 세 명의 제자들은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에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예수님은 기도하실 때에 변형하셨고,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고 있었습니다. 그때 베드로와 다른 두 명의 제자들이 잠에서 깼습니다. 깨어 보니까 하나님의 크신 영광으로 변형하신 예수님과 그 영광중에 함께 서 있는 두 사람인 모세와 엘리야가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대화를 마친 모세와 엘리야가 마침 떠날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다음과 같은 간청을 하였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있는 것을 본 베드로는 마음에 굉장한 기쁨이 일어나 너무 좋은 나머지 그분들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분들과 함께 이곳에서 언제까지나 살았으면 하는 강한 욕망이 일어났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분들이 머물 수 있는 처소를 마련해 드려야겠다는 열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우리들이 여기에서 살면 참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세분을 위하여 초막 셋을 지어 드리겠으니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이 말을 마가와 누가는 각각 기록하기를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자기 가 무슨 말을 할른지 알지 못함이더라.”(막 9:6),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눅 9:33)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베드로가 도대체 자기가 무슨 생각 속에서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무의식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변형하신 예수님과 말씀을 나누던 모세와 엘리야가 떠나려고 하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해야 이곳에 세분을 계속해서 머무르게 하여 그분들과 함께 살 수 있을지를 모르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상태에서 세분과 함께 이곳에서 계속해서 살면 좋겠다는 마음이 앞서 말하게 된 심정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대어 성경은 “베드로가 이렇게 말한 것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엉겁결에 나온 말이었다.”, “모세와 엘리야가 떠나려고 하자 베드로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불쑥 이렇게 말하였다.”라고 각각 번역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간청하는 동안 빛나는 구름이 제자들을 덮었습니다. 그러더니 구름 속에서 다음과 같은 음성을 그들에게 들려 주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마 17:5). 이 음성을 제자들에게 주신 것은, 지금 제자들이 변형하신 예수님과 그와 함께 한 모세와 엘리야의 모습에서 자신들도 그 속에 참여하여 함께 행복을 누리고 싶어 하는 소위 황홀경에 빠져있지, 세 분이 말씀을 나누신 내용과 그 뜻을 이해하고서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통과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으시는 일에 제자 된 자신들을 어떻게 드려 나갈지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는 권면을 하신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의 간청은 그가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에 대해 가진 마음과 본의와는 다르게 예수께서 구속주로서 짊어지시고 걸어가셔야 할 십자가의 길을 멈추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고난 이후에 받으실 하나님의 영광을 중단토록 하는 일이 됩니다. 이는 앞서 그가 신앙고백 직후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예언을 듣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아끼는 심정에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 것을 간청함으로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막는 잘못을 범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변화산에서의 이적을 통해 예수께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후에 받으실 영광과 그로 인해서 그를 믿는 자들이 누릴 영광스런 기쁨에 대하여 계시하여 주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순종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드려 감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온전히 기울일 것을 권면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헤르만 리델보스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말하고 행한 모든 것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귀를 기울여야 하는 진리라고 선포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이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가진 믿음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불러 모으십니다. 그 은혜의 수단으로 작용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십자가의 구속과 그로 인해 받으신 하나님의 영광의 진리입니다. 그러기에 이 진리에 귀를 기울이게 하여서 그 위에 있는 믿음으로 세워나가십니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전도할 때 십자가의 도외에는 어떤 것도 말하지 않기로 작정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능력을 그 진리 외에는 결코 행사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또한 사람들이 자신의 전도를 듣고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그들의 믿음이 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을 얻기를 바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단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회집하는 교회당을 오고 가며, 이 안에서 기독교의 여러 종교적 행위만을 갖는 데서는 결코 평가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배에서 증거되어 전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3장에는 천국 복음에 대한 여러 비유가 등장하여 “천국은 마치…와 같다.”를 말씀해 주십니다. 이 중에서 ‘씨뿌리는 비유’에서 듣는 바와 같이 길가 밭, 돌작 밭, 가시덤불 밭으로 가르쳐 주시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서 결실하지 못하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듣고도 그 마음이 길바닥 같이 굳어져 있어 깨닫지 못함으로 사단에게 그의 마음속에 뿌려진 씨를 빼앗기는가 하면,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을 듣고 이것이 옳다는 것을 알고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 씨가 뿌리를 내리지 못함으로 오래 가지 못하고 곧 말라죽음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서 떠나는가 하면,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을 떠나지 못함으로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합니다. 이는 말이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결실하지 못하는 이유가 이렇게 여러 가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데 의도가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이런 것이 있어서 결실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런 저런 것이 언급되면서 결실하지 못했다고 말씀해 주시는지요. 그것은 말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에서 말씀되고 있습니다. “좋은 땅에 뿌린 씨는 말씀을 듣고서 깨닫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인데, 그 사람은 열매를 맺되, 백 배 혹은 육십 배 혹은 삼십 배의 결실을 맺는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누가복음 8장 15절에서는 ”착하고 좋은[바른]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서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착하고 좋은 마음’은 그 사람 마음의 본성이 착하고 좋다는 것에서 하시고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3장 11-17절에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를 설명해 주시고 있는데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귀를 막고 눈을 감기게 하고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게 하신 자들은 아무리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많이 들어도 도무지 깨달을 수 없고 아무리 끊임없이 보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말씀해 주신 하나님의 뜻을 결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말이죠. 그들이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마음으로 깨달아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시는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믿음에 있는 제자들에게는 그들의 눈이 봄으로 복이 있고 그들의 귀로 들음으로 복이 있게 하십니다. 앞서의 선지자들이 그들이 보는 것을 보고자 하였으나 보지 못하였고 그들이 들은 것을 듣고자 하였으나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는 그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는 기쁨에 있고 그들이 듣지 못한 것을 듣는 기쁨에 있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는 이 사실을 알려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듣지 못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너희는 귀로 들음에 있고 또한 눈으로 봄에 있으며 또한 그렇게 듣고 보는 하나님 나라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앎에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 까닭에 좋은 땅에 심겨진 씨가 반드시 백 배, 육십 배, 삼심 배의 결실을 맺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결실에 있도록 그들에 마음에 심겨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지키어 인내하게 하신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듣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말이죠. 주께서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여 선한 자는 생명의 부활을, 악한 자는 사망의 부활을 하게 하시는 그날까지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믿음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이 믿음에 있는 자를 세상이 결코 감당하지/이기지 못합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게 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