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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름날의 온천장 – 혜산 박중선(단편소설)
(1)
창밖을 내다보니 건너편 산이 한결 더 검푸르게 보인다. 이제 여름이 서서히 시작되나 보다. 오늘은 올여름의 무더위를 예고하듯 한낮에는 제법 대알 지게 열기를 뿜어 대었다. 약 기운에 취한 파리처럼 식곤증에 시달린 낮이 꽤 길었다.
그러고 보니 낮의 길이도 어지간히 늘어난 셈이다. 오늘따라 유달리 착 가라앉는 기분은 변한 날씨 탓인가 보다. 콧구멍만 한 사무실에서 어서 탈출하고 싶은 생각에 시계가 붙어 있는 벽 쪽으로 눈이 자주 간다. 지겨울수록 더디게만 느껴지는 퇴근 시간이다. 그런 속에 일과를 마무리 지을 시간이 되었다. 문을 열고 네댓 명 되는 사원들에게 해방을 알린다.
“이제 마감들 하지!"
언제나 퇴근 시간이면 시든 푸성귀가 마냥 풀이 죽어 보이던 사원들의 행동이나 표정들에서 생기가 느껴진다. 일에는 거드름쟁이들도 퇴근하라면 굴레 벗은 말처럼 설친다. 그들 또래 적에는 나도 그랬으니 말이다. 막상 서둘러 일과를 마감했어도 갈 데가 마뜩잖다. '이 녀석들! 어디로 싸돌아다니기에 오늘따라 전화도 한 통 없냐?' 개똥도 약에 쓸려면 찾기 힘들다더니 제집 안방 드나들 듯하던 친구 놈들이 오늘따라 코빼기조차 안 보인다. 게다가 한 주일 내내 귀찮게끔 많든 먹거리 약속도 오늘따라 비어 있다. ‘애라, 어디 분위기 좋은 곳에 가 생맥주라도 한잔하는 거다.’ 윗도리를 챙겨 들고 문을 나설 무렵 전화벨이 울린다.
“따르릉따르릉."
잽싸게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야! 퇴근 안과 뭣 하냐?"
아니나 다를까 눈이 빠지게 기다리던 친구 남 사장의 목소리다. 쓴 소주라도 한잔하자는 주문에 귀가 번쩍 뜨인다.
“텔레파시가 통하는 모양이구먼?"
”왜? 나를 기다렸냐?"
"그래, 이 친구야!"
세상을 살아가면서 언제나 마음에 부담 없이 터놓고 지낼 수 있는 너와 나의 관계를 유지하고 살 수 있다는 것은 그다지 흔치 않은 법이다. 내가 아쉬울 때 변소 칸에 앉아 개 부르듯 하고 제가 생각날 때 반가운 짝꿍이 되어줄 수 있는 사이란 예사로운 관계가 아닐 게다. 아무튼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 마치 무겁던 마음을 훌훌 털어버리는 심정이다. 여간 다행스러웠다는 느낌으로 문을 나섰다. 온천장 어귀에서 차를 보내고 목욕탕 골목으로 들어섰다. 곰 장어 굽는 냄새가 꿀 짐 한 뱃속을 동하게 한다. 약속된 C 복국집은 문이 열려 있었다.
“어서 오시오!”
30대 초반쯤 되어 뵈는 낯선 여인이 반갑게 맞는다. 밉지 않은 인상에다 싱싱해 보인다. 단골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제법 자주 드나드는 편인데 처음 보는 종업원이 있을 정도면 그간 뜨음했다는 얘기다.
"오래간만이네예.“
돌아다 보니 주인 노릇을 하는 아줌마다. 실제 주인을 알기 때문이다.
"자주 오시는 모양이지예."
대꾸 없이 쳐다보니 곱상하게 생긴 아까 그 여인이 아는 체를 하며 뜸을 들일 새도 없이 물수건에다 냉수 잔을 가져다 안기는 양이 이런 일에 꽤 이골이 나 있어 뵌다. 술꾼들에게는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지 구석진 자리에 40대 남녀 한 쌍이 고작이다. 그들은 비밀스러운 말 나눔을 하다가 낯선 방문객을 보고는 얼른 톤을 낮추고 몸을 사리는 양이다. 음식을 주문해 놓고 기다리는 참인지 아직 탁자 위엔 민둥산이다. 온천장 목욕탕 거리는 야릇한 풍경도 많다. 남녀들이 목욕을 마치고 물기도 덜 마른 모습으로 이런 후미진 뒷골목의 구석진 음식점을 찾아드는 경우가 많은 것은 역시 관광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대체로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게 단박에 푯대가 난다. 그들이 비정상적인 커풀일 것이라는 선입관을 가지면서도 애써 태연한 척 다른 데로 시선을 보낸다. 사람들은 다 마찬가진가 보다. 일단은 흥미의 대상으로 삼아 잣대질을 해보는 짓궂은 심보는 너나 할 것 없이 똑같으리라는 생각에 쓴웃음을 머금는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스캔들인 거라.’ 어젯밤 술자리에서 김 사장이 어떤 이야기 끝에 하던 얘기가 실감이 난다. 약속 시간이 어지간히 지났는데도 나타나질 않는 것으로 보아 퇴근길이 오지게 막히는 모양이다. 혼자 앉았으려니 멋쩍고 떨떠름한 기분이다.
"우선 시원한 맥주나 한잔 하시지예?"
하긴 중요한 상거래를 나눌 비싼 자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기자기한 사랑놀이할 남녀가 만나는 터도 아니니까 우선 목부터 축이자는 뜻에서 곱상한 아줌마의 서두르는 주문을 따를 수밖에 없다.
"요리는 뭘로할까예?"
손님이 없으니까 유다르게 조른다. 그녀가 내민 메뉴판엔 그럴싸한 복요리들로 메꿔졌는데 막상 요리의 종류를 고르려 드니 복어 종류가 많아 쉽사리 판단이 서지 않는다.
"배부른 놈은 다 복쟁인 줄 알았는데 와 이리 종류가 많노?"
복어가 예쁘게 그려진 유니폼을 입고 옆에 서 있던 여인은 객쩍은 소리에 가슴을 들썩거리며 히죽히죽 웃는다. 다 같은 복어라 여겨지건만 참복은 값이 가당찮게 비싸다. 참복이 맛있고 좋노라고 연신 입방아 질을 해대는 여인의 이골난 장삿속에 솔깃해지다가도 세 곱절이나 비싼데 놀라 도리질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참복 한 접시 값이면 까치복 세 접시 값인데 우리 같은 서민이 그렇게 비싼 것 먹을 수 있나?"
"아이쿠, 사장님도 엄살께나 부린다?"
"허허, 요즘은 빚 심에 산다오. 하지만 오늘은 맞돈 주고 먹을 거니까 안심하소."
"자주복 수육으로 하이소."
"그렇게 비싼 것은 애인 데리고 목욕와서 돈푼깨나 써대는 잘 나가는 사장님들한테나 팍팍 시키는 거라서요."
옆좌석의 남녀가 흘낏 건너다본다. 순간 말이 너무 헤펐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메뉴판을 들고 있던 여인이 이를 앙다물며 실눈 짓이다.
"와, 내가 너무 입바른 소리 했나?"
바쁜 머슴 새워놓고 익은 밥 먹고 선소리 한다는 눈치다. 참복, 까치복, 은복 세 종류 중에서 빨리 고르라는 눈치다. 비싼 것을 알면서 남세스럽게 에누리를 하잘 수도 없는지라 맛이 있어봤자 제 놈이 복쟁이 맛이리라 자위하면서 말허리를 잘라 결정을 내렸다.
"까마귀복으로 해주소!"
우스개 삼아 까치복을 까마귀복이라 했더니 허영허영 하며 웃던 여인이 제자리로 돌아간다.
"이 친구 오늘따라 왜 이렇게 늦지?."
제아무리 늦는다고 해도 안주가 마련되어 나올 시간에 얼추 맞게 당도하겠거니 생각하며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들이켜며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벽에 야한 달력이 걸려있다. 가슴과 허벅지를 들어서 내놓은 미녀가 빤히 바라보며 웃는다.
"요새 소주 잘 팔리겠네."
국자로 요리를 뒤적거리던 그 여인이 입을 삐죽거린다. 홀 안 몇 좌석이 손님으로 채워지는 것을 보니 어둠이 깃드나 보다.
"이 친구 걸어서 오나?"
그렇듯 문이 열릴 때마다 주인공이 나타나는가 싶어 바라보건만 반길 사람은 아니다. 앞쪽 넓은 자리에는 방금 들어왔던 네댓 명의 젊은이들이 상사를 안주로 삼아 급하게 소주잔을 돌리고 있다. 쌍 쌍이 들어가는 욕지거리가 계속인 것을 보니 오늘 오달지게 욕을 얻어먹은 모양이다.
"요리가 다 되었네요."
앞에 그득하니 식사 전을 벌여두고 진득이 침만 삼키고 뜸을 들일 필요도 없거니와 음식에 보튼 성미도 가누기 힘들고 해서 상대 없이 두어 잔 홀짝거린 술이 잽싼 걸음으로 위벽을 간질이며 주기를 살살 부채질할 때쯤 해서 민망스러운 표정으로 남 사장이 들어섰다.
"어이쿠, 오늘따라 차가 어찌 막히는지."
‘후래자 삼배’ 라고 서너 잔 연거푸 안긴 뒤 겨끔내기로 술잔을 돌려가며 주고받다 보니 그의 얼굴에도 화기가 돈다. 배가 출출하던 김이라서 세 설은 접어두고 둘이서 되알지게 먹고 마시다 보니 제법 얼큰해졌다.
"아, 이제 부자 눈 아래로 보인다."
"복쟁이가 친구 온 줄 알겠다야."
부지런히 움직이던 아줌마들이 씩씩 웃는다. 벽에 붙은 복쟁이 그림처럼 뱃속이 가당찮게 부푼 느낌으로 그 집을 나선 것은 그러고도 한참 후였다.
(2)
저녁 여덟 시 경이다. 그 당 새 어둠은 온천장 거리를 다른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다. 생기가 없어 보이던 거리도 어느새 형형색색으로 아롱진 네온의 불빛 아래에서는 활기가 넘쳐 보인다.
"온천장은 역시 온천장이구만…."
"그래 말이야."
자주 찾아드는 외국인들을 모시고 이 골목에 와서 접대하는 남 사장은 화려한 온천장의 열기에 대해 외국인들의 인식을 피력한다. 막상 상담을 벌이는 자리에서는 한국의 어려운 경제 사정을 설명하다가도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이 거리에 나서면 말짱 거짓말처럼 믿으려 들지 않는다니 말이다. 그야말로 불야성을 이루는 휘황찬란한 거리다. 멀쩡한 사람들도 얼이 빠져들 정도인데 하물며 한 잔쯤 걸친 사람들이라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유혹에 이끌릴 만하다.
"어디 가서 차라도 한잔하고 가자!"
아직도 초저녁인데다 기분도 좋을 정도로 마셨는지라 그냥 헤어지기는 민숭민숭한 기분에서다.
"어디로 갈까?“
바로 길 건너 2층의 그럴싸한 간판이 눈길을 끈다.
"오랜만에 저 집으로 가볼까?"
2차는 늘 분위기 위주로 고른다. 양보다도 질 쪽으로 저울질을 한 셈이다. 예전부터 시나브로 드나들던 곳이다. 카페 차림도 아니고 그렇다고 경양식 집도 아닌 어정쩡한 곳이라서 가뭄에 콩 나듯이 찾아가는 곳이다. 오늘따라 그런대로 손님들이 북적댄다. 빈자리가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홀 안을 죽 돌아보니 반백 줄에 드는 우리 또래의 중늙은이는 없고, 대개가 젊은 쌍쌍들로 매워져 있다. 웨이터가 우리를 안답시고 앞장서서 안내한 자석이 안쪽의 구석진 자리다. 테이블 두 개가 놓였는데 그중 한쪽은 선객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반쪽이 비어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스텐드에 걸터앉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비록 별도의 테이블이긴 하지만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여자 손님께 실례한다는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불청객이라기보다는 낯선 나그네들과 옆자리를 한 것이 계면쩍은 기분이 드는가 보다. 얼굴이 반드롬한 그녀 역시 우리의 행동거지에 신경이 쓰이는 눈치다. 자주 시계를 들여다보던 그녀는 기다림이 지겨운지 담배를 챙겨 문다. 언뜻 보기에 미쳐 혼기를 놓친 20대 후반이거나 30대 초반쯤으로 보였다.
"뭘 주문하시겠습니까?"
막상 대화를 잊고 여인의 행동에 신경을 쓰던 두 신사가 웨이터가 내민 주문장을 들여다본다. 자릿값을 하노라 칵테일인 ‘맨해튼’과 '진토닉' 한 잔씩을 시켜놓고 대화의 가닥을 찾는다. 서너 날 못 만난 사이에 있어 봤자 별일이 있을 턱도 없다. 주변 잡담도 아까 술좌석에서 어지간히 소진해 버려 재고가 바닥난 셈이다. 대화가 궁해지자 남 사장은 외톨이로 앉아있는 여인에게로 말머리를 돌렸다.
"아가씨! 친구를 기다리는 모양인데 심심할 텐데 동석합시다."
'심심하면 저들이나 심심할 일이지 참 별꼴이야.' 하는 식으로 눈길을 보낸다. 그래도 남 사장은 여자들을 끄는 매력이 있어 던진 낚시가 헛방 질을 안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남자치고는 허우대가 좋고 음성도 굵직하니 점잖게 보여 우선은 여자들이 호감이 갈 수 있는 첫인상이라는 게 온천장 술집 마담들 사이에 알려진 남 사장에 대한 평이다.
"그래도 될 점잖은 분들입니다."
마침 인사차 옆에 왔던 지배인도 거든다. 잠시 내색을 안 하고 머뭇거리던 여인이 양쪽을 번갈아 보더니 만 무거운 엉덩이를 미시거리더니 소지품을 챙겨 시부저기 일어나 남 사장 옆으로 슬며시 당겨 앉는다. 그녀에게도 달착지근해서 마시기 편한 칵테일 한 잔을 시켜 안기고 서서히 우스개를 섞어 호기심이 어린 상대방의 신상 관계를 캐기 위한 전초전에 돌입하면서 좌석은 한결 부드러워졌다.
"오늘 데이트가 있는 모양이지요?"
"친구를 만나려 왔어예."
하기야 데이트하러 온 아가씨가 우리 곁으로 다가앉을 이유가 없지. 조금 있으려니 또래의 한 여인이 헐레벌떡 나타났다.
"너 많이 기다렸제?"
"기다린 게 뭣꼬야? 얼추 한 시간이나 되는데."
약속 시간을 어겨 미안스러워하던 여인이 좌석 분위기를 살피더니만 별 달갑잖은 표정으로 변한다. 다짜고짜로 우리와 동석한 것부터 못마땅한 눈치이더니 그래도 되느냐는 식으로 앞서 온 친구에게 핀잔을 주며 동석하기를 주저한다. 혼자 시투렁해 가지고서는 딴 짓거리다. 빈자리라도 있으면 찾아가 앉을 그런 눈치다.
"아가씨, 괜찮으니 앉아 보소!"
'괜찮은 건 제 사정이지?' 하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머무적거린다. 입성 좋은 남 사장이 나서서 변명 아닌 너스레로 분위기를 조정한다.
"알고 보면 고만고만한 인물들이니까 안심 폭 공구고 좋은 말 할 때 못 이기는 척하고 앉으소!"
그러나 삐딱한 심사를 추슬러 제 자리에 앉히기까지 제법 뜸을 들인 후였다. 그렇게 되어 어설픈 만남이 시작된 밤이었다.
(3)
기왕지사 벌인춤이라 식사를 겸한 안주에다 잔으로 마시던 양주를 아예 작은 병으로 청하면서 또 다른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랄 같은 인연의 모닥불이 타오르는 밤이 되었다. 술잔을 부딪쳐 즐거운 시간을 위해 건배를 외치고 나서부터 하룻밤 재운 고기 숨죽듯 부드러운 대화의 물꼬를 트는 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처음부터 음전하게 미소를 띠고 무덤덤해 보이던 여인은 김 양이라 했다. 그리고 뒤늦게 온 여인은 박이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어지간해서는 말 붙이기조차 어렵겠다 싶을 정도로 대꼬챙이처럼 뻣세 보이던 박 양은 끝까지 경계의 자세를 늦추지 않았다. 움푹 팬 큰 눈과 검은 눈썹 속에 강한 개성의 소유자임을 쉽게 읽을 수 있다. 예사말로 기갈께나 있어 보이는 그런 인상이다. 관상학적으로는 팔자가 세겠다는 점 깨가 나올 듯싶다. 그런 느낌을 남 사장이 들은 풍월 삼아 얼렁뚱땅 비유적으로 표현한다.
"내가 느끼는 감으로는 박 양은 남자로 태어났었더라면 여자 여럿은 거느릴 상이네요."
"대충 맞아예, 안 그렇니, 너?"
박 양을 대신한 김 양의 대답에 자기들끼리 뜻을 모를 눈짓이 오간다.
"어디 직장에 나가나요?"
"그런 복잡한 것 묻지 마세요!"
박 양이 야무지게 말허리를 자르는 바람에 잘하지 못했다가는 다 잡아 놓은 고기 놓칠까 봐서 수그러들지 않을 수 없다.
"아이고, 말 한번 잘 못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겠네."
김 양은 직장인이라고 했다. 그러나 박 양은 소속을 밝히려 들지 않았다. 옷을 입은 테와 화장기 없는 차림새에서 귀티는 풍기되 당차고 올곧아 보이는 첫인상에다 가리지 않고 상대를 무시하는 투의 얀정머리 없는 어투와 몸짓이 좀 버금가게 빗나간 혼기 놓친 노처녀일 것이라는 생각하게 한다.
"자! 전국적으로 한 잔씩 합시다!"
분위기가 무거워질 때쯤이면 으레 원샷을 청해 가라앉히려 드는 게 술좌석에서의 통례다. 평소에도 여자들을 잘 다루는 남 사장은 두 여인을 두고 소쿠리를 태웠다가 쟁이로 까불다가 때로는 음담패설로 약간 초를 쳐가며 50대 초반의 넉넉하고 든든한 여유를 심어 주었다.
"친구들끼리 만나면 주로 뭘 하고 놉니까?"
그게 궁금하다기보다는 대화가 궁해서다.
"식사하고 수다를 떨다 기분 좋으면 노래방에도 가기도 하고. 왜 그런 거 있지 않아요?"
"우리 같은 쉰내 나는 사람들이 우찌 아가씨들 노는 걸 알겠는교?"
"한참 나이신데요 뭐?"
오랜만에 박 양이 입을 연다.
"젊게 봐줘서 고마운데 그런 뜻에서 한잔 더 하소!"
말은 해야 맛이고 고기는 씹어야 제맛이라던가? 새침데기처럼 풀이 죽어 뵈던 여인들의 잔소리가 살아나고 한결 분위기가 나긋해졌다. 복어요릿집에서 두어 가지 술을 섞어 마신데다 양주를 몇 잔 걸친 남 사장이 발동을 건다.
"이왕지사 이렇게 만나 남의 팔자 점쳐서 어쩌자는 것도 아닌 판국이니 노래방에나 가서 악이나 써다 갑시다."
악이나 쓰잔 말에 여인들은 까르르 웃고 남자들은 허영 웃었다.
"그래요, 그게 재미 있겠어예."
말추렴에 시간만 까먹고 앉아 있기보다는 예쁜 아가씨들 노래도 듣고, 우리는 고함이나 지르다 가는 것이 엔도르핀이 솟는 일이겠거니 싶어 마다치 않고 따라나섰다. 꼬시는 남자들이야 늘 한패다. 서로 이견을 조율하던 여인들도 결코 해코지를 않을 사람같이 느꼈는지 '조금만 놀다 가자' 라는 단서를 붙여 동의하고 따라나선다.
(4)
온천장 거리는 더욱 휘황찬란하게 깊어 가고 있었다. 가까운 M이라는 노래방으로 갔다. 지하의 홀 안은 수많은 인간과 기계들이 만들어 내는 오만가지 잡음으로 시끌벅적하다.
"잘 아는 마담이 있습니까?"
웨이터가 묻는다. 각 실 마다 담당하는 주인이 있다는 얘기다. 남 사장의 얼굴을 알아보는 한복 입은 여인이 다가와 제 영역으로 안내를 한다. 네 사람이 들어가지 않으니 꽉 차는 기분이 들 정도로 작은 방이다.
"이 집 그림 한번 좋다."
아닌 게 아니라 별스레 브라운관에는 야한 영상이 비치고 있다. 반라의 여인이 다 벗어젖힐 듯한 액션으로 비틀고 꼬는 성적인 몸짓을 해댄다. 보아하니 주인공은 가수 마돈나였다.
"남 사장! 노래방은 참 잘 생겨 난 것 같제?"
우리 국민의 목청을 틔우고 놀이 문화의 질을 높이는 데 큰 몫을 했다는 얘기들이 오갔다.
"그래 말이야, 우선 우리 같이 늙은 사람들이 용을 써가며 가사를 외울 필요가 없으니 좋고.”
하기야 본디 노래판에 가면 음치던 사람들이 노래방 덕을 톡톡히 보는 게 사실이다.
"자! 즐거운 밤을 위하여!"
맥주잔을 비워가며 별스러운 만남의 주인공들이 마이크를 붙잡고 목청을 돋우며 차례를 메꿔간다. 역시 술이란 묘약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자기표현의 용기를 주고, 더러는 마음을 터서 비밀스러운 제 허울의 옷을 벗기도 한다. 박 양은 술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자기표현이 어렵다더니만 술기운이 드는지 잔소리가 잦아지고 조금은 나긋해지는 모습이다. 그래도 어딘가 깊은 곳에 감추어진 어두운 그림자는 내숭을 뜨는 품새와는 거리가 멀다. 그녀가 부르는 노래 곡조도 듣기에 따라서는 어두운 그런 곡목들로 일관한다.
그녀에게서 술기를 느낄 즈음 소음 속에서도 자기, 방어를 열심히 한다.
"이래 봬도 아무 데나 치마 귀 더 풀대며 싸돌아다니는 그런 행티 나쁜 여자는 아니라고요. 아시겠어요?"
"예, 알아 모시겠습니다."
비록 처음 만난 남자들과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어울리지만, 씨알머리없는 짓은 않고 산다는 것을 강조하며 은근히 푼수데기 취급을 말라고 겁을 줘가며 제 할 얘기는 다 한다.
"그렇다면 한잔하세요!"
다분히 명령조다. 젊은 여자치고는 빈틈이 없이 옹골차 보이고 줏대가 있어 보이던 그녀도 술기운에 젖어 들면서 제 딴에는 프라이드 있는 여인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 어딘지 그 이면에 가려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느낌을 받는다.
시간이 흐르자 그런 반대 국부적 현상이 약간의 술주정으로 나타난다. 노래를 부르기보다는 입방아를 찧고 싶은가 보다.
"얘!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고 했잖니? 기왕지사 이렇게 어울렸으면 실컷 까불다가 갈 일이지, 여기까지 와서 그렇게 해쌀 게 뭐니?"
앞 좌석에 앉아 남 사장과 노래를 부르기에 한창이던 김 양이 문자를 써가며 공개적으로 그녀의 분위기 잡치는 행동을 나무라는 투였지만, 내 인생 내가 산다는 식으로 기죽거나 수그러들 자세가 아니었다.
"얘! 잔소리 말고 너나 똑바로 해!"
되려 친구의 나무람에 정면 공박이다. 정말 토라지지 않는 꼿꼿하고 갈갈한 성미다. 두어 시간 동안 관찰한 그들 둘 사이의 분위기는 사뭇 달라 보인다. 정서적인 분위기나 감정적으로 아귀가 맞지 않아 미끄러지거나 뒤죽박죽 범벅이 되는 경우가 잦을 법도 하건만, 그래도 제 속을 알아주는 알짜배기 친구임을 강조하는 두 여인 사이가 무던해 보인다. 술기운이 들면서 박 양은 제 친구 자랑에 열을 올린다.
"저 친구를 만나면 그렇게 편해요."
"어떤 면에서 그래요?"
"왜? 친구 사이에도 못 할 말, 할 말 가려서 해야 하는 친구가 있지 않아요?“
만나면 비록 한시적이긴 하지만, 모든 고뇌가 일시에 사그라지고 그동안 흐느적거리던 생활이 제자리로 돌아드는 청량제가 되어 좋단다. 그리고 그녀와는 학연으로 맺어진 인연이 아니라 사회생활을 하는 속에 친해진 사이임을 설명한다. 그녀가 열을 올리는 우정론을 들으며 남 사장이 부르는 노래에 맞추어 몸을 흔들고 있는 김 양을 바라본다. 어딘지 모르게 심신이 부대끼는 고뇌를 머금은 듯 겉으로는 암되어 보이는 김 양이 그래도 새침데기는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자세히 보니 직업을 가진 여자답게 세파에 많이 시달린 듯이 느껴진다.
"얘, 세 설 그만하고 신나게 노래나 불러라예."
술기운이 더 할수록 데설궂게 말꼬투리를 달고 곱씹으려 드는 박 양에게 제발 분위기 깨지 말라고 꼬집기를 자주 한다. 어지간히 시간이 흘렀다. 시끌벅적하던 홀 안에 사람들의 고래 고함도 많이 줄어들었다. 마담이 다가와 우리에게도 장사를 파할 시간임을 전한다. 계산하는 동안 사항은 모두 끝나 있었다. 밖으로 나서니 쏜살같이 택시를 잡아타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녀들의 뒷모습만 보인다. 바람기 없는 온천장의 밤은 아직도 후덥지근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