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번히 나를 좌절하게 만드는 얍복강들 앞에서(호12:3-6)
2023.8.6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신실한 기독교인이면서 또한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피터 드러커(Peter F. Drucker, 1909~2005)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계획이란 미래에 관한 현재의 결정이다!”
피터 드러커의 말처럼 하나님 앞에서 장차 내가 어떤 사람 될 것인지는 지금 결정해야 한다. 만약 우리들이 진실로 하나님의 꿈을 내 꿈 삼고, 그 꿈을 이루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그에 대한 계획(목표와 방향)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노력이라는 대가지불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 이것은 세상일이나 영적인 일이나 다 마찬가지이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자신의 발목을 잡고 전진하지 못하게 하는 두려움의 강물 앞에서, 하나님이 주신 꿈을 이루기 위해서 과감하게 기도라는 대가지불 했던 한 사람이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야곱이다(호12:3-4).
“3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4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호 12:3-4)
이 말씀은 호세야 선지자가 야곱의 경우를 인용하면서, 극한 우상숭배와 온갖 죄악 가운데 빠져있던 북왕국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권면했던 말씀이다. 그런데 호세야 선지자가 인용했던 야곱의 모습들 중에서도 이 시간에 특히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가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다는 구절이다. 호세아의 권면은 오늘 온갖 사회적인 불의와 이단의 범람과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 있는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갖가지 형태의 얍복강들 앞에서 망설이며 힘들어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야곱이 얍복강 앞에서 천사와 씨름했던 자세한 장면은 창세기 32장에 나온다. 그 내용을 보면, 그는 그의 형 에서가 사백 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가축과 가족들까지 여러 떼를 나누어서 얍복강을 먼저 건너게 하고, 자신은 마지막까지 혼자 남았다.
그렇다면 그는 왜 다 보내고 혼자 남았을까? 젊은 시절 에서를 피해서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갔었듯이, 이번에도 여차하면 도망가려는 비겁한 의도가 엿보인다. 야곱이 얍복강 앞에서 혼자 남았다는 것은 역으로 말하면, 그가 진짜 두려워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야곱은 말로는 짐승들을 생각하고, 처자식을 생각하는 척했지만, 그가 진짜 두려워했던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뉴가 “고통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미 두려움에 고통 받고 있다”라는 말을 했듯이, 야곱은 이미 죽음의 두려움에게 고통 받고 있었다. 우리 주변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문제의 얍복강을 만나면, 그것을 애써 외면하고, 피할 길을 찾느라고 정신이 없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야곱은 두려움의 강물 앞에서 주님을 선택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자기 앞에 나타난 사람이 천사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 끝까지 매달리면서 축복해 줄 것을 간구했다. 심지어 울면서 환도 뼈가 위골되었는데도 천사를 놓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비록 비열한 성품의 소유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졌던 장점이며, 우리들이 가져야할 모습이기도 하다. 야곱에게 그랬듯이 기도는 지금도 우리들 앞에 있는 두려움의 강을 생명과 희망의 강으로 바꾼다.
오늘 본문 5절과 6절 말씀에 보면, 호세아 선지자는 이처럼 야곱의 눈물의 간구를 들어주신 하나님을 “만군(萬軍)의 하나님”이라고 적었다(5절). 다같이 5절 말씀을 함께 읽자.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호12:5)
“만군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뜻은 “전능하신 하나님(the Lord God Almighty)”, “천군의 총사령관이신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정말 그렇다. 지금 우리가 믿는 하나님, 지금 내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은 만군의 하나님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나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시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이길 자가 없다. 에서가 아무리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온다 해도,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셨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마귀가 우리를 공격하고, 각종 두려움의 강물들이 우리에게 엄몰해 오고, 에서의 사백인 보다 더 많은 대적자들에게 욱여쌈을 당한다 해도, 여전히 나의 아버지이신 만군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이 점을 확신하며 믿자. 이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자.
6절 말씀은 이처럼 우리(나)와 함께 하시는 만군의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말씀한다.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호12:6)
이 말씀을 보면, 전능하신 만군의 하나님 앞에서 또는 우리를 두렵게 하는 문제의 강물 앞에서 우리들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 세 가지를 강조한다. 그것은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하나님을 바라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돌아와서”는 완전한 방향전환과 철저한 회개를 뜻한다. 어정쩡하게 한 발은 세상에, 한 발은 하나님께 두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고 확실하게 하나님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께 방향을 전환했다면, 그것으로만 끝나지 않고,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하나님을 바라는 일에 힘써야 한다. 인애와 정의를 지키라는 말씀은 곧 성도들은 사랑과 공의라는 하나님의 성품을 갖기를 힘쓰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바랄지니라”는 마치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간절한 심정으로 사모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그것이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서 바라보았다 안보았다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이다. 이처럼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는 가장 방법 중에 하나가 바로 야곱처럼 간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라고 말했다. 이것이 성도의 마땅한 모습이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도 번번이 나의 발걸음을 멈추게(주저앉게 만들고, 포기하게) 만드는 여러 형태의 얍복강들이 있을 수 있다. 역으로 그것은 내가 반드시 넘어서야할 얍복강이기도 하다. 야곱처럼 죽음에 대한 공포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미움의 얍복강일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열등감의 얍복강 앞에서 번번이 스스로 주저앉는다. 쾌락의 얍복강 앞에서 번번이 발목을 잡히는 사람도 있다. 얼마 전에도 현직 판사가 대낮에 성매매를 하다가 적발된 일이 있었다. 구약의 삼손도 이런 부류에 속했다.
이처럼 내 앞을 가로막고, 전진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문제의 얍복강들을 어떻게 넘을 것인가? 야곱처럼 기도로 건너야 한다. 내 삶의 얍복강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면, 그것은 나를 비웃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비난이 옳았다고 박수쳐 주는 것과 같을 뿐이다.
만약 우리들이 정말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만군의 하나님이신 것을 믿는다면, 오직 하나님께만 살 길이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야곱처럼 기도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 기도가 최선이다(통나무집 이야기).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계획하신 미래의 꿈을 이룰 것인지, 잃을 것인지 지금 결정해야 한다. 기도는 그 꿈을 이루는 방법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해답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들이여, 우리는 매일 보이는 얍복강들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내면의 얍복강들까지 수 많은 두려움의 강들을 만난다. 마귀 사탄은 이런 것들 이용해서 우리를 좌절감에 빠뜨리고,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도록 간계를 부린다. 그러나 우리는 야곱처럼 기도로 문제의 얍복강들 정면 돌파해야 한다. 지금 기도의 계획을 세우는 것이 우리의 미래의 방향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전능하신 만군의 하나님께 기도할 계획을 세우고, 야곱처럼 과감하게 실천하자. “안하고 죽어도 좋을 일만 내일로 미뤄라”는 말이 있듯이 기도를 회복하는 것은 뒤로 미루지 말자. 성령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고, 함께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