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사부의 피살 被殺
봄꽃이 질 무렵 시작하여 이 년이 지나고, 다시 나뭇가지에서 갓 삐져나온 연두색 새싹들이 짙은 녹색으로 변하더니 또 낙엽 지고, 하얀 눈이 천지를 뒤덮고 노란 복수초가 흰 눈을 헤집고 땅속에서 천연스럽게 돋아 나올때 모든 수련이 끝났다.
이 년 사시사철 그리고 또 일 년, 삼 년 三年을 땀방울과 온통 피멍으로 물든 몸으로 그렇게 견디어내었다.
그동안 이중부와 한준도 키가 커져, 이제는 덩치가 수련생 형들과 엇비슷해졌다.
애띤 소년티를 벗고, 헌헌장부 軒軒丈夫 다운 사내의 모습을 보인다.
수련 기간이 끝나는 날
모두를 지치고 기력이 탈진된 상태지만 눈빛만은 형형 炯炯히 빛나고 있었다.
‘伍百夫長’ 오백 부장이라 새겨진 계란 크기의 조그만 동패 銅牌, 아래에는 ‘金城府’ 금성부란 직인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늑대가리, 팽이, 일궁, 위지율, 이중부 다섯 명이 받아 쥔다.
이른 나이에 오백 부장의 등용문을 통과한 것이다.
주위에서 인정하는 준재로 알려진 12명의 수련생 중, 태반 이상 탈락하고 다섯 명이 어렵게 합격한 것이다.
이제 막 소년티를 벗어난 청년이 백 부장을 다섯 명이나 거느릴 수 있는 높은 위치에 설 자격을 얻은 것이다.
막바지 탈락한 한준과 다섯 명은 ‘百夫長’ 백 부장이란 죽패 竹牌를 받았다.
백 부장들은 제 2기생들과 재훈련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부여 된다고 한다.
선택은 자유다.
중부는 뿌듯함과 동시에 한준을 보기가 민망하다.
삼 년을 함께 동고동락하며 고생했는데 계급장이 다르니 그렇다.
그러나 한준 별 내색 없이 표정은 밝아 보이나 얼굴이 핼쑥하다.
천남성 뿌리를 잘 못 먹은 후유증이 아직도 남아 있는 모습이다.
한준은 자신을 구해 준 단씨 형제들과 자주 어울렸다.
마침 보름이 지난 시점이다.
하현 달빛 아래 마당에는 모닥불을 피운 후, 거위를 가마솥에 삶고 양고기를 굽으며, 푸짐하게 차려진 상 앞에 앉은 수련생들 술잔을 든다.
어른들 몰래 몇 차례 술을 먹어 본 적은 있지만, 정식으로 대접받는 것은 처음이다.
지휘관이 되려면 술도 마실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 맛본 마유주 馬乳酒의 맛이 시큼한 것이 별로다.
어른 들은 왜 이렇게 맛없는 술을 자꾸 찾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모두들 내색하지 않고 성인이 된 것처럼 술잔을 돌려가며 마신다.
조금 지나니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이 기분이 들뜬다.
동방 중허 선생은 짧은 축사 祝辭를 하고는 석늑과 말을 타고, 야간 순찰 겸 옥전의 금성부로 보고차 나갔다.
두 분의 사부님들도 오늘만큼은 근엄한 표정을 풀고 안색이 밝다.
무사히 수련을 마친 대견스러운 제자들이 권하는 술잔을 마다할 리가 없다.
오랜만에 허리띠를 풀고 친구끼리 잔을 부딪치고 또, 제자들의 권잔 勸盞을 마다하지 않고 맘껏 마신다.
서로가 주거니 받거니 모두가 즐겁다.
중부와 한준도 술에 취해 정신이 몽롱하다.
지난 삼 년간 유지되었던 팽팽했던 긴장감이 일시에 풀어져 버렸다.
오늘따라 달빛이 유난히 포근하게 느껴진다.
보름이 몇 날 지나 그런지 조금 일그러져, 길쭉해진 하현달은 이제 중천에 떠 있으나 짙은 구름으로 인하여 제빛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정 무렵까지 그렇게 흥겨운 밤이 지나고 있었다.
긴장이 풀린 탓에 모두가 술에 취해 건들거리며 앉아 있다.
마루 위에 쓰러져 잠든 사람들도 여기저기 보인다.
그때 갑자기 지붕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옆집 지붕도 불바다가 되어있다.
불화살을 맞은 것이다.
적의 습격이다.
기습이다.
꽹과리가 울린다.
적군의 함성이 들려온다.
취중의 오백 부장들 정신이 없다.
옆집에는 벌써 적병이 쳐들어 와 난리다.
일단 창을 찾아 손에 쥐었으나 다리에 힘이 없다.
휘청거리며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으나 모두 마찬가지다.
대문으로 이미 적병들이 들이닥치고 있다.
그래도 다행히 술을 마시지 않은 향기가 눈을 비비며, 이 사람 저 사람을 깨우고는 창을 들고 대문을 가로막고 있었다.
두 사부도 고주망태의 상태지만 노익장 老益壯을 발휘하여, 겨우 몸을 추스르고 창을 잡고 일어난다.
대문간에서 백병전이 벌어지고 있다.
두 명의 적군이 향기를 여성이라 얕잡아 보고, 그냥 마구 밀고 들어오다가 향기의 날카로운 찌르기 창술에 옆구리와 무릎을 다쳐 피를 흘리며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러자,
옆집을 이미 풍비박산 낸, 적병 네 명이 재차 사립문 안으로 밀고 들어온다.
동료가 다친 걸 본 적병들은 이제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고, 두 명이 장창을 앞세워 문을 가로막고 있는 향기를 위협한다.
힘에 부친 향기가 한쪽으로 몰리자 뒤를 지키던 두 명의 군사는 재빠르게 마당 안으로 돌진한다.
이제 20여 가구의 박달촌 마을은 온통 불바다로 변했다.
붉은 불기둥과 매캐한 검은 연기가 동내 전체를 감싸고 있다.
취중의 ‘오백 부장’들과 두 사부. 연기까지 들이마시니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적들이 마당까지 침입하였으니 조심하세요!”
돌담 쪽으로 몰려 힘겹게 항전 抗戰 중인 향기가 앙칼지게 소리친다.
아직 정신이 혼미한 상태의 십이지살 선우옹은 겨우 반쯤 눈을 뜨고 비틀거리며 마당으로 나선다. 마당 가운데 연기 속의 희미한 형체의 인물을 향해 허겁지겁 창을 내지른다.
그러나 창날은 주인의 취한 상태만큼이나 둔한지, 목표물을 벗어나 허공을 찌르고 만다.
적병들은 양쪽에서 휘청거리는 선우옹을 향해 장창을 내찌른다.
십이지살 선우휘의 가슴과 옆구리에 2개의 창날이 동시에 깊이 박힌다.
마침 십이지살 선우옹의 양쪽에 있던 혈창루 모용 척과 한준이 적병을 향해 각기 창을 힘껏 내지른다.
선우옹의 몸에 박힌 창을 미처 뽑지 못한 적병들의 명치와 옆구리에도 창날이 깊숙이 박힌다.
창을 맞은 선우옹과 적병, 세 명이 동시에 마당에 나 뒹군다.
겨우 상황을 파악한 이중부와 늑대가리가 향기를 거세게 몰아붙이고 있는 두 명의 적병을 향해 창술을 구사한다.
허벅지와 어깨에 각각 창을 맞은 적병들 “어이쿠” 하면서 문밖으로 도망간다.
그때 강 쪽에서 징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린다.
그러자 마을을 짓밟던 적병들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둥~둥~ 크게 울리는 북은 대군 大軍의 전투 개시 開始나, 진군 進軍을 알리는 전진 前進의 소리다.
꽹과리는 소수 少數의 공격용 신호로 사용하기도 하고, 위급 시에 쓰이기도 한다. 징은 철수나 후퇴의 소리다.
그러는 사이, 갈대지붕을 모두 태운 불길도 어느 정도 사그라들고 있다.
나무 기둥과 대들보, 인방 引枋, 문짝 등이 아직 검 붉은 모습으로 불타고 있지만 모두 정신이 없어 불을 끌 생각조차 못 하고 있다.
그제야 마을 동구 밖에서 주둔하고 있던 해천의 군사들이 마을에 들어와 불을 끄고, 일부는 부상자들을 수습하고 있다.
십이지살 선우휘 사부의 상태가 매우 위중하다.
창날이 안 보일 정도로 왼 가슴에 깊이 박힌 창 때문에 입으로 검붉은 선혈 鮮血이 흘러나오고, 숨쉬기조차도 어려워 보인다. 한준과 팽이가 창 자루를 잡고 뽑고자 하니 모용척 사부가 말린다.
침울한 표정의 혈창루 모용척, 좌중을 둘러보며
“이미 틀렸다.” 낮은 목소리로 무겁게 입을 연다.
평생을 전장에서 지낸 백전노장의 입에서 이미 치료 불가의 상태라고 판정을 내린 것이다.
십이지살 선우옹의 안색은 오히려 편안해 보인다.
스스로가 이미 임종 臨終을 자각하고 있었다.
겨우 입술을 연다.
“전장에서 죽는 것이 우리 슝노 무인들의 바람인데 적의 기습으로 죽게 된다니, 그것이 좀 아쉽네”
목소리가 갈라지고 힘이 없다.
그러더니 모용척을 보고는 작은 소리로 힘겹게 겨우겨우 몇 마디 말을 한다.
십이지살의 이야기를 들은 혈창루 모용척이
“알았네”하며,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아마도 죽마고우 십이지살 선우 휘의 마지막 유언 遺言을 듣고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한준만 남기고 주위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창을 맞고 그때까지 마당에 쓰러져있던 적병 두 명을 끌고 문밖으로 나간다.
바깥은 더 아수라장이다.
죽은 마을 사람이 7명이나 되고, 10명의 부녀자가 적병들에게 잡혀갔다는 것이다.
부상자도 다수다.
집들은 성한 집이 한 채도 없다.
삽시간에 한 동네가 폐허가 되어버린 것이다.
윗동네, 상 박달촌 10여 가구도 같이 유린당하였다 한다.
잠시 뒤, 상기 上氣된 표정의 한준이 사립문 밖으로 나온다.
“선우 사부께서 운명하셨습니다”
정오쯤에 소식을 듣고 달려온 동방 중허 선생은 자책 自責을 한다.
“두 달가량 군부 軍部의 동태를 몰라, 어젯밤에 급히 금성부로 갔었는데, 이런 비극이 일어나다니….”
혈창루 모용척도 후회막급이다.
“그놈의 술 때문에 이렇게 친구를 허무하게 보내다니…. 다 내 탓이네.”
오백 부장들도 모두 죄인이 된 분위기다.
후사 後嗣가 없는 십이지살 선우휘, 제자들이 오일장 五日葬으로 정성껏 치른다.
십이지살 선우휘에게는 ‘기혁린 奇赫隣’이란 뛰어난 수제자가 있다는 소문은 있었으나, 그 수제자는 멀리 대릉하 쪽에 흉노족 이주민들과 같이 있다는 것이다.
한준이 상주 喪主 역할을 담당했다.
십이지살 선우 鮮于 사부는 태원을 본관 本貫으로 하며, 본시 흉노의 선우 單于와 같은 왕족 혈통이라 하며 후일, 청주 한씨 韓氏와 기씨 奇氏가 선우씨에서 갈라져 나왔다 한다.
그러니 무리 중에 제일 가까운 인척이라는 이유와 또, 선우휘 사부의 운명 殞命시 곁에서 지켰다는 두 가지 이유다.
그러고 보니 수련 때나 평소에 선우휘 사부가 한준을 은근히 총애 寵愛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박달촌을 기습했던 적병 중, 부상으로 낙오된 두 명의 적병을 문초하여 알아낸바, 한군 측은 지난 삼 년의 시간 동안 많은 수의 병력으로도 전선 戰線의 변화가 없는 것을 군 지휘관의 무능으로 보고 상부에서 이를 질책 叱責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보름 전,
수련생들의 적진 침투로 병사가 세 명이나 살해당하였다.
그러자 초조해진 한군에서는 무언가 전과를 올려야 하는 상황이라, 한군의 병영에서는 야간 기습작전을 획책하였다.
양군 兩軍이 대치한 조선하에서 도강 渡江하기 쉬운 물길이 얕은 지역을 물색하다 보니 강의 중류에 자리 잡아, 지류 支流가 합류 合流되는 위쪽의 박달촌이 도강 渡江에 적합한 지역으로 포착 捕捉되었고, 세작을 풀어 기회를 엿보던 중에 밤늦게까지 술잔치를 벌이는 모습을 보고, 돌격대 100명이 새벽녘에 기습을 감행했다는 것이다.
적의 기습으로 박달 상, 하촌 두 마을이 폐허가 되고, 수련생들의 사부가 죽는 등
예기치 않은 사고에 금성부는 말없이 수련생들에 대한 지원이 흐지부지 중지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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