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도쿄올림픽에서 러시아, 즉 러시아올림픽위원회(ROC) 소속 선수가 한국 출전 선수와 메달을 놓고 맞붙을 종목은 실제로 그리 많지 않다. 서로 경쟁력이 있는 종목이 엇갈리기 때문이다. 한국의 메달은 주로 양궁과 태권도, 베트민턴, 유도, 레슬링. 펜싱 등에서 나온다. 전통적인 스포츠강국인 러시아는 일부 종목에 한정돼 있지 않다.
이번 대회에서 러시아가 한국과 메달 색깔을 놓고 치열하게 맞붙은 종목은 펜싱과 양궁이다. ROC는 31일 일본 지바의 마쿠하리 메세에서 열린 도쿄 올림픽 펜싱 여자 사브르 단체전에서 프랑스를 꺾고 금메달을 차지했다. 한국은 ROC와 준결승에서 만났으나 26대 45로 패해 러시아의 벽을 넘지 못하고, 동메달에 그쳤다.
프랑스 펜싱 샤브르 선수, "러시아팀은 거짓말쟁이, 연속 실점하면 검이 고장났다 말해"/얀덱스 캡처
이날 결승전에서 ROC팀에 45대 41로 아깝게 패한 프랑스의 사브르 펜싱 선수 세실리아 베르데(Cecilia Berde)는 러시아팀의 경기 운영 전략을 '기만적'이라고 비난했다. 그녀는 경기후 자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러시아 선수들은 경기 도중 거짓말을 했다"며 "(내가) 연속으로 두 차례 연속 공격에 성공하자, 당황한 기색의 상대가 '미안하다. 검(샤브르 검)이 고장났다'고 했다"고 주장했다. 이 경우 2분간 휴식 시간이 주어진다. 당시 그녀와 맞상대는 올가 니키티나였다.
베르데는 "그녀(니키티나)가 (나의 공격에) 당황하고 있다고 느꼈다"고 했다. 니키티나는 검의 고장을 이유로 2차례나 경기 흐름을 끊은 '트릭'을 썼다는 것이다. 이를 트릭으로 볼 것인지, 경기 운영 전략으로 볼 것인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그녀는 "우리(프랑스팀)도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며 "연속으로 2~3점을 빼앗길 때 '미안하다. 눈에 뭐가 들어갔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면 2분간 쉴 수 있다"고 주장했다. 2분간 휴식으로 상대 공격의 기세를 한번 끊어주자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니키티나는 매우 강한 상대였다"고 인정했다. 러시아는 문제의 니키티나외에 개인전 금·은메달리스트인 소피아 벨리카야와 소피아 로즈드냐코바, 스베틀라나 세벨레바(후보)를 출전시켰다.
펜싱 샤브르 단체전에서 우승한 러시아팀. 그러나 경기운영시 트릭 사용 논란에 휩쓸려/사진출처:러시아올림픽위원회(ROC) 텔레그램 계정
러시아는 한국과의 준결승전에도 한때 당황한 바 있다. 3라운드에서 윤지수와 맞붙은 포즈드냐코바는 경기 시작과 함께 선제 점수를 빼앗기는 등 6점을 내주자 크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후 연속으로 5점을 따내며 개인전 금메달리스트의 면모를 보여줬다. 한국에서는 서지연, 윤지수, 최수연, 김지연이 출전했다.
한국을 꺾고 결승진출을 확정한 뒤 환호하는 러시아 여자 샤브르 선수. 샤브르 단체전 결승진출!!! 이라는 제목이 달렸다/ROC 캡처
펜싱 종목은 검의 종류에 따라 플뢰레와 에페, 사브르 세 종목으로 나뉜다. 샤브르 검은 플뢰레(110cm, 500g)와 에페(110cm, 770g)보다 짧고(105cm) 가볍다(최대 무게 500g)이다. 또 찌르기만 가능한 다른 종목과 달리 찌르기, 자르기, 베기가 모두 가능하다.
반면 ROC는 양궁종목에서는 한국팀에 완패했다. 도쿄 올림픽 첫 3관왕 안산은 30일 양궁 여자 개인전 결승에서 ROC의 엘레나 오시포바를 슛오프 끝에 6-5로 꺾었다. 또 여자 단체전에서도 ROC는 한국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은메달에 머물렀다. ROC 여자 양궁팀은 지난 23일 열사병으로 쓰러진 스베틀라나 곰보예바 선수를 주축으로 크세니야 페로바, 옐레나 오시포바가 나섰으나 한국에 6-0(55-54 56-53 54-51)으로 완패했다.
양궁 여자 개인 결승전서 ROC 오시포바 경기 모습/사진출처:ROC
메달을 따지는 못했지만, 국내에서 가장 큰 관심을 끈 종목은 수영이었다. '뉴 마린보이'라 불리는 황선우 선수 때문이다.
황선우도 ROC 선수와 메달을 놓고 물살을 갈랐으나 ROC의 벽은 높았다. 황선우는 28일 열린 남자 100m 자유형 준결승에서 47초56의 아시아신기록 및 세계주니어신기록을 세우고 전체 16명 중 4위로 8명이 겨루는 결승에 진출했다. 그러나 준결승 기록 1위는 ROC의 클리멘트 콜레스니코프(47초11)다.
이튿날 도쿄 아쿠아틱스 센터에서 열린 수영 남자 100m 자유형 결승전에서는 콜레스니코프(47초44)는 동메달, 황선우는 5위를 기록했다. 금메달은 올림픽 신기록을 세운 미국의 케일럽 드레슬(47초23)이었다.
그러나 콜레스니코프는 도쿄올림픽에서 '미국 수영의 신화'를 깨는 데 크게 기여했다. 27일 열린 남자 배영 100m에서 에브게니 릴로프와 함께 나란히 1, 2위를 차지, 미국을 3위권으로 밀어냈다. 릴로프(51초98)는 금메달, 콜레스니코프(52초00)는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디펜딩 챔피언 라이언 머피는 동메달에 그쳤다.
러시아가 수영 종목에서 올림픽을 제패한 것은 1996년 애틀랜타 대회 이후 25년 만이다. 반면 미국은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부터 이어온 남자배영 연속 금메달의 기록을 도쿄올림픽에서 멈췄다.
특히 금메달리스트 릴로프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나는 고양이 마스크를 쓰고 싶었지만 주최 측은 '이 마스크를 허용할 수 없다'고 해 울고 싶었다"고 했다. 그의 고양이 마스크 착용 사진은 국내외 언론에 도배됐다.
미국 수영의 신화를 깬 ROC 릴로프 선수의 '고양이' 사랑. 위로부터 고양이 마스크를 쓰고 금메달을 든 모습(ROC 캡처), 고양이 마스크(인스타그램 캡처), 고양이 모습의 모자.
ROC가 우리를 놀라게 한 종목은 '태권도'다. 2000 시드니올림픽 이후 21년 만에 금메달을 수확하지 못한 한국과 달리 러시아는 금메달 2개,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를 따냈다. 태권도 부문 메달 집계에서 1위다. 한국은 은1, 동2개로 역대 최하위. 메달은 모두 32개다.
남자 58㎏급(플라이급), 68㎏급(페더급), 80㎏급(웰터급), 80㎏ 이상급(헤비급), 여자 49㎏, 57㎏급, 67㎏급, 67㎏급 이상급 등 남녀 각각 4개 체급에서 금메달과 은메달이 나오고 동메달 2개씩 모두 16개다. 패자부활전에서 승리한 선수에게도 동메달을 주기 때문이다. 패자부활전에서 올라온 선수(2명)와 4강전에서 결승 진출이 좌절된 선수(2명)가 동메달 결정전을 치러 이긴 선수 2명에게 동메달이 수여된다. 이번 대회에서는 무려 21개국이 32개의 메달을 나눠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