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문(2/16)-
-백기완은 늘 거리에 있었다. 1973년 유신헌법 개정 투쟁 때도,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때도,
해고노동자들의 농성 천막이 철거될 때도 백기완은 노동자·농민·시민의 편에서 거리를 지켰다.
이제 더는 그를 거리에서 만날 수 없다.
사진은 고인이 1992년 명지대 학생 강경대 열사의 1주기 추모식에 참석해 연설하는 모습. -
“민중의 자존심을 갖고 소신대로 해보시오.”
평생 민중·민족·민주 운동의 불쌈꾼(혁명가)이자
큰 어른으로 살아온 백기완(88) 통일문제연구소장.
외세의 압제와 분단, 군부독재 등 현대사를 90년 가까운 삶에
아로새긴 그의 시선은 늘 못 배우고, 못 가진 사람들을 향했다.
병상에서 백기완 선생은 “나 같은 사람의 이야기가 귀에 들리진 않겠지만
그저 병실에서 한마디 남깁니다”라며 문재인 정부를 향해 당부의 말을 남겼다.
백기완 선생은 “문재인 정부가 한반도 문제에 관해서 다가서는 그 태도, 방법. 다 환영하고 싶습니다.
생각대로 잘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한마디 보태주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라며 말문을 열었다.
세월호 리본을 단 백기완 선생은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노력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역사에 주체적인 줄기였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바로 이 땅의 민중들이 주도했던
한반도 평화운동의 그 맥락위에 서있다는 깨우침을 가지시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백기완 선생은 “지난 촛불혁명은 우리 한반도의 참된 평화요, 민주요,
자주통일. 민중이 주도하는 해방통일이었습니다.
그 맥락위에 서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문재인 정부 민중적인 자부심과 민중적인 배짱을 갖고
소신대로 한번 해보시오!”라고 힘을 실어주었다.
고문으로 몸이 반쪽이 될지라도
백기완 선생은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투사, 사회운동가인 동시에 새내기,
동아리, 달동네 등 수많은 한글어를 만들어낸 우리말 운동가,
소설 <버선발 이야기>, 자서전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등을 펴낸 문필가였다.
그는 1932년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리에서
아버지 백홍렬과 어머니 홍억재 사이에 4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인 백태주는 천석꾼의 부자로 장련면의 유지로 있으면서
3.1 운동 당시 수천장의 태극기를 제작하여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는 등 민족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아버지 백홍렬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재직했고, 청년운동에도 나섰다.
두 부자는 각각 1923년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에 수해와 지진피해가 있었을 때와
1934년 삼남지방 수재 당시에 의연금을 기부하고 구휼에 힘쓰는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지만
조부 백태주가 독립군에 군자금을 대어주다가 발각돼 고문 끝에 옥사당한 이후 가계가 급격히 몰락했다.
-[수정본] 1990년 진압경찰 방패에 맞아 실시한 백기완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89)이 15일 투병 끝에 영면했다.
백소장은 지난해 1월 폐렴 증상으로 입원해 투병 생활을 해왔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2호실, 발인은 19일 오전 7시다.
사진은 1990년 서울 영등포시장 골목에서 노동자탄압 경찰폭력 규탄 평화행진 중
진압경찰이 휘두른 방패에 맞아 실신한 모습-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고 남북이 분단되며 가족도 나뉘어 살게 됐다.
백 선생은 이때 부산제5육군병원에서 군 복무를 했다.
전쟁 통에 징용된 작은 형이 죽기도 했다.
이같은 가족사는 이후 백 선생이 통일운동에 매진하는 계기가 됐다.
1964년 함석헌·계훈제 등과 함께
한일협정 반대운동을 벌이며 민주화 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투옥과 고문은 일상이 됐다. 장준하 등과
‘유신헌법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 운동’을 벌였다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투옥됐다.
1979년엔 ‘YMCA 위장결혼 사건’을 주도했다가 용산구 보안사령부로 끌려가
몽둥이로 두드려 맞고 무릎을 앞으로 꺾이고
손톱을 뽑히는 등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건장하던 몸은 반쪽이 됐다.
두 번째 옥고도 치렀다.
당시 옥중에서 썼던 시 ‘묏비나리’는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원작이 됐다.
- 2011년 쌍용차 해결 촉구 국민대회에서 발언 중인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2019년 고 김용균 태안화력발전소 노동자의 장례식을 찾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마지막 원고엔 “김진숙 힘내라”
그는 인생의 막바지까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삶을 살았다.
2014년 세월호 진상규명 집회, 2016년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 등의 현장에서 맨 앞자리를 지켰다.
가장 최근 행보는 지난해 12월 ‘연내 중대재해법 제정과
김진숙 복직을 촉구하는 사회원로 기자회견’에 이름을 올린 것이었다.
당일 백 소장은 몸이 불편한 탓에 하루 온종일을 들여 쓴 육필 원고를 보내왔다.
그의 원고에는 “김진숙 힘내라”는 여섯 글자가 담겨있었다.
백원담 교수는 “아버지가 마지막 남긴 글귀는 ‘노나메기’였다.
너도나도 일하되 모두가 올바로 잘사는 세상이라는 뜻”이라고 밝혔다.
‘노나메기 세상 백기완 선생 사회장 장례위원회’는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빈소를 차리고 장례는 오일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전국 16개 지역에 분향소 및 온라인 추모관(baekgiwan.net)도 운영한다.
발인일인 19일 오후 종로구 대학로에서 노제가 진행된다.
여야는 모두 고인을 애도했다. 더불어민주당 신영대 대변인은
“영원한 민중의 벗, 백기완 선생님의 정신은 우리 곁에 남아 영원할 것”이라고 했다.
국민의힘 김은혜 대변인은 “우리가 누리는 평등한 세상은 고인의 덕분”이라 했다.
정의당 정호진 대변인은 “사회적 약자들을 역사상 처음으로 정치의 주인으로 호명했다”고 추도했다.
장례위원회는 “선생님의 뜻에 따라 조화를 받지 않는다.
선생님은 (생전) 조화를 보낼 값으로 어려운 사람을 도우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이어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으로부터도 (문재인 대통령 명의의) 조화를
보내겠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거절했다”고 덧붙였다.
“내 이야기를 듣고 발을 구르던 젊은이들은 지금 다 뭘 하는지. 그러나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가슴에 심어 주는 것 자체가 성공의 역사라고 믿는 것, 그
게 진보사상이고 이야기예요.”(2013년 4월 22일자 서울신문 인터뷰)
-‘진보 원로’ 백기완 선생 별세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89)이 15일 투병 끝에 영면했다.
백소장은 지난해 1월 폐렴 증상으로 입원해 투병 생활을 해왔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2호실, 발인은 19일 오전 7시다. 사진은 창경궁에서의 백 소장.-
^^‘임을 위한 행진곡’의 백기완 선생 시로 밝힌 촛불집회^^
며칠 전 백기완 선생님의 시와 활동하시는 모습에 대해 소개했다.
1980년 12월 지으신 걸로 아는 시 ‘묏 비나리’는 이미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 추모식에
기념곡으로 제창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안 된다는 주장으로 맞섰던 ‘임을 위한 행진곡’의 원작시다.
008년까지는 아무런 문제없이 기념곡으로 제창되어 왔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2017년부터 다시 기념곡으로 제창된다.
-백기완 지난 2017년 5월 1일 촛불집회에 대한 기록으로
광화문미술행동은 인사동 나무화랑에서 <100일간의 기록>전을 열었다.
이때 백기완 선생님께서 참석하셔서 전시된 촛불광장에 걸었던
<응답하라 1987 한 걸음 더 2017> 현수막에 <노동미학 해방의 미학>이란 서명을 남기셨다.=
기왕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래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전에 <광장에서 불쌈꾼 백기완 선생과 함께 한 163일!>에 소개했던
묏 비나리에서는 “”로 표시를 해 두긴 했으나 그 부분만을 먼저 원본 그대로 만나보자.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구비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가나니
산 자여 따르라 산 자여 따르라
시와 노래가 느낌은 같지만 어딘가 낯설게 느껴지는 이들도 많으리라.
노랫말은 약간의 편집이 가해진 뒤 악보에 맞춰지다보니
원작시 그대로를 노랫말로 쓰지 못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이제 익히 아는 노래로 눈에 쏙 들어오리라.
조금 다르게 편집이 되었어도 여전히 그 감동은 살아있다
. 백기완 선생의 뜨거운 목소리가 들려오는 느낌말이다.
바로 이 시를 쓰셨던 백기완 선생님께서 지난 촛불정국에서 여러 편의 시를 촛불시민들에게 전하셨다.
먼저 “왜 촛불을 들었느냐”란 질문들을 받았을 때 답변으로 딱 맞는 시부터 소개한다.
오늘 우리들의 촛불은
오늘 우리들의 촛불은 앞만 밝히자는 게 아니다
죽을죄를 짓고도 잘못했다는 말 한 마디 없는
저 뻔뻔한 박근혜는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죄악의
극한까지 넘어선 끔찍한 범죄꾼이란 걸
우리 온 세계에 선언하자
오늘 우리들의 촛불은 비록 길거리에 섰으나
어떤 것이 사람이요
어떤 것이 참이며
어떤 것이 우리들의 희망이란 걸
이 하늘땅에 나부기는 깃발이 되자
그렇다. 그 희망으로 갈아엎어야 한다
박근혜와 그 부패의 뿌리를 발칵 갈아엎어야 한다
하지만 이 썩은 구조는 그대로 놔둔 채
사람만 바꾸자는 건 우리가 겪어온 것처럼
새시뻘건 사기 협작이다
촛불이여 그 무엇도 믿질 말자
제 몸을 태워 빛을 내는 촛불만 믿자
제 몸을 태워 거짓과 참을 바꾸고
세상과 역사를 왕창 바꾸는 촛불만 믿자
우리 지치지도 쓰러지지도 말자
맨손 맨몸으로 나왔으되 길 잃은 앞날의 길라잡이로
촛불이여 눈물 젖은 촛불이여 한없이 가물대면서도
해와 달이 꺼져도 너만은 너만은
거침없이 타올라라 남김없이 타올라라
-민중총궐기에 띄우는 불쌈꾼 백기완 선생의 ‘촛불출정 비나리’-
촛불은 조용한 선언이고, 행복한 세상을 향하여
끊임없이 갈구하는 우리들의 희망 바로 그것이다.
-제9차 촛불집회 2016년 12월 24일
제9차 박근혜퇴진 비상국민행동의 촛불집회가 있었다.
이 촛불집회에 백기완 선생님께서 시 한 편을 기원(비나리)으로 내셨다.
행진도 광장을 넘어 청와대가 멀지 않은 곳까지로 서서히 넓혀지기 시작했다.-
광장에 늘 울려 퍼지던 노래가 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로 시작되는 노래다.
이 노래를 제목이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가 제목입니다“라 대답을 하자
”왜 진실과 침몰을 동시에“란 질문이 재차 돌아왔다.
윤민석이 작사·작곡한 이 노래는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를 주제로 했다.
그런데 의외로 경쾌한 느낌이라 많은 이들에게 별 거부감 없이 전달되었고 부르게 된 걸로 본다.
광장에서 바로 그 노래를 들으며 백기완 선생님의 시를 만났다
. 2016년 12월 24일 제9차 박근혜퇴진 비상국민행동의 촛불집회가 있었다.
이 촛불집회에 백기완 선생님께서 시 한 편을 기원(비나리)으로 내셨다.
오늘도 나는
오늘도 어째서 빈손이냐고 하면
나는 고개를 저을 것이다 오늘도 나는
비록 빈주먹이지만 불끈 쥐고 나왔다고 말하겠다
그런데 어찌해 지팡이냐고 하면 보시라
내 눈에 활활 불을 당기고 있다고 하겠다
그 까닭이 무어냐고 하면
세상을 몽땅 쌔코라뜨린 박근혜가
나는 하나도 죄가 없다는 그 소름끼치는 거짓말
그건 한낱 개수작이 아니다
이 세상의 참과 도덕을 몽조리 학살하는 범죄요
인류의 문명에 대한 참혹한 침략이라
그것을 깨트리지 못하면 우리 사람이 죽되
창피하게 죽는 거라 벗이여
우리 모두 살기가 힘들어도 호미와 삽이 되시라
그리하여 저 거짓의 무덤 그 바닥까지를 왕창 엎어버리자
이 피눈물은 곡괭이가 되고
이 시름은 쇠스랑이 되어
착한 것이 주인 되고 어진 것이 기둥이 되는 아,
우리 천 년의 한을 푸는 그날까지
우리부터 몸과 마음이 갈라서질 말자
나 하나와 역사가 갈라지지도 말고
그렇다 끝장이다 박근혜의 거짓말 독재 끝장 낼 때까지
벗이여 오늘도 말없이 앞장서는 벗이여
그렇다. 이 시는 우리가 대대로 끊지 못했던 참과
도덕의 말살에 맞서는 민중을 위한 격문이다.
광장의 주체는 그 누구도 아닌 우리가 주인이다.
주인이 그동안 억압을 받아왔었다
. 그 억압의 굴레를 벗고자 촛불을 들고 나왔던 것인데
또 다시 적당히 타협하고 물러서서는 안 될 일이었다.
-백기완 2017년 1월 10일 광화문광장에 세워진 광장극장 블랙텐트의 오픈식에 참석하신 백기완 선생님.
촛불의 현장엔 늘 백기완 선생님께서 맨 앞자리에 앉아 끝까지 함께 하셨다. -
이 무렵 그동안 비교적 조용하다 싶던 수구세력들도 서서히 준동하기 시작했다.
박근혜의 탄핵이 국회에서 가결되었으나 헌법재판소에서 인용되어
파면이 되는 걸 막으려는 준비를 그들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할 때 광장은 조용하지만 늘 깨어 움직였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투쟁방식이 아닌 조용하면서도
끈질기고 굽혀지지 않는 저항운동이 시작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