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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와 시와 원문보기 글쓴이: 전향
시가 지나는 길목 ③ 술 / 서안나 | ||||||||||||||||||||||||||||
한 잔의 술, 시가 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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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술
술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술이 제의의식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처 텅(A. Tongue)에 의하면 술은 석기시대부터 제조되었으며, 최초의 술은 꿀로 빛은 하이드로멜(hydromel)이라는 발효주라고 추측되고 있다. 제의의식이 민중의 생활 속으로 확산하기 이전, 술은 종교의식을 관장하던 제사장들만의 전유물이었다. 제의의식에 받쳐지는 제물이 사람이었다가 동물로 대체되었고 이때 동물의 피는 신성함을 의미했다고 한다. 이후 동물의 피 대신 술로 대신하면서, 신에게 바쳐지는 술은 신에게 의탁하여 신의 힘으로 세상을 관장하는 기원을 담은 매개였기에 신성한 기운을 지닌 것으로 취급되어 왔다. 중요한 기호식품의 하나인 술은 그 어원도 주목을 요한다. 고유 우리말인 ‘술’은 예전부터 ‘수블’ 혹은 ‘수불’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우리 선조들은 술을 빚는 과정에서 누룩의 효모 때문에 거품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모양새를 물에 불이 붙은 것으로 보아 ‘수불’이라는 표현을 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술을 ‘수울’ ‘수을’로 기록하고 있으며, 학자들은 ‘수블→수울→수을→술’로 변화된 것으로 보고 있다. 문학 특히 시와 술은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시에서 술은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성으로 지칭되는 이태백과 두보를 떠올릴 때도 시와 함께 연결되는 것이 바로 술이다. 이태백은 〈월하독작(月下獨酌)〉에서 “석 잔을 마시니 도를 통한 듯하고 한 말을 마시니 자연과 합치된다.(三杯通大道 一斗合自然)”라고 했으며, 〈장진주(將進酒)〉에서는 “양고기 삶고 소 잡아 즐기려 하나니 모름지기 한 번 술 마시면 삼백 잔은 마셔야지”라며 술 마시기의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다. 우리 시문학에서도 술은 단골 소재이다. 여러 시인의 작품에서 술은 다양하게 변주되어 왔다. 우리 술 문화를 살펴보면, 삼국시대가 우리 술의 발아기라고 한다면, 고려시대는 성장기, 조선시대는 전성기, 일제강점기는 쇠퇴기, 그리고 현대는 부흥기로 나눠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좀 더 세분화하면, 한국 술의 변천사는 7단계로 나누어 삼국시대 이전의 형성기, 삼국시대를 맹아기, 통일신라시대를 정착기, 고려시대를 개발기, 조선시대를 전성기, 일제강점기를 침몰기, 그리고 해방 후부터 근대를 표류기로 구분할 수 있다. 삼국시대의 술 빚기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지만, 일본의 《고사기》에 “응신천왕(應神天王), 270~312년) 때 백제의 수수보리라는 사람이 누룩을 사용하여 술을 빚는 신법을 일본에 전래하였다”는 기록에서, 삼국시대의 술 빚기 기술이 상당히 발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술에 관련한 기록이 처음 발견되는 문헌은 이규보(李奎報)의 〈동명왕편〉에서 찾을 수 있다. 고구려 시조인 동명성왕(東明聖王) 건국담의 술에 얽힌 고사가 《고삼국사》에 인용되어 있다.
위의 기록을 살펴보면, 비단 자리가 눈이 부시도록 깔린 곳에, 향기로운 술과 금 술잔이 준비된 곳에 세 처녀가 마주 앉아서 술에 취한 흥겨운 장면이 나타나고 있다. 이 세 처녀가 바로 하백의 세 딸인 유화, 훤화, 위화이다. 그리고 이들을 초청하여 술을 대접한 이는 해모수이다. 하백의 딸 유화, 훤화, 위화가 더위를 피해 압록강의 웅심연서 놀고 있는데,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세 처녀의 아름다움에 도취하여 신하를 시켜 가까이하려 했으나 그들이 응하지를 않았다. 뒤에 해모수는 신하의 조언을 구하여 웅장한 궁실을 지어 그들을 초청하였는데 초대에 응한 세 처녀가 술대접을 받고 만취한다. 해모수는 세 여자가 술에 취한 틈을 타서 방문을 막고 닫자 놀란 세 여인이 달아났는데, 그 중의 큰딸 유화가 해모수에 잡혀 궁전에서 잠을 자게 되고 해모수와 정이 들게 된다. 해모수는 유화와 함께 오룡거를 타고 수궁으로 가서 유하의 아버지인 하백을 만나러 가게 된다. 결국 하백과 해모수가 서로 동물로 변신하며 재주를 겨룬 끝에 승리한 해모수와 유화는 결혼에 성공한다. 하지만 유하의 아버지인 하백이 해모수가 자신의 딸을 버릴까 하는 걱정 끝에 술을 잔뜩 먹여 두 사람을 가죽 부대 속에 가두어 오룡거를 태워서 내보냈다. 오룡거가 궁중을 빠져나오기 전에 해모수는 이레 만에 술이 깨어 유화의 금비녀로 가죽 부대를 뚫고 나와 하늘로 올라갈 수 있었다. 이후 유화가 수궁으로 되돌아갔지만, 화가 난 하백이 유화에게 입술이 석 자나 되게 늘어지는 벌을 주어 결국 우발수라는 곳으로 쫓겨났다. 혼자가 된 유화는 해모수와 술에 얽힌 하룻밤의 인연으로 잉태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이가 바로 주몽이다. 이상이 이규보의 동명왕편에 나오는 고구려 건국 신화 속이 술 이야기이다. 고구려 주몽의 건국 신화에 기록된 고구려의 술 문화는 이후 통일신라 시대로 이어졌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강왕의 기록에서 드러나듯 일반인들이 체를 통해 막 거른 막걸리를 음용한 반면, 상류사회에서는 맑게 거른 술인 청주를 음용하는 일이 성행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도경》 《제민요술》 등의 문헌의 술에 대한 기록으로 보아 우리 술의 역사는 삼국시대부터 술 문화가 이어져 내려옴을 알 수 있다.
《고려도경(高麗圖經)》과 이규보의 〈명일우작(明日又作)〉 고려시대에 들어서 송나라와 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술 문화는 더욱 활발해졌다. 당시에 송나라 사신(국신사)으로 고려를 방문했던 서긍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을 살펴보면 고려인의 술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를 거치면서 발아했던 술 문화가 고려시대에 이르러서 더욱 성행하여 술의 종류가 늘고 주조 기술법 또한 번창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소주에 대한 내용은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소주가 고려에 유입된 것은, 고종 6년(高宗 6년, 1219년)이다. 이 시기에 원나라와 국교를 맺게 되고, 약 90여 년의 원나라 간섭기에 원의 음식문화 전래로 채식문화가 육식문화로 변모하게 되고 더불어 소주와 같은 증류주 문화가 유입된다. 이는 《고려사(高麗史)》 우왕(禑王) 원년(1375년)의 기록에서 소주 음용의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마침내 우리나라는 곡주 위주의 탁주류, 청주류, 증류주의 3대 주종문화(酒種文化)를 고려시대에 완결하는 한편 북방유목민족의 유주문화권(乳酒文化圈), 남방민족의 열대과실주문화권에서 화주(花酒, 과실주의 일종), 서역사회(西域社會)의 포도주문화권에서 포도주 등이 유입됨으로써 범세계적인 주류 문화권과 교류가 고려시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한국 술의 개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술 문화의 배경 속에서 시인이며 정치가였던 고려의 이규보(1168~1241)는 술을 애용하고 술에 관한 시를 쓴 인물이다. 이규보는 시와 술과 거문고를 좋아하여 삼혹호(三惑好)라 스스로 호를 붙이기도 하였다. 이규보는 이미 15세 때 술의 맛을 통달할 정도로 애주가였다. 그의 술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던지, 친상(親喪)을 당한 와중에도 술을 마셨고, 심지어 병석에 누워서도 술을 끊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하루 동안 술을 마시지 않고 희롱 삼아 짓다〉라는 시에서 “일만 팔십 일 만에 오늘 다행히 술을 깼다”라는 내용을 통해 그의 음주벽을 알 수 있다. 그는 시 〈명일우작(明日又作)〉과 〈화유(花柳)〉를 통해서도 술 예찬론을 펼치고 있다. “하늘이 나로 하여금/ 술을 마시지 않게 하려면/ 꽃과 버들이 피지 말도록 하여라/ 화유가 꽃다울 때 마시지 못하면/ 봄은 나를 버릴지언정/ 나는 못 버리겠네”(이규보 〈화유花柳〉)라고 적고 있으며, “생강이나 계피를 섞어 말린 육포나, 절인 생선 담은 접시와 뜸 잘 들인 밥이 든 솥이나, 식혜 한 단지나 좋은 술 한 병을 스승에게 바쳐 속수의 의식을 행하려고 오는 사람이 있거든 너는 짖지 말라”(이규보 〈명반오문(命斑獒文)〉고 적고 있다.
그의 술 예찬은 수필 〈사륜정기〉에서 절정을 이룬다. 시와 거문고와 술을 좋아하여 삼혹호라 붙인 자호와 어울리게, 이규보는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풍류를 즐길 수 있는 정자를 만들려고 하였다. 사륜정이란 정자에 4개의 바퀴를 달아 수시로 장소를 옮겨가며 자연과 친구와 술을 벗 삼아 술과 시의 멋을 즐길 수 있는 이동식 정자인 셈이다. 잠시 〈사륜정기((四輪亭記)〉의 내용을 들여다보자.
이 정자의 면적은 모두 36평방척(平方尺)이며, 소위 이동식 정자로 정자 위에 거문고, 술 단지, 술병, 소반, 기명 바둑판 등을 갖추고 여섯 사람(거문고 타는 자, 노래하는 자, 詩僧, 바둑 두는 자 두 사람, 그리고 주인)이 앉게 되어 있다. 바퀴가 있어 하인들이 밀고 끌어서 경치 좋은 곳에 세워두고 즐기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쯤 되면 술과 친구를 좋아하고 자연을 벗하려는 풍류의 절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송강 정철의 〈장진주사(將進酒辭)〉 조선시대에 들어와 술 문화는 조선 초기와 후기에 다소 변화가 생긴다. 조선 초기에 지배층에 의해 음주문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면 후기에는 일반인들에게도 술 문화가 확대되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 술 문화가 일반 서민층에게도 확대된 것은 농업기술의 발달과 쌀의 생산량 증대와 연관이 있다. 이러한 기반에 힘입어 원나라에서 유입된 증류주인 소주류 제조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탁주, 청주, 소주가 우리나라 술로 자리매김 되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고려시대에 시성으로 이규보가 있었다면, 조선에는 송강 정철이 있었다. 당쟁에 의한 좌천과 유배와 은둔 시절에 〈관동별곡〉 〈성산별곡〉 〈사미인곡〉 등의 걸작을 남긴 송강 정철 역시 대표작 〈장진주사(將進酒辭)〉란 권주시에서 술 예찬론을 펼치고 있다. 〈장진주사(將進酒辭)〉는 자연과 어울리며 술잔을 기울이는 풍류와 함께 생의 유한함과 당쟁으로 부귀와 명예의 허명과 생의 비애를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송강 정철의 권주시편을 감상하다 보면 옛 선비들의 은은하면서 여유 있는 기개와 풍류를 엿볼 수 있다. 송순의 〈면앙정가〉에도 술에 관련된 구절이 있다. “술이 익었거니 벗이야 없을소냐 (중략) 온 가지소리로 주흥(醉興)을 배야거니 근심이라 있으며 시름이야 붙었이랴”(송순 〈면앙정가〉) 조선의 술 문화는 시 이외에도 음식에 관련한 고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술의 제조법에 관련한 대표적인 서적으로는 조선시대 후기인 1670년경에 쓰인 한글 전문 요리서인 《음식디미방》을 꼽을 수 있다. 《음식디미방》의 경우, 총 132조목 중 51조목이 술에 관한 것이다. 더불어 술 제조법을 책의 제일 앞에 기록한 것만 보아도 제사를 중시하던 조선시대의 문화를 알 수 있다. 《음식디미방》 이외에도 술에 관한 기록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17세기 말엽의 《주방문(酒方文)》(1600년대 말엽)에는 12조목이, 《산림경제(山林經濟)》(1715년경)에는 61조목의 전통주 제법이 기록되어 있다. 빙허각 이씨(憑虛閣李氏, 1759~1824)의 《규합총서(閨閤叢書)》(1815년경),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1850년경) 등에도 술에 관한 기록이 나타난다. 이처럼 조선시대는 한국 술 문화의 전성기로 200여 종의 다양한 술이 생산되었고, 양조주(釀造酒)와 증류주는 물론 각종 약초를 가미한 약용주(藥用酒), 그리고 수차례 증류방법으로 제조된 홍로(紅露)와 감홍로(甘紅露)와 같은 고급술이 생산되었으며, 한국 술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일제의 주세법, 주세령과 전통 민속주 쇠퇴 그러나 일본이 우리나라를 점령하던 일제강점기에 들어 화려했던 우리의 전통 술 문화는 몰락하여 쇠퇴기로 전환된다. 조선시대에는 양조장이 12만 개나 있었으나, 조선 말기인 1883년에는 일본의 후쿠다(福田)가 부산에 일본식 청주공장을 세운다. 조선총독부는 주세법과 더불어 문화말살정책의 하나로 융희(隆熙) 3년(1909) 7월 ‘주세령’을 공포한다. 그리고 그 해 9월 주세령이 강제 집행되었는데, 일본은 보다 효율적으로 주세를 걷어 들이기 위하여 한국 술 제조를 탁주, 약주, 소주의 세 종류로 규격화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주세법과 주세령은 우리 전통주인 각 지역의 특산주(特産酒)와 가양주(家釀酒) 등의 민속주 제조를 불법으로 규정하여 사라지게 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후 한국의 주조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기 위하여 몇 차례의 제도가 공포되었으나 일제강점기는 한국 술의 침몰기이며 이들 법안은 광복 후에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일제의 주세법과 주세령 이후 급속하게 우리의 민속 전통주들이 사라지게 되었고, 이 시기에 일본식 청주(淸酒), 맥주, 양주 등의 외국 술이 유입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상당기간 일본식 제도가 남아 있어 민간에서는 제사나 혼사나 회갑연 등을 치르기 위해 가정에서 술을 밀조하였으며 이러한 밀조가 곧 토속주의 맥을 살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정부의 금지정책이 풀리면서 안동소주, 문배주 등의 증류식 소주와 각종 가양주가 제조되고 발전하게 되었다.
술 권하는 사회와 조지훈의 주도(酒道) 18단계 특히 1960~70년대에는 문단과 술, 특히 시인과 술은 무척이나 친밀한 단어였다. 60~70년대는 만취의 시대, 술 권하는 사회였다. 우선 술의 공급이 폭발적으로 증대되었다. 막걸리 양조장이 마을마다 널려 있었고, 희석식 소주는 텔레비전 메인 시간대 광고에 흘러넘쳤다. 농촌에서 되로, 공장에서 공단으로 수많은 근로자가 끼리끼리 어울리며 노동의 고통을 술로 잊었고, 개발독재에 저항하던 인사들 역시 그 좌절과 절망을 술로 달랬다. 80년대는 야간통행금지 해제에 따른 폭음의 시대, 밤의 문화의 시대였다. 성공한 쿠데타 시대는 수단과 방법을 묻지 않았다. 돈! 돈! 돈! 돈만 벌어라. 막걸리, 소주가 맥주로. 맥주가 어느새 코냑, 위스키로 바뀌었다. 당시에 문인들이 많이 출입했던 술집으로는 ‘은성’ ‘대머리집’ ‘낭만’ ‘흑산도’ 등이 있었다. 이 중 1970년대 종로 청진동에 있었던 ‘흑산도’란 술집 주인은 시인 권일송(1933~1995)이었다. 그의 시는 제목마저도 〈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이 땅은 나를 술 마시게 한다》 한빛사, 1966)라고 붙여 당시 시대상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술을 통해 토로하고 있다.
또한 술에 얽힌 시인들의 주벽과 기행의 일화는 시보다 더 흥미로운 경우가 많다. 문인과 술에 관한 저서로는 1953년 서울신문사에서 간행된 수주 변영로의 《명정사십년(酩酊四十年)》과 1960년 신태양사(新太陽社)에서 발간한 무애 양주동의 《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가 있다. 그리고 한국평론가협회 부회장을 지낸 신동한 선생이 1991년 해돋이에서 출간한 《문단주유기》가 있다. 술로써 세상에 싸움을 거는 시인들의 일화는 곧 세계에 대한 시인의 고민과 투쟁을 드러내는 하나의 은유라 할 수 있다. 시인들에게 술이란 곧 내면의 고통을 달래는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김종삼 시인의 술과 관련된 작품은 시를 읽는 독자를 고통스럽게 한다. 술에 중독된 시인의 글에서 서글픔과 가족의 애환이 절절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전집에는 술에 관련한 작품이 약 20여 편이 있다. 손민달은 “김종삼의 시 세계에서 파편화된 현실은 ‘술’을 통해 오히려 비극화되었고 동일시된 타인과 교유하며 환상의 세계에서 원형의 복원을 꿈꾸”었다고 평했다. 김종삼은 시 〈장편〉에서 “쉬르레알리즘의 시를 쓰던/ 나의 형/ 宗文은 내가 여러 번 입원하였던 병원에서/ 심장경색증으로 몇 해 전에 죽었다./ (중략) / 아우는 스물두 살 때 결핵으로 죽었다/ 나는 그 때부터 술꾼이 되었다.”라며 술을 마시게 된 이유를 형의 죽음과 폐병으로 사망한 동생에 대한 슬픔에서 비롯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산문에서도 “살아가노라면 어디서나 굴욕 따위를 맛볼 때가 있다. 화가 나서 마시고 어째서 마시고 했지만 한 마디로 절제를 못했다. 일종의 현실도피였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이 비극적인 가족사와 경제적인 어려움 그리고 현실에 대한 비극적 정황 인식을 술로 달래었다. ‘술병’이 도지면 눈에 술밖에 보이는 게 없다. 아내는 환자가 밖에 나가지 못하게 돈은 물론 토큰까지 뺏어가지만 그는 무작정 나선다. 동네 가게에서 외상으로라도 술을 마셔야 했다. 그러나 미리 당부를 받은 가게 주인은 가라고 소리친다. 그는 쫓겨나듯 아내의 발길이 미치지 못한 윗동네 가게로 가서 무작정 소주를 딴다. ‘돈은 나중에’라고 말하게 되면 상대 쪽에선 당연히 욕설이 튀어 나왔다.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며칠 동안 계속 소주를 마시며 폭음을 하여, 결국 술 때문에 지병인 간경화증으로 죽음을 맞았다. 이러한 그의 비극적 삶의 면면이 몇 편의 시에 그려지고 있다.
위의 시를 보면 술 때문에 겪는 고초가 녹록지 않음을 알 수 있는데, 자신의 신상에 관련한 체험적 내용을 과감하게 시적 소재로 차용하는 시인의 솔직함이 더욱 시를 감동적으로 읽히게 한다. 술은 이처럼 시인에게 시적 상상력이나 기질적 우울을 달래주는 역할도 하지만, 반면에 사람을 폐인으로 만들어 일찍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경우도 많다. 김종삼 시인 이외에도 술에 관련한 일화를 꼽으라면 술성이라 불렸던 〈승무(僧舞)〉의 시인 조지훈을 빼놓을 수 없다. 조지훈의 술에 관한 일화와 사람에 대한 정이 넘치는 일화는 〈술은 인정이라〉는 수필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수필에서 그는 술을 마시면서 생긴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인정을 마시고, 술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흥에 취하는 것이 오도(吾道)의 자랑이거니와 그 많은 인정 속에 술로 해서 잊지 못하는 인정가화(人情佳話) 두 가지를 지니고 있다.”라고 자신의 주도를 술회하고 있다. 또한 〈주객이 아니라는 성명〉에서 조지훈은 “나는 폭주 20년의 주력은 있지만 그동안 1만여 번의 술좌석에서 일어난 일을 거의 잊은 적이 없고 혼자서 술을 마신 적이 없다”고 했다. 또한 “다만 술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술 마신 흥취를 좋아하는 것이다”라며 애주가다운 면모를 보이고 있다. 조지훈 시인은 술에 대한 여러 가지 단계를 설명한 〈주도유단(酒道有段)〉에서 “음주에는 무릇 열여덟의 계단이 있다.”라고 했다. 더불어 “첫째, 술을 마신 연륜이 문제요, 둘째 같이 술을 마신 친구가 문제요, 셋째는 마신 기회가 문제며, 넷째 술을 마신 동기, 다섯째 술버릇, 이런 것을 종합해 보면 그 단(段)의 높이가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다.”라고 적고 있다.
1963년에 쓴 미당의 시 〈선운사 동구〉에도 술 이야기가 나온다. 〈선운사 동구〉는 1968년 출간된 제5시집 《동천》에 실린 작품으로, 선운사에 시비로 세워진 작품이기도 하다.
이 시를 보면 능란하게 넘어가는 육자배기와 칼칼한 막걸리가 절로 떠오른다. 지금은 특산물인 풍천장어집이 즐비한 선운사 입구이지만, 예전에는 절 입구 삼거리에 막걸릿집이 하나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어느 해 초가을, 미당이 아버지 장례식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던 길에 선운사 버스정류장에서 우산도 없이 이슬비를 맞고 서 있다가 선운사 동구 주막집에 들어섰다. 비를 맞아 추운 몸에 뜨끈한 구들방과 잘 익은 신김치에 막걸리를 마셨는데, 마침 40대 중반의 주막집 여인이 있어 미당이 육자배기를 청하자 막걸릿집 주인 여자가 나직이 노래를 불렀다. 그런 일 있었던 이후 여주인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아편에 의탁하다 끝내 아랫동네 감나무 밑에서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다고 한다. 미당은 그 여인의 비극적인 삶을 전해 듣고 시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는 죽어서까지 일화를 남기고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장례식장에서 몇백만 원의 조의금이 걷혔는데, 그들 가족에게는 큰돈이라 장모가 애써 숨긴다고 부엌의 아궁이에 숨겨 놓았는데, 이를 알지 못한 시인의 아내가 불쏘시개로 태워버렸다는 사연 역시 그를 더욱 기인처럼 만들고 있다. 술과 관련된 그의 일화 역시 독특하다. 그는 술 중에서도 특히 막걸리를 좋아했었는데, 전기고문으로 망가진 몸을 달래기 위해 매일 막걸리 두 되로 세 끼 식사를 대신했다고 한다. 인사동이나 종로 일대를 떠돌며 동료 문인들에게 돈을 꾸어 막걸리와 술과 담배를 사서 피웠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그는 결혼 후에 경기도 의정부 장암동의 담장도 대문도 없는 허름한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는 아내 목순옥 여사에게 하루 이천 원의 용돈을 받으면 맥주 한 병과 담배 한 갑을 사는데, 그 일이 그의 삶에 커다란 행복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을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라고 말하고 다녔다고 한다. 아래 두 편의 시는 천진무구한 천 시인의 삶과 순수함을 엿보게 한다.
소주 수백 병을 마시고 수백 편의 시를 토한 박정만 시인 《시인세계》에서 2005년 봄호에 기획한 〈시인과 술〉에 기고한 장석주와 정규홍의 글에 따르면 “시인 박정만은 죽기 서너 달 전부터 곡기를 끊고 하루도 쉬지 않고 소주를 마셨다.”고 한다. 그가 한 달 동안 마신 소주병이 삼천 병에 달한다고 하여, 술병을 모아 마당에 줄지어 세워놓으니 그 풍경이 장관을 이루었다고도 한다. 이렇듯 그가 스무 해 동안 썼던 시보다 죽기 직전의 두세 달 동안 소주를 마시고 쏟아낸 수백 편의 시의 양이 더 많았다. 박정만은 시의 끝머리에 시를 쓴 날짜와 시간을 적어 넣었는데, 어떤 시들은 불과 일이 분의 간격을 두고 쓰였다고 한다. 이상으로 우리 시문학에 나타난 술을 살펴보았다. 술은 백약의 으뜸이면서 동시에 인간을 파멸시키며 일찍 죽음으로 몰아넣는 양면성을 지닌 음식으로, 술은 오랜 시간 동안 우리의 삶과 직접 연관되어 우리 삶 깊숙하게 밀착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와 조선과 현재에 이르기까지 고전 시가와 현대시를 망라하여 술은 시의 중요한 핵심 소재로 다루어지고 변주되어 왔다. 술은 시인에게 시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대상으로 혹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오는 중압감을 풀어주는 매개인 동시에, 비극적인 현실이나 시대적 상황을 타파하고 시대를 통찰하는 매개로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에 나타난 술의 역사를 살피는 일은 곧 술을 통해 세계와 몸으로 부딪치려는 시인의 눈과 펜에 가까이 다가가는 일이기도 하다. 이 서투른 글을 쓰면서 문득 대학가 주점 벽면에 거친 붓글씨로 휘갈긴 어느 시인의 시가 생각난다. “날씨야 아무리 네가 추워 봐라/ 내가 옷 사 입나/ 술사먹지” 가난하고 추웠을 시인은 아마도 배고픔과 추운 시절을 소박한 한 잔 술로 데웠음이 분명하리라.
서안나 anna2121@naver.com / 시인. 1990년 《문학과 비평》으로 등단. 시집 《푸른 수첩을 찢다》 《플롯 속의 그녀들》 《립스틱 발달사》와 평론집 《현대시와 속도의 사유》가 있다. 한양대. 추계예대 출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