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넷에서 “꼬마 감자가 엄마 감자에게 ‘엄마, 나 감자 맞아?’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엄마 감자는 ‘당근이지!’라고 했습니다. 꼬마 감자는, 엄마 감자의 대답에서 정체성에 혼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에게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할머니, 나 감자 맞아?’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 감자는 ‘오이야(오냐)’라고 했습니다. 할머니에게서도 혼란을 느낀 꼬마 감자는 결국, 정체성을 찾아 집을 나갔습니다”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정체성”을 국어사전에서 찾으면, “변하지 아니하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 또는 그 성질을 가진 독립적 존재”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므로, 정체성이란, 자신이 갖고 있는 가치관, 신념, 그리고 특징, 외모, 내면 모든 것의 총합으로, 사물의 본래 형체가 갖고 있는 성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체성은, 기업들의 판매 마케팅 전략에서도 사용됩니다. 그것을, “아이덴슈머 마케팅”이라 하는데, 이는, “아이덴티티와 소비자를 결합한 신종 마케팅 전략”으로, 똑같은 상품이나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동질감을 느끼도록 함으로, 회사의 신뢰도를 높이는 마케팅 전략입니다. 소비자는 같은 제품을 사용하는 사람들끼리 정보를 공유하며, 기업은 이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소비자들이 물건을 살 때는, 단순히 제품만 구매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선택한 제품의 상징성이나 관점, 의미, 철학까지도 함께 구매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는 사람은, 삶의 목표를 올바르게 세우지 못하기에, 인생을 되는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은, 그 정체성을 근거로 삶의 목표를 세워서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 몸부림을 치게 됩니다. 인디언들은 사냥이나 이동을 할 때, 계속해서 열심히 가다가도, 갑자기 말에서 내려 한참을 가만히 서 있는 다고 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너무 빨리 달림으로 인해, 자신의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봐 돌아온 그 길을 보며 영혼을 기다리는 거라고 합니다. 오늘의 우리도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 하루하루가 어떻게 가는 것인지도 모를 때가 많습니다. 저녁이 되면, 퇴근해서 집으로 가고, 피곤해서 자다보면, 아침이 되어 정신없이 출근하고, 출근해서 업무에 바쁘게 뛰어다니다 보면, 어느 새 날이 저뭅니다. 이렇게, 정신없이 보내는 하루하루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생각하며, 삶의 방향, 삶의 계획들을 새롭게 세우고,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곳곳으로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환자들이 있을 때는 그들을 위해 기도했고, 또는, 본문 앞의 12절을 보시면,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고 합니다. 이 사건을 보고는,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예수의 이름을 도용하는 사람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얹을 때는 병도 치료되고, 악귀도 나갔는데,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행하는 자들에게는, 악귀가 나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대체 너희는 누구냐?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아는데 너는 누구냐?”라며, 악을 쓰며 그에게 달려들어 행패를 부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보면, 사도 바울의 능력은 그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게서 나옴을 알 수 있습니다. 요 15: 7을 보시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합니다. 여러분, 시대와 상황에 따라, 우리의 판단력을 혼란케 하고 믿음을 송두리째 흔드는 사건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성도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을 혼란케 하고, 신앙을 현혹시킵니다. 이 시간 본문을 통해, 올바른 신앙의 정체성을 세우심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복 가운데 거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4 - 16절을 보시면,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과 믿음은 별개입니다.
본문 앞의 12절을 보면, 사도 바울의 능력은, 그의 간절함 속에서 직접 안수한 것이 아니라, 그의 몸에 걸쳤던 천으로도 병이 나았고, 악귀가 나갔습니다. 또, 행 5: 15 - 16을 보시면,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과 사도 베드로의 이러한 기적은, 그들이 의지하고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주문이 아니라 그들의 신앙이었고,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 14절을 보면,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이러한 일을 행했는데, 악귀가 물러가기는커녕, 오히려 기세가 당당하여,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을 공격하였다고 합니다. 이 일로, 그들은 악귀와 그 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톡톡히 망신을 당한 것은 물론이고, 생명까지도 위태로운 봉변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에 문제가 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사도 바울이나 사도 베드로가 어떤 묘수를 사용했기 때문일까요? 이도 저도 아닙니다. 문제는 스게와의 일곱 아들에게 있습니다. 그들은 제사장의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었던 겁니다. 본문 16절을 보시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라고 합니다. 이는, 악귀가 마치 표범이 먹이를 덮치듯 일곱 아들 모두에게 뛰어올라가서 그들을 억제하여 이겼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악귀가 예수를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악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건너편의 가다라 지방에 가셨을 때, 무덤 사이에 거하던 군대 귀신들린 자들이 뛰어나와 예수님을 향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이라고 외쳤습니다. 이것은 귀신들이 예수를 잘 알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귀신들은 예수님을 알기는 알되 믿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아는 지식과 믿음은 별개”라는 겁니다. 예수님에 대해 지식적으로 안다고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성도가 아니어도 예수님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습니다. 심지어는 타종교인도 예수님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습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는 예수님을 지식적으로 많이 알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지식만큼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7 - 19절을 보시면,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고 합니다. 말씀이 선포됨으로,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자복하며 회개하는 회복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의 이름으로 말할 때, 악귀가 쫓겨나고, 병도 치료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은 몰랐습니다. 단지, “예수”라는 이름에 능력이 있기에 그런 줄만 알았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예수의 이름이 모든 귀신들을 압도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 이름을 높이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에베소에 모든 사람들과 성도들에게 커다란 충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그 동안 자신들이 행했던 잘못에 대해,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회개를 하였으며, 마술사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잘못되었음을 알고는, 마술에 관련된 모든 책들을 자진해서 불태웠습니다. 이렇게, 자신들의 책을 자진해서 불태웠다는 것은, 공개적으로 마술을 배격한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여러분, 본문의 배경이 되는 에베소는 점과 마술이 성행한 도시였습니다.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 초조, 염려를 해결하고자 점과 마술을 의지했던 겁니다. 오늘날에도 성도들 중에, 이러한 것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염려와 불안과 초조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맡기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이, 내 의지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은, 내 생각과 내 의지대로 이루어지는 것보다 더 지혜롭고, 내게 유익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 것과 같이, 사도 바울 역시, 다메섹으로 가던 중,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자신의 출생과 가문과 학문에 대한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합니다. 빌 3: 7 - 9을 보시면,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도 주님을 위해서 버리고 포기해야 할 것은 버리고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송두리째 바꿔놓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의지하며 살아가야 할 것, 우리가 소망을 두며 살아가야 할 것, 우리의 꿈과 비전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게 함으로, 우리가 성도로서 지녀야 할 정체성을 알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의 능력이요, 복음의 능력입니다. 이제, 본문을 통해서,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내어놓고, 또, 우리의 믿음 없음을 미스바에 모였던 이스라엘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새롭게 빚어진 성도가 되심으로, 사도행전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회복의 은혜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0절을 보시면,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힘이 있어 흥왕하여 졌습니다.
본문을 현대인 역으로 보시면, “이렇게 해서 주님의 말씀은 힘 있게 계속 퍼져나갔다”라고 합니다. “흥왕”을 국어사전에서 찾으면, “세력이 매우 왕성하다. 왕흥하다”라고 합니다. 우리의 삶이 본문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심으로 따를 때, 우리의 삶, 우리의 모든 것은 기운차게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 우리의 생각, 우리 삶의 기준에 우리의 정체성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것에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열정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것에 두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비로운 것으로 또는, 일반적인 것이 아닌 특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에 두어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선포하실 때, 비유를 하심에 있어서, 일반적인 것이 아닌 특별한 그 무엇에 비유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특별한 것으로 이해하거나 받으려고 하는 것은,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 행한 욕심과도 같은 겁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사도 바울이 그러했고, 사도 베드로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켜야 합니다. 본문 속의 악귀는 사도 바울과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의 마음을 꿰뚫어보았습니다. 악귀는 우리의 영적 상태, 우리의 마음가짐을 압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과 자신과의 신앙관계를 먼저 바르게 살피고, 견고하게 세워야 합니다. 여러분, 에베소 사람들은, 말씀에 대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 있게 퍼져 나갔고, 점점 힘을 떨친 지역으로 소문난 에베소에는, 많은 성도들을 생겨나며 처음 사랑을 바탕으로 놀라운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그래서 꾸준히 성장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르게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기에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지역이 되었습니다. 또,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 중, 가장 먼저 편지를 받게 되는 곳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도 에베소 교회를 주목하셨다는 겁니다. 히 4: 12을 보시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본문의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의 의미는, “말씀에 강력한 힘이 있기에 모든 것을 이기고 지배하였다”라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은 어려움 속에 있지만, 언제 어디서나 성도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심으로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원줄기에 붙어 있을 때, 열매를 맺고 자랄 수 있는 것처럼, 성도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의 원줄기가 되시는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욕심이나 호기심, 또는 주변의 유혹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성도된 우리의 정체성은 “임마누엘”에 있음을 기억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성도인 우리의 정체성을 회복하심으로, 우리의 삶과 가정과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더욱 힘있게 흥왕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