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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인 비난 글들에 대한 유감
유아인 관련한 내 생각은 이 포스트로 정리한다. 더 정확하게는, 유아인이 아니라 유아인을 바라보는 일각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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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석은 유아인을 비판하는 글 구석구석에 다음의 문장들을 끼워넣었다. "자신의 글 하나에 독립선언문만큼 비장하며 거대한 의미를 붙이는 이에게 자신이 태어난 순간은 얼마나 중요하겠는가." "단지 글을 못 써서라고 할 수도 있겠다. 평소에 글 쓰는 법을 익히지 않았다면 자신이 얼마나 장황한 서론을 썼는지 모를 수도 있다." "그가 말하는 페미니즘은 어머니와 누나의 페미니즘이 아니라, 가족을 통해 여성의 차별을 인식한 대견한 페미니스트, 유아인의 페미니즘이다." "글 하나에 “신념과 사랑과 시대정신을 담아 ‘페미니즘’을 이야기 하고자”하는 나, 이렇게 소중한 나" "자신의 기준에 맞으면 돕고, 그렇지 않으면 폭도가 된다. 자기 객관화가 안 되는 그에게 자신의 비대한 자아를 꾸며주지 않는 페미니즘에는 어떤 가치도 없다."
노골적인 조롱이다.
그런가 하면 윤광은은 이렇게 썼다.
"유아인 씨는 글을 못 쓴다. 문장 구조가 무질서한데다가... 이건 마음은 문학소년이지만 글 솜씨가 따라주지 않는 사람들이 과욕을 부릴 때 나오는 설익은 표현이다. ... 이건 글을 넘어 그의 생각이 설익고 뒤죽박죽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왜 비평의 금도를 벗어났는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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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 못한' 유아인의 글솜씨를 조롱하면서 비판을 시작하는 직업적 필자들이 있다. 유아인은 적어도 자기 생각을 말할 때 '(나보다) 얼굴도 못생겨서 열등감 있는 것들에게 고함'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유아인이 아무리 맞는 말을 해도 상대에게 "외모 열등감을 이기지 못해 잘생긴 자신에게 증오를 쏟아내는 자들의 한심함"을 전제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유아인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으면 뭐가 문젠지,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 쓰면 된다. 저런 표현들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유아인은 작가들의 얼굴이 왜 오징어인지 이목구비를 조목조목 깎아내리고, "외모에 대한 열등감이 그들을 나에게 공격적으로 만들었나보다"고 해야 제대로 된 미러링이 될 것이다.
작가에게는 타인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있어야 한다. 자기 눈에 글솜씨가 덜 찬다고 못 볼 꼴이라는 이야기를 공론장에 갖고 오는 건 작가이기 이전에 근대시민윤리의 기준조차 충족하지 못한다. 윤광은의 '안면 구조'는 얼마나 질서정연한가?
덧붙여 유아인의 글솜씨가 문제도 아니겠거니와, 굳이 따져물어야 한다면 그는 글을 잘 쓴다. 누구에게나 직관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들로만 쓰면 딱 유아인만큼 장황해진다. 작가야 불필요한 지면을 절약하기 위해 고급 개념어들을 쓸 뿐이다. 거기에 연예인으로서 스타일의 차원에서 '스웩'을 첨가하면 유아인의 글이 된다. 그래서 유아인의 말이 구구절절 맞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얘기다.
유아인은 왜 논쟁을 하기에 앞서 '설익은' 글솜씨와 '비대한' 자아를 먼저 품평받아야 하나? 그 이유를 추적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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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인을 비판하는 글의 논리구조는 천편일률적이다. <유아인은 자기 식대로 페미니즘을 정의한 후, 그걸 여성들에게 강요한다>, <따라서 유아인의 페미니즘은 남자가 베풀어주 척, 실은 여성을 옥죄는 페미니즘이며 진정한 페미니즘이 아니다>라는 내용이다. 기계적으로 '복붙'되고 있는 논리틀이다.
허핑턴포스트에 게재된 노정태의 기사가 한 예다. 노정태는 유아인의 트윗 "증오를 포장해서 페미인척 하는 메갈짓 이제 그만"이라는 한 문장을 가지고 그를 5공 정권으로 만들었다. '메갈짓'을 '빨갱이'로 바꾸면 군사정권의 폭압 논리와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특정 커뮤니티에서 형성된 언어로 집단적 모욕을 받은 이에게 해당 커뮤니티를 인정할 의무는 없다. 유아인은 '메갈짓'은 진짜 페미니즘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이게 그 사람의 생각일 뿐이다.
무슨 자격으로 페미니즘과 아닌 것을 구분짓느냐는 일각의 화살은 곧바로 한 바퀴를 돌아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그 역시 유아인의 페미니즘은 진짜가 아니라고 재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명석의 기사 제목이 <유아인이 허락한 페미니즘>이다. 그런데 <강명석이 허락한 페미니즘>으로 바꿔도 아무런 무리가 없다.
'메갈짓'이라는 표현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싶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메갈짓이 무엇인지' 특정해달라고 요청하면 될 일이다. 그 과정을 지나치고 유아인과 군사정권을 동일시하는 건 의도적인 논리적 비약이다. 이 기저엔 전문적인 글쓰기를 훈련받지 않은 유아인이 반박하지 못할 거라는 기대심리가 의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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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남자로 태어날 수 있고 대구에서 태어날 수도 있다. 그리고 남자도 페미니스트 선언을 할 수 있다. 유아인은 '대구 남자'로서 그가 관찰한 여성들보다 많은 혜택을 받고 자랐고 그것이 불공평하다고 느꼈다. 누구나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통해 사회적 가치를 호명하게 마련이다. 옳고 그름을 논할 사안이 아니라 당연한 현상일 뿐이다.
유아인의 페미니스트 선언이 그 자체로 용납 불가능하다면 페미니즘은 자가당착의 논리에 빠진다. 남성은 설득과 포섭의 대상이 아니며 무자격자일 수도 있게 되니까. 그렇다면 남자들은 페미니즘을 지지할 이유가 없어진다.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유아인이 페미니즘을 자기 멋대로 재단하는 님성적 권위를 휘두른다는 과잉 해석의 연유를 추적해보면, 실체가 너무나 사소해 웃음이 나온다.
어떤 사람이 페미니스트 선언을 했다고 치자. 그런데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욕설과 음해에 시달린다면, 선택지는 다음의 두 가지 뿐이다.
1) 공격자들이 진정한 페미니스트이고, 자신은 아니라고 한다. 이는 집단적 폭력도 페미니즘의 일부라고 인정하는 꼴이다. 이 선택을 하면 자동적으로 페미니즘을 모욕해야 한다.
2) 예의의 상식선을 넘은 공격자들을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한다. 이래야만 페미니즘의 대의와 존재가치를 여전히 존중할 수 있다.
어느 경우가 페미니즘과 인간 전반에 대한 예의인지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유아인은 같은 선택지를 마주한 대부분의 이들처럼 2)를 택했을 뿐이고, 그게 전부다.
물론 페미니즘 일각에서는 일반적 상식에서 악행으로 규정되는 언행에 대해 '미러링'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미러링을 어떻게 해명해도 미러링에 불쾌해 할 당사자의 권리마저 봉쇄할 수는 없다. 그 권리는 침해받아서는 안 되는 고유한 영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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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자연스러운 선택의 흐름을 가지고 유아인을 여성성의 억압자로 만들기에는 부족하다. 그래서 필자에 따라 유아인의 '비대한 자아'와 '자기애', '과대망상'을 논해야 한다. 논리를 강화하기 위해 타인의 품성과 지적능력을 폄하하는 것이다. 그리고 유아인의 생각은 곧 그의 글로 표현되었으므로 글솜씨를 비하한다. 유아인이 페미니즘을 모욕했다는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해 거꾸로 그를 모욕한다.
유아인의 입장이 무결하고, 그에 대한 비판이 모두 잘못됐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다만 유아인이 '맨스플레인'을 했다면 작가와 기자들은 그에게 '펜스플레인'을 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비판을 하고 싶으면 당사자가 내놓은 생각과 맹점을 짚어야지, 인간적 조건에 점수를 매겨서는 안 된다. 그런데 유아인은 아직 맹점이 될만한 구체적 사상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를 무너뜨려야겠으니 '정신 상태'를 걸고 넘어지는 것이 아닌가?
차라리 유아인을 무조건적으로 찬양하는 것은 성급하고 위험하다고 한다면 인정하겠다. 이 경우 그의 존재를 부정적으로 단정하는 것 역시 시기상조임을 동시에 인정해야 한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의 존재는 화들짝 놀라 당장 처리해야 할 변수가 아니라 상수다. 상대를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발전적 논의는 난망하다. 페미니즘이 단 한 가지 형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다양한 분파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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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기자가 사농공상의 사(士)쯤 되고 유아인은 남사당패인가? 신분질서를 옹호한다고 주장하는 작가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과 유아인이 받는 처사는 공평해야 한다.
내가 알기로 유아인만큼 잘생긴 작가는 국내에 없다. 그럼에도 유아인에게 '문 밖에 나서면 거리 미관을 해친다'는 언어폭력을 당해도 되는 작가는 없을 줄로 안다.
유아인을 '논리적으로' 비판하는 글들을 보고 내가 확인한 것은 작가들의 가난한 자아밖에 없다. 글 잘 쓰면 밑도 끝도 없는 모욕을 동원해 논리를 전개해도 되는가? 필력과 도덕성이 비례하라는 법은 없지만 예의범절은 글쓰기 훈련에 포함되어 있다.
나는 직업적 작가가 도의적 문제에서도 자유로울만큼 그렇게 대단한 신분인 줄 처음 알았다. 유아인의 '비대한' 자아는 눈 뜨고 못 봐줄 웃음거리고, 자신의 가난한 자아는 전시해도 될 지적 우월함인가. 성경에 남의 눈에 티끌은 보고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한다는 구절이 있다. 나는 요며칠 글밥 먹는 동료 직업인들에게 실망했다.
https://www.facebook.com/daesun.hong.58/posts/1722820351116921
요며칠 한 말은, 유아인을 비판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한 사람을 굳이 악당이자 반동으로 만들기 위해 논리를 꾸며내지는 말자는 얘기다.
어제 경향신문에 실린 기사는 유아인이 무지할 뿐만 아니라 그의 무지는 비윤리적이기까지 하다는 언어폭력을 쏟아냈다. 점입가경이다. 이하 큰따옴표 처리된 것은 모두 해당 기사의 내용이다.
"과학 잡지 ‘스켑틱’의 편집장 마이클 셔머는 비판적 사고를 가로막는 오류 중 하나로 ‘박해를 받는 쪽이 올바르다는 믿음’을 꼽으며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사람들은 코페르니쿠스를 보고 웃었다. 사람들은 라이트 형제를 보고도 웃었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순교자가 된다고 해서 당신이 옳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맞다. 핍박과 옳고 그름은 카테고리가 다르다. 따라서 유아인이 핍박받는다는 이유로 그가 틀린 것도 아니다. 기사를 쓴 위근우가 유아인에게 쓴 논리는 그대로 자신에게 돌아온다.
"그가 상당수 여성 누리꾼들에게 비난과 조롱을 받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다시 셔머의 말을 빌리자.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그렇다면 필자가 공개적으로 지지한 메갈리아가 남성 누리꾼들에게 비난과 조롱을 받은 건 사실이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기사 제목이 < ‘페미니스트’ 자처한 그대가 ‘남초’들의 지지를 받는 건 왜일까요?>이다. 남초의 지지를 받으면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는 함의다. 그런데 핍박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지를 받는 일도 옳고 그름과는 상관이 없다잖은가.
"유아인이 느끼는 분함과 억울함이, 스스로 믿어 의심치 않는 진정성이, 옳고 그름을 가르는 기준은 아니며 누군가가 페미니스트냐 아니냐를 가르는 기준 역시 되지 못한다."
기사에 따르면 유아인과 논쟁하거나 그를 비판하면서 '지금 이 순간에도 여성이 얼마나 핍박받는지'를 강조한 화법 역시 동시에 틀려야 한다. 여성시민 A도 유아인도 공평한 처사를 받아야 하는 동료 시민이므로 문장의 단어만 바꿔보겠다. <여성들이 느끼는 분함과 억울함이, 스스로 믿어 의심치 않는 진정성이, 옳고 그름을 가르는 기준은 아니며 누군가가 페미니스트냐 아니냐를 가르는 기준 역시 되지 못한다.>
집단적 폭력을 당한 유아인의 관점을 부정하려면 여성이 사회적 탄압을 받고 있다는 -그래서 어떤 말을 해도 미러링이며, 그럴 만 하다는- 메갈리아의 스탠스도 동시에 부정해야 한다.
유아인을 비판하는 척 하면서 사실은 최근의 웹 페미니즘 조류를 부정하려는 고도의 책동이 아닌지 강력히 의심된다. 왜냐고?
"...그는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는 대신 자신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메갈짓”을 하는 “폭도”로 규정했다."
이 말은 곧 : <페미니즘 진영은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는 대신 자신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맨스플레인"을 하는 "한남"으로 규정했다.>
기가 막히지 않은가? 왜 여성진영에 그대로 되돌아오는 논리를 되풀이할까? 너는 멍청하거나 나쁘다는 말도 아니고, 무지한 동시에 비윤리적이라는 비난에 어떻게든 성공하고 싶어서다.
"유아인은 놀라울 정도로 무지하다. ... 이 권력이 뿌리 깊은 구조적 불평등 위에서 작동한다면 윤리의 문제가 된다. 유아인의 무지는 비윤리적이다."
그러므로 자동적으로 : <이 권력이 한 연예인vs익명의 대중이라는 구조적 불평등 위에서 작동한다면 윤리의 문제가 된다. SNS 페미니스트들의 무지는 비윤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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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한 반성적 논증 대신 스스로에 대한 떳떳함 하나로 돌파하는 그녀들은 어느새 여초 커뮤니티에서 일기당천의 장수가 되었고, 이러한 이미지를 구심점 삼아 모인 여성들이 과격한 폭도로서의 ‘한남’에게 공격받는 선량한 여성의 포지션을 다시 한번 점유하게 해줬다. (방금의 문장은 원문에서 단어만 네 번 바꾼 것이다.)
대체 여기 어디에 페미니즘이 있는가. (이 문장은 원문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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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름난 필자는 이런 글을 썼고 중앙일간지는 이런 글을 실었는가. 기사의 표현에 따르면 무지하고 비윤리적이어서 그렇다. 아닌가?
아니다. 타인을 그렇게 전인격적으로 부정하면 못쓴다. 다시 말하지만 유아인을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단계에서, 비판에 성공했을 때 유아인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뭘까. 우리 사회는 이미 좋은 레토릭을 확보해두고 있다.
<아쉽다>
<소홀했다>
<당신의 00엔 뜻하지 않은 위험성도 있음을 알아주기 바란다>
<선의를 기대하겠다>
이런 상식적 예의로는 성에 차지가 않아서, 한 사람의 존재가치를 말살하고 싶어서 위근우, 강명석, 윤광은, 박우성, 오마이뉴스같은 억지를 동원하면 안 된다. 부탁한다. 폭력을 즐기지 말라.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진보진영의 필자들에게 더 큰 선의를 기대하며, 언론의 소홀함이 아쉽다.
https://www.facebook.com/daesun.hong.58/posts/1724684020930554
간만에 제대로 글 쓰는 작가 만났네.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