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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20) 자비, 베푸는 행위라기보다는 함께하며 나누는 삶
③ 약한 이들(병자들)의 형제 공동체
“내가 그들한테서 떠나올 때는 역겨웠던 바로 그것이 내게 있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얼마 있다가 나는 세속을 떠났습니다.”
이것은 자비가 하는 일과 관련한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인 결과다. 지난 20세기 말에 발간된 프란치스코 시대의 나환우들이 한데 모여 살던 곳에 대한 연구서들을 보면, 그곳 사람들은 나환우뿐 아니라 다른 약한 이들, 병자들, 다양한 방식으로 정상적인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마을 사람들은 ‘수호자(guardian)’를 선출하여 자신들을 이끌게 하였고, 서로 ‘형제들(fratres)’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들도 역시 일반적인 생활 체제를 받아들여 그들의 재산을 공동으로 나누어 썼으며, 어떤 곳에서는 심지어 사람들이 공동체가 모인 가운데 수호자 앞에서 하느님께 가난과 정결과 순종을 약속했다고 한다. 그들은 거의 준수도자 같은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프란치스칸들은 일찍부터 수도원을 ‘집(domus)’이라고 칭했는데, 이들 역시도 자신들의 사는 곳을 그렇게 불렀다. 우리 프란치스칸들 역시도 이들처럼 처음부터 형제들의 거처를 ‘수도원(monastery)’이라 부르지 않고 ‘집’이라고 불러왔다. 프란치스코는 이런 사람들에게로 내려가서 그들과 함께 살았고, 또 그들과 삶을 나누면서 그들에게서 무언가를 배웠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자비를 베푸는 행위라기보다는 함께하며 나누는 삶이었다.
실제로 ‘misericordia(자비)’라는 라틴말 단어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로 인한 비참함을 향하는 하느님의 마음을 표현하는 단어다. 이 단어는 본래 ‘miseriae’(비참함, 불행, 고통, 불쌍함)와 ‘cor’ 혹은 ‘cordis’(마음)라는 두 단어를 합성한 단어다. 그래서 본래 이 단어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불쌍함에 대해 마음이 동하여, 이런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들어 높여 주시고 당신의 한없는 사랑 안에 품으시려는 하느님의 마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프란치스코가 자기 유언에서 이 단어를 쓰면서 “자신이 나환우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다(혹은 행했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프란치스코가 말하고자 했던 바를 헤아려볼 필요가 있다. 즉 그는 그 자비가 결국 자기가 행하거나 베푼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자기를 통해 나환우에 베푼 것이며, 이를 통해 자기 또한 하느님의 자비를 입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말한 바로 후에 그가 나환우들을 통해 받은 자비, 즉 역겨웠던 것이 단맛이 되게 해준 하느님 자비의 은총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형제 공동체의 초기 모델 중 하나였다는 점이 놀라운 사실이다. 그러므로 실질적으로 프란치스칸 삶(교회 전체를 포함하여 다른 모든 공동체 삶을 포함)에 들어선다는 것은 상처받은 사람들(나환우들)의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우리 프란치스칸 형제 공동체 삶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다. 이러한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인간에 대한 극진한 사랑으로 인해 인간의 모든 한계성을 취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바로 우리 형제공동체 삶이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 형제 공동체는 물론이고 교회도 자비와 치유가 필요한 나환우들의 공동체인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하느님께서 데려다 주신 곳에서 참회를 시작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참회의 장소는 물리적인 장소이기도 하지만 교회 안팎과 공동체 내의 사람들 사이의 상호 관계성 안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공동체, 즉 자매애와 형제애는 참회를 실행하는 프로젝트이다; 이것은 시작할 때 한 번 하는 그런 회개가 아니라 이 삶을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발전시켜가고 완성으로 이끌어가야 할 프로젝트이다. 우리는 나환우 공동체로서 우리 공동체를 규명하는 것에 대해 탐탁하지 않겠지만, 이것이 실제로, 진실로, 가장 정확한 묘사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동병상련’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우리 공동체 구성원이 모두 다 건강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여기에서부터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서 이탈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아픈 것처럼 다른 이들도 아프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해 같은 마음(同情)을 품어주고 치유하고 싸매주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공동체 상이다. 루카 복음 17장 11절부터 19절에 나오는 나병환자 열 사람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이런 공동체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평소에는 적대시하던 유다인과 사마리아인이 나병으로 인해 같은 공동체 일원이 되지 않았던가?!
우리는 대개가 모든 것이 질서 있게 정돈된 상황을 좋아한다. 그래서 아마 교회도 성직 체계를 거룩한 질서(Holy Order)라고 칭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육화하신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무질서 속으로 들어오셔서 그 안에서 거룩함을 세우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 무질서를 질서 있게 바꾸시기 위해 노력하신 것이 아니라 무질서와 죄의 상황 안에서도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 당신과 일치하시기를 바라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어찌 보면 ‘죄’와 ‘무질서’는 하느님께로 나아가 그분과 일치하는 데 도움을 주는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우리 삶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통해 하느님과 일치하기보다는 죄와 그 죄의 사함을 통해 하느님과 일치했던 것이 분명한 사실 아닌가?! 이에 대해서는 프란치스코와 다른 많은 성인이 증명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질서도 사랑해야 하지만 거룩한 무질서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신비주의자 노르위치의 율리안나 성녀도 “죄는 필요하고 유용한 것이다(Sin is behovely)”라고 말한 바 있다. 분명히도 하느님께서는 우리 삶에서 경험하게 되는 죄와 어둠마저도 우리를 구원하시고 완성으로 이끌어가시는 데 활용하시는 참된 선, 선의 원천이시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21) ‘반대의 일치’ 실현하시는 그리스도께 희망 두어야
보나벤투라는 「he Triple Way(삼중도)」라는 책에서 중세의 전통적인 기도의 3단계-정화기, 조명기, 완성기(혹은 일치기)-를 이용해 기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일치에 대해서 말하는데 특별히 정화기에서 우리 죄의 성찰을 언급하면서 죄의 종류들을 나열한다. 그중에서 뜻밖의 죄 목록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아름다운 것만 보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삶에서 무질서와 죄를 체험하게 된다. 이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면서 이 무질서 속에서 거룩함을 향해 나아가려는 인내심 깊은 믿음이 필요한 것이고, 이런 과정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총으로 죄 많은 우리를 당신과 일치시켜 주신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아마 우리가 급히도 변화되어 가고 ‘빨리빨리’를 선호하는 삶을 살아가며 아쉽게도 너무도 힘들고 더욱더 신경증적인 모습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은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갖추어지고 조건 지어져야 한다는 강박증 때문인지 모른다. 우리가 삶을 더 살면 살수록 엄연한 현실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 세상과 이 사회의 모습, 내 공동체의 모습은 내가 원하는 대로 상황 설정이 맞추어지지도 않고, 내가 원하는 모습대로만 형성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일 때야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과의 관계성 안으로 들어설 수 있다.
모든 것이 질서 지어져 있어서 그 모든 것이 어떤 규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과학 이론이 주를 이루었던 현대주의 세계관과는 달리 현대주의 이후(post-modern)의 과학에서는 무질서와 불규칙을 계속해서 더 발견해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특별히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요 우주인 것이다. 보나벤투라는 이런 우주를 십자가에 비유하며 ‘반대의 일치(coincidence of opposites)’에 대해서 말한다. 그런데 이 반대의 일치를 실현하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인간의 한계와 하느님의 무한하심, 세상의 무질서와 하느님의 거룩함, 가로와 세로가 합쳐지고 조화를 이루는 곳이 바로 십자가의 가로와 세로가 만나는 곳,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위치하는 곳이다.
20세기 초 스페인의 철학자 미구엘 데 우나무노는 그래서 우리 인간의 이런 삶의 모습을 두고 ‘삶의 비극적 의미’라는 말로 표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분명히도 인생은 그렇게 내 마음대로 움직여가지도 않고 내가 바라는 대로 아름다운 것만 내 삶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을 성경의 세계관과 고대 신화들과 고대 그리스의 비극들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인간이 주도하지 않고 신화적인 것을 받아들이던 때의 인간들은 이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분위기 속에 살았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이것, 즉 삶에 주어진 자연스러운 불편함을 받아들이기를 너무도 싫어하는 정신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심지어 우리는 더러운 것마저도 끌어안아야 할 때가 있다. 온 세상은 깨끗하게만, 혹은 질서정연하게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질서가 있으면 무질서가 있고, 깨끗함이 있으면 더러움도 있는 것이며, 행복이 있으면 불행도 있는 것이고, 웃음이 있으면 울음도 있는 것이다. 이것을 「코헬렛」의 저자는 잘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이것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세상의 다른 모든 피조물처럼 자연스럽고 행복한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주장한 파시즘(fascism)은 이런 종류의 어리석은 우리 인간의 정신세계를 잘 드러내 준다. 본래 이 말은 ‘다발’ 혹은 ‘묶음’을 의미하는 파쇼(fascio)에서 유래하는 말로서, 모든 것이 획일화한(모든 것이 같은 정신 아래 흐트러지지 않는 질서를 이루고 있는) 상태를 뜻한다. 현대 세계에서 파시스트라고 일컬어지는 무리는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 정신세계는 그런 질서정연함만을 좋아하고 추구하는 파시스트의 모습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의 이런 상황을 그저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상책일까? 그렇지 않다. 이런 상황을 아무런 대책 없이, 절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선으로 모으는 절대적인 ‘그 무엇’, 혹은 ‘그 누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정신 자세가 꼭 필요하다. 이는 위대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찾고자 했던 ‘통일된 영역(unified-field, 통일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무질서가 절대적으로 극복되는 영역 혹은 어떤 인격체(Persona)가 존재하기에 우리는 이런 무질서 안에서도 확신 있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희망’의 의미다. 그리스도교의 희망은 ‘내일 혹은 앞으로 잘 될 거야’ 식으로 막연한 기대를 거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벌써 그 희망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22) “주님은 모든 선의 원천이시며 온 우주의 하느님”
성 프란치스코가 형제들의 삶에 대해 걱정하며 기도할 때 주님께서 프란치스코에게 해주신 말씀은 이 확신에 찬 희망을 우리가 누구에게 두고 살아야 할 것인지를 잘 말해준다. “나에게 말해 보시오, 오, 순박하고 무식한 작은 이여, 어떤 형제가 수도회를 버린다고, 내가 여러분에게 가르쳐 준 길을 형제들이 따르지 않는다고 왜 그토록 괴로워합니까? 나에게 말해 보시오, 누가 이 형제회를 설립했습니까? 누가 사람들을 회개시켰습니까? 누가 그들에게 참고 견디는 특전을 주었습니까? 그건 내가 아니었습니까? 당신이 학자라고 해서, 열변가라고 해서 내 가족을 다스리도록 당신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내가 내 양 떼를 돌보겠다는 것을 당신과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순박하고 무식한 그대를 선택하였습니다.”(「완덕의 거울」 82항, 「페루지아 전기」 86항 참조)
④ 하느님의 선과 인간의 자유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
프란치스코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모든 것을 제공해주시는 분으로 체험했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의 글에 나타나는 하느님 선에 대한 찬미들을 살펴보면 프란치스코가 체험한 하느님의 선이 무엇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 그는 ‘시간 전례마다 바치는 찬미경’에서 “전능하시고 지극히 거룩하시고 지극히 높으시며 으뜸이신 하느님, 모든 선이시고 으뜸 선이시고 온전한 선이시며, 홀로 선하신 당신께, 모든 찬미와 모든 영광과 모든 감사와 모든 영예와 모든 찬양과 그리고 모든 좋은 것을 돌려드리나이다”라고 기도하고 있다.
주님의 기도에서 영감을 받아 바친 기도에서는 “주님, 당신은 으뜸 선이시고 영원한 선이시며 모든 선이 당신에게서 나오고 당신 없이는 어떤 선도 없기에 그들 안에 머무시며 그들을 복됨으로 채우시나이다”라고 찬미드리고 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에서도 “당신은 선(善)이시고 모든 선이시며 으뜸 선이시고 살아 계시며 참되신 주 하느님이시나이다”라고 기도하고 있다.
또한, 「인준받지 않은 수도 규칙」 17장과 23장에서는 형제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하며 하느님을 모든 선의 근원이요 원천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우리는 지극히 높으시고 지존하신 주 하느님께 모든 좋은 것을 돌려드리고, 모든 좋은 것이 바로 그분의 것임을 깨달으며, 모든 선에 대해 그분께 감사드립시다. 모든 선이 그분에게서 흘러나옵니다. 그리고 모든 선의 주인이시며 홀로 선하신, 지극히 높으시고 지존하시며 홀로 참되신 하느님께서 모든 영예와 존경과 모든 찬미와 찬송과 모든 감사와 모든 영광을 지니시고, 또한 돌려받으시며, 받으시기를 빕니다.”(「1221년 수도 규칙」 17장).
“그러므로 우리는 충만한 선, 모든 선, 완전한 선, 참되시고 으뜸 선이신 우리 창조주이시고 구세주이시고 구원자이시며 홀로 진실하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홀로 선하시고(루카 18,19 참조) 홀로 자비로우시고 홀로 양순하시고 홀로 부드러우시며 홀로 감미로우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홀로 거룩하시고 홀로 정의로우시고 홀로 진실하시며 홀로 올바르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홀로 인자하시고 홀로 무죄하시고 홀로 순수하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하늘에서 함께 기뻐하고 회개하는 모든 이들과 의로운 모든 이들과 복된 모든 이들의 모든 용서와 모든 은총과 모든 영광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그분을 통하여 있으며 그분 안에 있는(로마 11,36 참조)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우리는 원하지도 말고 바라지도 말며, 다른 아무것도 마음에 들어 하지도 즐거워하지도 맙시다.” (「1221년 수도 규칙」 23장) 앞서 언급했듯이, 프란치스코는 1219년 말부터 1220년 초까지 십자군 전쟁이 한창이었던 이집트의 다미에타를 방문하는 동안 하느님의 초월성, 즉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이 단순히 그리스도교의 하느님만이 아니라 종교와 문화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의 하느님일 뿐 아니라, 온 우주의 하느님이심을 더 확실하게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프란치스코가 체험한 이런 하느님의 초월성은 인간의 힘을 무한히 초월하는 힘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모든 선의 원천이요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특히 당신의 모상과 유사함으로 창조하신 우리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의 관점에서의 초월성이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초월성은 우리 모두의 선과 사랑을 무한히 초월하는 사랑과 선이며, 우리의 선과 사랑이 모두 그분에게서 나오는 것이며, 그렇기에 그분의 초월성은 묘하게도 초월과는 정반대의 의미인 내재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프란치스칸 신학자요 철학자인 요한 둔스 스코투스는 프란치스코의 이런 초월적 의미와 내재적 의미가 동시에 공존하는 선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하여 하느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특별히 인간 개개인 안에 하느님의 선이 온전히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스코투스의 주장에 의하면 하느님은 모든 존재를 어떤 종(種)이나 류(類), 즉 포유류, 혹은 조류, 인류 등의 무리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각각의 피조물을 당신의 선으로 각각 온전히 고유하게 창조하셨고, 각 피조물 안에 당신의 온전한 선을 부여해주셨다. 이것이 바로 스코투스가 말하는 ‘개성 원리’(haecceitas: this-ness: 이것-성)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23)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전적으로 모든 자유를 주셨다”
우리 인간의 인격(persona)은 하느님의 위격(persona)과 동일 선상에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관계성 안에서의 자유롭고 선한 나눔이 가능한 것이 바로 인간 인격인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삼위일체’의 관점을 다룰 때 조금 더 설명하고자 한다.
여기서 우선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하느님의 이런 선이 하느님의 완전한 자유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선은 자유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강요나 강제에 의한 선은 진정한 선이 아니고, 또한 진정한 진리도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주어진 선 또한 자유로운 하느님의 의지에서 나온 것이고, 인간의 자유 의지는 결국 선을 향하는 본질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프란치스코는 「권고 말씀」 2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낙원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창세 2,16.17)
프란치스코가 권고를 창세기의 이 말씀으로 시작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전적인 자유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언뜻 보면 한 가지 제한(선악과를 먹지 마라는 것)이 귀에 거슬릴지 모르지만, 자세히 숙고해본다면, 이 제한 자체 역시도 ‘자유’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선택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유로운 선을 통해 인간에게 주신 자유로운 선은 인간에게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선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가 비유적으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표현되어 있다는 점은 어찌 보면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전적으로 모든 자유를 주셨는데, 그 자유가 역설적으로 한 가지 제한이 되어버린 셈이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칸 고전 중 하나인 「가난 부인과의 교제(Sacrum Commercium)」에 다음의 내용이 나온다. “나(가난 부인)는 한때 사람이 벌거벗고 다녔던 하느님의 낙원에 있었다. 사실 나는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고 무엇도 의심하지 않으며 어떤 악도 의심치 않은 채 벌거벗고 사람 안에서 사람과 함께 낙원의 온갖 곳을 걸어 다녔다. 내가 그와 함께 영원히 있으리라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사람은 의롭고 선하고 현명하게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지극히 기쁘고 아름다운 곳에 살도록 배려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극도로 기쁘게 살았고, 늘 사람 면전에서 노닐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던 그는 온전히 하느님께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의 자유는 하느님의 완전한 자유인 선을 선택할 자유인 것이지, 악을 방종하여 선택하는 것이 자유가 아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프란치스코가 하느님의 육화를 그렇게도 중요시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느님이 선의 원천이시라면 당신 아들(말씀)을 통해 창조하신 피조물 역시 선하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프란치스코의 육화-세계관은 그의 인간 이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성 보나벤투라가 자신의 창조 신학에서 강조하듯이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홀로 사랑이실 수 없기에 내부로 삼위를 이루시고 외부로는 모든 창조된 존재, 특히 인간과 자유로운 사랑의 관계성 속에 존재하신다. 모든 피조물, 특히 당신 자유 의지에 의해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당신 모상에 따라 당신과 유사하게 창조하신 인간과 사랑을 나누시는 분이시다.
결국, 인간은 하느님과 공유하고 있는 선과 사랑을 자유롭게 나눌 수 있는 선하고 사랑 가득한 존재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성 프란치스코가 이해한 인간관이다. 물론 그가 “우리의 것이라고는 악습과 죄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프란치스코의 1221년 수도 규칙」 17,7)고 말하지만, 그것은 본래 하느님이 주신 인간의 본질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프란치스코가 형제들에게 준 권고 말씀 2번에서 말하듯이 하느님과 같은(비슷한)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이 자기기만(악마의 꾐)에 빠져 하느님처럼 되고자 하는 잘못, 즉 하느님의 것을 자기의 것으로 하고자 하는 인간의 거짓 정체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기 의지를 자기의 것으로 삼고 자기 안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을 자랑하는 바로 그 사람은 선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는 것입니다. 결국, 악마의 꾐에 빠져 계명을 거슬렀기 때문에, 그에게 먹은 것이 악을 알게 하는 열매가 되어버렸습니다.”(「프란치스코의 권고」 2,3-4)
이와는 대조적으로 프란치스코는 「권고 말씀」 5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오, 사람이여, 주 하느님께서 육신으로는 사랑하시는 당신 아들의 ‘모습대로’, 그리고 영(靈)으로는 당신과 ‘비슷하게’(창세 1,26) 그대를 창조하시고 지어내셨으니, 주 하느님께서 그대를 얼마나 높이셨는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24) “인간 본질 안에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고귀함이 있다”
프란치스코가 이해한 인간의 본질 안에는 끊임없는 사랑의 흐름 속에서 춤추시며 선과 사랑의 에너지를 삼위의 관계성 안에서는 물론이고 피조물, 특히 인간 존재 각자에게 발산해주시는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관계성에 초대된 고귀함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우리 역시도 그분과의 관계와 우리 서로의 관계 안에서 이 사랑의 끊임없는 춤을 추며 우리에게 주어진 그 사랑과 선을 당신과는 물론이고 우리 서로와 다른 모든 피조물과 나누도록 초대받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그리스도 중심주의 영성’, ‘삼위일체 중심주의 영성’, 혹은 ‘인간 중심주의 영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다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이 정해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이신 존재로 바라본다면 우리 자신뿐 아니라 우리 서로를 그런 사랑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가 “우리의 의화는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실제로 우리는 절대로 우리 인간 쪽에서 자신을 의롭게 할 수 없고, 반드시 하느님 쪽에서만 자유로운 의지로 우리를 의롭게 해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는 선이 자신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임을 믿음으로 고백한다면, 그 선이 나의 작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위대한 선임을 우리는 또한 받아들이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믿음으로 인한 의화(義化)’가 아닌가 한다.
사실 프란치스코에게 있어 하느님이 이해될 수 없는 분으로 다가오는 상황에서도 하느님이 온전한 선이시고 모든 선이시며 최고의 선이시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최고의 현실이었다. 프란치스코는 구체적인 역사 상황 속에서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자비이시며, 지혜이시고 겸손이시며, 인내이시고 아름다움이시며, 온화이시고 안식처이시며, 피난처요 보호자이시며, 평화이시고 기쁨이시며, 희망이시고 믿음이시며, 감미로움이시고 영원한 생명(「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 3-6)이시라는 사실을 체험한다.
프란치스코에게 있어 하느님은 보호하심과 제공해주심 그리고 너그러우심의 그 깊숙함 안에서 초월자인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다시 또다시 이러한 생각 혹은 체험(오히려 체험이 더 맞겠다)으로 되돌아온다. 그는 이것을 자신의 삶으로부터 알게 되었다. 첼라노와 보나벤투라가 지적하고 있듯이, 처음부터 하느님은 프란치스코에게 거룩한 영감, 교회에 대한 신앙, 형제들, 모든 좋은 것, 세상의 아름다움을 주셨다. 그가 어려움 중에 있을 때에는 하느님께서 그에게 위로를 주셨고, 그의 가난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부유함을 주셨고, 결혼을 포기하는 것 안에서는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한 애정을 주셨다. 또한, 하느님의 초월성과 불가지성에 대한 체험을 통해서는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비추심과 감미로움을 체험한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합당함과 선에 의존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런 모습은 우리 신앙생활의 여러 측면에서 드러나는데, 특별히 성체성사와 관련해 생각해 보면 금방 이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하느님만이 하느님이셔야 하는데, 우리가 은총을 끌어내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듯한 모습을 우리는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성체 바로 전에 분명히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라고 고백을 하면서도, 우리가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기에 영성체에 참여할 수 있는 듯한 마음 자세를 가질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리처드 로어 신부(Fr. Richard Rohr, OFM)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성체성사의 식사를 ‘은총’과 ‘선물’의 현실임을 선포하는 행위로보다는 가톨릭교회의 회원 자격을 규정하는 행위로 이해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엄청난 곤경에 빠지게 된다.”
사실 성체성사는 다른 제사와는 달리 봉헌하는 제물 역시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고, 또한 그 봉헌 제물을 받아먹는 것도 다른 희생 제사의 신들과 달리 하느님이 아닌 봉헌하는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만일 이 합당함의 문제가 관건이라면 누가 하느님 앞에 합당하게 설 수 있겠는가? 사실 여기에서 관건은 ‘신뢰’와 ‘온전한 내어드림’이다. 또한 이것은 전적인 ‘확신과 사랑’으로 귀결된다. 이것이 바로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가 한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25) “하느님은 우리 인간에게 완전한 자유를 허락하셨다”
사랑과 선을 창조하는 동업자로 삼으시다
그런데 인간 이해와 관련하여 이렇게 말을 이어가는 것이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인간 존재를 이렇게 이해하게 될 때는 인간이 하느님께 온전히 의존적으로만 존재해야 하는 자유롭지 못한 존재로 이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하느님은 우리에게 온전히 자유를 허락하신 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낙원에 두시고, 그다음에 그들이 그곳에서 선악과를 따먹는 이야기는 하느님과 우리 인간의 끊임없는 다람쥐 쳇바퀴 식의 관계성을 말해주는 비유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하느님은 온전한 자유를 허락하시고 인간은 한 가지 제한이 또 다른 자유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자유로운 선을 지배하는 ‘권력’으로 오해하여 계속해서 거기에 반기를 들며, 급기야는 하느님과 똑같으신 외아드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우를 범하는 것이 성경이 말해주는 인간 역사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사실 역사의 주인은 오직 하느님이시기에 그 역사를 주도해가시는 분 역시 하느님이시지 우리 인간이 아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 인간에게 완전한 자유를 허락하시며 당신과 더불어 사랑과 선의 창조를 계속해 가는 동업자로 우리를 삼으셨다.
코로나19, 관계성 되볼아보는 계기
우리는 코로나19 바이러스 위기 시대를 겪으면서 계속해서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말을 듣게 된다. 전염병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한 분명하고도 불가피한 대처이다. 그런데 이 말의 논리를 거꾸로 들여다보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 인간 존재의핵심부에는 관계성, 즉 함께 있고자 하는 본질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가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지내왔다는 것이고, 또 그 가까움의 갈망이 우리 내면 깊숙하게 심겨 있기에 ‘사회적 거리 두기’의 규칙을 어기면서까지 함께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요즘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라는 전염병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 서로의 관계성과 관련하여 내면 깊이 성찰해보아야 할 것이 있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에게만이 아니라 우리 서로에게 그런 함께 함과 관계 맺음의 본성을 강력하게 지니고 있으면서도 함께 할 때 우리가 겪게 되는 불편과 어려움으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가 제한된다는 잘못된 판단 속에서 계속해서 하느님과 서로에게 반기를 드는 삶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원죄’라고 하는 말속에 들어있는 반복적인 인간의 자기 기만을 표현해주는 이야기일지 모른다.
죄는 인간의 어림석음이고 수치
사실 ‘원죄’라고 하는 말도 어찌 보면 ‘죄’라고 하는 단어로 인해 뭔가 잘못된 개념을 우리에게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죄’라는 것은 성경 전통이 분명하게 단언해주는 것이지만, 그 ‘죄’의 본질을 잘 들여다본다면 그것은 오히려 인간의 ‘어리석음’이고 ‘수치’라고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창세기의 ‘원죄’ 이야기에서도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가려주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주시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의 이 수치스러운 어리석음은 하느님의 자비를 가져다준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노르위치의 성녀 율리안나는 “처음에 인간의 넘어짐이 있었고, 그다음에 그 넘어짐에서 일어남이 있었다. 이 두 개가 다 하느님의 자비다”라고 말한다.
바오로 사도도 이와 맥을 같이 하는 말을 한다. “어떤 선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혹시 누가 죽기를 무릅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에게 대한 당신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으로 있던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우리가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되어 있는 지금에는 더욱 확실히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을 것입니다.”(로마 5,7-9)
이것이 바로 성 프란치스코가 하느님의 선을 그렇게도 찬미 찬양했던 이유다.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저희는 저희의 탓으로 추락했나이다. 또한,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저희를 창조하신 것같이, 저희를 ‘사랑하신’ 참되고 거룩한 당신 ‘사랑’ 때문에 참하느님이시며 참사람이신 그분을 영화로우시고 평생 동정이신 지극히 복되시고 거룩하신 마리아에게서 태어나게 하셨으며, 또한 포로가 된 저희를 그분의 십자가와 피와 죽음을 통하여 구속하기를 원하셨으니, 당신께 감사드리나이다.”(「인준 받지 않은 수도 규칙」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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