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날개에 업혀 독일선교사로
대학 시절 성경공부하며 세계선교에 대해 배울 때 “세계선교 목표를 위한 선교지를 어디로 정하겠느냐?”는 질문을 여러 번 받았다. 꿈이 많던 시절이라 로렐라이 언덕이 있는 미국 콜로라도주 명문 예일대 캠퍼스를 말씀으로 섬겨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평신도생활을 하며 수원 역사를 섬기던 내게는 세계선교가 너무 멀게 느껴졌다. 나중에 나의 기록물들을 읽어 보니 81년도에 서독선교사로 나가겠다고 결단한 적이 있었다. 분명한 꼬투리나 어떤 구체적인 방향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조그마한 실마리도 없었는데 그렇게 기도한 것을 하나님은 들으시고 기억하셨다. 기도한 나는 잊고 있었는데 기도한 대로 인생을 이끌어 가고 계셨다. 우리 선교단체 모임에서는 믿음이 분명한 사람이라면 다 선교사로 나가고자 결단했었다. 선교사로 나가지 않고 사는 것이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서 나도 어찌하든지 선교사로 파송되고자 항상 기도는 했다.
내가 아직 싱글이었던 83년도에 미국 메릴랜드 주에서 도계공(닭을 잡아 가공하는 일)을 취업이민을 모집하였을 때 응모하여 합격했다. 드디어 미국 선교사로 나갈 길이 열렸다고 좋아하며 기다렸다. 우리 교회에서 또 한 분도 함께 합격하여 둘이는 수속금 100만원씩을 내고 갈 날을 기다렸다. 그 길은 4년 뒤 취소되어 미국행이 막혔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선교사의 길을 접고 캠퍼스 역사를 섬기며 아기자기한 가정의 행복을 누리면서 계속 사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선교사님들과 같이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며 하나님만을 드러내기에는 부족했다. 본국에서 누리고 싶은 작은 꿈들이 많이 내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86년에 큰 딸을 낳고 88년 둘째 딸을 낳아 알콩달콩 살고 있던 우리 가정에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담임 목자님이 교체되고 분위기가 달라진 틈을 타 남편이 세상 사람들과 같이 살기 시작한 것이다. 직장생활 잘 하고 아내인 나에게도 자상하고 따뜻하게 잘 하던 사람이고 믿음으로 결혼을 해서 우리의 결혼생활은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하다고 자랑했는데 언젠가부터 나도 모르게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남편이 “사회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시간 여유가 생겼고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을 호기심을 갖고 따라 하다가 죄에 발을 들여놓았고 순수한 영혼에 찔림이 되어 죄를 고백했다”는 것을 같은 소그룹에서 소감교제를 했던 한 성도로부터 전해 들었다. 안마시던 술을 마시더니 급기야는 가서는 안 될 장소에 출입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청천벽력과 같았다. 믿음으로 결혼한 사람이라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 믿었는데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왜 그럴까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되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냥 이대로 살면 안 되겠다 싶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세계 선교하겠다고 기도는 하면서도 영적인 것에 힘을 쓰지 않고 편안하게 살고자 하니까 하나님이 사람 막대기로 때리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아기자기하게 쭉 살고 싶은 욕심과 자기중심적인 꿈에서 깨어났다.
가정의 심각한 문제를 놓고 기도하던 중 88년 9월 5일 서울에서 가진 세계선교보고대회에서 “하나님을 믿으라.”(마가복음 11:22) 말씀을 심령으로 받았다. 가정문제 해결도 어려워 보이는 세계선교도 하나님만 믿고 해야 한다는 것을 깊이 영접했다. 그 날부터 나는 우리 가정에 있는 죄의 요소와 전쟁을 선포하고 싸우기 시작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한1서 2장 16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뜻보다 세상의 것들을 더 사랑하니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서서히 빠져갔던 것을 회개하였다.
하나님보다 세상과 안일을 더 사랑한 죄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 나와 우리 가정의 모습을 돌아보니 너무나 형편없음이 보였다. 내 모습에 스스로 절망하여 밥을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아기들이 어리다는 핑계로 양육하는 동안은 느슨하게 살려했던 것과 내 마음의 첫 자리에 하나님을 모시며 섬기지 못한 죄를 돌아보고 통회하며 회개하였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자 새로워졌다. 느긋했던 영적 생활을 다잡고 새벽에 총알같이 깨어 일어나 새벽예배에 참석하여 남편이 영적으로 다시 깨어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남편을 영적으로 동역하지 못한 죄를 회개하고 철저히 하나님의 여종으로서 남편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며 동역하여야 하는 것을 삶에서 체험으로 깨달았다. 내가 회개하고 영적으로 깨어나자 남편도 옆에서 영적으로 다시금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해 10월 서독 Stuttgart에서 8년 동안 헌신하여 섬기시던 이선교사님이 시온성 훈련을 위해 한국에 들어오셨다. 수원에서 선교보고회를 가진 뒤 독일 선교사로 가기를 자원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다. 남편이 번쩍 손을 들었다. “독일에 유학생으로 가서 공부하면서 평신도선교사로서 선교활동을 하면 된다.”며 초청하겠다고 하였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선교사로 나가 쓰임 받고 싶었는데 구체적으로 갈 길이 열리니 너무 반갑고 기뻤다.
“소뿔도 단김에 빼라”는 속담처럼 바로 수속을 시작하였다. 12월에 바로 직장에 사표를 내고 선교 훈련을 받았다. 새 삶에 대한 두려움이나 계산이 생기지 않았다. 담대하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추진했다. 죄악의 땟물이 빠져나가기 시작하자 선교사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89년 3월 남편에게 Stuttgart 대학 입학허가서가 나왔고 6월 13일에 드디어 독일 Stuttgart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믿음이 있어서 그런지 독일어를 조금 밖에 공부하지 않았지만 두려움 없이 떠났다. 남편이 돕던 신**님과 함께 첫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교회에서는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어 크게 기뻐하며 감사하였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선교사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지만 결혼 때 주셨던 비전과 같이 남편을 세계적인 말씀의 종이요 선교사로 키우시고 써주시리라 믿었다.
허물과 죄의 사함을 받고 은혜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년 4개월 후 나에게도 양로간호학교 입학허가서가 나와 독일에 갈 때까지 나와 아이들은 동생 집에서 함께 살았다. 당분간 아파트 모든 살림은 학생들을 위한 공동생활 숙소로 쓰도록 하였다. 독일로 떠날 때쯤 아파트를 팔아 반은 선교비로 사용하고 그 중의 반은 수원역사를 위해 드리게 되었다. 독일 비자수속이 끝나 선교사로 파송될 그 즈음 교사 생활 12년 4개월의 경력을 뒤로 하고 직장에는 사표를 냈다.
교원이라는 좋은 직업을 과감하게 사표내고 독일로 떠나가는 것에 대해 부모님은 매우 서운해 하셨지만 하나님의 선한 손을 의지하고 독일 땅에서 선교하다가 죽어 뼈를 묻을 생각으로 아낌없이 한국생활을 정리하기로 했다.
독일로 떠나기 전 지나온 삶의 발자취를 돌아보니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살고자 할 때 후히 되어 누르고도 넘치도록 주셨음을 돌아보며 감사하였다.
초·중·고교와 대학에 가기까지
은사님들을 통해 진학하도록 도움을 받게 하신 것
대가족 속 일 많은 집에서 힘들다고 투정했을지라도
교사가 되기까지 부모님이 필요를 따라 물질로 섬겨주셨다.
교대에 가서 하나님을 아는 친구를 만나 성경공부를 하고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아가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 손에 이끌려 산 모든 인생길은
모두 일방적인 하나님 은혜였다.
78년 4월 임시 강사 발령으로 시작하여
교원으로서 든든한 직장에서 필요한 물질을 공급받았고
해마다 옮겨야 했던 교회 이전 역사를 섬길 수 있었으며
개척역사를 섬길 수 있었던 것이 그 얼마나 일방적인 은혜였는지 모른다.
남편을 먼저 선교사로 파송한 뒤
나 홀로 아이 둘을 키우며
평신도 생활을 하느라 바빴지만
하나님께서 좋은 도우미를 보내주시고
선교원에 다니면서 여러 가지 적응 훈련도 받게 하셨다.
그 곳에서 큰 딸은 한글도 조금씩 배우며
독실한 믿음을 소유한 선생님에게서 좋은 영향을 많이 받게 하셨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살고자 폼만 잡아도 넘치도록 축복해 주셨다.
독일에 가면 교원의 자리에서 떠나 간호사가 되어야 하는데
병원에서 일해 본 경험이 전혀 없지만
은혜주시고 새로운 길도 잘 감당하게 하시리라 믿었다.
어린 딸들에게 좋은 보모도 허락해 주시고 선교 역사도 섬길 수 있게 하시며
하늘나라에 가기까지 인도하실 것을 믿었다.
하나님은 나를 모태에서부터 뜻을 두고 키우셨으며
때가 되자 하나님 역사에 부르셨다.
또한 부르신 자된 나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도우셨다.
창세기 12:2
“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이 한 말씀을 영접하고 살았을 때 수원 역사에 모퉁이 돌로 쓰임을 받았다.
그저 하나님 말씀 배우며 순종하였더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장하게 된 것이다.
날마다 일용할 양식으로 QT하고 기도하며 또한 매주 귀한 말씀 공부와 소감을 써서 발표를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내면화되는 삶을 살게 하셨다.
“하나님을 믿으라.”(마가복음 11:22)
하시는 음성에 순종하였을 때 세계선교에도 동참하게 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요한복음 11: 40)
말씀을 의지하고 세계 선교에서도 승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줄로 믿었다.
하나님께서 승리의 선교사 생활을 하게 하시고
필요한 언어정복과 물질자립을 허락하실 것이라 확신했다.
또한 끊임없이 개척 정신을 갖고 개척도록 도우실 것을 기대하며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고 순종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 되고자 결단했다.
90년 9월 28일 네 살짜리 큰 딸과 두 살 반짜리 작은 딸을 데리고 하나님의 독수리 날개에 업혀 독일 땅으로 날아갔다. 남편이 먼저 가서 기다리는 그곳 독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하나님이 마음대로 쓰실 수 있는 주의 계집종이요 복의 근원 삼으시고 써주세요.’